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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 당굴렘 여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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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자벨 당굴렘 여백작은 앙굴렘 백작 아이메르 Tailiefer의 외동딸이자 상속녀로, 1200년 잉글랜드 왕 존과 결혼하여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존과의 결혼 전 약혼자였던 휴 9세 르 브룅과의 관계 때문에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갈등을 겪었다. 존 왕 사후 프랑스로 돌아가 휴 10세 드 뤼지냥과 재혼하여 9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루이 9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모의하다가 실패하고 124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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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 당굴렘 여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퐁트브로 수도원의 에피지
칭호잉글랜드 왕비
재위 기간1200년 8월 24일 – 1216년 10월 19일
대관식1200년 10월 8일
칭호 (앙굴렘)앙굴렘 여백작
재위 기간 (앙굴렘)1202년 6월 16일 – 1246년 6월 4일
이전아이머
이후위그 10세
섭정 (앙굴렘)존 (1202–1216)
위그 10세 (1220–1246)
칭호 (라 마르슈)라 마르슈 백작부인
재위 기간 (라 마르슈)1220년 5월 10일 – 1246년 6월 4일
배우자존 (결혼: 1200년, 사망: 1216년)
위그 10세 드 뤼지냥 (결혼: 1220년)
자녀헨리 3세
리처드, 콘월 백작
조안, 스코틀랜드 왕비
이자벨라, 신성 로마 황후
엘레오노르, 펨브로크 백작부인
위그 11세 드 뤼지냥
아이머, 윈체스터 주교
앨리스, 서리 백작부인
윌리엄, 펨브로크 백작
이자벨라 드 뤼지냥
가문타이유페르
아버지아이머
어머니알릭스 드 쿠르트네
출생일약 1186년 / 약 1188년
사망일1246년 6월 4일 (약 58세 또는 60세)
사망 장소퐁트브로 수도원, 프랑스
매장 장소퐁트브로 수도원
이름 (프랑스어)
프랑스어Isabelle d'Angoulême
프랑스어 발음 (IPA)izabɛl dɑ̃ɡulɛm

2. 잉글랜드 왕비

이자벨은 1200년 8월 24일 존 왕과 결혼하여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8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그녀는 원래 라 마르슈 백작의 상속자인 위그 9세 뤼지냥과 약혼한 상태였으나, 존 왕과의 결혼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분노를 사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 몰수와 무력 충돌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왕비가 된 이후인 1202년 6월 16일, 이자벨은 아버지 아이메르가 사망하자 자신의 권리로 앙굴렘 여백작 지위를 계승했다.

이자벨은 존 왕과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이들은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여 유럽의 여러 왕가 및 귀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1207년 10월 1일 윈체스터 성에서 첫 아들이자 훗날 잉글랜드 왕이 되는 헨리 3세를 낳았고, 이후 아들 리처드와 딸 조안, 이자벨, 엘레오노르를 낳았다. 조안을 제외한 네 자녀는 모두 후손을 남겼다.

2. 1. 가문과 초기 생애

이자벨은 앙굴렘 백작 아이메르 Tailiefer(에마르 타이유페르)와 알릭스 드 쿠르트네 사이의 외동딸이자 유일한 상속녀였다.[2] 그녀의 어머니 앨리스는 쿠르트네의 피터 1세의 딸이자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증손녀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황제 쿠르트네의 피터 2세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1202년 6월 16일, 아버지 아이메르가 사망하자 이자벨은 자신의 권리로 앙굴렘 여백작이 되었다.[2] 이때 그녀는 이미 잉글랜드의 왕비였다.

