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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레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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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바티스트 레지스는 1663년 또는 1664년에 태어나 1738년에 사망한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서 40년간 과학과 천주교를 전파하며 중국 지도를 제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강희제의 명을 받아 요하킴 부베, 도미니크 파레닌 등과 함께 중국 전역의 지도를 제작했으며, 1717년 중국 전도를 완성하여 당시 기술 수준에서 뛰어난 정확성을 보였다. 레지스는 또한 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 두 번째 프랑스인이었으며, 중국과 한국의 관계, 한국의 지리, 문화 등을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했다. 그의 기록은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중국인과 조선인의 증언에 의존하여 개괄적인 묘사에 그쳤지만, 고조선 관련 내용을 포함하여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 전기 및 중국 지도 제작 활동

장바티스트 레지스는 1663년 6월 11일 또는 1664년 1월 29일 프로방스이스트르에서 태어나 1738년 11월 24일 베이징에서 사망한 예수회 선교사이다.[1] 그는 1683년 9월 14일 또는 1679년 9월 13일에 예수회에 입회했으며,[1] 1698년부터 중국으로 건너가 약 40년간 과학 연구와 천주교 전파에 헌신했다.[1]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강희제의 후원 아래 중국의 지리 정보를 유럽에 알리고 청나라의 전국 지도를 제작하던 때였다. 레지스는 강희제의 명으로 시작된 전국 지도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만리장성 측량(1708년)을 비롯해 이후 10년간(1709-1717) 만주, 몽골, 중국 본토 등 광범위한 지역의 지도 제작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지도 제작 외에도 레지스는 중국의 고전 연구에 관심을 기울여 《역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번역 일부는 사후에 율리우스 몰(Julius Mohl)에 의해 편집되어 1834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출판되었다.[1] 동료 선교사였던 앙투안 고빌은 레지스를 겸손하고 온화하며 동료 선교사들과 궁정 사람들로부터 보편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로 평가했다.[1]

2. 1. 초기 활동과 배경

장바티스트 레지스는 1663년 6월 11일 또는 1664년 1월 29일에 프로방스이스트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1683년 9월 14일 또는 1679년 9월 13일에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1698년부터 중국으로 건너가 40년 동안 과학 연구와 천주교 전파에 헌신했다. 특히 그는 청나라의 전국적인 일반 지도 제작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레지스가 활동하기 이전에도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16세기 말부터 유럽에 중국의 정확한 지리 정보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유럽의 최고 지도 제작자들조차 중국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이러한 노력은 17세기 중반, 마르틴 마르티니(Martin Martini) 신부가 출판한 Novus Atlas Sinensis|노부스 아틀라스 시네시스la (1655년 암스테르담 출판)라는 지도책으로 집대성되었다. 마르티니는 중국의 지리서에서 얻은 방대한 정보(주요 지점 간 거리, 비록 부정확하지만 조잡한 지도 포함)와 자신 및 동료 선교사들이 주요 도시에서 직접 수행한 천문 관측 결과를 결합하여 당시로서는 놀랍도록 정확한 위치 정보를 담은 지도를 만들었다.

선교사들은 강희제(재위 1662-1722)의 호의 덕분에 지리 연구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페르디난드 베르비에스트 신부는 황제와 함께 두 차례(1682-1683)에 걸쳐 타타르(현대 몽골 제국 지역 포함)를 답사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초기 정보를 수집했다.

1687년, 루이 14세가 파견한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면서 선교 활동, 특히 지리학 분야의 학문적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들은 파리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에게 훈련받고 발전된 측량 도구를 갖추고 있어, 기존에 측정된 지점들의 위치를 더욱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ion) 신부는 1688년부터 1698년까지 8차례에 걸쳐 타타르몽골 지역을 여행하며 더 많은 지리 정보를 수집했다.

1701년에는 수도 베이징과 그 주변 지역(황제의 옛 여름 거처와 약 1700개의 진(鎭) 또는 촌(村) 포함)의 지형도를 제작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중요한 임무는 벨기에 출신의 안토니 토마스(Antoine Thomas) 신부와 프랑스 출신인 요아킴 부베(Joachim Bouvet), 장바티스트 레지스, 그리고 도미니크 파레닌(Dominique Parennin)에게 맡겨졌다. 이 작업은 직례 지역 여러 강의 주기적인 범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강희제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2. 2. 강희제 시기 지도 제작

강희제는 선교사들이 지닌 과학 지식, 특히 지리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 평가했다.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마르틴 마르티니 신부의 Novus Atlas Sinensisla(1655)와 같이 중국 지도를 제작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강희제의 지원 아래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지도 제작이 가능해졌다. 특히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신부는 황제와 함께 타타르 지역을 여행하며 지리 정보를 수집했다(1682-3).

