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지바르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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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잔지바르 혁명은 1964년 1월 12일, 아프리카계 반군이 잔지바르의 경찰서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혁명은 술탄 자무시드 빈 압둘라가 해외로 도망가고, 아프리카-시라지당(ASP)이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혁명 이후 아베이드 카루메가 대통령으로, 압둘라만 무함마드 바부가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잔지바르는 탕가니카와 합병하여 탄자니아를 이루었다. 혁명은 아랍/아시아 지배 계급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사회 개혁을 실시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개인의 자유 통제와 친족 등용, 그리고 카루메 암살 이후의 혼란 등의 문제점도 있었다. 혁명은 잔지바르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탄자니아의 공휴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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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 술탄국 - 무스카트 오만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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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혁명 | |
---|---|
위치 정보 | |
![]() | |
기본 정보 | |
분쟁 | 잔지바르 혁명 |
전체 | 냉전 |
날짜 | 1964년 1월 12일 |
장소 | 잔지바르 |
결과 | 혁명 세력의 승리 |
결과 상세 | 잔지바르 술탄국의 멸망 잔지바르 인민공화국의 수립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아랍인의 대량 추방과 학살은 잔지바르의 인구 구조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옴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혁명 세력 아프로-시라지당 움마당 |
교전국 2 | 잔지바르 술탄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존 오켈로 |
지휘관 2 | 잠시드 빈 압둘라 술탄 무함마드 샴테 하마디 총리 |
병력 | |
병력 1 | 혁명 세력 800명 |
병력 2 | 잔지바르 경찰 및 잔지바르군 |
사상자 | |
기타 사상자 정보 | 혁명 동안에 최소 8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으며 아랍인이 대부분을 차지함 혁명의 여파로 2,000명에서 4,000명(최대 20,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함 |
기타 정보 | |
스와힐리어 | Mapinduzi ya Zanzibar |
아랍어 | ثورة زنجبار (Thawrat Zanjibār) |
관련 정보 | |
관련 항목 | * 가봉 (1964년) * 잔지바르 (1964년) * 알제리 (1965년) * 다호메이 (1965년) * 부룬디 (1965년) * 콩고 민주 공화국 (1965년)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1965-1966년) * 부룬디 (1966년 7월) * 부룬디 (1966년 11월) * 가나 (1966년) * 오트볼타 (1966년) * 나이지리아 (1966년 1월) * 나이지리아 (1966년 7월) * 콩고 공화국 (1966년) * 다호메이 (1967년) * 가나 (1967년) * 토고 (1967년) * 말리 (1968년) * 콩고 공화국 (1968년) * 다호메이 (1969년) * 수단 (1969년) * 리비아 (1969년) * 소말리아 (1969년) |묶음2 = 1970년대 |내용2 = * 레소토 (1970년) * 우간다 (1971년) * 모로코 (1971년) * 수단 (1971년) * 다호메이 (1972년) * 가나 (1972년) * 모로코 (1972년) * 콩고 공화국 (1972년) * 르완타 (1973년) * 니제르 (1974년) * 코모로 (1975년) * 나이지리아 (1975년) * 차드 (1975년) * 부룬디 (1976년) * 나이지리아 (1976년) * 베넹 (1977년) * 콩고 공화국 (1977년) * 세이셸 (1977년) * 수단 (1977년) * 가나 (1978년)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1979년) * 가나 (1979년) * 적도 기니 (1979년) |묶음3 = 1980년대 |내용3 = * 리비아 (1980년) * 기니바사우 (1980년) * 오트볼타 (1980년)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1981년) * 감비아 (1981년) * 가나 (1981년) * 세이셸 (1981년)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1982년) * 