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타르의 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슈타르의 문은 신바빌로니아 시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빌론의 이슈타르 여신에게 헌정하기 위해 건설한 문이다. 기원전 575년에 완공되었으며, 푸른 유약 타일로 덮여 용, 황소, 사자 부조로 장식되었다. 이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으나, 현재는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 전시되어 있으며, 이라크 정부는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기원전 575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건설되었다.[7] 당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문은 바빌로니아의 주요 여신인 이슈타르에게 헌정되었다.[8] 문은 푸른색 유약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이는 귀한 보석인 청금석을 모방한 것이었다. 벽면에는 신들을 상징하는 무슈후슈(용), 오록스(황소), 사자 등의 부조가 새겨졌다.[8] 최고급 삼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종교적 행렬에도 사용되었다.
기원전 575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건설된 이슈타르 문은 푸른 유약타일로 덮여 있으며, 여러 상징적인 동물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문 앞면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주요 신인 마르둑이 용(무슈후슈)으로, 아다드가 오록스로 상징되어 번갈아 묘사되었다.[9] 문의 디자인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선형 테두리와 로제트 패턴도 포함되어 있다.[9]
2. 역사
한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여겨졌으나, 서기 6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로 대체되었다. 20세기 초 발굴을 통해 유적이 발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30년대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일부가 복원되었다. 이라크 바빌론 유적지에도 레플리카가 세워졌으나, 이라크 전쟁으로 일부 손상되었다.
2. 1. 건설 배경
이슈타르의 문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기원전 575년경,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604년부터 562년까지 재위했으며,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7] 그는 이 문을 바빌로니아의 주요 여신인 이슈타르에게 헌정했다.
문의 건설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헌정 명판 기록에 따르면 문의 지붕과 문짝은 최고급 삼나무로 만들어졌다. 벽은 푸른색 유약을 입힌 벽돌로 덮여 있었는데, 이는 고대에 매우 귀하게 여겨졌던 보석인 라피스 라줄리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푸른 벽돌은 햇빛 아래에서 문이 보석처럼 빛나는 효과를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의 벽면은 다양한 상징적인 동물들의 부조로 장식되었다. 무슈후슈(용), 오록스(황소), 사자의 형상이 번갈아 가며 배치되었는데, 이는 각각 마르두크, 아다드, 이슈타르 신을 상징했다.[8] 문 자체에는 이들 신들의 모습만이 묘사되었지만, 문을 통해 도시 내부로 이어지는 '행렬 길'의 벽에는 약 120마리에 달하는 사자, 황소, 용, 그리고 꽃들이 노란색과 검은색 유약을 바른 벽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문은 종교적인 의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신들의 조각상을 실은 행렬이 이 문을 통과하여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2. 2.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역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절정기인 기원전 604년부터 562년까지 통치했던 왕이다. 그는 성경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인물로도 기록되어 있다.[7]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575년경 이슈타르의 문 건설을 명령했으며, 완성된 문을 바빌로니아의 여신 이슈타르에게 헌정했다.[8]
이 문은 제국의 최전성기에 건설되었으며,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문과 지붕을 최고급 삼나무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문의 벽돌은 당시 매우 귀했던 보석인 청금석처럼 보이도록 푸른색 유약을 입혀 구웠다.[8] 이는 햇빛 아래에서 문이 보석처럼 빛나는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
문의 파사드에는 유약을 바른 벽돌 위에 여러 동물의 부조가 번갈아 장식되었다. 여기에는 마르두크 신을 상징하는 용(무슈후슈), 아다드 신을 상징하는 오록스(황소), 그리고 문이 헌정된 이슈타르 여신을 상징하는 사자가 포함되었다.[8] 문으로 이어지는 행렬 길 역시 화려하게 장식되었는데, 약 120마리의 사자, 황소, 용, 그리고 꽃 문양이 노란색과 검은색 유약 벽돌로 묘사되어 있었다. 다만 문 자체에는 신들의 상징 동물만 묘사되었다. 새해 축제와 같은 중요한 행사 기간에는 신들의 조각상이 이 문을 통과하여 도시로 들어오는 행렬에 사용되었다.
2. 3. 이슈타르 문 앞 도로
이슈타르 문 앞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을 가로지르는 장대한 행렬길이 있었다. 이 길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시작하여 주요 신전과 궁전 앞을 지나 이슈타르 문까지 이어졌다.[17] 길이는 800m 이상, 혹은 약 약 0.80km에 달했으며, 너비는 약 약 20.12m 정도였다.[15][17] 도로는 역청을 바른 기반 위에 거대한 돌로 포장되었다.[17]
이 행렬길은 매년 봄에 열리는 새해 축제를 위해 사용되었다. 이 축제는 농경의 시작을 축하하고 보리 수확 직후, 춘분(현대의 3월 20일 또는 21일경) 즈음에 12일 동안 성대하게 거행되었다.[9] 축제의 주된 목적은 바빌로니아의 주신 마르두크에게 경배를 드리고 땅의 풍요에 감사하며, 동시에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었다.[9] 축제 기간에는 여러 신들의 조각상이 이 길을 따라 행진하며 도시를 통과했다.
