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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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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징후이는 랴오닝성 출신의 군벌이자 만주국의 정치인이다. 청년 시절 두부를 팔았으며, 장쭤린을 만나 그의 부하가 되어 봉계 군벌에서 활동했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만주국 헤이룽장성 성장, 만주국 국무원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1935년 만주국 총리대신에 올라 실권 없는 자리에서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겨져 푸순 전범 관리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1959년 사망했다. 그는 만주국 총리 재임 시절 일본에 아첨했다는 부정적 평가와, 만주국 붕괴 당시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등 굳건한 면모를 보였다는 긍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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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후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장징후이
원어 이름張景惠
로마자 표기Zhang Jinghui
출생일1871년 6월 21일
출생지타이안, 랴오닝성, 청나라
사망일1959년 1월 11일
사망지푸순시, 랴오닝성, 중화인민공화국
소속 정당협화회
종교알 수 없음
직업정치인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경력
소속청나라, 중화민국, 만주국
계급장군
참전청일 전쟁
러일 전쟁
주요 직책
직책만주국 국무총리
임기 시작1935년 5월 21일
임기 종료1945년 8월 20일
군주푸이
이전정효서
이후폐지
직책만주국 외교부장
임기 시작1937년 5월
임기 종료1937년 7월
이전장옌칭
이후오하시 주이치
직책만주국 국방부장
임기 시작1932년 4월 7일
임기 종료1935년 5월 20일
이전마잔산
이후위즈산
직책중화민국(의) 국방부장
임기 시작1926년 5월
임기 종료1927년 6월
이전자더야오
이후허펑린
이미지
장징후이
장징후이

2. 초기 생애

장징후이는 랴오닝성 타이안 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에는 두부를 만들어 팔고 친구를 사귀는 데 능했으며, 도박을 즐겼다. 청일 전쟁 이후 청나라의 만주 통치력이 약화되자, 각지에서 무장 세력이 발호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마을 상무회장(商務會長)을 맡아 자위단을 조직, 상인과 부자들을 보호했다. 당시 장쭤린이 토비의 습격을 받고 펑더린에게 의탁했을 때, 장징후이는 장쭤린과 의기투합하여 그를 자위단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하가 되었다. 이때부터 장징후이는 장쭤린을 따랐다.[1]

이후 장징후이는 장쭤린의 홍호자 기병대에 합류, 러일 전쟁 기간에는 일본군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청나라 말기, 장쭤린은 동북 삼성 총독에 임명되었고, 신해혁명 이후에는 중화민국 군대의 일부로 인정받았다. 장징후이는 한때 장쭤린을 떠나 우페이푸의 즈리 군벌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곧 다시 장쭤린에게 돌아갔다.

2. 1. 출생과 성장

랴오닝성 타이안 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두부를 만들어 팔았으며, 친구 사귀기에 능했고, 도박을 좋아하였다. 청일 전쟁 이후, 청나라는 만주 지역의 통치력을 상실했고, 각지에서 기회를 틈타 무장 세력이 발호하였다.

장징후이는 마을의 상무회장(商務會長)을 맡아 자신의 사병 격인 자위단을 조직하여 마을의 상인들과 부자들을 보호하였다. 당시 장쭤린이 토비인 진슈찬의 습격을 받자, 바자오타이(八角台)로 와서 펑더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장쭤린과 장징후이는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하였다. 장징후이는 장쭤린을 자위단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청했고, 스스로는 그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그는 장쭤린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1]

2. 2. 홍호자 활동과 장쭤린과의 만남

장징후이는 랴오닝성 타이안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청일 전쟁의 격전지였으며, 그는 어린 나이에 만주 군벌 장쭤린의 홍호자 기병대에 합류했다. 이들은 1904-05년의 러일 전쟁 동안 일본군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다.[1]

청나라 말기에 장쭤린은 동북 삼성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근거지는 선양에 있었다. 신해혁명으로 그는 자신의 군대를 새로운 중화민국 군대의 일부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베이양 군벌의 제27 보병 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16년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베이양 군벌은 여러 적대적인 파벌로 분열되었다.

장징후이는 장쭤린을 버리고 우페이푸의 즈리 군벌에 합류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장쭤린에게 합류하였다.

