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궁 (후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궁은 신나라에서 후한 시기까지 활약한 인물로, 자는 군옹이다. 녹림군에 참여하여 교위를 지냈으며, 후한 광무제를 섬기며 하북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광무제 즉위 후 기도위와 시중을 거쳐 보위장군, 광한태수를 역임했다. 성가 공손술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큰 전공을 세웠으며, 이후 찬후, 낭릉후에 봉해졌다. 명제 때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고, 58년에 사망하여 민후의 시호를 받았다.
장궁은 젊어서 현의 정장(亭長)과 유요(游徼)를 지냈고[5], 빈객을 거느리고 녹림군의 일파인 하강병(下江兵)에 참여해 교위(校尉)를 지냈다. 이후 유수(후의 광무제)를 섬겨, 광무제의 하북 정벌에서 여러 공을 세웠다.
여러 장수들이 장궁의 용맹함을 칭찬했으며, 광무제는 그가 근면하고 과묵하다는 것을 알아보고 매우 친하게 지냈다.[1] 장궁은 병력이 적었을 때 낙월(駱越)에 이르렀는데, 주변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밤중에 성문의 문지방을 자르게 하고 여러 번 수레를 통과시켜 마치 대군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낙월인들을 귀순시켰다.[1]
[1]
서적
後漢書
2. 생애
성명 장궁 시대 신 ~ 후한 생몰년 생년 미상 - 58년 (영평 원년) 자·별호 군옹(字) 본관·출신지 등 예주영천군 협현 직관 정장[신] → 교위 [왕상] 작위·호 등 성안후[후한] → 기사후[후한] 진영·소속 등 왕상 → 경시제 → 광무제 → 명제 가족·일족 아들: 장신
건무 11년(35년) 오한, 잠팽 등과 함께 공손술 토벌에 참여하여, 36년(건무 12년) 음력 9월 부와 면죽을 함락하고 공손회의 목을 베었다. 이후 번과 비를 함락하고, 오한과 함께 성도성을 함락하여 성나라를 멸망시켰다.
건무 19년(43년), 무당의 제자 선신(單臣)과 부진(傅鎭)의 난을 평정하고, 성문교위, 좌중랑장을 역임했다. 무계(武谿)의 도둑을 쳐 강릉까지 이르러 항복시켰다.
영평 원년(58년)에 죽었다. 시호는 민후이다.
2. 1. 초기 생애 및 녹림군 가담
젊어서 현의 정장(亭長)과 유요(游徼)를 지냈고[5], 빈객을 거느리고 녹림군의 일파인 하강병(下江兵)에 참여해 교위(校尉)를 지냈다. 이후 녹림군의 다른 일파인 용릉병(舂陵兵)의 대장 유인의 동생 유수(후의 광무제)를 섬겨, 광무제의 하북 정벌에서 여러 공을 세웠다.
2. 2. 후한 건국 초기 활동
젊어서 현의 정장(亭長)과 유요(游徼)[5]를 지냈고, 빈객을 거느리고 녹림군의 일파인 하강병에 참여해 교위를 지냈다. 이후 녹림군의 다른 일파인 용릉병의 대장 유인의 동생 유수를 섬겨, 광무제의 하북 정벌에서 여러 군공을 세웠다.
건무 원년(25년), 광무제가 황제에 오르면서 기도위·시중이 되었고, 건무 2년(26년)에는 성안후[6]에 봉해졌다.
건무 3년(27년)에는 돌기(突騎)를 거느리고 채준에게 속해 경시제의 장군 좌방(左防)·위안(韋顔)을 열양(涅陽)과 척(酈)[7]에서 무찔렀다. 건무 5년(29년)에는 강하군의 대향(代鄕)·종무(鍾武)·죽리(竹里)를 굴복시켰다. 보위장군(輔威將軍)이 되었다.
건무 7년(31년)에는 기사후로 이봉되었고, 양군과 제음군을 평정했다.
건무 11년(35년), 중로(中盧)의 낙월(駱越)인 중에 주둔했는데, 2년 전에 성가의 장수 전융(田戎)·임만(任滿)·정범(程汎)이 후한 군을 무찌르고 남군의 형문(荊門)까지 진격했기에 후한의 잠팽이 이때까지 여러 차례 형문을 공격했으나 연이어 격퇴당했다. 이에 낙월인들이 동요해 성나라에 붙으려 하자, 병력이 부족해 이들을 억누르지 못했는데 마침 속현에서 보급 수레들이 오자 이를 끊임없이 이르게 해 낙월인에게 한나라 군대가 많은 것처럼 속였다. 이 허장성세는 성공해 낙월인들과 화합할 수 있었다. 이후 오한, 유륭, 유흠 등과 함께 형문에서 대치하는 후한 군의 증원으로 합류했다.