원래 이자벨은 라 마르슈 백작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휴 9세 르 브룅과 약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1200년 8월 24일, 잉글랜드 왕 존은 글로스터의 이사벨과의 첫 결혼을 무효로 선언한 지 1년 만에, 12세 혹은 14세였던 이자벨과 앙굴렘에서 결혼했다.[2] 이자벨은 같은 해 10월 8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의식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했다.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이자벨은 어린 나이에도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녀를 고대 헬렌에 비유하기도 했다. 존 왕은 젊고 아름다운 이자벨에게 매료되었지만, 약혼자를 빼앗아 그녀와 결혼한 것은 개인적인 감정만큼이나 정적들을 자극하고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존 왕은 앙굴렘을 확보하여 프랑스와 자신의 조카 아르튀르 1세 (브르타뉴 공)를 지지하는 앙주, 메인, 투렌 등 북부 영지와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영지인 아키텐 사이를 분리하려 했다.[3] 그러나 이 강압적인 결혼은 오히려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존 왕의 프랑스 내 영지를 몰수할 빌미를 주었으며, 결국 무력 충돌과 푸아티에에서의 봉기로 이어졌다.[3]

존 왕이 국사를 제쳐두고 정오까지 이자벨과 침실에 머물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이는 당시 플랜태저넷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필리프 2세와 필사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던 존 왕을 무능하게 보이게 하려는 정적들의 중상모략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자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에 그녀를 "세이렌" 또는 "메살리나"에 빗대어 부르기도 했다. 한편, 존 왕의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이 결혼을 받아들였다.

2. 2. 존 왕과의 결혼

이자벨은 1200년 8월 24일 보르도 대성당에서 존 왕과 결혼했다.[2] 이는 존이 글로스터의 이사벨과의 첫 번째 결혼을 무효로 한 지 1년 후였다. 당시 이자벨의 나이는 12세 혹은 14세였다. 그녀는 1202년 6월 16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앙굴렘 여백작이 되었다.[2] 결혼 후 이자벨은 1200년 10월 8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여왕으로 즉위했다.

이자벨은 원래 라 마르슈 백작 위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위그 9세 뤼지냥과 약혼한 상태였다.[2] 존이 이미 약혼한 이자벨과 결혼한 결정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 국왕의 분노를 샀다. 필리프 2세는 존의 프랑스 내 모든 영지를 몰수했고, 이는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존은 이 결혼을 통해 프랑스 및 조카 아르튀르 1세를 지지하는 앙주, 메인, 투렌 등과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영지 아키텐 사이에 균열을 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 강압적인 결혼은 푸아티에에서의 봉기를 초래했다.[3]

결혼 당시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이자벨은 미모로 유명했으며, 때때로 역사가들에 의해 헬레네에 비유되기도 했다. 존 왕은 젊고 아름다운 아내에게 매료되었으나, 결혼에는 전략적인 의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존이 이자벨과의 시간에 몰두하여 정오까지 침대에 머무르며 국사를 소홀히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당시 플랜태저넷 영지를 지키기 위해 필리프 2세와 전쟁 중이던 존을 무능하게 보이게 하려는 정적들의 선전일 가능성이 있다. 일반 백성들은 그녀를 "세이렌" 또는 "메살리나"라고 부르기도 했다. 시어머니인 엘레오노르는 그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였다.

이자벨은 존과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낳았다. 1207년 10월 1일 윈체스터 성에서 훗날 헨리 3세가 되는 아들을 낳았고, 이후 아들 리처드, 딸 조안, 이자벨, 엘레오노르를 낳았다. 다섯 자녀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2. 3. 왕비 시절

이자벨은 원래 라 마르슈 백작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휴 9세 르 브룅과 약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존은 글로스터의 이사벨과의 첫 결혼을 무효로 한 지 1년 후인 1200년 8월 24일, 앙굴렘에서 12세 혹은 14세였던 이자벨과 결혼했다. 존이 약혼자를 빼앗아 두 번째 부인으로 삼은 이 행동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를 격분시켜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몰수당하고 무력 충돌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자벨은 1200년 10월 8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의식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했다. 이후 1202년 6월 16일에는 아버지 아이메르 당굴렘의 뒤를 이어 자신의 권리로 앙굴렘 백작이 되었다.