행렬길 양쪽 벽은 눈부신 색상의 유약을 바른 벽돌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벽에는 주로 세 신을 상징하는 동물이 부조로 새겨졌는데, 전쟁과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하는 사자, 신들의 왕 마르두크를 상징하는 용(무슈후슈), 폭풍의 신 아다드를 상징하는 황소(오록스)가 그것이다.[8][15]
특히 이슈타르를 상징하는 사자 장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길 양쪽으로 각각 60마리씩, 총 120마리의 사자가 푸른색 유약 벽돌 배경 위에 새겨졌다.[10] 이 사자들은 저마다 털과 갈기의 색이 다르게 표현되었으며, 동쪽 벽의 사자들은 왼발을, 서쪽 벽의 사자들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는 모습으로 생동감을 더했다. 각 사자는 46개의 성형 벽돌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10], 흰 몸에 노란 갈기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5][16] 이러한 장식은 행렬길을 따라 걷는 이들에게 바빌론의 강대함과 영광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15]
또한 이 도로는 방어적인 기능도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길을 감싸는 성벽 위에는 치상벽이 설치되어 도시 방어력을 높였다.[9]
2. 4.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축문
이슈타르 문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문을 건설한 목적과 자신의 업적을 설명하기 위해 바친 헌정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백색과 청색 유약을 바른 벽돌에 아카드어 설형 문자로 쓰여 있으며, 문 벽면에 위치한다. 비문의 크기는 높이 15m, 너비 10m에 달하며 총 60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비문은 이슈타르 문의 건설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605년에서 562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18]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바빌론의 왕, 마르두크의 뜻에 따라 임명된 경건한 군주, 나부의 사랑을 받는, 가장 높은 제사장 군주, 신중한 심사숙고를 하는 자, 지혜를 포용하는 법을 배운 자, 그들(마르두크와 나부)의 신적인 존재를 파악하고 그들의 위엄을 존경하며, 지칠 줄 모르는 통치자, 에사길라와 에지다의 숭배를 항상 마음에 품고 바빌론과 보르시파의 안녕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자, 지혜롭고 겸손하며 에사길라와 에지다의 관리인, 바빌론의 왕 나보폴라사르의 맏아들인 내가 바로 네부카드네자르이다.
(도시 성벽) 임구르-엘릴과 네메티-엘릴의 두 문 입구가 바빌론에서 거리를 채운 후 점점 낮아졌다. (그래서) 나는 이 문들을 허물고 아스팔트와 벽돌로 수위에서 기초를 다졌으며, 그 위에 멋진 황소와 용이 묘사된 청석으로 된 벽돌로 만들었다. 나는 웅장한 삼나무를 길게 늘어뜨려 지붕을 덮었다. 모든 문 입구에 청동으로 장식된 삼나무 문을 설치했다. 나는 야생 황소와 사나운 용을 게이트웨이에 배치하여 인류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호화로운 광채로 장식했다.
나는 신들의 주인이자 주요 신과 부수적인 신들을 위한 기쁨과 환희의 장소인 마르두크의 가장 높은 축제 집인 에시스쿠르시스쿠르 신전을 아스팔트와 구운 벽돌로 바빌론 구역의 산처럼 튼튼하게 짓게 했다.[19]
3. 디자인
문의 기본적인 배경색은 매우 귀했던 보석인 라피스 라줄리의 색을 모방한 선명한 파란색 유약이다. 동물 부조에는 금색과 갈색 유약이 사용되었고, 테두리와 로제트 장식은 검은색, 흰색, 금색 유약으로 만들어졌다.[10] 이러한 유약은 점토로 만든 벽돌에 입혀 구워내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벽돌 제작과 유약 처리, 사용된 재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문을 나무와 라피스 라줄리처럼 보이도록 유약을 바른 점토로 만든 것은 아카드 시대부터 이슈타르 여신과 동일시된 이난나 여신과의 연관성을 보여줄 수 있다. 이난나 신화에서 라피스 라줄리와 나무는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하며,[11][12][13] 이는 문 자체가 여신 이슈타르의 일부임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이슈타르 문에는 세 개의 주요 입구가 있었으며, 중앙 입구는 이중 문 구조(두 세트의 이중 문)를 가졌다.[14] 이 문은 고대 바빌론의 궁전, 사원, 요새, 정원 등을 포함한 거대한 도시 설계의 일부였으며, 도시 전체를 장식하는 데는 1,500만 개가 넘는 구운 벽돌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10]
3. 1. 벽돌과 유약
이슈타르 문의 벽돌은 고운 질감의 점토를 나무 틀에 압착하여 만드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각 동물 부조 역시 점토를 재사용 가능한 틀에 눌러 만든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많은 양의 벽돌을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벽돌 사이의 이음새가 동물의 눈이나 다른 중요한 부분에 위치하여 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계획되었다.[10] 이렇게 만들어진 벽돌은 햇볕에 먼저 말린 다음, 유약을 바르기 전에 한 번 구워졌다(비스크 소성). 이 단계에서 점토 벽돌은 갈색 빛을 띠었다.[10]
문의 기본적인 배경색은 선명한 파란색 유약으로 덮여 있는데, 이는 당시 매우 귀했던 보석인 라피스 라줄리의 색상을 모방한 것이다. 동물 문양에는 금색과 갈색 유약이 사용되었고, 문의 테두리와 로제트(장미 모양 장식) 패턴에는 검은색, 흰색, 금색 유약이 사용되었다.[10] 이러한 유약의 재료로는 규산염 성분을 얻기 위해 식물의 재, 사암 조각, 자갈 등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재료들을 섞어 반복적으로 녹이고, 식히고, 분쇄하는 과정을 거쳐 프릿(frit)이라는 혼합물을 만들었다. 여기에 코발트와 같은 광물을 넣어 원하는 색을 낸 후, 비스크 소성된 벽돌에 칠하고 더 높은 온도에서 다시 구워 최종적으로 유약 벽돌을 완성했다.[10]