같은 해 음력 윤3월, 후한 군이 형문에서 마침내 성군을 무찌르자, 따로 수작산(垂鵲山)에서 자귀까지 이르는 길을 내 강주까지 이르렀다. 이후 잠팽을 따라 부수(涪水)를 따라 평곡(平曲)을 무찔렀다. 성나라에서 연잠·여유·왕원·공손회를 보내 막자 음력 8월에 잠팽이 이들을 우회해 성나라 내부를 휩쓰는 동안 호군 양흡(楊翕)과 함께 항복한 군대 5만을 거느리고 평곡에서 수비했다. 거느린 군대는 많은데 수송은 어렵고, 현지 군현은 성나라와 후한 사이에서 관망할 뿐이라 현지조달도 원활하지 않았으며, 퇴각하자니 점령지를 모두 성나라에 반납하는 꼴이라 곤란했다. 그런데 마침 광무제가 잠팽에게 보낸 군대에 말 7백 필이 있었고, 장궁은 황제의 명령을 사칭해 이 말들을 가져가서 급히 진격해 성나라 군대를 위협했다. 어두운 새벽 사이에 군대를 산으로 올려보내 깃발을 잔뜩 세우고 북을 치고, 보병·기병·수군을 한꺼번에 나아가게 해 소리를 가득하게 했다. 성나라 대장 연잠은 한군의 진격 속도가 예상 밖이라 산에 올라 바라보고 크게 당황하니, 장궁은 이 틈을 타 공격해 성군을 크게 무찔러 침수(沈水)에 빠진 익사자와 참수자가 모두 만여 명이었다. 연잠은 성도로 도망쳤고, 남은 무리들의 투항을 받아 말과 보물 등을 얻었다.
2. 3. 공손술 토벌
건무 11년(35년) 봄, 오한, 잠팽 등과 함께 공손술 토벌에 나섰다. 이들은 형문에 집결하여 병력을 정비하고, 장궁은 잠팽을 따라 진격했다. 형문을 격파하고 추작산(垂鵲山)을 거쳐 강주에 이르렀다. 잠팽은 파군을 함락시키고, 항복한 병사 5만 명을 장궁에게 맡겨 평곡(平曲)으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별동대를 이끌었다. 장궁은 평곡에서 공손술의 장수 연잠을 격파했다.[3] 이후 잠팽이 공손술의 자객에게 암살당하자, 전군은 오한에게 인계되었다. 장궁은 평양현(平陽縣)에서 공손술의 장수 왕원의 항복을 받고, 면죽을 함락시켰으며, 부성(涪城)을 격파하고 공손술의 동생 공손회를 참수했다. 나아가 번(繁)과 비(郫)를 함락시키고, 마침내 오한과 함께 공손술을 멸망시켰다. 촉(蜀) 평정 후, 광무제는 장궁을 광한 태수로 삼았다.
2. 4. 후한 조정에서의 활동
25년(건무 원년), 광무제가 황제에 오르면서 장궁은 기도위·시중이 되었고, 26년(건무 2년)에는 성안후[6]에 봉해졌다.
27년(건무 3년)에는 돌기(突騎)를 거느리고 채준에게 속해 경시제의 장수 좌방(左防)·위안(韋顔)을 열양(涅陽)과 척(酈)[7]에서 무찔렀다. 29년(건무 5년)에는 강하군의 대향(代鄕)·종무(鍾武)·죽리(竹里)를 굴복시켰다. 이후 보위장군(輔威將軍)이 되었다.
31년(건무 7년)에는 기사후로 이봉되었고, 양군과 제음군을 평정했다.
35년(건무 11년), 장궁은 중로(中盧)의 낙월(駱越)인 중에 주둔했는데, 2년 전에 성가의 장수 전융·임만·정범(程汎)이 후한 군을 무찌르고 남군의 형문(荊門)까지 진격했기에 후한의 잠팽이 이때까지 여러 차례 형문을 공격했으나 연이어 격퇴당했다. 이에 낙월인들이 동요해 성나라에 붙으려 하자, 병력이 부족해 이들을 억누르지 못했는데 마침 속현에서 보급 수레들이 오자 이를 끊임없이 이르게 해 낙월인에게 한나라 군대가 많은 것처럼 속였다. 이 허장성세는 성공해 낙월인들과 화합할 수 있었다. 이후 오한, 유륭, 유흠 등과 함께 형문에서 대치하는 후한 군의 증원으로 합류했다.