결혼 당시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이자벨은 이미 미모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역사가들은 그녀를 고대 헬렌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 존 왕보다 훨씬 어렸지만 그와 비슷한 격정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존 왕은 젊고 아름다운 아내에게 깊이 빠졌던 것으로 보이나, 이 결혼에는 낭만적인 이유만큼이나 정적들을 자극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존 왕이 이자벨에게 빠져 국사를 소홀히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당시 그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치열한 전쟁에 몰두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정적들의 모함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반 백성들은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 때문에 "세이렌" 또는 고대 로마 황후 메살리나에 빗대어 부르기도 했다. 한편, 시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이자벨을 존의 아내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자벨은 존 왕과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이들은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유력 가문과 혼인했다.

  • 헨리 3세: 1207년 10월 1일 윈체스터 성에서 출생. 할아버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이름을 딴 후계자이자 미래의 잉글랜드 왕.
  • 콘월의 리처드
  • 조안: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되었으나 후손은 없었다.
  • 이자벨: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자 시칠리아의 왕비.
  • 엘레오노르: 펨브로크 백작 부인이자 레스터 백작 부인.


조안을 제외한 네 자녀는 모두 후손을 남겼다.

3. 재혼과 프랑스로의 귀환

1216년 10월 남편 존 왕이 사망하자, 이자벨은 1217년 프랑스로 돌아가 자신의 상속 영지인 앙굴렘을 관리했다. 이후 1220년 봄, 그녀는 과거 약혼했던 위그 9세 드 뤼지냥의 아들인 휴 10세 드 뤼지냥, 라 마르슈 백작과 재혼했다.[2] 이 재혼은 잉글랜드 의회의 동의 없이 이루어져 추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3. 1. 라 마르슈 백작과의 재혼

1216년 10월 남편 존 왕이 사망하자, 이자벨은 아들 헨리 3세의 즉위를 도왔다. 그러나 즉위식이 치러진 지 1년도 안 된 1217년 7월, 그녀는 어린 아들을 섭정 윌리엄 마샬, 1대 펨브로크 백작에게 맡기고 프랑스로 돌아가 자신의 상속 영지인 앙굴렘을 관리했다.

1220년 봄, 이자벨은 과거 자신과 약혼했던 위그 9세 드 뤼지냥의 아들인 휴 10세 드 뤼지냥과 재혼했다.[2] 휴 10세는 라 마르슈 백작이자 루지냥의 영주였다. 본래 휴 10세는 이자벨의 장녀인 조안 공주와 약혼한 상태였고, 어린 조안은 결혼을 위해 뤼지냥 궁정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휴 10세는 여전히 아름다운 이자벨을 보고 마음을 바꿔 조안의 어머니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조안 공주는 1221년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2세와 결혼했다.

이자벨은 과부 왕비로서 재혼 시 받아야 하는 잉글랜드 국왕 의회의 동의 없이 휴 10세와 결혼했다. 당시 의회는 과부 왕비의 재혼 상대를 지정하거나 허락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자벨이 의회의 권위에 따르지 않자, 의회는 그녀의 지참금 토지를 몰수하고 연금 지급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이자벨과 그녀의 남편은 스코틀랜드 국왕과의 결혼이 약속된 조안 공주를 프랑스에 계속 붙잡아 두겠다고 위협하며 맞섰다. 잉글랜드 의회는 처음에는 어린 헨리 3세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이자벨 부부의 파문을 요청했으나, 신부를 기다리는 스코틀랜드 국왕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결국 이자벨과 타협하기로 결정했다. 타협을 통해 이자벨은 데번의 주석 광산 수입과 에일스베리 수입을 4년간 받게 되었고, 몰수된 노르망디의 지참금 토지에 대한 보상과 체납된 연금 3000GBP를 받았다.

이자벨은 휴 10세와의 사이에서 9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그들의 장남인 휴 11세 드 뤼지냥은 124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 마르슈 백작과 앙굴렘 백작이 되었다. 존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이자벨을 따라 앙굴렘으로 가지 않고, 장남인 헨리 3세와 함께 잉글랜드에 남았다.