케냐 (1982년) * 오트볼타 (1982년) * 오트볼타 (1983년) * 오트볼타 (1983년) * 나이지리아 (1983년) * 모리타니 (1984년) * 카메룬 (1984년) * 기니 (1984년) * 우간다 (1985년) * 나이지리아 (1985년) * 수단 (1985년) * 레소토 (1986년) * 부르키나파소 (1987년) * 부룬디 (1987년) * 콩고 공화국 (1987년) * 튀니지 (1987년) * 수단 (1989년) * 부르키나파소 (1989년) * 에티오피아 (1989년) |묶음4 = 1990년대 |내용4 = * 나이지리아 (1990년) * 잠비아 (1990년) * 말리 (1991년) * 레소토 (1991년) * 시에라리온 (1992년) * 알제리 (1992년) * 부룬디 (1993년) * 나이지리아 (1993년) * 감비아 (1994년) * 레소토 (1994년) * 코모로 (1995년) * 부룬디 (1996년) * 니제르 (1996년) * 잠비아 (1997년) * 레소토 (1998년) * 콩고 공화국 (1998년) * 니제르 (1999년) * 코르티부아르 (1999년) |묶음5 = 2000년대 |내용5 = * 부룬디 (2001년) * 중앙아프리카 (2001년) * 중앙아프리카 (2003년) * 상투메 프린시페 (2003년) * 부르키나파소 (2003년) * 차드 (2004년) * 적도 기니 (2004년) * 모리타니 (2005년) * 차드 (2006년) * 마다가스카르 (2006년) * 기니 (2008년) * 모리타니 (2008년) * 마다가스카르 (2009년) |묶음6 = 2010년대 |내용6 = * 니제르 (2010년) * 기니바사우 (2010년) * 콩고 민주 공화국 (2011년) * 니제르 (2011년) * 기니바사우 (2011년) * 말리 (2012년) * 기니바사우 (2012년) * 이집트 (2013년) * 리비아 (2013년)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2012-2013년) * 남수단 (2013년) * 리비아 (2014년) * 레소토 (2014년) * 감비아 (2014년) * 부룬디 (2015년) * 부르키나파소 (2015년) * 부르키나파소 (2016년) * 리비아 (2016년) * 짐바브웨 (2017년) * 적도 기니 (2017년) * 가봉 (2019년) * 수단 (2019년) * 에티오피아 (2019년) |묶음7 = 2020년대 |내용7 = * 말리 (2020년)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2021년) * 니제르 (2021년) * 말리 (2021년) * 기니 (2021년) * 수단 (2021년 9월) * 수단 (2021년 10월) * 부르키나파소 (2022년 1월) * 기니바사우 (2022년) * 부르키나파소 (2022년 10월) * 상투메 프린시페 (2022년 11월) * 감비아 (2022년) * 수단 (2023년) * 니제르 (2023년) * 가봉 (2023년) * 부르키나파소 (2023년) * 시에라리온 (2023년) * 기니바사우 (2023년) * 콩고 민주 공화국 (2024년) |아랫글 = * 성공한 쿠데타 * 친위 쿠데타 }} |
2. 배경
잔지바르는 인도양 무역의 중심지로, 스와힐리 문화가 번성했던 곳이다. 킬와 술탄국 등 여러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바스쿠 다 가마의 탐험 이후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후 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잔지바르 술탄국이 성립되면서 노예 무역은 더욱 번성하였다.
19세기 말,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잔지바르는 독일 동아프리카와 영국 동아프리카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고,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통해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탕가니카 영토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2. 1. 식민지 이전 시대
- 올두반 석기 문화
- 올두바이 협곡
- 라에톨리 발자국
- 뭄바 동굴 수렵 채집인
- 쿠시트 팽창
- 룩스만다
- 반투족의 확산
- 닐로트족의 확산
- 인도양 무역
- 잔지바르 역사
- 메누티아스
- 랍타
- 우레웨 문화
- 스와힐리 문화
- 킬와 술탄국
- 엥가루카
2. 2. 식민지 시대
- 바스쿠 다 가마와 포르투갈의 팽창
- 오만 제국
-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
- 잔지바르 술탄국
- 잔지바르 노예 무역
- 아프리카 분할
- 독일 동아프리카
-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
- 마지 마지 반란
- 동아프리카 전역
- 영국 동아프리카
- 탕가니카 영토
2. 3. 혁명 직전의 상황
1964년 1월 12일 이른 새벽, 존 오켈로가 이끄는 600~800명의 아프리카계 반군은 변변찮은 무장을 갖추고 있었으나, 최근 해고된 경찰관들의 도움을 받아 웅구자섬의 경찰서를 기습 공격했다.[1][18] 이들은 창, 칼, 마체테, 타이어 쇠지렛대 등으로 무장했고 총기는 없었지만, 수적 우세와 기습을 통해 경찰을 제압하고 무기를 탈취했다.[22] 오켈로는 직접 경찰 초병을 공격해 소총을 빼앗고 경찰관을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22]반군은 노획한 수백 정의 자동소총, 기관단총, 브렌 경기관총을 이용해 수도 잔지바르 시의 주요 건물들을 장악했다.[26][24] 오전 7시경, 오켈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에게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라고 촉구했다.[25] 그는 자신을 "원수"라고만 칭했고, 그의 강한 아콜리 억양 섞인 스와힐리어는 잔지바르에서 그의 정체에 대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25]
