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야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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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즈미야 시게루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배우, 미술가, 만화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이다. 1971년 포크 가수로 데뷔하여 '춘하추동' 등의 곡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배우 활동을 시작하여 드라마와 영화에서 폭넓은 연기를 선보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2010년대에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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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야 시게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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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즈미야 시게루 |
본명 | 이즈미야 시게루 (泉谷 茂) |
출생일 | 1948년 5월 11일 |
출생지 |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
거주지 | 도쿄도 메구로구 히가시야마 |
국적 | 일본 |
직업 | 싱어송라이터, 배우, 방송인 |
활동 시작 | 1971년 |
학력 | 도쿄도립 메구로 고등학교 중퇴 |
음악 활동 | |
장르 | 포크송, 록 |
악기 | 보컬, 기타 |
레이블 | CBS・소니 엘렉 레코드 AARD-VARK 포라이프 레코드 어사일럼 레코드 폴리돌 레코드 SWITCH Invitation 스피드스타 레코드 GUERRILLA RECORD iZ 레이블 인덱스 뮤직 포니캐니언 캇사이 |
소속사 | 이즈미야 시게루 사무소 |
관련 음악가 | 가토 가즈히코 니시오카 다카시 나카이도 레이치 |
기타 활동 | |
별칭 | "방과 후의 왕" (放課後の王様, Houkago no Ousama) |
웹사이트 | |
공식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소속사 웹사이트 | 소속사 웹사이트 |
관련 정보 | |
아티스트 아카이브 | 아티스트 아카이브 |
2. 생애
이즈미야 시게루는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에서 태어나 3세부터 도쿄도 메구로구 히가시야마에서 성장하였다.[140]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후유증으로 보행이 불편하다. 메구로 구립 히가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도립 메구로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140] 롤링 스톤스를 동경했지만 18세 때 집이 화재로 일렉트릭 기타, 앰프 등 악기 장비를 모두 잃고 어쿠스틱 기타만 남아 포크 가수가 되었다.[140]
1971년 라이브 앨범 『이즈미야 시게루 등장』으로 ELEC 레코드사에서 데뷔했다.[11] 1972년 앨범 『춘하추동』을 발매, 가토 카즈히코가 프로듀싱을 맡았고 타이틀곡은 이즈미야의 대표곡이 되었다. 1975년 이노우에 요스이, 요시다 타쿠로와 포라이프 레코드를 설립했지만, 1977년 결별했다.
1980년 이시이 소고 감독의 영화 『광이咲き 썬더로드』에서 미술을 담당하며 영화계에 진출했다. 1986년에는 자신이 감독한 SF 영화 『데스파우더』를 제작했다.[144]
1993년 홋카이도 지진 이후 이재민 구호를 위한 게릴라 공연을 시작,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에도 같은 활동을 이어갔다. 주요 자선 활동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내용 |
---|---|---|
1993년 | 홋카이도 남서쪽 해역 지진 | "너희들 기부해라!"라는 문구로 일본 유니세프 협회 협찬을 받아 1인 포크 게릴라 자칭, 도쿄 23구 내 게릴라 라이브.[61] 모금액 및 싱글 "왜, 이런 시대에" 인세 전액 오쿠시리섬 기부.[62] |
1994년 | 운젠산 화산 폭발 | 이세 쇼조, 이노우에 요스이 등이 참여한 "메시지송의 날" 개최.[65] |
