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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차 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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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비차 오심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에는 뛰어난 드리블 실력으로 "무자비한 드리블러"라는 평가를 받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유고슬라비아 대표로 참가하여 2골을 기록했으며, UEFA 유로 1968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감독으로서 FK 젤레즈니차르 사라예보,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파나티나이코스, SK 슈투름 그라츠, 제프 유나이티드 지바, 일본 대표팀 등을 지휘했으며, 각 팀에서 리그 우승, 컵 우승, 슈퍼컵 우승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는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고 창의적으로 플레이할 것을 요구하는 "생각하는 축구"를 강조했으며,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일본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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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차 오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비차 오심 - SK 슈투름 (1999)
1999년 인터뷰 중인 오심
본명이반 오심
출생일1941년 5월 6일
출생지사라예보, 크로아티아 독립국 (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망일2022년 5월 1일
사망지그라츠, 오스트리아
안장 장소바레 공동묘지, 사라예보
국적보스니아
1.89m
배우자1965년 아시마 오심과 결혼
자녀3명 (아마르 오심 포함)
부모어머니: 카롤리나 오심
아버지: 미하일 오심
선수 경력
포지션미드필더
유소년 클럽젤레즈니차르 (1954–1959)
클럽 경력젤레즈니차르 (1959–1968): 166경기 56골
즈볼러셰 보이스 (1968): 2경기 0골
젤레즈니차르 (1969–1970): 54경기 9골
스트라스부르 (1970–1972): 58경기 16골
스당 (1972–1975): 105경기 16골
발랑시엔 (1975–1976): 30경기 1골
스트라스부르 (1976–1978): 32경기 4골
총 출전 / 득점447경기 102골
국가대표 경력유고슬라비아 (1964–1969): 16경기 8골
감독 경력
감독 클럽젤레즈니차르 (1978–1986)
유고슬라비아 (1986–1992)
파르티잔 (1991–1992)
파나티나이코스 (1992–1994)
슈투름 그라츠 (1994–2002)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 (2003–2006)
일본 (2006–2007)
수상
유럽 선수권 대회은메달: 1968 이탈리아
행정 경력
직책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축구 협회 정상화 위원회 위원장
임기 시작2011년 4월 18일
임기 종료2012년 12월 13일
이전술레이만 촐라코비치, 보그단 체코, 일료 도민코비치 (회장단 구성원)
이후엘베딘 베기치 (단독 회장)

2. 선수 경력

오심은 1959년 고향 클럽인 FK 젤레즈니차르에서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뛰어난 드리블 실력과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18세에 FK 젤레즈니차르 1군에서 뛰기 시작했으며, 사라예보 대학교 이학부에서 수학, 물리학, 철학 등을 배우며 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운동과 학업 모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학내에서 수학 강사 역할도 했다.[35]

대학교 3학년 무렵부터 경기 출전 수당이 아버지의 3배가 되면서 "수학인가, 축구인가"를 고민하다가, 23세에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 선발되고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위한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프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35]

2. 1. 클럽 경력

오심은 1959년 고향 클럽인 FK 젤레즈니차르에서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축구 경기장을 밟은 최고의 보스니아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무자비한 드리블러로 알려졌다.[36] 오심은 당시 28세 미만 선수들의 해외 이적이 금지되어 1968년 말까지 유고슬라비아에 머물렀다. 1968년 12월, 즈볼세 보이즈에서 뛰기 위해 네덜란드로 갔으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3개월 만에 팀을 떠났다.[36] 1970년, 스트라스부르와 계약을 맺고 선수 생활의 나머지 기간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발랑시엔, 세당 및 다시 스트라스부르에서 뛰었다.[36]

2. 2. 국가대표 경력

오심은 1964년 10월 1964년 올림픽에서 모로코를 상대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으며, 총 16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기록했다.[3][10] UEFA 유로 1968에 출전하여 유고슬라비아가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이탈리아에 패했다.[3][10]



오심의 마지막 국제 경기는 1969년 4월 월드컵 예선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치른 원정 경기였다.[11]

3. 감독 경력

1978년, 오심은 선수 생활을 했던 젤레즈니차르의 감독을 맡아 1986년까지 팀을 이끌었다.[3] 젤레즈니차르 감독 시절,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서 3위를 기록하고, 유고슬라비아 컵 결승과 UEFA컵 준결승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3]

