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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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잠실섬은 과거 한강에 있던 섬으로, 조선 시대에는 누에치기를 하는 잠실이 있어 잠실섬으로 불렸다. 홍수로 인해 부리도, 부래도, 무동도로도 불렸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등장한다. 근대에는 경기도 고양군과 광주군에 속했으며, 1970년대 초 매립 공사를 통해 서울종합운동장과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면서 현재의 석촌호수를 제외하고는 육지가 되었다. 잠실섬 일대에는 새내마을, 잠실마을, 부렴마을이 있었으며, 양잠, 농업 등이 이루어지다 매립으로 인해 사라졌다.
잠실섬은 조선 시대에 누에치기를 하던 잠실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부리도는 홍수가 나면 물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유래된 것인데, '물에 떠내려온 섬'이라 하여 부래도(浮來島)로도 불렸다. 무동도는 섬 남쪽에 춤추는 어린아이와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생긴 이름이다.
잠실섬에는 새내마을, 잠실마을, 부렴마을이 있었다. 새내마을은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고, 잠실마을은 30여 가구, 부렴마을은 50여 가구가 넘는 마을이었다. 부렴마을에서는 뽕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상신제를 올리던 500년 넘은 뽕나무가 있었으며, 지금의 잠실7동 아시아공원과 정신여자중학교 근처에 있었다. 아시아공원에 건립한 부리도 기념비 앞에서 지금도 상신제를 올리고 있다.[4]
2. 역사
1914년 행정구역상 잠실섬은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와 신천리였고, 부리도는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 무동도 역시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였다.
1960년대 후반, 서울특별시는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을 추진하였다. 1969년 1월 21일 잠실섬 일대 매립 신청은 건설부에 의해 반려되었는데[1], 김학렬 당시 총리가 현대건설, 대림산업, 극동건설, 삼부토건, 동아건설 등 5개 사에 매립 공사 이권을 주고 정치 자금을 제공받기로 했기 때문이다.[1]
1970년 11월 3일, 경인개발주식회사에서 잠실지구 매립 인가 신청서를 제출했고, 이듬해 2월 1일 건설부에서 사업을 인가하였다.[1] 1971년에는 잠실섬 남쪽의 송파강을 막고 섬의 북동쪽을 절개하여 신천강을 넓히는 공사가 시작되었고[2], 한강 준설 토사로 매립을 진행했다. 토사량이 부족해지자 몽촌토성을 헐어 메우는 방안이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무산되었다.[3] 결국 연탄재 등 폐기물로 매립을 완료하였다.[3]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잠실지구 종합 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되어 서울종합운동장과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4][5] 매립되지 않은 곳은 현재의 석촌호수가 되었다.
2. 1. 조선
잠실섬은 조선 시대에 누에치기를 하던 잠실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부리도는 홍수가 나면 물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유래된 것인데, '물에 떠내려온 섬'이라 하여 부래도(浮來島)로도 불렸다. 무동도는 섬 남쪽에 춤추는 어린아이와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생긴 이름이다.
2. 2. 근대
1914년 행정구역상 잠실섬은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와 신천리였고, 부리도는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 무동도 역시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였다.
1960년대 후반, 서울특별시는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을 추진하였다. 1969년 1월 21일 잠실섬 일대 매립 신청은 건설부에 의해 반려되었는데[1], 김학렬 당시 총리가 현대건설, 대림산업, 극동건설, 삼부토건, 동아건설 등 5개 사에 매립 공사 이권을 주고 정치 자금을 제공받기로 했기 때문이다.[1]
1970년 11월 3일, 경인개발주식회사에서 잠실지구 매립 인가 신청서를 제출했고, 이듬해 2월 1일 건설부에서 사업을 인가하였다.[1] 1971년 2월 17일 잠실섬 남쪽의 송파강을 막고 섬의 북동쪽을 절개하여 신천강을 넓히는 공사가 시작되어[2], 4월 15일 물막이 작업이 완료되었다.[2] 1971년 6월 19일 실시계획이 인가되었고, 7월 13일에는 5개 사가 합작한 잠실개발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잠실지구 매립 권한을 이전받았다.[1]
한강 준설 토사로 매립을 진행하다 토사량이 부족해지자 몽촌토성을 헐어 메우는 방안이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무산되었다.[3] 결국 연탄재 등 폐기물로 매립을 완료하여 1977년 3월 9일과 1978년 6월 29일에 각각 준공하였다.[3]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잠실지구 종합 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되어 서울종합운동장과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4][5] 매립되지 않은 곳은 현재의 석촌호수가 되었다.
3. 마을
3. 1. 새내마을
새내마을은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이곳은 마을이 사라질 때까지 전기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체한 사람에게 효험이 있다는 우물이 유명하였다.[4] 새내마을 사람들은 잠실본동 새마을시장 주변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행정구역과 관계없이 그 일대를 ‘신천’ 또는 ‘새마을’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4] 2001년, 잠실본동 잠실공원에 새내마을 내력비가 건립되었다.[4]
3. 2. 잠실마을
잠실마을은 30여 가구가 넘는 마을이었다.[4]
3. 3. 부렴마을
부리도는 50여 가구가 넘는 마을이었다. 앞의 두 마을에서는 거의 기르지 않던 뽕나무 묘목을 재배하여 팔았으며, 상신제(桑神祭)를 올리던 500년 넘은 뽕나무도 있었다.[4] 지금의 잠실7동 아시아공원과 정신여자중학교 근처에 있었으며, 아시아공원에 건립한 부리도 기념비 앞에서 지금도 상신제를 올리고 있다.[4] 마을 명칭은 작은 섬을 나타내는 말인 '염[嶼]'이 '부리(浮里)' 또는 '부래(浮來)'와 합쳐져 붙은 것으로 보인다.
3. 4. 생활
조선 시대부터 잠실섬은 뽕나무 재배와 양잠으로 유명했으나, 홍수가 반복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잠실섬의 양잠 기능이 잠원동의 '신잠실'로 옮겨갔다. 일제 강점기에는 밀이나 메밀 등을 경작했고, 한국 전쟁 이후에는 무, 배추, 땅콩, 수박 등을 재배하여 서울 시내에 공급했다.
잠실섬은 지대가 낮아 여름철 홍수 피해가 잦았다. 주민들은 청평댐 방류가 시작되면 공동으로 쌓은 피수대로 모여 배를 타거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던 주한 미군 부대의 헬리콥터를 이용해 자양동이나 봉은사로 대피했다.[4]
1971년 잠실섬 매립을 위한 방조제 공사가 완료된 후, 1972년부터 1973년까지 토지 보상이 이루어졌다. 등기 유무에 따라 보상 면적에 차등을 두어, 원래 집이나 땅에 등기가 있으면 면적의 40% 가량을 잠실7동 땅으로 받았고, 등기가 없으면 최소한의 땅만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상 과정은 형평성 문제를 야기했으며, 원주민들의 주거 안정을 위한 더 적극적인 정책적 지원이 필요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4]
1976년부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외지인이 유입되고 원주민 비율은 감소했다.[4]
참조
[1]
harvard
[2]
뉴스
뭍으로 이어진 서울의 고도 잠실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네이버)
1971-04-16
[3]
harvard
[4]
뉴스
뽕밭이 ‘콘크리트숲’ 으로
http://legacy.www.ha[...]
한겨레
2005-02-13
[5]
뉴스
"1960년대 개발 이전 잠실을 아시나요?"
http://news.nate.com[...]
아시아경제(네이트)
200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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