1687년 루이 14세가 파견한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면서 지도 제작 기술은 더욱 발전했다. 이들은 파리 천문대의 방법론으로 훈련받고 정교한 도구를 갖추고 있어 기존의 위치 측정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1701년, 황제의 명으로 베이징과 그 주변 지역의 지형도 제작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벨기에 출신의 안토니 토마스(Antoine Thomas) 신부와 프랑스 출신의 조아킴 부베, 장바티스트 레지스, 도미니크 파레닌(Dominique Parennin) 등이 주도했다. 강희제는 특히 직례 지역 강의 주기적인 범람 문제 해결을 위한 정확한 측량 결과에 만족했다.

파레닌 신부의 제안으로 만리장성 지도 제작이 추진되었다. 1708년 6월 8일, 부베, 레지스, 피에르 자르투 신부는 직례만에서 시작하여 만리장성 측량에 착수했다. 이들은 규칙적으로 분할된 줄(코드)을 사용하여 거리를 측정하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추적했으며, 태양의 자오선 관측을 통해 위도를 계산했다. 10월 16일까지 측량한 결과, 레지스는 만리장성의 길이가 약 21°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부베는 건강 문제로 도중에 베이징으로 돌아갔으나, 레지스와 자르투는 가욕관의 서쪽 끝까지 측량을 계속하고, 내륙의 성벽까지 측정하여 쿠쿠노르 호수 근처 서녕까지 도달했다. 1709년 1월 10일 베이징으로 돌아온 이들의 지도는 강희제를 크게 만족시켰고, 황제는 만리장성 외부 지역과 중국 본토 전체로 지도 제작 범위를 확장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10년에 걸쳐 중국 전역의 지도가 제작되었다. 레지스를 비롯한 여러 예수회 선교사들이 참여했으며,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중국 전역 지도 제작 참여 인물 및 담당 지역
연도참여 인물담당 지역/활동
1709-1710레지스, 자르투, 에른베르트 프리델리요동, 만주, 직례 (지리성)
1711레지스, Francis Cardoso산둥성
1711자르투, 프리델리, Guillaume Bonjour몽골 (바이칼 호수 ~ 준가르 칸국)
1712-14Vincent de Tartre, Cardoso산서성, 섬서성, 장시성, 광둥성, 광서성
1712-15안마리 드 마이야, Roman Hinderer, 레지스후난성, 강남(Jiangnan), 저장성, 푸젠성, 포모사섬(대만섬)
1714-15프리델리, 봉주르 (1714년 사망), 레지스 (1715년 합류)쓰촨성, 윈난성, 구이저우성, 호광(Huguang)



지도 제작의 기본적인 방법은 장소 간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여 경도와 위도를 얻는 것이었다. 태양의 자오선과 북극성 관측을 통해 위도를 직접 측정하고 보정했다. 월식이나 목성의 위성 관측을 통해 경도를 더 정확하게 측정하려 했으나, 여러 제약으로 인해 제한적으로만 활용되었다.

지도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선교사들을 동행한 중국 관리들은 이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의심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며, 원하는 지역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정밀한 천문 관측을 수행하는 데 제약이 따랐다. 또한, 선교 활동과 병행하며 지도를 제작해야 했고, 완성된 지도는 즉시 황제에게 제출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1717년 1월 1일, 마침내 중국 전역의 새로운 지도가 완성되었다.

앙투안 고빌(Antoine Gaubil) 신부는 당시 프랑스 학계의 비판에 대해 편지(1736년 11월 5일)에서 "우리 교부들은 선교 사업을 하고, 지방의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새로운 선교를 설립하기 위해 지도 제작자의 소명을 활용했다. 그들을 동반한 중국인과 타타르 만다린들은 그들을 극도로 방해했다... 작업이 끝나는 대로 완성된 지도를 서둘러 황제에게 보내야 했다... 이 작업은 그러한 가치 있는 작업을 명령한 타타르 왕자(강희제)에게 영예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은 우리 교부들의 신용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라고 변호했다.

독일의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토펜은 "만들어진 시기를 생각하면 예수회 지도는 전체적으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Chinade, I, 686).

지도 제작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자르투, 레지스, 프리델리는 완성된 지도의 사본을 프랑스로 보냈다. 이 자료는 장바티스트 뒤 알드 신부가 유명한 지리학자 장바티스트 부르기뇽 당빌의 도움을 받아 편찬한 Description de la Chine프랑스어(1735)의 기초가 되었다. 레지스는 Nouvelle géographi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orientale프랑스어라는 제목의 해설서를 작성했으며, 이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MS. 17, 242). 뒤 알드는 이 해설서의 내용을 상당 부분 활용했다.