3. 1.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 이반 토플라크를 보좌하여 유고슬라비아 올림픽 대표팀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1986년,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UEFA 유로 1988 예선 첫 경기에서 잉글랜드에게 홈에서 1-4로 패하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고슬라비아 FA 회장 밀얀 밀야니치의 신임으로 유임되었다.[12]

이후 오심의 유고슬라비아는 1990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를 제치고 조 1위를 차지하며 반등에 성공했다. 1990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는 16강에서 스페인을 2-1로 꺾고 8강에 진출했으나,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레피크 샤바나조비치가 전반 30분 만에 퇴장당하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연장전까지 버텼지만, 결국 승부차기에서 패배했다.[3][13]

유고슬라비아는 UEFA 유로 1992 예선을 통과했지만,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해 사라예보에 있는 그의 가족이 폭격에 직면하자, 1992년 5월 23일에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는 "나의 나라는 유럽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인간 고통의 규모에서 볼 때, 나는 조국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국가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나의 입장을 조화시킬 수 없다"고 덧붙였다.[14] 유고슬라비아는 이 대회에서 출전 금지되었고, 이후 독립한 국가들은 별도의 국가로 경쟁하게 되었다. 오심의 조국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2014년 FIFA 월드컵에서 첫 메이저 대회에 진출하기까지 2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15]

오심은 티토 사후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에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을 맡아, 민족에 따른 선수 구성을 배제하고 실력 위주로 팀을 구성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11명 전원을 코소보알바니아인으로 채울 수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민족적 배려를 하지 않았으며,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슬레치코 카타네츠, 데얀 사비체비치 등을 발탁하여 팀을 이끌었다.

1990년 월드컵 당시, 언론의 선수 기용 요구에 반발하여 첫 경기에서 요구대로 기용하여 패배를 보여주고, 다음 경기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팀 편성을 통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심이 만들어낸 마지막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1990년 월드컵에서는 8강에 그쳤지만, UEFA 유로 1992에서는 우승 후보 중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로 강력한 팀이었다. 그러나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을 이탈하면서 팀 내에도 민족 간 대립이 심화되었고, 결국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해체되었다.

3. 2. 클럽 감독 경력

오심은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파르티잔, 파나티나이코스, 슈투름 그라츠 등 유럽 클럽들을 이끌었다. 슈투름 그라츠에서는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2회(1998년, 1999년), 오스트리아 컵 3회(1996년, 1997년, 1999년), 오스트리아 슈퍼컵 3회(1996년, 1998년, 1999년) 우승을 달성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3] 1998년부터 2001년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 2000-01 시즌에는 16강에 진출했다.[16]

2003년 J1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지바 감독으로 부임, 2005년 J리그컵 우승을 이끌었다.[3]

2022년 사망 후 그라츠 푼티감 구역 거리에 그려진 오심 벽화

3. 3. 일본 대표팀

2006년 FIFA 월드컵 이후 지쿠 감독의 후임으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2006년 8월 9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데뷔전에서 2-0 승리를 거두었다.[17]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일본의 3회 연속 우승을 이끌지 못하고, 준결승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패하고, 3·4위전에서 대한민국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17] 오심은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지 않은 점을 자책하며 "바지를 두 번이나 벗은 기분이다"라고 표현했다.[17] 대회 기간 동안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후 선수들을 "아마추어"라고 질책하며 통역을 울게 만들기도 했고,[18] 호주와의 8강전 승부차기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보지 않았다. 일본 대표팀을 감독하다 죽고 싶지 않다. 고향인 사라예보에서 죽고 싶다"며 보기를 거부했다.[19]

그의 발언들은 일본 팬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2005년에 출판된 그의 어록 모음집 オシムの言葉|오심의 말일본어은 40만 부 이상 판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9]

4. 지도 철학 및 스타일

이비차 오심은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고 창의적으로 플레이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생각하는 축구"를 강조하며, 선수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 오심은 "지성 있는 축구를 잘 아는 선수"를 선택하고, 이들을 기반으로 "엘레강스한 선수", "에고이스트한 선수"들을 조금씩 선발하여 기용했다. 일본 대표팀 감독 시절에는 운동량이 풍부하고 수비 능력이 뛰어난 헌신적인 유틸리티 플레이어를 중용했다.