나무와 라피스 라줄리처럼 보이도록 유약을 바른 점토로 문을 만든 것은, 아카드 시대에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되었던 여신 이난나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난나가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신화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성한 힘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라피스 라줄리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11][12] 또한 지하 세계의 여왕에게 사로잡혔을 때 이난나는 라피스 라줄리, 은, 나무로 묘사되는데,[13] 이 중 나무와 라피스 라줄리라는 두 재료는 이슈타르 문의 주요 시각적 요소를 구성한다. 이는 문 자체가 여신 이슈타르(이난나)의 일부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13]
유약 처리가 끝난 벽돌들은 조립 과정에서 1mm에서 6mm 정도의 좁은 가로 이음새를 두고 쌓아 올려졌다. 이 이음새는 자연에서 채취한 검은색의 끈적한 물질인 역청(bitumen, 현대의 아스팔트와 유사함)으로 꼼꼼하게 메워졌다.[10] 이슈타르 문은 궁전, 사원, 내부 요새, 성벽, 정원 등 거대한 고대 바빌론 도시 전체 구조물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도시 전체를 장식하는 데에는 1,500만 개가 넘는 구운 벽돌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3. 2. 동물 부조
성문의 앞면에는 바빌로니아 판테온의 주요 신 두 명, 즉 국가의 주신인 마르둑과 아다드(이스쿠르)를 상징하는 동물이 부조 형태로 반복되어 묘사되었다. 마르둑은 뱀의 머리와 꼬리, 사자의 비늘 몸통, 강력한 뒷발톱을 가진 용인 무슈후슈로 표현되었다. 마르둑은 선과 악 사이의 신성한 중재자로 여겨졌으며, 많은 바빌로니아인들은 그의 보호를 기원했다.[9] 두 번째 신인 아다드는 현재 멸종된 소의 조상인 오록스로 상징되었다. 그는 파괴적인 폭풍과 풍요를 가져오는 비를 다스리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졌다.[9]
이슈타르 문과 연결된 행렬길에는 전쟁과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하는 사자 부조가 장식되었다.[15] 하늘의 여주인으로 숭배받은 이슈타르는 성적 매력의 힘을 나타내면서도 사납고 단호한 존재로 여겨졌으며, 별과 그녀의 신성한 동물인 사자로 상징되었다. 그녀는 또한 전쟁의 여신이자 통치 왕조와 군대의 보호자로 간주되었다.[9] 행렬길 양쪽 벽의 프리즈에는 총 60마리의 사자가 묘사되었는데,[10] 흰색 몸체와 노란색 갈기를 가졌으며,[15][16] 동쪽 벽의 사자는 왼발을, 서쪽 벽의 사자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각 사자는 11개 행, 46개의 성형된 벽돌로 만들어졌다.[10] 도시 보호라는 개념은 문 양쪽에 치상벽을 설치하여 디자인에 더욱 강조되었다.[9]
이 동물 부조 벽돌들은 고운 점토를 나무 틀이나 재사용 가능한 동물 모양 틀에 압착하여 만들었다.[10] 벽돌 사이의 이음새가 동물의 눈과 같은 중요한 부분에 오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계되었다. 벽돌은 먼저 햇볕에 말린 뒤 1차로 구워 갈색 빛을 띠는 비스크 상태로 만들었다.[10]
그 후 벽돌에 유약을 입혀 다시 구웠다. 배경은 주로 귀중한 청금석(라피스 라줄리)의 색을 모방한 선명한 푸른색 유약으로 칠해졌다. 동물 부조에는 금색과 갈색(용, 오록스) 또는 흰색과 노란색(사자) 유약이 사용되었다. 문의 경계 부분과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로제트 패턴[9] 등은 검은색, 흰색, 금색 유약으로 장식되었다.[10] 이 유약들은 식물의 재, 사암, 자갈 등을 혼합하고 녹이고 냉각하고 분쇄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만든 프릿에 코발트와 같은 착색제를 첨가하여 만들어졌다.[10] 나무와 라피스 라줄리처럼 보이도록 유약을 바른 점토를 사용한 것은, 지하 세계 신화에서 라피스 라줄리 장신구를 착용하고 라피스 라줄리, 은, 나무로 묘사되는 여신 이난나(이슈타르와 동일시됨)를 나타내어 문 자체가 여신의 일부임을 상징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11][12][13]
유약 소성 후 벽돌들을 조립할 때 생긴 1mm~6mm 정도의 좁은 틈새는 자연에서 채취한 검은색 역청으로 메웠다.[10]
3. 3. 색상과 재료
이슈타르 문의 벽돌은 고운 점토를 나무 틀에 눌러 모양을 잡고 햇볕에 말린 뒤, 한 번 구워서 만들었다. 이 초기 단계에서 벽돌은 갈색을 띠었다.[10] 오록스나 무슈후슈 같은 동물 부조 역시 재사용 가능한 틀을 이용해 점토로 찍어냈으며, 벽돌을 쌓았을 때 동물의 눈 같은 중요한 부분에 이음새가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다.[10]
벽돌 표면에는 유약을 입혀 다채로운 색을 냈다. 기본 배경색은 밝은 파란색인데, 이는 당시 매우 귀했던 보석 라피스 라줄리의 색을 따라 한 것이다. 동물 문양에는 금색과 갈색 유약을 사용했고, 테두리와 로제트(장미 덩굴 모양) 장식은 검은색, 흰색, 금색으로 마감했다.[10]
이 유약의 재료는 식물의 재, 사암, 조약돌 등을 섞어 녹이고 식히고 분쇄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만든 프릿이라는 규산염 혼합물에, 색을 내기 위한 코발트 같은 광물을 첨가하여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유약을 초벌구이한 벽돌에 칠한 뒤, 다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면 색이 입혀진 벽돌이 완성되었다.[10]
파란색 유약과 문의 나무 구조는 아카드 시대부터 이슈타르 여신과 동일시된 이난나 여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난나가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신화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성한 힘을 상징하는 라피스 라줄리 장신구를 착용하며, 지하 세계 여왕에게 붙잡혔을 때는 라피스 라줄리, 은, 나무로 묘사되는데[11][12], 이 중 라피스 라줄리와 나무는 이슈타르 문의 주요 재료(또는 모방된 재료)와 일치한다.[13] 즉, 문 자체가 여신 이슈타르의 일부임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지닌다.