1995년 | 한신·아와지 대지진 | "너희들 기부해라!" 문구로 일본 각지 게릴라 라이브, 모금액 및 싱글 "It's gonna be Alright" 인세 전액 기부.[62] |
이즈미야 시게루는 우파 연예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김장훈, 박종우 등을 비난한 적이 있다.[145]
2. 1. 어린 시절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에서 태어나 3세부터 도쿄도 메구로구 히가시야마에서 성장하였다.[140] 메구로 구립 히가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도립 메구로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140] 롤링 스톤스를 동경했지만 18세 때 집이 화재로 일렉트릭 기타, 앰프 등 악기 장비를 모두 잃고 어쿠스틱 기타만 남아 포크 가수가 되었다.[140] 유년기에는 소아마비에 걸린 적도 있어, 후유증 때문에 보행이 불편하다. 이즈음 만화 잡지 com에 투고하여 만화가가 되려고도 했다. 16페이지 분량의 만화 작품 "나쁜 놈들"(わるい奴ら)이 남아있다.[141]2. 2. 1970년대: 데뷔와 포크 음악 활동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에서 태어나 3세부터 도쿄도 메구로구 히가시야마에서 성장하였다.[140] 메구로 구립 히가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도립 메구로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롤링 스톤스를 동경했지만 18세 때 집이 화재로 일렉트릭 기타, 앰프 등 악기 장비를 모두 잃고 포크 기타만 남아 포크 가수가 되었다.[140]1971년 라이브 앨범 『이즈미야 시게루 등장』으로 ELEC 레코드사에서 포크 싱어로 데뷔했다.[11] 요시다 타쿠로가 CBS소니로 이적하면서 ELEC의 간판 스타가 되었다.[21] 요시다 타쿠로는 히로시마 포크 마을 출신이었고, 포크는 도쿄보다는 지방 출신이 더 잘 팔린다는 판단에 따라 이즈미야 시게루도 아오모리 출신임이 강조되었다.[142] 후루이도 (나카이도 레이치), RC 석세션 (이마와노 키요시로) 등과 히비야 공원 대음악당(노온)에서 열린 우타노이치 콘서트에 참가했다.[22][23]
1972년 앨범 『춘하추동』 발매. 가토 카즈히코가 프로듀스를 맡았다. 타이틀곡 「춘하추동」은 이즈미야의 대표곡이 된다.[11][24] 싱글로도 발매되었지만 동명 앨범의 음원이 아닌, 오무니버스 라이브 앨범 『노온 우타노이치』에 수록된 라이브 버전으로 싱글화되었다. 싱글 자켓에는 "실황 녹음반"이라고 적혀 있다.[25] 1988년에는 록 어레인지로 재싱글화되었다.[26][27]
그 후에도 『지구는 축제 소동』(1972년), 사디스틱 미카 밴드가 참가한 『빛과 그림자』(1973년)를 발매. 나카가와 이사토, 니시오카 타카시와의 합동 앨범 『친구 시작』(1973년) 및 옐로우(밴드), 라스트 쇼를 거느리고 록 색채를 강조한 앨범 『황금광시대』(1974년)를 일렉 레코드에서 발표했다.[29][30][31][32]
1975년 코무로 토모토, 이노우에 요스이, 요시다 타쿠로와 포라이프 레코드를 설립하고 이적[11]했다. 그 첫 번째 앨범으로 『라이브!! 이즈미야 -왕자들의 밤-』(1975년)을 발표했다.[33][34]
1976년 앨범 『가족』, 『이스트로부터의 뜨거운 바람』(같은 해 미국에서 녹음한 라이브 앨범) 발매했다.[35][36]
1977년 스트리트 파이팅 멘을 백밴드로 한 록 앨범 『광석의 거인』 발표했다.[37] 이것을 마지막으로 포라이프 레코드를 떠난다.[11] 당시 이즈미야는 "뮤지션도 하고 회사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경영자와 뮤지션의 두 가지 일을 하는 행위는 다른 경영자에게 실례다"라고 생각했고, 코무로를 대신해 사장에 취임한 타쿠로와 의견 차이가 생긴 것이 원인이었다.[38]
아사일럼 레코드로 이적하여 가토 카즈히코 프로듀스의 앨범 『80의 발라드』, 『도시의 러너』 발표했다.[40][41]
2. 3. 1980년대: 영화 및 다양한 분야 진출
1980년 이시이 소고 감독의 영화 『광이咲き 썬더로드』에서 미술을 담당하며 영화계에 존재감을 알렸다. 이 작품으로 블루리본상 미술 디자인상을 수상했고,[43] "전광석화에 은의 구두", "날개 없는 야로들", "국기 펄럭이는 아래" 등이 극중가로 사용되었다.[43]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에에잖아까』에 출연하며 주제곡도 담당했다.[143]1982년 폴리도르로 이적하여 『NEWS』, 『39°8′』, 『ELEVATOR』 등을 발표했다.[47][48][49]