2. 3. 지도 제작의 의의와 평가

지도 제작에는 장소의 경도와 위도를 얻기 위한 거리의 정확한 측정이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태양의 자오선 관측과 극지방 관측으로 보완 및 통제되어 직접적인 위도 정보를 제공했다. 때때로 월식목성의 위성 관측을 통해 경도를 얻으려 했으나, 당시의 조건 하에서는 더 정밀한 경도 측정을 위한 완벽한 과정을 수행하기 어려웠다.[1]

지도 제작 방식에 대해 프랑스의 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소속 학자 페레(Féret)는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앙투안 고빌(Antoine Gaubil)은 1736년 11월 5일자 서한에서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이 처했던 어려움을 설명하며 반박했다. 그는 카시니, 마랄디(Maraldi), 샤젤(Chazelles) 등 당대 유럽 최고의 천문학자들이 완벽한 장비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작업했던 것과 달리, 중국에서의 지도 제작은 선교 활동의 일부였으며 여러 제약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지적했다. 선교사들은 선교 활동 지원, 새로운 선교지 개척 등을 위해 지도 제작자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동행한 중국과 타타르 관리들의 감시와 방해로 인해 원하는 장소에서 자유롭게 관측하거나 측정하기 어려웠다. 또한, 자오선 관측, 도로 측정, 나침반 바늘의 변화 측정 등이 제약을 받았고, 작업이 끝나면 즉시 황제에게 지도를 제출해야 하는 시간적 압박도 있었다. 고빌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룬 성과는 타타르 왕자(강희제)에게 영예가 되는 일이었으며, 선교사들의 명예를 높이는 작업이었다고 평가했다.[1]

후대의 지질학자이자 탐험가인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역시 "제작된 시기를 고려할 때, 예수회 지도는 전체적으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1]

지도 제작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자르투(Jartoux), 레지스, 프리델리(Fridelli)는 지도의 사본을 프랑스로 보냈고, 이 자료는 장바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 신부가 유명한 지리학자 장바티스트 부르기뇽 당빌(Jean Baptiste Bourguignon d'Anville)의 도움을 받아 저술한 《Description de la Chine》(1735)에 활용되었다. 레지스는 지도에 대한 간략한 해설서인 《Nouvelle géographi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orientale|fra》(중국과 동타타르의 새로운 지리)를 저술했으며, 이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필사본(MS. 17, 242)으로 보존되어 있다. 뒤 알드 신부는 이 저술을 상당 부분 참고했으나, 전부 출판하지는 않았다.[1]

3. 한국 관련 기록과 역사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였던 장바티스트 레지스는 13세기 기욤 드 뤼브룩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 프랑스인이다.[1] 그는 직접 한국 땅을 밟지는 않았으나, 중국인과 조선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국의 지리, 문화, 역사 등을 담은 Observations géographiques et Histoire de la Corée|한국의 지리 관찰과 역사프랑스어를 저술했다. 이 책은 당시 서구 사회에 한국을 소개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또한 그의 기록 중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 고대사를 상세히 다룬 부분이 후대에 발견되어 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레지 고조선 사료영어 (RHROJ)로 명명되었다.[2] 이 사료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기록된 드문 고대사 자료라는 점에서, 특히 한국 상고사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레지스의 기록은 직접적인 경험에 기반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지적되기도 하지만, 서양에 한국의 존재와 역사를 알리고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관점과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 1. 한국 관련 기록의 배경과 내용

프랑스인으로서는 13세기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ouck)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1] 약 500년 만에 프랑스인의 기록에 한국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레지 신부는 직접 한국 땅을 밟지는 않았으나, 중국인과 조선인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의 지리 관찰과 역사(Observations geographiques et Historie de la Coree)>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이후 1748년 아베 프리보(I'Abbe Prevost)의 <여행의 역사(Historie des voyages)>에 편집되어 수록되었다.

레지 신부의 책은 당시 예수회 신부들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처럼 백과사전식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국가 이름의 변천사와 기원을 설명하고, 이어서 한국의 내륙 지방, 산과 강 등 지형적 특징을 다루었다. 다음으로는 한국의 가옥 구조를 서술했는데, 이는 당시 주거 양식을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수도의 이름, 의복, 언어, 종교, 조선 조정과 사법 체제, 그리고 인삼과 같은 특산물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다.