유약을 입혀 구운 벽돌들을 쌓아 올릴 때는 벽돌 사이의 미세한 틈(약 1~6mm)을 역청(자연 아스팔트)으로 꼼꼼하게 메워 견고하게 만들었다.[10] 이슈타르 문은 거대한 바빌론 도시의 일부였으며, 도시 전체를 장식하는 데 약 1,500만 개가 넘는 구운 벽돌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10]
4. 발굴과 전시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된 이슈타르 문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로버트 콜데바이가 이끄는 독일 발굴팀이 바빌론에서 발굴한 유물을 바탕으로 1930년대에 재건한 것이다.[20][21] 높이 14m, 너비 30m에 달하는 이 문은 발굴된 수많은 유약타일 조각들을 독일로 가져와 복잡한 과정을 거쳐 복원되었다. 발굴 당시 문 기초의 14m가 발견되기도 했다.[20]
바빌론 유적에 대한 초기 관심은 바그다드에 거주하던 영국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클라우디우스 리치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발굴과 이슈타르 문의 발견은 독일 고고학자 로버트 콜데바이에 의해 이루어졌다.[21] 독일 동양학회의 막대한 자금 지원 아래 진행된 발굴 과정에서, 발굴팀은 비용 정당화를 위해 다량의 유물을 독일로 옮겼다. 특히 콜데바이의 조수였던 발터 안드레는 현지 인맥을 동원하여 유물 반출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 과정은 사실상 '밀반출'에 가까웠다.[22][23][24] 예를 들어 행렬의 길을 장식하던 사자 부조 120개 중 118개가 독일로 옮겨졌다.[22]
페르가몬 박물관의 이슈타르 문은 원래 이중문 구조 중 더 작은 앞부분이며, 더 큰 뒷부분은 공간 제약으로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25] 문을 장식했던 동물 부조 벽돌들은 페르가몬 박물관 외에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전 세계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전시되고 있다.
한편, 이라크의 바빌론 유적지에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인 1987년에 완공된 이슈타르 문의 복제품이 있다. 이는 이라크의 고대 문명을 강조하며 민족주의를 고취하려는 의도로 건설되었으나,[26] 원본보다 크기가 작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복제품은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군 주둔 과정에서 일부 손상되기도 했다.
4. 1. 발굴 과정
바그다드에 거주하던 영국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클라우디우스 제임스 리치는 고대 바빌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개인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현장 데이터를 수집하며 고대 유적의 비밀을 밝히고자 노력했고, 1815년 바빌론 유적에 대한 첫 지형 기록을 출판했다. 리치를 비롯한 19세기 학자들은 바빌론의 거대한 언덕을 고대 왕궁으로 추정했다.[21]이 추정은 독일 고고학자 로버트 콜데바이의 발굴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콜데바이는 이전에 베를린 왕립 박물관의 의뢰로 수르굴(고대 니나)과 알-히바(고대 라가쉬) 등 고대 도시들을 발굴한 경험이 있었으며, 1899년부터 바빌론 발굴을 시작했다.[21] 그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궐 두 곳과 이슈타르 문을 발견했다.
당시 영국 고고학계는 터널과 깊은 참호를 파는 방식을 선호했으나, 이는 진흙 벽돌로 지어진 바빌론 유적의 기초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콜데바이 팀은 무너져가는 건물 자체보다는 쐐기 문자 점토판과 같은 유물과 문헌 자료 조사에 집중하는 대안적인 방법을 채택했다. 이 방식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게 해주었으며, 데이터 기록 역시 이전 메소포타미아 발굴보다 훨씬 철저하게 이루어졌다.[21] 콜데바이의 조수 중 한 명인 발터 안드레는 바빌론 유적의 문서화와 재구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현장에 세워진 작은 박물관의 초대 관장을 맡기도 했다.