오심은 다양한 훈련 방법을 통해 선수들의 실력 향상을 도모했다. 특히 여러 색깔의 빕스를 활용한 훈련은 그의 독특한 훈련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선수들에게 복잡한 제한을 가하여 실전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방식이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규칙이나 목적의 이해가 어렵지만, 선수들은 훈련을 통해 몸뿐만 아니라 머리도 함께 쓰는 훈련을 하게 된다.[47] 또한, 달리는 축구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달리기 훈련을 따로 시키지 않고 훈련 자체가 달리기를 많이 요구하는 내용으로 구성하여 자연스럽게 체력을 단련시켰다.

그는 농구핸드볼의 전술을 참고하기도 했으며, 특히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농구 남자 일본 대표팀 헤드 코치를 맡았던 젤리코 파블리세비치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4. 1. 오심 어록

오심은 재치 있고 철학적인 발언으로 유명하다. 그의 어록은 축구 팬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발언은 일본 팬들에게 인기를 얻어, 2005년에 출판된 그의 어록 모음집 오심의 말|オシムの言葉|일본어은 40만 부가 판매되어 일본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19]

2007년 AFC 아시안컵 기간 동안, 오심은 카타르와의 1-1 무승부 이후 선수들을 "아마추어"라고 칭하며 탈의실에서 호통을 쳐 통역을 울게 만들었고,[18] 호주와의 8강전 승부차기를 보기를 거부하며 "마음이 좋지 않아서 보지 않았다. 일본 대표팀을 감독하다 죽고 싶지 않다. 고향인 사라예보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19]

그는 자신의 감독 수행에 대해 "바지를 두 번이나 벗은 기분이다"라고 말하며 지친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17]

4. 2. 한국 축구에 대한 시사점

오심의 "생각하는 축구" 철학은 선수들의 창의성과 판단 능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한국 축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축구는 오심의 철학을 참고하여 선수들의 창의성과 판단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더욱 노력해야 한다. 오심은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선수들에게 휴식을 충분히 주지 않은 점을 자책하며 "바지를 두 번이나 벗은 기분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7] 또한, 카타르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 후에는 선수들을 "아마추어"라고 비판하며 탈의실에서 호통을 쳐 통역을 울게 만들기도 했다.[18]

5. 개인사

오심은 사라예보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6] 학창 시절에는 수학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35] 오심은 아내 아시마와의 사이에 두 아들(셀미르, 아마르)과 딸(이르마) 하나를 두었다.[3] 그의 아들 아마르 역시 축구 선수와 감독으로 활동했다.

1994년부터 오심은 아내와 함께 대부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살았다.[8] 감독 경력 동안 일본에서 살았을 때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축구 협회 고문으로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에만 일시적으로 거주지를 변경했다.

2022년 5월 1일, 오심은 뇌졸중 이후 수년간 건강 문제로 고생하다가 81번째 생일을 5일 앞두고 오스트리아 그라츠 자택에서 사망했다.[21] 그는 아내 아시마, 딸 이르마, 두 아들 셀미르와 아마르를 남겼다.[3]

오심의 장례식 날인 2022년 5월 14일에 그의 묘는 꽃으로 덮여있다

6. 수상 경력

수상 및 기타 경력



오심은 재치 있고 철학적인 발언으로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어록 모음집은 40만 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19] 축구계뿐만 아니라 일반 언론과 교육 현장에서도 널리 회자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언론의 폐해를 경험한 오심은 언론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일본 언론의 특정 선수 편향 보도와 칭찬 일색 보도를 비판했으며, 일본 유소년 축구 시스템에 대해서는 토너먼트제가 아닌 리그제 도입을 주장했다. 이는 한 번의 패배로 어린 선수들의 기회를 잃게 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6. 1. 선수

오심은 1959년 고향 클럽인 FK 젤레즈니차르에서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축구 경기장을 밟은 최고의 보스니아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무자비한 드리블러로 알려졌다. 오심은 당시 28세 미만 선수들의 해외 이적이 금지되어 1968년 말까지 유고슬라비아에 머물렀다. 1968년 12월, 그는 즈볼세 보이즈에서 뛰기 위해 네덜란드로 갔으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3개월 만에 팀을 떠났다. 1970년, 오심은 스트라스부르와 계약을 맺고 선수 생활의 나머지 기간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발랑시엔, 세당 및 다시 스트라스부르에서 뛰었다.