전투 시작 6시간 만에 전신국과 주요 정부 건물들이 혁명 세력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섬의 유일한 활주로는 오후 2시 18분에 점령당했다.[26][24] 시골에서는 '망가'라고 불리는 농촌 아랍인들과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경찰서에서 노획한 무기가 반군에게 전달되면서 망가는 몰락했다.[27] 스톤타운에서는 말린디 경찰서에서 가장 치열한 저항이 있었지만, 탄약이 떨어진 후 항복했다.[27][28]
스톤타운 전역에서 반군은 아랍인과 남아시아인 소유의 상점과 가옥을 약탈, 파괴하고, 많은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했다.[28] 술탄 자무시드 빈 아브둘라는 무하마드 샴테 하마디 총리와 내각 구성원들을 대동하고 왕실 요트 ''세이드 칼리파''호를 타고 섬을 탈출했다.[24][29] 혁명 정부는 술탄의 궁전과 기타 재산을 압류했다.[30]
잔지바르 공식 역사에 따르면, 혁명은 아프리카-쉬라지당(ASP) 지도자 아베이드 아마니 카루메가 계획하고 주도했지만, 당시 그는 아프리카 본토에 있었다.[18] 금지된 움마당의 지도자 압둘라흐만 무하마드 바부도 마찬가지였다.[29] 오켈로는 펨바의 ASP 청년 지부 서기장으로서 카루메를 본토로 보내 안전을 확보했다.[1][29] 1959년 케냐에서 잔지바르에 도착한 오켈로는 마우마우 반란 당시 케냐 반군의 원수였다고 주장했지만, 군사 경험은 전혀 없었다.[1][7]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잔지바르 사람들을 무슬림 아랍인으로부터 해방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잔지바르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다.[7]
오켈로는 혁명 당시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MI5는 그가 케냐에서 마우마우와 싸운 전직 경찰관이며 쿠바에서 혁명 폭력 기술을 훈련받았다고 보고했지만,[37] 며칠 후 기자 회견에서 오켈로는 이를 부인하고 자신이 기독교인이며 "성경에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38]
혁명 기간 동안 아프리카인들은 남아시아인과 아랍인 공동체에 폭력을 저질렀고, 수천 명의 여성이 강간당했으며, 섬 전역에서 광범위한 약탈과 학살이 발생했다.[28] 미국 외교관 돈 페터슨은 아프리카 다수에 의한 아랍인의 살해를 대량 학살 행위로 묘사했다.[39] 오켈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추종자들에게 최대한 잔혹하게 아랍인을 죽이라고 구약 성서의 언어로 촉구했다.[40]
3. 혁명의 전개
1964년 1월 12일, 존 오켈로가 이끄는 600~800명의 아프리카계 반군이 잔지바르 혁명을 일으켰다. 이들은 창과 마체테 등 열악한 장비를 가졌지만, 기습과 수적 우위를 통해 경찰을 무장 해제하고 주요 건물들을 점령했다. 술탄 자무시드 빈 아브둘라는 가족 및 각료들과 함께 영국으로 탈출했다.
이 쿠데타 이후, 17세기 이후 잔지바르에 거주해 온 아랍계 및 아시아계 소수 민족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다. 5,000명에서 12,000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생존자들은 재산의 절반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었다. 이 학살은 이탈리아 영화 감독 구알티에로 야코페티의 다큐멘터리 영화 "아프리카여, 안녕"에 기록되었다.
혁명의 전개 과정과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1964년 1월 12일
1964년 1월 12일 오전 3시경, 존 오켈로가 이끄는 600~800명의 아프리카계 반군이 잔지바르 혁명을 일으켰다.[1][18] 이들은 최근 해고된 전직 경찰관들의 도움을 받아 웅구자의 경찰서를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했다.[1][18] 반군은 창, 칼, 마체테, 타이어 쇠지렛대 등으로 무장했지만 총기는 없었다.[22]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했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훈련이 부족했던 아랍계 경찰들을 제압했다.[1][23][22]오켈로는 직접 경찰 초병을 공격하여 소총을 빼앗고 경찰관을 살해했다.[22] 반군은 노획한 수백 정의 자동소총, 기관단총, 브렌 경기관총을 이용해 수도 잔지바르 시의 주요 건물들을 장악했다.[26][24] 오전 7시경, 오켈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에게 "제국주의자"를 타도하라고 촉구했다.[25] 그는 자신을 "원수"라고만 칭했으며, 아콜리 억양이 섞인 스와힐리어를 사용했다.[25]