발굴 자금을 지원한 독일 동양학회는 막대한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굴된 유물의 독일 반출을 요구했다. 발터 안드레는 독일 정보 장교 및 현지 이라크 부족 지도자들과의 관계(와스타)를 활용하여 유물 밀반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2] 예를 들어, 행렬의 길을 장식했던 사자 부조 120개 중 118개가 독일로 옮겨졌다.[22] 이슈타르 문의 유약 벽돌 조각들은 복잡한 번호 체계에 따라 분해된 뒤, 짚으로 싸서 석탄 통에 넣어 위장되었다.[23] 이 통들은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샤트알아랍 수로로 운송된 후 독일 선박에 실려 베를린으로 옮겨졌다.[24]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이슈타르 문과 행렬의 길 복원은 고고학 역사상 가장 복잡한 건축 재건 작업 중 하나였다.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진행된 발굴[20] 과정에서 발견된 문의 기초는 깊이가 14m에 달했다. 수백 개의 상자에 담겨 독일로 옮겨진 유약 벽돌 조각들은 염분을 제거하고 하나하나 다시 맞춰졌다. 손상되거나 유실된 부분은 원래의 색상과 질감을 재현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가마에서 구운 새 벽돌로 보충되었다.[25] 현재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된 문은 높이 14m, 너비 30m 크기로[20], 원래 이중문 구조 중 더 작은 앞부분이다. 더 큰 뒷부분은 박물관 공간 제약으로 인해 전시되지 못하고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25]
이슈타르 문과 행렬의 길을 장식했던 동물 부조 벽돌들은 페르가몬 박물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용 부조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덴마크 코펜하겐의 뉘 칼스베르 글립토테크, 디트로이트 미술관, 스웨덴 예테보리의 뢰스카 박물관 등 4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사자 부조는 이들 박물관 외에도 루브르 박물관, 뮌헨 국립 이집트 미술관, 비엔나 쿤스트히스토르스 박물관,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시카고 동양 연구소,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박물관, 보스턴 보스턴 미술관, 코네티컷 뉴헤이븐의 예일 대학교 미술관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라크의 바빌론 유적지에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인 1987년에 완공된 이슈타르 문의 복제품이 세워졌다. 이는 당시 건설 중이던 박물관의 입구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졌으며, 이라크의 고대 역사와 문명을 강조하여 민족주의를 고취하려는 목적을 가졌다.[26] 이 복제품은 원본보다 크기가 작고, 원래 문의 건축 기술을 모방하려 했으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타깝게도 이 복제품은 이라크 전쟁 중 미군의 공격으로 인해 일부 파손되었다.
4. 2. 페르가몬 박물관 복원
현재 독일의 베를린에 위치한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이슈타르의 문은 193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이는 로버트 콜데바이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바빌론에서 발굴한 유물 조각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20] 이 문은 높이가 14m이고 너비는 30m이며, 발굴 당시 문 기초의 14m가 발견되었다.[20]바빌론 유적에 대한 관심은 바그다드에 거주하던 영국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클라우디우스 리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독학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바빌론에 매료되었고, 현장 연구를 통해 1815년 바빌론 유적에 대한 첫 기록을 출판했다. 리치를 비롯한 19세기 학자들은 바빌론의 거대한 언덕을 고대 왕궁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독일 고고학자 로버트 콜데바이의 발굴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콜데바이는 이전에 베를린 왕립 박물관의 의뢰로 다른 고대 도시들을 발굴한 경험이 있었으며, 바빌론 발굴은 1899년에 시작했다.[21]
당시 영국 고고학계가 선호했던 터널식 발굴 방법은 진흙 벽돌 구조물을 손상시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콜데바이 팀은 건물 자체보다는 출토되는 쐐기 문자 점토판과 같은 유물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전의 메소포타미아 발굴보다 훨씬 더 철저한 데이터 기록을 가능하게 했다. 콜데바이의 조수 중 한 명인 발터 안드레는 건축가이자 제도사로서 바빌론 유적의 문서화와 재구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현지에 세워진 작은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기도 했다.
독일 동양학회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독일 고고학자들은 많은 유물을 독일로 가져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특히 발터 안드레는 독일 정보 장교 및 현지 이라크 부족과의 인맥(와스타)을 활용하여 유물 반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2] 문의 유약 벽돌 조각들은 번호를 매겨 분해한 뒤, 석탄 통에 짚과 함께 넣어 위장했다.[23] 이 통들은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샤트알아랍으로 운송된 뒤 독일 선박에 실려 베를린으로 옮겨졌다.[24] 예를 들어, 행렬의 길을 장식했던 120개의 사자 부조 중 118개가 독일로 반출되었다.[22]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서의 이슈타르 문과 행렬의 길 재건은 고고학 역사상 가장 복잡한 건축 복원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수백 개의 상자에 담겨 온 유약 벽돌 조각들은 염분을 제거하고 하나하나 다시 맞춰졌다. 파손되거나 없는 조각들은 특별히 제작한 가마에서 구운 새 벽돌로 대체하여 원래의 색상과 마감을 재현했다. 이슈타르 문은 원래 이중문 구조였으나, 페르가몬 박물관에는 그중 더 작은 앞쪽 문만 전시되어 있다.[25] 더 큰 뒤쪽 문은 박물관 공간 제약으로 인해 창고에 보관 중이다.
