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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기미독립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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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입장 기미독립기념탑은 1919년 일제강점기 당시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입장면에서는 3월 20일 양대리 만세운동과 3월 28일 직산 금광 광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양대리 만세운동은 광명학교 학생들과 주민 700여 명이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를 외쳤으며, 직산 금광 광부들은 갱구에서 시위를 벌이다 일제에 의해 3명이 순국했다. 1990년 4월 27일 기념사업회에서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기념비문에는 당시의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의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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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기미독립기념탑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입장기미독립기념탑 정보
입장기미독립기념탑
입장기미독립기념탑
국가대한민국
위치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128
유형향토문화유산
지정 번호47
지정일1995년 5월 10일

2. 배경

2. 1. 일제의 식민 통치

2. 2.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

3. 입장면의 독립만세운동

3. 1. 양대리 만세운동 (3월 20일)

3. 2. 직산 금광 광부 만세운동 (3월 28일)

4. 결과 및 영향

4. 1. 일제의 탄압 강화

4. 2. 독립운동의 확산

4. 3. 역사적 의의

5. 기념 사업

5. 1. 입장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건립

1919년 3월 20일 입장면 양대리에서 양대 사립 광명학생 및 직산 금광회사 광부 등 7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4월 27일 기념사업회에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문은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신용하 박사가 작성했다. 기념비문에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때, 이 고장 입장(현 천안시 입장면)에서 3월 20일 양대 사립 광명학교의 어린 여학생들과 양대 장꾼들의 봉기, 3월 28일 직산 금광 광부들의 봉기가 있었다고 적혀있다.

3월 20일에는 오전 10시 하얀 상복으로 갈아입은 세 여학생을 선두로 80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양대시장으로 향했다. 광명학교 강기형 선생과 광부 안시봉 등 주민들도 다수 참가하여 100여 명의 대열이 학교로부터 양대 장터까지 행진했다. 양대 장터에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광부 김병열, 김채준과 상인 조쌍동(원명:조규영) 등도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선도했고, 장터에 나와있던 700여 명의 천안군 농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시작, 삽시간에 시위군중은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일제 천안 헌병대가 급파한 150여 명의 일본 군경이 시위군중을 체포, 애국 군민이 무려 200여 명이었다. 유관순 열사의 애국투쟁보다 10여 일 앞서 양대 광명학교 여학생들의 주도로 양대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음은 천안의 자랑이라고 기념비문에 적혀있다.

3월 28일에는 새벽 6시 30분 박창신 등은 광부의 근무교대 시간을 이용하여 갱구에서 200여 명의 광부를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입장을 향하여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감행하였다. 양대 일본 헌병 주재소에서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총칼로 제지하자 분노한 광부들은 주재소로 돌진하여 총을 빼앗고 전화선을 끊으며 격렬히 항쟁하였다. 일제는 천안에서 일본 군경을 급파하여 이 애국 광부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3명의 애국자가 순국하였다.

3월 28일 천안군 입장면 직산 금광 광부들의 독립만세운동은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순국자가 발생할 만큼 격렬한 것이었고 일본이 가장 중히 여기는 굴지의 금광지대에서 광부들이 적수공권으로 일제의 총칼에 맞서 피를 흘리며 대한독립을 절규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고 기념비문에 적혀있다.

5. 2. 기념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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