전투 시작 6시간 만에 전신국과 주요 정부 건물들이 혁명 세력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섬의 유일한 활주로는 오후 2시 18분에 점령당했다.[26][24] 시골에서는 망가(농촌 아랍인)와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지만, 경찰서에서 노획한 무기를 얻은 반군에게 망가는 밀려났다.[27] 스톤타운에서는 말린디 경찰서에서 가장 치열한 저항이 있었으나, 경찰청장 J. M. 설리반은 탄약이 떨어진 후 항복하고 잔지바르를 떠났다.[27][28]
스톤타운 전역에서 반군은 아랍인과 남아시아인 소유의 상점과 가옥을 약탈, 파괴하고, 많은 여성을 집단 성폭행했다.[28] 무하마드 샴테 하마디 총리와 내각 구성원들은 왕실 요트 ''세이드 칼리파''호를 타고 섬을 탈출했고,[24][29] 혁명 정부는 술탄의 궁전과 기타 재산을 압류했다.[30] 12시간 동안의 시가전으로 최소 8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대부분 아랍인이었다.[30]
미국 시민 61명과 언론인 4명이 각각 피신 및 구금되었고,[24][31] 스톤타운 거주 미국인들은 잉글리시 클럽으로 피신했다.[32] 이들은 아랍인 남성들의 시체와 잘린 성기가 입에 쑤셔 박힌 모습을 목격했다.[33] 오켈로의 계획에 따라, 아프리카인들은 발견하는 아랍인과 남아시아인들을 체계적으로 살해했다.[34] 미국 외교관 돈 페터슨은 자신의 집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아랍인의 집을 습격하여 참수하고, 가족들을 강간 및 살해하는 것을 목격했다.[34] 혁명가들은 최소 이틀 동안 시골 지역의 망가와 통제권을 두고 싸웠고, 아랍인 가족 전체가 학살당하기도 했다.[35]
잔지바르 공식 역사에 따르면, 이 혁명은 ASP 지도자 아베이드 아마니 카루메가 계획하고 주도했지만,[18] 당시 카루메는 본토에 있었고, 금지된 움마당의 지도자 압둘라흐만 무하마드 바부도 마찬가지였다.[29] 오켈로는 펨바의 ASP 청년 지부 서기장이었고, 1959년 케냐에서 잔지바르에 도착했다.[1][29][7] 그는 군사 경험이 없었지만,[1] 기독교인으로서 잔지바르 사람들을 무슬림 아랍인으로부터 해방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다.[7]
혁명 기간 동안 아프리카인들은 남아시아인과 아랍인 공동체에 대해 폭력을 저질렀고, 수천 명의 여성이 강간당했으며, 섬 전역에서 아랍인에 대한 광범위한 약탈과 학살이 발생했다.[28] 미국 외교관 돈 페터슨은 아랍인의 살해를 대량 학살 행위로 묘사했다.[39] 오켈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추종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아랍인을 잔혹하게 죽이라고 촉구했다.[40]
3. 2. 혁명 이후


카루메와 바부는 각각 대통령과 대외협력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ASP와 우마당이 임시 정부 역할을 할 혁명 평의회를 수립했다.[29] 국가 이름은 잔지바르와 펨바 인민공화국으로 변경되었고,[1] 새 정부는 술탄을 영구 추방하고 ZNP와 ZPPP를 금지했다.[30] 카루메는 변덕스러운 오켈로와 거리를 두기 위해 그를 정치 무대에서 조용히 배제했지만, 그가 자칭한 원수 칭호는 유지하도록 허용했다.[1][29] 그러나 오켈로의 혁명가들은 곧 웅구자의 아랍인과 아시아인 주민들에게 보복을 시작하여 구타, 강간, 살인, 재산 공격을 자행했다.[1][29]
오켈로는 라디오 연설에서 "적들과 꼭두각시들" 수만 명을 사살하거나 투옥했다고 주장했지만,[1] 사망자 수에 대한 추산은 "수백 명"에서 2만 명까지 크게 달랐다. 일부 서구 신문들은 2,000명에서 4,000명이라고 보도했지만,[31][2] 더 높은 수치는 오켈로 자신의 방송과 일부 서구 및 아랍 언론의 과장된 보도에 의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1][41][42]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이탈리아 영화 제작진은 아랍인 포로 살해와 대량학살 무덤 매장 장면을 기록했으며, 이 영상은 살해 장면을 보여주는 유일하게 알려진 시각적 자료이다.[43] 많은 아랍인들이 오만으로 피신했고,[41] 다른 이들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오켈로의 명령에 따라 유럽인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29] 혁명 이후의 폭력은 펨바섬으로 확산되지 않았다.[42]
2월 3일까지 잔지바르는 마침내 정상으로 돌아왔고, 카루메는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44] 경찰이 거리로 돌아왔고, 약탈당한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민간인들이 불법 무기를 자수하기 시작했다.[44] 혁명 정부는 500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을 특별 법원에서 재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오켈로는 지지자들로 구성된 준군사 조직인 자유군(FMF)을 결성하여 거리를 순찰하고 아랍인의 재산을 약탈했다.[45][46] 오켈로 지지자들의 행동, 그의 폭력적인 언변, 우간다 사투리,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대체로 온건한 잔지바르인들과 무슬림 ASP에게 많은 반감을 샀다.[47] 3월까지 카루메 지지자들과 우마당 민병대는 FMF 대원 상당수를 무장 해제시켰다.