이슈타르 문과 행렬의 길을 장식했던 동물 부조 벽돌들은 페르가몬 박물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용 부조는 4개 박물관, 사자 부조는 다수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주요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박물관 | 소장 유물 |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 사자, 용, 황소 |
뉘 칼스베르 글립토테크 (코펜하겐) | 사자 1마리, 용 1마리, 황소 1마리 |
디트로이트 미술관 | 용 |
뢰스카 박물관 (예테보리) | 용 1마리, 사자 1마리 |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사자 |
국립 이집트 미술관 (뮌헨) | 사자 |
쿤스트히스토르스 박물관 (비엔나) | 사자 |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토론토) | 사자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사자 |
동양 연구소 (시카고) | 사자 |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박물관 | 사자 |
보스턴 미술관 | 사자 |
예일 대학교 미술관 (뉴헤이븐) | 사자 |
4. 3. 복원 과정의 어려움
이슈타르 문과 행렬의 길은 로버트 콜데바이가 발굴한 자료를 바탕으로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재구성되었다.[20] 이 문은 높이 14m, 너비 30m에 달하며, 비문 조각들을 포함하고 있다. 발굴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문 기초의 14m 깊이까지 발견되었다.초기 바빌론 연구는 바그다드에 거주하던 영국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클라우디우스 리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바빌론에 매료되어 개인적인 연구를 수행했으며, 현장 데이터 수집을 통해 고대의 경이로움을 밝히고자 했다. 그의 바빌론 유적 지형 기록은 1815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리치를 비롯한 19세기 방문객들은 바빌론의 거대한 언덕을 왕궁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독일 고고학자 로버트 콜데바이의 발굴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콜데바이는 이전에 베를린 왕립 박물관의 의뢰로 다른 고대 도시들을 발굴한 경험이 있었으며, 바빌론 발굴은 1899년에 시작했다.[21]
당시 영국 고고학계에서 선호하던 터널 및 참호 발굴 방식은 진흙 벽돌로 지어진 바빌론 유적의 기초 구조물을 손상시키는 문제를 야기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부서지기 쉬운 건물 자체보다는 점토판 문서나 다른 유물에 집중하는 방식이 제안되었다. 이러한 발굴 방식의 변화는 기존 메소포타미아 발굴보다 훨씬 더 철저한 데이터 기록을 가능하게 했다. 콜데바이의 조수 중 한 명이었던 발터 안드레는 바빌론 최초의 건축가이자 제도사로서, 유적의 문서화와 재구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현장에 세워진 작은 박물관의 초대 관장을 맡기도 했으나, 이후 유물을 독일로 밀반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독일 동양학회는 이 발굴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고, 독일 고고학자들은 그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유물을 독일로 가져가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예를 들어 행렬의 길을 장식하던 120개의 사자 프리즈 중, 독일인들은 118개를 가져갔다.[22] 발터 안드레는 독일 정보 장교 및 현지 이라크 부족 지도자들과의 강력한 인맥(와스타)을 이용하여 유물 반출을 용이하게 했다. 문의 유약 벽돌 조각들은 복잡한 번호 체계에 따라 분해된 뒤, 석탄 통에 짚으로 위장 포장되었다.[23] 이 통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샤트알아랍 수로로 운송된 후 독일 선박에 실려 베를린으로 옮겨졌다.[24]
베를린에서 이루어진 이슈타르 문과 행렬의 길 재건은 고고학 역사상 가장 복잡한 건축 복원 작업 중 하나였다. 수백 개의 상자에 담겨 도착한 유약 벽돌 조각들은 염분을 제거하는 세척 과정을 거친 후 하나하나 다시 조립되었다. 완전히 소실되거나 파손된 벽돌을 대체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가마에서 원래의 색상과 질감을 재현한 새로운 벽돌을 구워 사용했다. 이슈타르 문은 원래 이중문 구조였으나, 현재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그중 더 작은 정면 부분이다.[25] 더 큰 뒷부분은 박물관 공간의 제약 때문에 전시되지 못하고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문과 행렬의 길에서 가져온 동물 장식 벽돌 중 일부는 페르가몬 박물관 외에도 전 세계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박물관 | 소장 조각 |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 사자, 용, 황소 |
뉘 칼스베르 글립토테크 (덴마크 코펜하겐) | 사자 1마리, 용 1마리, 황소 1마리 |
디트로이트 미술관 (미국) | 용 |
뢰스카 박물관 (스웨덴 예테보리) | 용 1마리, 사자 1마리 |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파리) | 사자 |
국립 이집트 미술관 (독일 뮌헨) | 사자 |
쿤스트히스토르스 박물관 (오스트리아 비엔나) | 사자 |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캐나다 토론토) | 사자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 사자 |
동양 연구소 (미국 시카고) | 사자 |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박물관 (미국) | 사자 |
보스턴 미술관 (미국) | 사자 |
예일 대학교 미술관 (미국 뉴헤이븐) | 사자 |
한편,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인 1987년에 이슈타르 문의 작은 복제품이 건설되었다. 이는 당시 건설 중이던 박물관의 입구 역할을 했으며, 복원된 바빌론 궁전과 함께 배치되었다. 이 복제품은 원본의 건축 기술을 모방하려 했으나, 실제 크기는 원본보다 눈에 띄게 작고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 건설 목적은 이라크의 고대 역사와의 연결을 강조하며 민족주의를 고취하려는 시도였다.[26] 하지만 이 복제품은 이후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미군 점령 시기에 일부 파손되었다. (미군 영향 참조).