프레드릭 불레스텍스의 저서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청년사, 2007)>에 따르면, 레지 신부는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직접 국경 근처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한국의 도시에서 4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타타르인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한국인들의 집은 단층이며, 시골에서는 흙으로 집을 짓고 도시에서는 보통 벽돌로 집을 짓는다."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54쪽

하지만 한국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한국 문화를 개괄적으로 묘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또한 한국 문화를 설명할 때 항상 중국과 비교하며, 한국을 중국의 주변 문화 정도로 인식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당시 예수회 신부들은 지도 제작에 필요한 지리나 역사 정보 수집에 주력했으며, 문화 자체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레지 신부 역시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보다는 지도 제작 정보나, 당시 여러 속국을 거느린 청 왕조의 우월성을 뒷받침할 역사 자료 수집에 더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어디까지나 <레지 고조선 사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이 사료는 유정희와 정은우에 의해 2018년 국내에 소개되고 분석되었다. 유정희는 이 사료를 <레지 고조선 사료: 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라고 명명했다.[2] 이 사료에서 레지스는 한국의 고대사, 특히 고조선고구려의 역사를 다루는데, 그 내용이 국내 민족사학의 관점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삼국유사와 같은 신화적 서술과 달리, 이 사료는 정치적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외국인 관찰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상고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다음은 해당 사료의 일부 내용이다.

>"The People of Corea were ''fubject'' to to the ''Chinefe'' from ''Yao'', who began to reign 2357 Years before the Chriftian Era, to the Emperor ''Tai king'' of the Dynafty of the Hia, who began to reign 2188 before the Chriftian Era; the bad Government of this Prince made them revolt; Under the Reign' of ''Kie'', which began 1818 before the Chriftian Era, they were brought to pay their Tribute; but his tyrannical Government engaged them in a freth Revolt, and put them upon invading a Part of ''China''.

>

>조선인(여기서는 주로 고조선인)은 기원전 2357년 치세를 시작한 중국 요(堯) 임금 때부터 기원전 2188년 치세를 시작한 하(夏)나라 3대 제왕(帝王)인 태강(太康)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1. 그러나 이 때 하나라 천자(天子) 태강의 압정은 고조선의 저항을 가져왔다. 하지만 기원전 1818년 치세를 시작한 하나라 마지막 천자(天子)인 걸(桀) 때 이르러서는 고조선은 중국에 다시 조공을 바쳤다. 그렇지만 걸(桀)의 폭정은 또다시 고조선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어 이때 고조선은 일부 중국 영토에 침입하기도 한다2.

>

>''Tching tang'', who began to reign about the Year 1755, before the Chrifitian Era, after he had deprived Kie of the Crown, and founded the Dynafty of the ''Chang'', made War upon them, and brought them back to their Duty.

>

>하나라 걸의 제위를 빼앗아 기원전 1766년경부터 중국을 통치한 상(商)나라 초대 제왕인 성탕(成湯)은 무력으로 고조선인들을 제압하고 고조선이 다시 조공3을 바치게 만든다.

>

>Under the Emperor ''Tchang ting'', who began to reign 1562 Years before the Chriftian Era, they attack'd ''China''; and afterwards they foretimes fubmitted, and fometimes revolted; this Alternative of Obedience and Revolt continued to the Year 1324 when ''Ven ting'' began to reign.

>

>기원전 1562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 중정(中丁) 때 고조선은 중국을 침공하였고, 이후 고조선은 때때로 굴복하기도 하고 또한 때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속과 반란은 기원전 1324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 무정(武丁) 치세 이전까지 계속되었다4.

>

>The Weakness of this Prince gave them oppurtunity of making themselves Mafteres of the Provinces of ''Kiang nan'' and ''Chan tong'', where they maintain'd their ground til the time of ''Tfin tcbi boang'', who fubdued them, and difpers'd them in the Empire; but fo little of the Affairs of their History is known before the Dynafty of the ''Tcheou'', that the ''Chinefe'' Hiftorians are in the right to begin the Eftablifhment of that Monarchy with ''Ki tfe'', the from whom to this prefent time it hath continued two thoufand eight hundred and fourteen Years without comprehending in this account the time in which it was reduc'd into a Province.

>

>무정 때의 세력 약화는 고조선이 강남과 산동 지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조선은 자신들을 정복하여 몰아낸 진시황(秦始皇)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을 점유했었다.5 그러나 주 왕조(周王朝) 이전의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들은 알려진 게 미미하기에 중국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기자(箕子) 시대 이들의 왕정(王政)이 제대로 성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6. 기자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한 주로 복속되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2814년간 이어져 내려왔다."

>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124쪽에서 가져옴.