3월 11일, 오켈로는 공식적으로 원수 계급을 박탈당했고,[46][47][48] 본토 여행에서 돌아오려 할 때 잔지바르 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는 탕가니카를 거쳐 케냐로 추방된 후 고향 우간다로 빈털터리로 돌아왔다.[47]
4월, 정부는 인민해방군(PLA)을 결성하고 오켈로의 남은 FMF 민병대의 무장 해제를 완료했다.[47] 4월 26일, 카루메는 탕가니카와 새로운 국가 탄자니아를 형성하기 위한 연합이 협상되었다고 발표했다.[49] 이 합병은 당시 언론에 의해 잔지바르의 공산주의 전복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한 명의 역사가는 온건한 사회주의자인 카루메가 급진 좌파 우마당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고 말한다.[45][49][50] 바부는 우마당이 준군사 조직을 갖도록 잔지바르로 무기를 여러 차례 보내도록 주선한 중국 외교관들과 가까워졌다.[51]
카루메와 탕가니카의 니에레레 대통령 모두 잔지바르가 미국과 영국 외교관들이 소련, 중국, 동독 외교관들과 영향력을 다투는 냉전 긴장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비동맹국인 탕가니카와의 연합이 잔지바르를 세계의 주목에서 벗어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51] 우마당의 사회복지, 교육, 사회복지에 관한 많은 사회주의 정책이 정부에 의해 채택되었다.[42]
17세기 이후 잔지바르에 거주한 아랍계 및 아시아계 소수 민족에 대한 학살이 발생하여 5000명에서 12000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를 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재산의 절반을 몰수당한 채 출국했다. 이 학살은 이탈리아 영화 감독 구알티에로 야코페티에 의해 촬영되었고, 1966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아프리카여, 안녕 (Africa addio)」는 이 학살을 촬영한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다.
4. 혁명 이후의 탄자니아
잔지바르 혁명은 약 200년 동안 지속된 아랍/아시아 지배 계급의 권력을 분쇄하는 주요 결과를 가져왔다.[73][74] 탕가니카와 합병한 후에도 잔지바르는 혁명 평의회(Revolutionary Council (Zanzibar))와 대표원(House of Representatives of Zanzibar)을 유지했으며, 1992년까지 일당 체제(one-party system)로 운영되며 내정에 대한 권한을 가졌다.[75]
초대 대통령 카루메가 이끄는 정부는 혁명의 성공을 바탕으로 섬 전체에 걸쳐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의 상당수는 아랍인의 권력 제거와 관련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잔지바르 공무원들은 거의 전적으로 아프리카인들로 구성되었고, 토지는 아랍인들로부터 아프리카인들에게 재분배되었다.[73] 또한 혁명 정부는 무료 의료 서비스와 아프리카 학생들을 위한 교육 시스템 개방(혁명 전에는 중등 교육의 12%만을 차지했음)과 같은 사회 개혁을 실시했다.[73]
잔지바르 정부는 여러 프로젝트 자금 조달과 군사 자문을 위해 소련, 동독(GDR),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했다.[73] 그러나 신잔지바르 프로젝트(New Zanzibar Project)를 포함한 여러 동독 주도 프로젝트의 실패로 인해 잔지바르는 중국 원조에 집중하게 되었다.[76][77] 혁명 이후 잔지바르 정부는 개인의 자유와 이동에 대한 가혹한 통제와 정치 및 산업 부서 임명에 있어서의 친족 등용(nepotism)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새로운 탄자니아 정부는 개입할 수 없었다.[78][79]
결국 정부에 대한 불만은 1972년 4월 7일 카루메 암살로 극에 달했고, 이후 몇 주 동안 친정부 세력과 반정부 세력 간의 싸움이 이어졌다.[80] 1992년에 다당제(multi-party system)가 수립되었지만, 잔지바르는 여전히 부패와 선거 부정(vote-rigging) 혐의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2010년 총선(Tanzanian general election, 2010)은 상당한 개선으로 평가받고 있다.[75][81][82]
잔지바르 혁명은 잔지바르 주민과 학자들에게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역사가들은 혁명을 인종적, 사회적 기반으로 분석했으며, 일부는 아프리카 혁명가들이 아랍인과 남아시아인으로 대표되는 지배 계급과 상업 계급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83] 다른 이들은 이 이론을 반박하고 인종 간 경제적 불평등으로 악화된 인종 혁명으로 제시한다.[84] 잔지바르 혁명 기념일(Zanzibar Revolution Day)은 탄자니아 정부에 의해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1월 12일에 기념된다.[86] 또한 잔지바르 혁명 기념일(1월 12일)을 기념하기 위해 1월 6일부터 13일 사이에 마핀두지 컵(Mapinduzi Cup, 혁명 컵)이라는 축구 토너먼트가 개최된다.[87]
4. 1. 탕가니카와의 합병
1964년 4월 26일, 카루메는 탕가니카와 탄자니아라는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연합이 협상되었다고 발표했다.[49] 당시 언론은 이 합병을 잔지바르의 공산주의 전복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적어도 한 명의 역사가는 온건한 사회주의자인 카루메가 급진 좌파 우마당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45][49][50]카루메와 탕가니카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은 잔지바르가 미국과 영국 외교관들이 소련, 중국, 동독 외교관들과 영향력을 다투는 냉전 긴장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비동맹국인 탕가니카와의 연합이 잔지바르를 세계의 주목에서 벗어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51] 이후 우마당의 사회복지, 교육, 사회복지에 관한 많은 사회주의 정책이 정부에 의해 채택되었다.[42]