4. 4. 전 세계 박물관 전시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이슈타르 문은 1930년대에 재건된 것이다. 이는 로버트 콜데바이가 이끄는 독일 발굴팀이 1902년부터 1914년까지 바빌론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20][21] 발굴 과정에서 수집된 수많은 유약 벽돌 조각들은 독일으로 옮겨져 복원 작업에 사용되었다. 재건된 문의 높이는 14m, 너비는 30m에 달하며, 발굴 당시 문 기초 부분도 14m 깊이까지 발견되었다.[20]독일 동양학회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은 발굴팀은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유물을 독일로 가져가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특히 행렬의 길을 장식했던 120개의 사자 부조 중 118개가 독일로 옮겨졌다.[22] 콜데바이의 조수였던 발터 안드레는 독일 정보 장교 및 현지 부족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유물 반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문의 도자기 조각들은 번호 체계에 따라 분해된 후, 석탄 통에 짚과 함께 넣어 위장된 채 유프라테스강을 통해 샤트알아랍 수로로 운송되었고, 이후 독일 선박에 실려 베를린으로 보내졌다.[23][24]
페르가몬 박물관에서의 이슈타르 문과 행렬의 길 재건은 고고학 역사상 가장 복잡한 작업 중 하나였다. 수백 개의 상자에 담겨 온 유약 벽돌 조각들은 염분을 제거하고 하나하나 다시 맞춰졌다. 유실된 부분은 특별히 제작된 가마에서 구운 새 벽돌로 대체하여 원래의 색상과 질감을 재현했다. 이슈타르 문은 원래 이중 구조였으나, 페르가몬 박물관에는 비교적 작은 정면 부분만 전시되어 있다. 더 큰 뒷부분은 박물관 공간 제약으로 인해 창고에 보관 중이다.[25]
이슈타르 문을 장식했던 동물 부조 벽돌들은 페르가몬 박물관 외에도 전 세계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소장되어 있다. 주요 소장 현황은 다음과 같다.
박물관 | 국가 | 소장 유물 (사자/용/황소) |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 튀르키예 | 사자, 용, 황소 | ||
뉘 칼스베르 글립토테크 | 덴마크 | 사자 1, 용 1, 황소 1 | ||
디트로이트 미술관 | 미국 | 용 | ||
뢰스카 박물관 | 스웨덴 | 용 1, 사자 1 | ||
루브르 박물관 | 프랑스 | 사자 | ||
국립 이집트 미술관 (뮌헨) | 독일 | 사자 | ||
쿤스트히스토르스 박물관 | 오스트리아 | 사자 | ||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 캐나다 | 사자 |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미국 | 사자 | ||
동양 연구소 | 미국 | 사자 | ||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박물관 | 미국 | 사자 | ||
보스턴 미술관 | 미국 | 사자 | ||
예일 대학교 미술관 | 미국 | 사자 |
한편, 이라크의 바빌론 유적지에도 이슈타르 문의 복제품이 세워졌다. 이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인 1987년에 완공되었으나, 박물관 입구로 계획된 이 문은 미완성 상태이며 원본보다 크기가 작다. 이 복제품 건설은 이라크의 역사와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였으나,[26]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군 주둔 등으로 인해 일부 파손되었다.
5. 현대 이라크의 이슈타르 문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해 생략)
5. 1. 복제품 건설
현재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이슈타르 문은 1930년대에 완성된 것으로, 1900년대 초 바빌론 유적에서 발굴된 벽돌들을 독일로 옮겨와 재현한 것이다. 이 복원된 문의 높이는 14m, 너비는 30m에 달하며, 발굴 당시 14m 깊이의 성문 기초도 함께 발견되었다.이슈타르 문의 발굴과 복원 과정은 여러 인물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바그다드에 거주하던 영국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클라우디스 제임스 리치(Claudius James Rich)는 고대 바빌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으며, 1815년 관련 저서를 처음 출간했다. 그와 19세기 학자들은 바빌론 유적의 거대한 언덕을 고대 왕궁으로 추정했고, 이는 독일 고고학자 로버트 콜더웨이(Robert Koldewey)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콜더웨이는 이전에 독일 박물관의 의뢰로 고대 시리아 도시들을 발굴한 경험이 있었으며, 바빌론 발굴은 1899년에 시작했다.
당시 영국 고고학계가 선호했던 터널식 발굴 방법은 진흙 벽돌 유적을 손상시키는 문제가 있어, 콜더웨이 팀은 관련 문헌과 자료 조사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정보를 확보했다. 특히 콜더웨이의 조수 중 한 명은 고대 바빌론 복원과 정보 수집에 큰 공헌을 하여, 현지에 작은 박물관을 세우고 초대 관장이 되기도 하였다.
페르가몬 박물관의 이슈타르 문과 그 앞 도로 복원은 가장 큰 복원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발굴된 수많은 유약타일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고 조심스럽게 운반하여 다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완전히 소실된 벽돌은 특수 제작된 틀을 이용해 당시와 동일하게 만들어 보충했다. 이슈타르 문은 원래 이중문 구조였으나, 현재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앞쪽 문이다. 더 큰 뒤쪽 문은 전시하기에는 너무 커서 창고에 보관 중이다. 또한, 문을 장식했던 동물 부조 벽돌들은 페르가몬 박물관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전시되고 있다.
한편, 이라크의 바빌론 유적지에도 이슈타르 문의 레플리카가 세워졌다. 이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기에 건설되었으나, 미완성 상태이며 원본보다 크기가 작다. 이 복제 문은 복원된 바빌론 궁전 및 성벽과 함께 유적지의 입구 역할을 했다. 건설 목적은 당시 미국과의 갈등 속에서 이라크 고대 문명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라크 전쟁 중 미군의 공격으로 인해 이 복제 문 역시 상당 부분 파손되었다.
