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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빙 바트뭉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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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잠빙 바트뭉흐는 1926년 몽골에서 태어나 1997년에 사망한 몽골의 정치인이다. 1974년 몽골의 총리가 되었으며, 1984년 윰자깅 체덴발을 대신하여 몽골 인민 혁명당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몽골과 소련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1980년대 후반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1990년 몽골 민주화 운동으로 서기장직에서 사임했다. 퇴임 후에는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며 살았으며, 1990년 민주화 운동에서의 역할은 2016년 몽골 영화로 각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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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빙 바트뭉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잠빈 바트뭉흐
본명잠빈 바트뭉흐
로마자 표기Jambyn Batmönkh
출생1926년 3월 10일
출생지몽골 인민 공화국 웁스 주 히야르가스
사망1997년 5월 14일 (향년 71세)
사망지몽골 울란바토르
배우자아비르메디인 다리마
자녀3명
학력
출신 학교몽골 국립 대학교
경력
이전 직책몽골 대학교 총장
정당
소속 정당몽골 인민 혁명당
활동 기간1948년-1990년
주요 직위
몽골 인민 혁명당 서기장재임 시작: 1984년 8월 24일
재임 종료: 1990년 3월 14일
몽골 인민 공화국 인민 대회 의장단 의장재임 시작: 1984년 12월 12일
재임 종료: 1990년 3월 21일
몽골 인민 공화국 각료 회의 의장 (총리)재임 시작: 1974년 7월 11일
재임 종료: 1984년 12월 12일

2. 생애

잠빙 바트뭉흐는 1926년 3월 10일 옵스주 캬르가스 솜에서 태어나, 1948년 몽골 인민 혁명당(MPRP)에 입당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1] 1951년부터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3년 과학부 장관, 1974년 각료회의 부의장 및 의장(총리)을 역임했다.

1984년 윰자긴 체뎅발이 축출되면서 국가 원수가 되었고, 소련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2] 1986년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가졌다.[2]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에너지 및 광업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1989년 말부터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자, 바트뭉흐는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1990년 3월 몽골 인민 혁명당 정치국의 사임을 이끌어냈다. 그는 시위 진압 명령에 서명하지 않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선택했다.[3]

1990년 은퇴 후, 가족 대부분이 실직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1992년부터 수흐바타르구 담바다르자에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며 생활했다. 그는 새 행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1997년 사망했다. 1990년 민주화 운동에서 그의 역할은 2016년 몽골 영화 "잊지 마세요"("Бүү март")에 묘사되었다.

2. 1. 초기 생애 (1926-1951)

잠빙 바트뭉흐는 1926년 3월 10일 옵스주 캬르가스 솜에서 태어났다.[1]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그는 형의 이름인 잠바를 성으로 사용했다. 고향인 옵스주에서 7학년을 졸업한 후, 몽골 국립 대학교의 2년 예비 과정에 입학했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몽골 국립 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공부했다.

16살 때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바트뭉흐와 다리마는 각각 몽골 국립 대학교 경제학과와 농업 기술 전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들은 1년 후 결혼했다. 다리마는 1988년 은퇴할 때까지 33년 동안 몽골 국립 대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2. 2. 정치 경력 (1951-1984)

바트뭉흐는 1948년 집권당인 몽골 인민 혁명당(MPRP)의 회원이 되었다. 1951년, 바트뭉흐는 사범대학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20년 이상 교수로 재직하며 대학의 학장으로 일한 후, 1973년 과학부 장관(당 중앙국의 과학 교육부 감독관)으로 승진했다. 1974년 봄, 그는 몽골 인민 혁명당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했다. 1974년 6월, 인민 대후랄 회기 동안, 그는 다시 각료회의 의장, 즉 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승진했다.[4]

1974년 윰자깅 체덴발이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인민 회의 간부 회의 의장에 취임하자 바트뭉흐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4]

2. 3. 몽골의 지도자 (1984-1990)