4. 2. 카루메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
아프리카계 정당인 아프로-시라지당(ASP)과 잔지바르 민족주의당(ZNP)의 연립 정부가 붕괴된 후, ASP는 카루메를 대통령으로 하는 혁명 평의회를 수립했다. 국가 이름은 잔지바르와 펨바 인민공화국으로 변경되었고, 새 정부는 술탄을 영구 추방하고 ZNP와 ZPPP를 금지했다.[1][29][30] 카루메는 변덕스러운 존 오켈로와 거리를 두기 위해 그를 정치 무대에서 조용히 배제했지만, 그가 자칭한 원수 칭호는 유지하도록 허용했다.[1][29]1964년 2월 3일, 잔지바르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카루메는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경찰이 거리에 복귀하고 약탈당한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열었으며, 민간인들은 불법 무기를 자수했다.[44] 혁명 정부는 500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을 특별 법원에서 재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오켈로는 지지자들로 구성된 준군사 조직인 자유군(FMF)을 결성하여 거리를 순찰하고 아랍인의 재산을 약탈했다.[45][46] 그의 폭력적인 언변, 우간다 사투리, 기독교 신앙은 온건한 잔지바르인들과 무슬림 ASP에게 반감을 샀고, 3월에 FMF 대원 상당수가 무장 해제되었다.[47]
3월 11일, 오켈로는 원수 계급을 박탈당하고,[46][47][48] 탕가니카 여행에서 돌아오려 할 때 잔지바르 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는 탕가니카, 케냐를 거쳐 고향 우간다로 추방되었다.[47] 4월, 정부는 인민해방군(PLA)을 결성하고 남은 FMF 민병대의 무장 해제를 완료했다.[47] 4월 26일, 카루메는 탕가니카와 탄자니아 연합이 협상되었다고 발표했다. 닐레레 대통령과 카루메는 잔지바르가 냉전 긴장의 중심지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탕가니카와의 연합이 잔지바르를 세계의 주목에서 벗어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51]
잔지바르 혁명으로 약 200년간 이어진 아랍/아시아 지배 계급의 권력이 분쇄되었다.[73][74] 탕가니카와 합병 후에도 잔지바르는 혁명 평의회와 대표원을 유지하며 1992년까지 일당 체제를 유지했다.[75] 카루메 정부는 아랍인들의 권력 제거에 집중했다. 잔지바르 공무원은 거의 아프리카인으로 구성되었고, 토지는 아랍인으로부터 아프리카인에게 재분배되었다.[73] 무료 의료 서비스와 아프리카 학생들을 위한 교육 시스템 개방(혁명 전 중등 교육의 12%) 등 사회 개혁도 실시되었다.[73]
정부는 소련, 동독,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했으나, 신잔지바르 프로젝트 등 동독 주도 프로젝트 실패 후 중국 원조에 집중했다.[73][76][77] 혁명 이후 잔지바르 정부는 개인의 자유와 이동에 대한 가혹한 통제, 친족 등용으로 비난받았고, 탄자니아 정부는 개입할 수 없었다.[78][79] 1972년 4월 7일 카루메 암살 이후 친정부 세력과 반정부 세력 간의 싸움이 이어졌다.[80] 1992년 다당제가 수립되었지만, 잔지바르는 여전히 부패와 선거 부정 혐의에 시달리고 있다. 2010년 총선은 상당한 개선으로 평가된다.[75][81][82]
4. 3. 카루메 암살과 그 이후
잔지바르 혁명 당시 아랍인 학살아프리카계 잔지바르인 다수로 구성된 아프로-쉬라지당(ASP)과 좌파 우마당은 임시 정부 역할을 할 혁명 평의회를 수립했다. 아베이드 카루메가 대통령으로, 압둘 라만 무함마드 바부가 대외협력부 장관으로 평의회를 이끌었다.[29] 국가 이름은 잔지바르와 펨바 인민공화국으로 변경되었고,[1] 새 정부는 술탄을 영구 추방하고 잔지바르 민족주의당(ZNP)과 잔지바르와 펨바 인민당(ZPPP)을 금지하는 것을 첫 조치로 삼았다.[30] 카루메는 변덕스러운 존 오켈로와 거리를 두기 위해 그를 정치 무대에서 조용히 배제했지만, 그가 자칭한 원수의 칭호는 유지하도록 허용했다.[1][29] 그러나 오켈로의 혁명가들은 곧 웅구자의 아랍인과 아시아인 주민들에게 보복을 시작하여 구타, 강간, 살인, 재산 공격을 자행했다.[1][29]
오켈로는 라디오 연설에서 "적들과 꼭두각시들" 수만 명을 사살하거나 투옥했다고 주장했지만,[1] 사망자 수에 대한 추산은 "수백 명"에서 2만 명까지 크게 달랐다. 일부 서구 신문들은 2,000명에서 4,000명이라고 보도했지만,[31][2] 더 높은 수치는 오켈로 자신의 방송과 일부 서구 및 아랍 언론의 과장된 보도에 의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1][41][42] 아랍인 포로의 살해와 대량학살 무덤에 매장은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이탈리아 영화 제작진에 의해 기록되었고, 이 영상은 살해 장면을 보여주는 유일하게 알려진 시각적 자료이다.[43] 많은 아랍인들이 오만으로 피신했고,[41] 다른 이들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오켈로의 명령에 따라 유럽인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29] 혁명 이후의 폭력은 펨바로 확산되지 않았다.[42]
2월 3일까지 잔지바르는 마침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카루메는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44] 경찰이 거리로 돌아왔고, 약탈당한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민간인들이 불법 무기를 자수하기 시작했다.[44] 혁명 정부는 500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을 특별 법원에서 재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오켈로는 지지자들로 구성된 준군사 조직인 자유군(FMF)을 결성하여 거리를 순찰하고 아랍인의 재산을 약탈했다.[45][46] 오켈로 지지자들의 행동, 그의 폭력적인 언변, 우간다 사투리,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대체로 온건한 잔지바르인들과 무슬림 ASP에게 많은 반감을 샀다.[47] 3월까지 그의 FMF 대원 상당수가 카루메 지지자들과 우마당 민병대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다.