3. 2. 프랑스 궁정과의 갈등

일부 동시대인들에게 "허영심 많고 변덕스러우며, 성가시스럽다"고 묘사된 이자벨은 잉글랜드왕비였던 과거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단순히 라 마르슈 백작 부인으로 여겨지며 다른 귀족 여성들에게 우선권을 내줘야 하는 자신의 지위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1220년 존 왕 사후, 이전 약혼자의 아들인 위그 10세와 재혼한[2] 이자벨은 프랑스 궁정과의 관계에서 여러 갈등을 겪었다. 1241년, 이자벨과 남편 위그 10세는 프랑스 궁정에 소환되어 푸아투 백작으로 임명된 루이 9세의 동생 알퐁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루이 9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블랑슈 왕대비는 이자벨을 공개적으로 무시했다. 이는 이자벨을 격분하게 만들었는데, 그녀는 1216년 5월 제1차 남작 전쟁 당시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했던 블랑슈에게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자벨은 루이 9세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자벨과 위그 10세는 사위인 레이몽 7세를 비롯한 다른 불만을 가진 귀족들과 함께, 프랑스 남부와 서부 지방을 규합하여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는 연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자벨은 1241년 말, 아들인 헨리 3세와 남편 위그 10세를 선동하여 루이 9세에게 반기를 들도록 부추겼다. 이는 1230년 노르망디 침공 당시 아들 헨리를 격려했음에도 약속했던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반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1244년 위그 10세는 루이 9세와 화해했다. 같은 해, 두 명의 왕실 요리사가 루이 9세를 독살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심문 과정에서 이자벨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이자벨은 체포되기 직전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1246년 6월 4일 사망했다.[4]

이자벨은 자신의 많은 잘못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수도원 묘지에 묻히기를 원했다. 이후 아들 헨리 3세가 퐁트브로를 방문했을 때, 어머니가 수도원 밖에 묻힌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유해를 수도원 내부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그녀는 최종적으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옆에 안치되었다.[4] 이자벨 사후, 프랑스에서 별다른 입지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그녀의 많은 자녀들(루지냥 가문 출신)은 이복 형제인 헨리 3세가 있는 잉글랜드 궁정으로 건너갔다.[1]

4. 반란, 죽음 그리고 사후

일부 동시대인들은 이자벨을 "허영심 많고 변덕스러우며, 성가시스럽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과거 잉글랜드의 왕비였던 이자벨은 프랑스에서 백작 부인으로 지위가 낮아진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공식 석상에서 다른 귀족 여성들에게 우선권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1241년, 이자벨과 그녀의 남편 위그 10세는 프랑스 궁정으로 소환되어 루이 9세의 동생이자 새로 푸아투 백작으로 임명된 알퐁스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 자리에서 루이 9세의 어머니인 블랑슈 왕대비는 이자벨을 공개적으로 무시했고, 이는 이자벨을 크게 격분시켰다. 이자벨은 과거 제1차 남작 전쟁 당시 블랑슈가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했던 일로 인해 이미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루이 9세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자벨과 위그 10세는 사위인 레이몽 7세를 포함한 다른 불만을 가진 귀족들과 연합하여, 프랑스 남부와 서부 지방을 아우르는 반(反)프랑스 왕실 연맹을 결성하고자 했다. 이들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기대했다. 이자벨은 이전 1230년에 아들 헨리 3세가 노르망디를 침공하도록 부추겼으나, 정작 약속했던 지원은 제공하지 않은 전력이 있었다.

1241년 말, 이자벨은 아들 헨리 3세와 남편 위그 10세를 선동하여 루이 9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생통주 전쟁에서 패배하며 반란은 진압되었다.[2]

1244년, 연맹이 실패하고 위그 10세가 루이 9세와 화해한 후, 왕실 요리사 두 명이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심문 과정에서 이자벨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이자벨은 체포되기 직전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1246년 6월 4일에 사망했다.[4]

이자벨은 생전에 자신이 저지른 많은 잘못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수도원 묘지에 묻히기를 원했고, 유언에 따라 처음에는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아들 헨리 3세가 퐁트브로를 방문했을 때, 어머니가 수도원 건물 밖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즉시 수도원 내부로 이장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최종적으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곁에 안치되었다. 이자벨이 사망한 후, 프랑스에서 별다른 입지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그녀의 여러 자녀들(루지냥 가문 출신)은 이복 형제인 헨리 3세의 궁정이 있는 잉글랜드로 건너갔다.[1]