1984년, 바트뭉흐는 D. 몰롬잠츠와 함께 윰자긴 체뎅발이 권좌에서 물러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해, 그는 당의 오랜 지도자였던 체뎅발이 당 대회에서 축출되면서 국가 원수가 되었다.[2] 바트뭉흐는 소련과의 동맹을 강화했지만, 다른 많은 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이 권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압력이 많았다. 그는 또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촉구하며, 1986년 11월 평양 국빈 방문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중국-몽골 관계의 발전을 쇄신하는 것은 우리 두 나라 국민의 공동 이익을 위해 중요하다"고 말했다.[2]

바트뭉흐의 통치 기간 동안 주요 에너지 (울란바토르 및 에르데네트 발전소 건설, 중앙 고전력 그리드와 소련의 시베리아 그리드 연결) 및 광업 (에르데네트 및 바가누르 석탄 광산, 보르-온도르 석고 광산 운영 시작) 인프라가 구축되었으며, 다양한 다른 경공업 생산 및 식품 가공 공장도 건설되었다.

1989년 말, 민주화 운동이 힘을 얻었다. 1990년 3월, 몽골 민주 연합(Ardchilsan Kholboo)이라는 최초의 민주 연합이 바트뭉흐가 이끄는 공산 정부의 사임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바트뭉흐는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몽골 인민 혁명당(MPRP) 정치국의 사임이라고 선언했으며, 무력 사용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엄격한 정책을 유지했다. 이후 "결코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다. 정치국 위원들과의 논의와 당 중앙위원회 제8차 회의 이후, 몽골 인민 혁명당은 1990년 3월 9일 공식적으로 권력에서 물러났다.

바트뭉흐의 미망인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1990년 3월이었습니다. 바트뭉흐는 집에 앉아 몽골 인민 혁명당 제8차 회의 연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화가 울렸고, 잠시 통화한 후 그는 갑자기 '우리 몽골인들은 서로 코피를 흘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말하며 전화를 던졌습니다. 그는 매우 침착한 사람이었기에,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몇몇 지도자들이 모여서 나에게 무언가 서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서 다녀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바로 옆에 넥타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넥타이를 찾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매우 당황하고 초조해했습니다. 그는 식사도 하지 않고 문 앞에서 차 한 잔만 마시고 나갔습니다. 저는 밖에서 시위대와 충돌이 있을까 봐 불안해하며 집에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정치국 및 권력자)은 그에게 밖에서 시위를 진압하고 해산하라는 칙령 초안에 서명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나중에 바트뭉흐가 '나는 절대 여기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몽골인들은 서로 코피를 흘릴 정도까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며 탁자를 치고 방을 나섰다고 회상했습니다."[3]

그의 미망인은 "그는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사임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우 침착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3]

2. 4. 은퇴 이후 (1990-1997)

1990년, 그의 가족 대부분은 정치 부패 혐의로 실직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빵을 만들어 팔았고, 델과 구탈을 판매했다.[1] 199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수흐바타르구 담바다르자에 살면서 채소와 과일을 심었다.[1]

퇴임 후 그는 새 행정부(특히 신임 대통령 푼살마깅 오치르바트)에 대해 사적으로 비판적이었다.[1] 그는 1997년에 사망했다.[1]

3. 대중 문화

바트뭉흐의 1990년 민주화 운동에서의 역할은 2016년 몽골 영화 "잊지 마세요"("Бүү март")에 각색되어 묘사되었다.[1] 1978년에 NHK에서 방송된 NHK 특집 "대초원의 축제 ~ 몽골을 가다"에서는 욤자깅 세덴발의 나담 개막 선언 장면에서 바트뭉흐와 마이달의 모습이 보인다.[2]

참조

[1] 웹사이트 Batmönkh, Jambyn http://mongol.undest[...] undesten.mn 2013-07-02
[2] 웹사이트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https://digitalarchi[...]
[3] 웹사이트 Batmönkh's widow A. Daariimaa:If my husband was working as a professor, he would have been alive today http://www.bolod.mn/[...] 2013-07-03
[4] 간행물 モンゴル党・国家代表団歓迎平壌市民大会で行なった 朝鮮問題研究所 198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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