3월 11일, 오켈로는 공식적으로 원수 계급을 박탈당했고,[46][47][48] 본토 여행에서 돌아오려 할 때 잔지바르 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는 탕가니카로, 그리고 케냐로 추방된 후 고향 우간다로 빈털터리로 돌아왔다.[47]
4월, 정부는 인민해방군(PLA)을 결성하고 오켈로의 남은 FMF 민병대의 무장 해제를 완료했다.[47] 4월 26일, 카루메는 탕가니카와 새로운 국가 탄자니아를 형성하기 위한 연합이 협상되었다고 발표했다.[49] 이 합병은 당시 언론에 의해 잔지바르의 공산주의 전복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한 명의 역사가는 온건한 사회주의자인 카루메가 급진 좌파 우마당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고 말한다.[45][49][50] 바부는 우마당이 준군사 조직을 갖도록 잔지바르로 무기를 여러 차례 보내도록 주선한 중국 외교관들과 가까워졌다.[51]
카루메와 탕가니카의 니에레레 대통령 모두 잔지바르가 미국과 영국 외교관들이 소련, 중국, 동독 외교관들과 영향력을 다투는 냉전 긴장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비동맹국인 탕가니카와의 연합이 잔지바르를 세계의 주목에서 벗어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51] 우마당의 사회복지, 교육, 사회복지에 관한 많은 사회주의 정책이 정부에 의해 채택되었다.[42]
5. 외국의 반응
잔지바르 혁명에 대한 외국의 반응은 혁명의 성격과 지정학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영국은 자국민 보호와 질서 유지를 위해 군사 개입을 준비했지만, 현지 고등판무관의 반대로 실행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국민 철수를 위해 해군 구축함을 파견했으나, 혁명 정부와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압둘라 카심 헝가와 압둘라흐만 무하마드 바부 등 좌파 인사들이 새 정부 요직에 임명되면서, 서방 정보기관들은 이 혁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새 정부를 신속하게 승인하고, 잔지바르가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이러한 의혹은 더욱 커졌다.
반면, 쿠바는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부인하면서도 잔지바르를 지지했다. 영국, 영연방 국가들, 미국은 공산권 국가들이 이미 새 정부를 승인한 이후인 2월 23일까지 승인을 보류했다. 이러한 상황은 잔지바르가 소련과 더욱 가까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서방 국가들은 잔지바르가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 확산의 거점이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5. 1. 영국
1964년 1월 12일 새벽, 존 오켈로가 이끄는 아프리카계 반군이 잔지바르 시의 경찰서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주요 건물들을 장악했다. 이들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기습 공격을 통해 취약한 경찰력을 제압했다. 브렌 경기관총 등 다수의 화기를 노획한 반군은 잔지바르 시를 빠르게 장악했다.[26][24]무하마드 샴테 하마디 총리와 내각 구성원들은 왕실 요트 ''세이드 칼리파''호를 타고 섬을 탈출했으며[24][29], 혁명 정부는 술탄의 궁전과 기타 재산을 압류했다.[30]
혁명 소식을 접한 케냐 주둔 영국군은 잔지바르 공항 공격을 위해 대기 태세에 돌입했지만, 잔지바르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티모시 크로스웨이트는 개입을 반대했다.[1][52] 많은 영국인이 핵심 정부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크로스웨이트는 영국 시민들의 즉각적인 탈출 승인도 보류했다.[52]
5. 2. 미국
혁명 발발 몇 시간 후, 미국 대사는 섬에 있는 미국 시민들의 철수를 승인했고, 미국 해군 구축함 USS 맨리(USS ''Manley'')가 1월 13일에 도착했다.[53] ''맨리''호는 잔지바르 시 항구에 정박했지만, 미국은 혁명평의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철수 작전을 진행했으며, 배는 무장한 사람들의 집단에 의해 맞닥뜨려졌다.[53] 허가는 결국 1월 15일에 나왔지만, 영국은 이러한 대치 상황이 이후 잔지바르에서 서구 열강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시킨 원인이라고 여겼다.[54]미국 시민 61명(NASA 위성 추적 기지에 근무하는 16명의 남성 포함)이 잔지바르 시의 잉글리시 클럽에 피신했고, 미국 언론인 4명이 섬의 새 정부에 구금되었다.[24][31]
5. 3. 동구권 및 기타 국가