오심은 1964년 10월 1964년 올림픽에서 모로코를 상대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으며, 총 16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UEFA 유로 1968에 출전하여 유고슬라비아가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이탈리아에 패했다.[3][10] 오심의 마지막 국제 경기는 1969년 4월 월드컵 예선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치른 원정 경기였다.[11]

클럽 기록
대회우승
유고슬라비아 2부 리그1961-62 (서부)
프랑스 2부 리그1976-77



국가대표팀 기록
대회성적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1968 준우승



개인 수상 기록
대회수상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UEFA 유로 토너먼트 팀 (1968)


6. 2. 감독

1978년 선수 경력을 마친 오심은 선수 생활을 시작했던 젤레즈니차르의 감독직을 맡았다. 1986년까지 이 클럽을 지휘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챔피언십에서 3위를 한 차례 기록했고, 유고슬라비아 컵 결승에 한 번, UEFA컵 준결승에 한 번 진출했다.[3]

1991년 여름, 오심은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겸임하며 파르티잔의 새로운 감독이 되었다. 그는 파르티잔과 함께 1991-92 유고슬라비아컵에서 우승했으며, 준결승에서 그의 옛 클럽인 젤레즈니차르를 꺾었다.[3]

유고슬라비아를 떠난 후, 오심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그리스 알파 에트니키 클럽인 파나티나이코스의 감독을 맡아 1993년에 그리스 컵과 슈퍼컵에서 우승했으며, 1993년에는 리그 2위를 기록했다.

1994년, 스트라스부르에서 함께 선수로 뛰었던 하인츠 쉴처가 그에게 오스트리아 클럽 슈투름 그라츠를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오심은 '블랙키스'를 이끌고 1998년과 1999년에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1996년, 1997년, 1999년에 오스트리아 컵, 1996년, 1998년, 1999년에 오스트리아 슈퍼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오심의 지도 아래 1998년부터 2001년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했다. 2022년까지 슈투름은 조별 예선을 통과하여 챔피언스 리그 16강에 진출한 유일한 오스트리아 클럽이었다. 레드불 잘츠부르크는 오심이 이끌던 슈투름 팀보다 20년 이상 지난 2021-22 시즌에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16]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오심은 J1리그의 제프 유나이티드 지바의 감독을 맡아 구단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팀을 강팀으로 만들었다. 2003년에는 시즌 전반기 3위, 후반기 2위를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우승에 근접했다. 2005년에는 오심 감독 체제 하에 J리그컵에서 우승하며 창단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2006년 7월 21일, 오심은 2006년 FIFA 월드컵 종료 후 사임한 브라질 출신 감독이자 전 선수인 지쿠를 대신하여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오심은 2006년 8월 9일, 감독 데뷔전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2-0으로 꺾었다.

그는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 일본을 3회 연속 우승으로 이끌지 못하고 준결승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3위 결정전에서 대한민국에게 승부차기로 패했다. 오심은 자신의 감독 수행에 대해 "바지를 두 번이나 벗은 기분이다"라고 말하며 지친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17] 대회 기간 동안, 오심은 카타르와의 1-1 무승부 이후 선수들을 "아마추어"라고 칭하며 탈의실에서 호통을 쳐 통역을 울게 만들었고,[18] 호주와의 8강전 승부차기를 보기를 거부하며 "마음이 좋지 않아서 보지 않았다. 일본 대표팀을 감독하다 죽고 싶지 않다. 고향인 사라예보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19]

'''감독으로서의 기록'''

대회결과
1991–92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1992–93그리스 컵 우승
1993그리스 슈퍼컵 우승
1997–98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우승
1998–99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우승
1995–96오스트리아 컵 우승
1996–97오스트리아 컵 우승
1998–99오스트리아 컵 우승
1996오스트리아 슈퍼컵 우승
1998오스트리아 슈퍼컵 우승
1999오스트리아 슈퍼컵 우승
2005J리그컵 우승
2007아프리카-아시아 네이션스컵 우승


6. 3. 개인

수상 및 기타 경력



오심은 재치있고 철학적인 발언으로 일본 팬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의 어록 모음집은 40만 부 이상 판매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고,[19] 축구계뿐 아니라 일반 언론과 교육 현장에서도 회자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언론의 폐해를 경험한 오심은 언론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일본 언론의 특정 선수 편향 보도와 칭찬 일색 보도를 비판하며, 일본 유소년 축구 시스템에 대해서는 토너먼트제가 아닌 리그제 도입을 주장했다. 이는 한 번의 패배로 어린 선수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이유였다.