3. 2. 레지스 기록의 특징과 한계

레지스 신부의 기록은 13세기 기욤 드 뤼브룩 이후 약 500년 만에 프랑스인이 한국에 대해 남긴 두 번째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1] 하지만 레지스 신부는 한국 땅을 직접 밟지 않았고, 대신 중국인과 조선인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의 지리 관찰과 역사(Observations géographiques et Histoire de la Corée프랑스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훗날 1748년 아베 프리보의 『여행의 역사(Histoire des voyages프랑스어)』에 편집되어 수록되었다.

레지스 신부의 책은 당시 예수회 신부들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처럼 백과사전식으로 구성되었다. 책의 내용은 국가 이름의 변천과 기원을 시작으로 한국의 지형(내륙, 산, 강), 가옥 구조, 수도 이름, 의복, 언어, 종교, 조선 조정과 사법 체계, 그리고 인삼과 같은 특산물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가옥에 대한 서술은 당시 주거 양식이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프레드릭 불레스텍스의 저서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2007년 한국어판 발간)에 따르면, 레지스 신부는 한국 국경 근처까지 가서 정보를 얻으려 했으나 직접적인 경험은 부족했다. 그는 "한국의 도시에서 4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타타르인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한국인들의 집은 단층이며, 시골에서는 흙으로 집을 짓고 도시에서는 보통 벽돌로 집을 짓는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간접적인 정보에 의존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레지스 신부의 기록은 한국 문화를 개괄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쳤다. 또한 그의 서술은 한국 문화를 항상 중국 문화와 비교하며 설명했고, 한국을 중국의 주변 문화로 이해하는 시각을 보였다. 이는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도 제작에 필요한 지리 정보나 역사 서술에 중점을 두었고, 문화 자체에 대한 깊은 관심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경향과 관련이 있다. 레지스 신부 역시 한국 문화 자체보다는 지도 제작 정보나, 당시 여러 속국을 거느렸던 청 왕조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역사 자료 수집에 더 집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그의 저술에서 고조선 관련 사료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이전까지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3. 3. 레지스 기록의 역사적 의의와 영향

장바티스트 레지스의 기록은 13세기 기욤 드 뤼브룩에 이어 프랑스인이 한국에 대해 남긴 두 번째 기록으로, 약 500년 만에 프랑스 기록에 한국이 다시 등장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1] 레지스 신부는 직접 한국 땅을 밟지는 않았으나, 중국인과 조선인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의 지리 관찰과 역사》(Observations geographiques et Historie de la Coree)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1748년 아베 프리보(I'Abbe Prevost)의 《여행의 역사》(Historie des voyages)에 편집되어 수록되었다.

레지스의 저서는 백과사전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 이름의 변천사 및 기원, 지형(산, 강 등), 가옥 구조, 수도 이름, 의복, 언어, 종교, 조선 조정과 사법 체계, 그리고 인삼과 같은 특산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당시의 주거 양식을 문화 이해의 중요한 소재로 인식하고 서술한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레지스는 한국을 직접 방문하지 않았기에 기록은 개괄적인 묘사에 머물렀고, 한국 문화를 중국과 비교하며 중국의 주변 문화로 인식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는 당시 예수회 신부들이 지도 제작에 필요한 지리 및 역사 정보 수집에 주력하고 문화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았던 경향과도 관련이 있다. 레지스 역시 한국 문화 자체에 대한 깊은 관심보다는 지도 제작 정보나 청나라 중심의 역사 자료 수집에 더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평가는 2018년 유정희와 정은우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고 분석된 《레지 고조선 사료》(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의 발견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2] 이 사료는 레지스가 한국의 역사, 특히 고조선고구려 등에 대해 독자적으로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이 사료의 내용이 국내 민족사학의 관점과 상당 부분 일치하며, 《삼국유사》와 같은 신화 중심의 서술과 달리 정치적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레지 고조선 사료》는 외국인 관찰자가 남긴 고조선 관련 기록이라는 점에서 한국 상고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사료에는 고조선이 고대 중국 왕조들(요, 하, 상, 주, 진)과 겪었던 복속, 조공, 저항, 그리고 강남과 산동 지역 점유 등 영토 분쟁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사료의 발굴은 레지스의 기록이 단순한 지리 정보나 개괄적 소개를 넘어 한국 고대사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을 담고 있음을 증명하며,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4. 레지스의 유산과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참조

[1] 웹인용 유럽포커스 - 프랑스, 유럽 뉴스, 문화, 여행 정보 네트워크 www.euro-focus.kr http://www.euro-focu[...] 2021-11-23
[2] 웹인용 고조선 대담②, 요하 유역 고고학(요하문명)과 프랑스 사료(레지 사료)의 만남 https://www.sedaily.[...] 서울경제 202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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