혁명 이후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아프리카 최초)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승인한 것은 서구 열강에게 잔지바르가 공산권과 긴밀히 결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추가적인 증거였다.[46] 혁명 6일 후, ''뉴욕 타임스''는 잔지바르가 "아프리카의 쿠바가 되려는 기로에 서 있다"고 보도했지만, 1월 26일에는 적극적인 공산주의 개입이 없다고 부인했다.[31][56] 잔지바르는 계속해서 공산권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고, 2월에는 소련, 동독, 중국으로부터 고문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57] 쿠바 또한 체 게바라가 8월 15일 "잔지바르는 우리의 친구이며, 필요한 순간에 우리는 작은 도움, 형제적인 도움, 혁명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며 혁명 당시 쿠바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지원했다.[58]서구 정보기관은 이 혁명이 와르샤 조약 국가들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고 믿었다. 압둘라 카심 헝가가 총리로, 압둘라흐만 무하마드 바부가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사실은 이러한 의혹을 더욱 강화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공산주의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좌파 인사였다.[1] 영국은 이 두 사람이 탕가니카의 외무장관 오스카 캄보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전직 탕가니카 라이플즈 대원들이 혁명 지원을 위해 동원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 움마당 일부 당원들은 쿠바식 전투복을 착용하고 피델 카스트로 스타일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이는 쿠바의 혁명 지원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55]
아프리카 공산주의 국가의 등장 가능성은 서구에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영국 국방 및 해외 정책 위원회는 잔지바르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쿠바처럼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63] 영국, 영연방 대부분 국가, 그리고 미국은 2월 23일까지 새 정권을 승인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이미 공산권 대부분 국가에서 인정받은 상태였다.[64]
6. 혁명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잔지바르 혁명은 약 200년 동안 지속된 아랍/아시아계 지배층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73][74] 탕가니카와 합병했음에도 불구하고, 잔지바르는 혁명 평의회와 대표원을 유지하며 내정에 대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1992년까지 일당제 국가로 운영되었다.[75]
초대 대통령 아베이드 아마니 카루메가 이끄는 혁명 정부는 섬 전체에 걸쳐 개혁을 추진했다. 아랍인들의 권력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 개혁의 일환으로, 공무원은 거의 전적으로 아프리카인으로 구성되었고, 토지는 아랍인으로부터 아프리카인에게 재분배되었다.[73] 또한, 혁명 이전에는 중등 교육 기회가 12%에 불과했던 아프리카 학생들을 위해 교육 시스템을 개방하고,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사회 개혁도 실시했다.[73]
혁명 정부는 소련, 동독, 중국으로부터 여러 프로젝트 자금 조달과 군사 자문을 요청했다.[73] 그러나 신잔지바르 프로젝트(1968년)를 포함한 여러 동독 주도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잔지바르는 중국의 원조에 집중하게 되었다.[76][77] 혁명 이후 잔지바르 정부는 개인의 자유와 이동을 가혹하게 통제하고, 정치 및 산업 부서 임명에 친족 등용을 하는 등의 문제로 비판받았지만, 탄자니아 정부는 개입할 수 없었다.[78][79]
1972년 4월 7일, 카루메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고, 이후 몇 주 동안 친정부 세력과 반정부 세력 간의 싸움이 이어졌다.[80] 1992년에 다당제가 도입되었지만, 잔지바르는 여전히 부패와 선거 부정 혐의에 시달리고 있다. 2010년 총선은 상당한 개선으로 평가받는다.[75][81][82]
잔지바르 혁명은 잔지바르 주민과 학자들에게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역사가들은 혁명의 인종적, 사회적 기반을 분석해왔다. 일부는 아프리카 혁명가들이 아랍인과 남아시아인으로 대표되는 지배 계급과 상업 계급에 맞서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83] 다른 학자들은 이 이론에 반박하며, 인종 간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악화된 인종 혁명으로 본다.[84]
잔지바르 내에서 혁명은 중요한 문화적 사건으로, 10주년에는 545명의 죄수를 석방하고 40주년에는 군사 퍼레이드를 개최하는 등 기념 행사가 열렸다.[85] 잔지바르 혁명 기념일은 탄자니아 정부에 의해 공휴일로 지정되어 매년 1월 12일에 기념된다.[86] 또한, 잔지바르 혁명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잔지바르 축구 협회는 1월 6일부터 13일 사이에 마핀두지 컵(혁명 컵)이라는 축구 토너먼트를 개최한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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