5. 2. 건설 목적과 피해
기원전 575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건설되었다.[1][2] 이 문은 바빌론의 여신 이슈타르에게 봉헌되었다.[1]20세기 초 발굴 과정에서, 당시 영국 고고학계가 선호하던 터널식 발굴 방법은 진흙벽돌로 지어진 바빌론 유적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 이라크의 바빌론 유적에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기에 만들어진 이슈타르 문의 레플리카가 있다.[2] 이 레플리카는 미국과의 갈등 속에서 이라크 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이라크 전쟁 중 미군의 공격으로 인해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2]
6. 논란과 반환 시도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이 이슈타르 문을 소장하게 된 과정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27][28] 이라크 정부는 여러 차례 독일에 문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며, 이는 전쟁 등으로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의 소유권 및 반환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논쟁의 중요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29]
6. 1. 반출 논란
페르가몬 박물관이 이슈타르 문을 소유하게 된 과정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바빌론 발굴 과정에서 문이 발견된 후 즉시 베를린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그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정부는 2002년[27]과 2009년[28]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독일 정부에 문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이슈타르 문은 전쟁 등의 이유로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논쟁은 해당 유물이 지닌 문화적 중요성을 존중하여 원소유국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불안정한 지역보다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보존하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슈타르 문의 경우,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내에서의 문화재 보존 환경에 대한 우려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으로 인해 페르가몬 박물관 역시 피해를 입었던 전력이 있어 어느 곳이 더 안전한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29]
6. 2. 문화재 반환 논쟁
페르가몬 박물관이 이슈타르 문을 소장하게 된 경위는 논란의 대상이다. 바빌론 발굴 과정에서 문이 발견된 후 곧바로 베를린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정부는 2002년[27]과 2009년[28]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독일 정부에 문 반환을 요구했다. 이슈타르 문은 전쟁 피해국의 문화적으로 중요한 유물 반환 문제와, 해당 유물을 더 안전한 환경에서 보존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쟁에서 주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특히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현지의 불안정한 상황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 피해를 입었던 페르가몬 박물관 중 어느 곳이 더 안전한 보존 환경인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29]7. 갤러리
참조
[1]
논문
"An archaeomagnetic study of the Ishtar Gate, Babylon"
https://journals.plo[...]
PLOS ONE
2024-01-17
[2]
백과사전
Ishtar Gate
https://www.worldhis[...]
[3]
서적
Ancient Mesopotamia: Life in the Cradle of Civilization
The Great Courses
2018
[4]
학술지
Review: The Excavation of Babylon
[5]
웹사이트
China's Iraq Oil Problem
https://fortune.com/[...]
2014-06-30
[6]
웹사이트
The Embassy of Republic of Iraq in Hashemite Kingdom of Jordan Makes Unremitting Efforts to Follow Up Affairs of Iraqi Community in Combatting the Coronavirus – وزارة الخارجية العراقية
https://mofa.gov.iq/[...]
2020-06-07
[7]
웹사이트
Panel with striding lion {{!}} Work of Art {{!}} Heilbrunn Timeline of Art History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ttps://www.metmuseu[...]
2017-11-28
[8]
서적
Gardner's Art Through the Ages
Thompson Learning, Inc.
[9]
서적
Handbook to Life in Ancient Mesopotamia
Oxford University Press
2003-07-07
[10]
학술지
The Ishtar Gate
http://search.inform[...]
2008
[11]
서적
Sumerian Mythology: A Study of Spiritual and Literary Achievement in the Third Millennium B.C.: Revised Editio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2]
서적
Inanna: Queen of Heaven and Earth: Her Stories and Hymns from Sumer
Harper&Row Publishers
[13]
학술지
Observations on a Passage of 'Inanna's Descent'
[14]
서적
The Excavations at Babylon
Macmillan and Company
[15]
학술지
The Lion of Ishtar
1932-10
[16]
웹사이트
Panel with Striding Lion
https://www.metmuseu[...]
2018
[17]
서적
Art History
Pearson
[18]
서적
Mesopotamia: Ancient Art and Architecture
Thames and Hudson Ltd
[19]
서적
Babylon und das Neujahrsfest
Berlin : Vorderasiatisches Museum
[20]
웹사이트
Inside the 30-Year Quest for Babylon's Ishtar Gate
https://www.national[...]
2018-01-05
[21]
서적
Antiquity on display : regimes of the authentic in Berlin's Pergamon Museum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22]
뉴스
Iraq appeals to Berlin for return of Babylon gate
https://www.theguard[...]
2002-05-04
[23]
웹사이트
بوابة عشتار .. كيف نقلت الى المانيا ؟!
https://almadasupple[...]
2021-07-07
[24]
Youtube
كيف سرق الألمان بوابة عشتار من بابل؟
https://www.youtube.[...]
2020-07-25
[25]
학술지
The exhibition of architecture and the architecture of an exhibition
2009-01-05
[26]
뉴스
Hussein's Babylon: A Beloved Atrocity
https://www.nytimes.[...]
2003-08-19
[27]
뉴스
Iraq appeals to Berlin for return of Babylon gate
https://www.theguard[...]
2002-05-04
[28]
뉴스
Is Iraq right to reclaim the Ishtar Gate from Germany?
https://historynewsn[...]
2009-11-05
[29]
서적
DEcolonial Heritage: Natures, Cultures, and the Asymmetries of Memory
Deutsche Nationalbibliothek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