1986년에는 자신이 감독하고 사토 코이치, 나츠키 마리 등을 배우로 기용한 SF 영화 『데스파우더』를 제작했다.[144] 촬영을 위해 자택 지하실을 폭파하기도 했다.[52]
1988년 빅터로 이적하여 『짖는 발라드』, 『IZUMIYA SELF COVERS』, 『HOWLING LIVE』, 『'90sバラッド』, 『叫ぶひと囁く』 등을 발표했다. 같은 해 히무라 쿄스케의 솔로 데뷔 앨범 FLOWERS for ALGERNON에 수록된 "혼자 파시즘"의 작사를 담당했고,[59] 자신이 감독 및 출연한 오리지널 비디오 '네이비 락 워 격파하라'를 발표했는데, 방위청(현 방위성), 해상자위대의 전면 협력을 얻어 촬영되었다.[60]
2. 4. 1990년대 이후: 자선 활동 및 다방면 활동
1991년 데뷔 20주년을 맞아 전국 투어를 진행했다. 1993년 홋카이도 지진 발생 후 이재민 구호를 위한 게릴라 공연 "너희들 모금해라!"를 시작, 피해자 응원가 『왜 이런 시대에』, 『격렬한 계절』 등을 발표했다.[62] 쿠와타 케이스케, 이마와노 키요시로, 오다 카즈마사, 쓰지 히토나리 등과 자선 공연을 개최했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에도 같은 제목의 게릴라 콘서트를 열고, '이즈미야 기금'을 설립했다.[68] 나가사키 운젠산 분화 시에도 이마와노 키요시로, 오다 카즈마사, 요시다 타쿠로, 사다 마사시 등과 함께 자선 공연을 진행했다.연도 | 사건 | 내용 |
---|---|---|
1993년 | 홋카이도 남서쪽 해역 지진 | "너희들 기부해라!"라는 문구로 일본 유니세프 협회 협찬을 받아 1인 포크 게릴라 자칭, 도쿄 23구 내 게릴라 라이브.[61] 모금액 및 싱글 "왜, 이런 시대에" 인세 전액 오쿠시리섬 기부.[62] 11월 15일 홋카이도 후생 연금 회관에서 쿠와타 케이스케, 이마와노 키요시로 등이 참여한 "오쿠시리섬 자선 콘서트" 개최.[63] |
1994년 | 운젠산 화산 폭발 | 3월 13일 나가사키 공회당에서 이세 쇼조, 이노우에 요스이 등이 참여한 "메시지송의 날" 개최.[65] 8월 16일 일본 무도관, 10월 28일 시마바라시 문화회관에서 "일본을 구원하라 '94" 개최.[62] |
1995년 | 한신·아와지 대지진 | 지진 당일 밤부터 "너희들 기부해라!" 문구로 일본 각지 게릴라 라이브, 모금액 및 싱글 "It's gonna be Alright" 인세 전액 기부.[62] 이마와노 키요시로의 "ZERRY"가 소속된 밴드 더 타이머즈 싱글 "사요나라는 하지 않아" 수익금, 이즈미야 설립 "이즈미야 기금" 통해 피해 지역 기부.[68] |
1996년 경력 집대성 비디오 발매, 10월 일본 TV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고정 출연.[62] 1998년 작품집 발매, 시부야, 가루이자와, 후쿠오카, 고베 등에서 『이즈미야 시게루 아트전』 개최.[62]
2. 5. 정치/사회적 입장 및 논란
이즈미야 시게루는 우파 연예인으로 알려져 있으며,[145] 독도 문제에 대해 김장훈, 박종우 등을 비난한 적이 있다.[145]그는 일본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중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러시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발언을 자주 한다.[122][123][124] 그러나 "엔터테인먼트나 스포츠 종사자는 국가 간 정치적 대립에도 '모두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해야 하며, 분쟁을 부추겨선 안 된다"는 견해도 밝혔다.[122] 또한 "재난이나 전쟁이 일어나도 평화롭게 즐길 수 있다면 즐겨야 하며, 모두가 위기감에 휩싸여선 안 된다"고도 말했다.[125]
2014년, 그는 "자살의 권유"와 "선천성 욕정마" 두 곡의 저작권을 영구 폐기하길 원했다. "싫어하는 노래를 억지로 부르는 것은 젊은 시절의 무모함을 보여주며 불쾌감과 고통을 줄 뿐"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130]
과거 라이브에서 기타를 던지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나, 2015년 관객 부상으로 소송이 제기되어 합의금을 지불하고 사과한 후 중단했다.[131][132]
3. 작품 목록
이즈미야 시게루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아 활약했다.
; 영화
- 터미널 (2015년) - 미나미 타츠조 역[116]
- 후처업의 여자 (2016년) - [116]
; 드라마
- 아랑 -GARO- -GOLD STORM- 쇼 (2015년)
- 감옥의 가시 (2017년) - 진구 코레키요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