같은 해 음력 윤3월, 후한 군이 형문에서 마침내 성군을 무찌르자, 장궁은 따로 수작산(垂鵲山)에서 자귀까지 이르는 길을 내 강주까지 이르렀다. 이후 잠팽을 따라 부수(涪水)를 따라 평곡(平曲)을 무찔렀다. 성나라에서 연잠·여유·왕원·공손회를 보내 막자 음력 8월에 잠팽이 이들을 우회해 성나라 내부를 휩쓰는 동안 장궁은 호군 양흡(楊翕)과 함께 항복한 군대 5만을 거느리고 평곡에서 수비했다. 거느린 군대는 많은데 수송은 어렵고, 현지 군현은 성나라와 후한 사이에서 관망할 뿐이라 현지조달도 원활하지 않았으며, 퇴각하자니 점령지를 모두 성나라에 반납하는 꼴이라 곤란했다. 그런데 마침 광무제가 잠팽에게 보낸 군대에 말 7백 필이 있었고, 장궁은 황제의 명령을 사칭해 이 말들을 가져가서 급히 진격해 성나라 군대를 위협했다. 어두운 새벽 사이에 군대를 산으로 올려보내 깃발을 잔뜩 세우고 북을 치고, 보병·기병·수군을 한꺼번에 나아가게 해 소리를 가득하게 했다. 성나라 대장 연잠은 한군의 진격 속도가 예상 밖이라 산에 올라 바라보고 크게 당황하니, 장궁은 이 틈을 타 공격해 성군을 크게 무찔러 침수(沈水)에 빠진 익사자와 참수자가 모두 만여 명이었다. 연잠은 성도로 도망쳤고, 남은 무리들의 투항을 받아 말과 보물 등을 얻었다.
이후에도 계속 북쪽으로 진격해 평양현(平陽縣)에서 왕원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왕원이 항복하고 1년여 간은 이렇다할 전과가 기록되지 않다가[8] 36년(건무 12년) 음력 9월에는 부와 면죽[9]을 잇따라 함락하고 공손회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번과 비[10]를 함락했고, 큰 성들을 도륙해 군대의 기세가 드높았다. 오한 역시 가는 곳마다 이겨 성도성에 이르렀는데, 장궁은 오한의 군에 방문해 큰 연회를 열어 성도성의 성군을 모멸한 채로 돌아갔으나 성군은 대항하지 못했다. 이후 성나라 황제 공손술과 장군 연잠의 항전을 받아 세 번 연이어 지기도 했으나, 이때 오한을 공격한 공손술이 치명적인 중상을 입어 성군이 혼란에 빠졌기에[11] 오한과 장궁은 함께 성도성을 함락하고 성나라를 멸할 수 있었다. 성나라 멸망 후 장궁은 광한태수가 되었다.
37년(건무 13년), 증봉되어 찬후가 되었고, 39년(건무 15년), 직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봉조청이 되었으며, 낭릉후[12]에 봉해졌다. 42년(건무 18년)에는 태중대부가 되었다.
43년(건무 19년), 무당의 제자 선신(單臣)과 부진(傅鎭)이 요언을 퍼뜨려 스스로 장군을 일컫고 원무[13]를 장악하자, 장궁은 북군(北軍)과 여양영(黎陽營)의 수천 군사를 거느리고 포위했으나 적이 군량이 많아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상자만 났다. 이에 당시 동해왕으로 있던 명제의 계책에 따른 광무제의 칙서를 받아 포위망 한 쪽을 풀어주었고, 과연 적들이 흩어지니 그제야 선신과 부진 등을 베었다. 이후 성문교위, 좌중랑장을 역임했다. 무계(武谿)의 도둑을 쳐 강릉까지 이르러 항복시켰다.
2. 5. 사망
張宮|장궁중국어은 영평 원년(58년)에 죽었다. 시호는 민후이다.[5]
3. 평가 및 일화
장궁은 호전적인 무장이었다.[1] 흉노가 기근과 역병에 시달렸을 때, 광무제에게 방책을 묻자 "군사를 이끌고 공을 세우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1] 광무제는 "상승장군은 계략을 함께 할 수 없으니, 나도 그것을 생각하겠다."라고 말했다.[1] 또한 장궁은 마무와 함께 흉노를 공격하자는 건의를 상소했다.[1] 그러나 광무제는 이는 나라를 기울일 수도 있는 행위이며, 차라리 백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 채택하지 않았다.[1]
참조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서적
후한서
[12]
문서
[13]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