참조

[1] 뉴스 Nikad nisam skrivao da sam Jugosloven http://www.e-novine.[...] 2022-05-02
[2] 웹사이트 Štraus sa Grbavice: Veliki Ivica Osim slavi 80. rođendan https://sportske.ba/[...] 2021-05-06
[3] 간행물 Ivica Osim - The great Bosnian coach reflects on the war, Japan and Alan Mullery's lack of fair play https://books.google[...] Blizzard Media Ltd 2016-12-18
[4] 웹사이트 FIFA Names Ivica Osim Head of Bosnian Football http://www.balkanins[...] Balkan Insight 2011-04-18
[5] 웹사이트 Umro je legendarni Ivica Osim https://www.klix.ba/[...] Klix.ba 2022-05-01
[6] 웹사이트 Ivica Osim, 1. deo memoara "Štrausa s Grbavice": Mislio sam samo na uspjeh mog Željezničara http://yugopapir.blo[...] originally in Plavi vjesnik 1969-01
[7] 웹사이트 Ivica Osim http://www.manijaci.[...]
[8] 웹사이트 Österreichs Spiel ist moderner geworden https://www.derstand[...] STANDARD Verlagsgesellschaft m.b.H. 2021-10-09
[9] 웹사이트 Ovo su moji najdraži golovi! - Sarajevska legenda - Ivica Osim (1967) http://yugopapir.blo[...] originally in Plavi vjesnik 2016-12-19
[10] 웹사이트 Ivica Osim http://www.reprezent[...] 2016-12-19
[11] 웹사이트 Player Database https://eu-football.[...] 2021-04-23
[12] Youtube Savicevic interview https://www.youtube.[...]
[13] 뉴스 HAIL, BOSNIA https://www.si.com/v[...] Sports Illustrated 2016-12-18
[14] 뉴스 The Right Thing, Reluctantly https://www.nytimes.[...] 2008-02-15
[15] 뉴스 European World Cup qualifying: Bosnia-Hercegovina reach Brazil https://www.bbc.com/[...] 2013-10-15
[16] 웹사이트 FC Red Bull Salzburg in last-16 of Champions League https://www.redbull.[...] 2022-02-11
[17] 뉴스 Osim admits mistakes after disappointing finish in Asian Cup http://search.japant[...] 2007-07-30
[18] 뉴스 Soccer-Japan coach blasts players, reduces interpreter to tears http://uk.reuters.co[...] 2007-07-10
[19] 뉴스 Japan national coach Osim suffers stroke http://in.reuters.co[...] 2007-11-16
[20] 뉴스 Okada set for Japanese national team http://soccernet.esp[...] ESPN 2007-12-04
[21] 웹사이트 Umro je Ivica Osim https://www.index.hr[...] index.hr 2022-05-01
[22] 웹사이트 Reakcije na smrt Ivice Osima, javljali se nogometaši, klubovi, političari, prijatelji... https://www.klix.ba/[...] Klix.ba 2022-05-01
[23] 웹사이트 Riječi Piksija Stojkovića jasno pokazuju ko je bio Ivica Osim https://sportsport.b[...] sportsport.ba 2022-05-01
[24] 웹사이트 Džaferović: Ivicu Osima ćemo pamtiti kao vrhunskog fudbalera, ali i velikog čovjeka https://avaz.ba/vije[...] avaz.ba 2022-05-01
[25] 뉴스 Sturm Graz verabschiedete sich von Ivica Osim orf.at 2022-05-04
[26] 웹사이트 Ivica Osim sahranjen u Sarajevu, hiljade ljudi se oprostilo od legende bh. nogometa https://www.klix.ba/[...] Klix.ba 202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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