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도 (18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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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도는 1821년에 태어나 1887년에 사망한 청나라 말기의 인물이다. 호남성 평강현 출신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학문에 힘써 수재와 거인이 되었으며, 유학을 가르쳤다. 태평천국에 대항하여 상군에 들어가 증국번을 보좌했으며, 휘주 방어 실패로 면직되었으나, 이후 귀주성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운남 안찰사, 광동성 방어를 거쳐 귀주 포정사로 승진했으나 재직 중 사망했다. 저서로는 《국조선정사략》, 《호남성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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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도 (182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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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이원도 (李元度) |
자 | 승균(升均) |
호 | 담원(澹園) |
출생 | 1821년 |
사망 | 1887년 |
본관 | 해주 이씨 (海州 李氏) |
주요 활동 | 청나라 관리, 군인 |
생애 | |
시대 | 청나라 |
활동 시기 | 19세기 |
주요 경력 | 과거 급제 지방 관리 군인 (상군 지휘관) |
주요 공적 | 태평천국의 난 진압 참여 |
기타 | 증국번의 막료 |
가족 관계 | |
부 | 이경원(李敬元)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참고 자료 | |
관련 서적 | 담원총독유집 (澹園督略遺集)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
2. 생애
이원도는 청나라 말기 호남성 평강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에 정진한 인물이다. 젊은 시절 태평천국 운동에 반대하여 증국번의 상군에 참여하였고, 증국번이 자살하려는 것을 두 번이나 막는 등 그를 보좌했다. 1860년 휘주 방어에 실패하여 면직되었다.
이후 귀주성에서 소수민족 반란을 진압하고 청불전쟁에 참전하는 등 군사적 공적을 세웠다. 1887년 귀주 포정사로 승진했으나, 재직 중 병사했다.
2. 1. 초기 생애
호남성 평강현 사단촌(沙塅村) 출신이다. 아버지는 두부를 팔았고,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18세에 수재(秀才)가 되었고, 23세에 거인이 되어 검양현에서 유학을 가르쳤다.2. 2. 상군 참여와 증국번 보좌
1853년, 침주의 주학 훈도가 되었다. 태평천국이 유학을 비난하는 것에 분노하여, 형양에 있던 상군 증국번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는 평강에서 모집한 병력 500명을 이끌고 상군에 참여했다. 증국번은 2년간 군사 훈련을 시켰지만, 장사의 정항진(靖港鎭)에서 참패를 당하자 이원도에게 유서를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원도는 증국번을 건져 올리며 달랬다. 증국번은 이에 감동하여 자신의 조카딸과 이원도를 결혼시켰다. 1856년 8월, 태평천국의 당정재가 이끄는 수군이 파양호에서 상군을 포위했고, 증국번은 다시 자살을 시도했지만, 이때도 이원도가 말렸다.2. 3. 휘주 전투와 좌절
1860년, 양강총독이 된 증국번은 이원도에게 휘주에 주둔한 상군 사령부가 있는 기문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했다. 그러나 태평천국군은 10만 병력을 이끌고 휘주를 공격하였고, 이원도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곳을 탈출했다. 그는 휘주 방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이유로 증국번에게 탄핵되어 면직되었다. 여기에는 증국번과 사이가 좋지 못한 왕유령 절강순무를 구출하려고 해서 증국번의 분노를 샀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2. 4. 귀주성에서의 활약과 청불전쟁 참전
1866년, 이원도는 의용군 2천 명을 이끌고 귀주성에서 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전했다. 그 공으로 운남 안찰사로 임명되었다.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팽옥린의 요청으로 광동성 방어를 담당했다.
2. 5. 말년
1887년, 귀주 포정사로 승진했지만, 재직 중에 병사했다.3. 저서
이원도는 학자로서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닌 저서를 남겼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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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선정사략 |
호남성지 |
3. 1. 주요 저서 목록
- 국조선정사략 (國朝先正事略)
- 호남성지 (湖南省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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