5. 자녀

이자벨은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총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첫 번째 남편 잉글랜드의 존 왕과의 사이에서는 2남 3녀, 총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5] 두 번째 남편 휴 10세 드 뤼지냥과의 사이에서는 5남 4녀, 총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6] 각 자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1. 존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잉글랜드의 존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다섯 명의 자녀는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5]

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헨리 3세1207년 10월 1일 – 1272년 11월 16일프로방스의 엘레노어잉글랜드 왕. 후손으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있음.
리처드1209년 1월 5일 – 1272년 4월 2일1. 이사벨 마셜
2. 프로방스의 산치아
3. 팔켄부르크의 베아트리체
콘월 백작, 로마 왕. 자녀를 둠.
조안1210년 7월 22일 – 1238년 3월 4일알렉산더 2세스코틀랜드의 왕비. 자녀 없음.
이사벨라1214년 – 1241년 12월 1일프리드리히 2세신성 로마 황제시칠리아 왕의 황후. 자녀를 둠.
엘레노어1215년 – 1275년 4월 13일1. 윌리엄 마셜
2. 시몽 드 몽포르
첫 남편 사후 재혼하여 자녀를 둠.


5. 2. 휴 10세 드 뤼지냥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이자벨은 휴 10세 드 뤼지냥과의 사이에서 5남 4녀, 총 9명의 자녀를 더 낳았으며, 이들은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6] 이 자녀들은 잉글랜드 귀족이 되었다.

  • 휴 11세 드 루시냥 (1221–1250), 라 마르슈 백작이자 앙굴렘 백작. 드뢰 백작부인 욜랑드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루시냥의 에이머 (1222–1260), 윈체스터 주교
  • 아녜스 드 루시냥 (1223–1269). 윌리엄 2세 드 쇼비니 (1270년 사망)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루시냥의 앨리스 (1224년 – 1256년 2월 9일).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와렌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루시냥의 가이 (1225년경 – 1264), 루이스 전투에서 사망. (터프턴 비미시는 그가 루이스 전투 이후 프랑스로 탈출하여 1269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 루시냥의 제프리 (1226년경 – 1274). 1259년 샤텔로 비케스의 잔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이사벨 드 루시냥 (1226/1227년경 – 1299년 1월 14일). 먼저 1244년 이전에 모리스 4세 드 크라옹 (1224–1250)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고; 두 번째는 제프리 드 랑콩과 결혼했다.
  • 루시냥의 윌리엄 (1228년경 – 1296). 초대 펨브로크 백작. 조앤 드 문첸시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마르그리트 드 루시냥 (1229년경 – 1288). 먼저 1243년 툴루즈의 레몽 7세와 결혼했고; 두 번째는 1246년경 투아르 자작인 아메리 9세 드 투아르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6. 대중문화

이자벨 당굴렘 여백작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1956년 TV 시리즈 ''로빈 후드의 모험''의 "이사벨라" 에피소드에서는 배우 지나 워커가 이자벨을 연기했다. 다만, 극중에서는 12세 소녀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 1976년 영화 ''로빈 앤 마리안''에서는 배우 빅토리아 아브릴이 연기했다.
  • 1979년 TV 미니시리즈 "악마의 왕관"에서는 배우 린지 벡스터가 연기했다.
  • 1986년 TV 시리즈 ''셔우드 숲의 로빈 후드''의 "사칭자" 에피소드에서는 배우 코리 풀먼이 연기했다.
  • 2010년 영화 ''로빈 후드''에서는 배우 레아 세이두가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A Great and Terrible King. Edward I And The Forging of Britain Pegasus Books 2009
[2] 기타 Weir, p. 68
[3] 기타 森、p. 78
[4] 기타 Weir, p. 69
[5] 기타 Weir, pp. 69 - 72
[6] 기타 Weir, pp. 68 -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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