3. 군벌 시대의 활동

장징후이는 장쭤린을 따라 군벌 시대에 활동했다. 장쭤린은 홍호자 기병대 출신으로,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거치며 세력을 키웠다. 장징후이는 장쭤린의 부하로서 봉계 군벌 형성에 기여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장징후이는 장쭤린 휘하에서 군 경력을 이어갔다. 그는 제53여단장, 봉군 제1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직계 군벌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제2차 직봉전쟁에서 패배하고, 차오쿤의 베이징 정부에 합류하면서 장쭤린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후 장징후이는 장쭤린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 봉군에 합류했다. 1926년 장쭤린이 베이징을 장악하면서 육군총장, 실업총장 등 요직을 맡았다. 1928년 황구툰 사건으로 장쭤린이 사망할 때, 장징후이도 함께 부상을 입었다.[1]

3. 1. 청나라 군대와 봉천군벌

1902년 장쭤린이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기로 결정하면서 장징후이도 이를 따랐다. 처음에는 초관(哨官, 하급 장교 계급)이 되었고, 1903년에는 방대(帮带)로 승진하여 청나라의 정식 군인이 되었다.

1906년 장쭤린은 후로순방영총령(後路巡防營統令)에 임명되었고, 장징후이도 관대(冠帶)로 승진하였다. 1910년 청나라 중앙 관군 군사에서 쫓겨난 장쭤린은 함께 쫓겨난 장징후이, 탕위린, 장쭤샹 등에게 현역 군관으로서 펑톈 강무당(봉천군사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장징후이에게는 수시로 펑톈의 군사, 정치 동향을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장쭤린은 그리하여 봉계 군벌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장쭤린의 군대를 봉군(奉軍)이라고도 한다.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장쭤린은 제27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장징후이는 그 휘하의 연대장이 되었다. 1917년 펑위린이 장쭤린과 사이가 벌어지자, 장징후이는 장쭤린 편에 서서 제53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1918년 2월 장징후이는 53여단을 이끌고 직계 군벌을 압박하였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7개 혼성여단을 조직했다. 장쭤린은 장징후이를 임시 편성의 봉군(奉軍) 제1사단장에 임명하였고, 봉군의 지역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같은 해 8월 장징후이는 양위팅과 쉬수정과 연합하여 봉군의 명의로 4개 여단을 더 모집하였고, 세력을 강화하고 장쭤린에게 비밀리에 알렸다. 장징후이는 봉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장쭤린의 대리역을 맡아 베이징에 주재하였다. 1920년 9월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쑨원의 중화민국 광둥 정부와 다름)는 장징후이를 차하얼 도통(都統)겸 중화민국 육군 제16사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제2차 직봉전쟁 중, 장징후이는 다시 봉군 서로총사령관의 중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결단력이 없고, 행동이 느려서 서로군은 참패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직계 군벌인 차오쿤이 부정선거로 대총통이 되어 전국국도국(全國國道局)을 신설하자, 장징후이를 이곳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장쭤린은 이런 장징후이의 배신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1925년 겨울, 장징후이의 모친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감히 장쭤린이 지배하는 고향에 들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장쭤린의 부하들에게 부탁하여 장쭤린에게 용서를 빌었고, 장쭤린은 그를 용서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장징후이는 이때 펑톈(선양)에 먼저 가서, 장쭤린을 먼저 찾아가서 통곡하면서 고두사죄를 했다고 전해진다. 장쭤린은 옛 동지였던 그를 용서하고 다시 봉군 독군서참의(督軍署參議)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쭤린을 대리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바쁘게 일했다.

1926년 이후, 장쭤린이 베이징을 장악하자, 장징후이도 육군총장과 실업총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펑톈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의 음모로 철도가 폭파되어 암살되었고, 장징후이도 크게 다쳤다.[1]

1928년 말, 장쭤린의 뒤를 이어 봉군의 우두머리가 된 장쉐량은 그를 동성특별장관(東省特別長官)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장쉐량은 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항복한 후에 그는 난징에 가서 군사참의원 원장을 맡았다.

3. 2. 중화민국 초기와 군벌 간의 갈등

1902년 장쭤린이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기로 결정하면서 장징후이도 함께했다. 처음 하급 장교 계급인 초관(哨官)이 되었고, 1903년에는 방대(帮带)로 승진하여 정식 군인이 되었다.[1]

1906년 장쭤린이 후로순방영총령(後路巡防營統令)에 임명되면서 장징후이도 관대(冠帶)로 승진했다. 1910년 청나라 중앙 군에서 쫓겨난 장쭤린은 장징후이, 탕위린, 장쭤샹 등에게 펑톈강무당(奉天講武堂, 봉천군사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또한 장징후이에게 펑톈의 군사, 정치 동향을 보고하도록 지시하여 봉계 군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의 군대는 봉군(奉軍)이라고도 불렸다.[1]

신해혁명 발발 후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장쭤린은 제27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장징후이는 그 휘하 연대장이 되었다. 1917년 펑위린이 장쭤린과 사이가 틀어지자 장징후이는 장쭤린 편에 서서 제53여단장으로 승진했다. 1918년 2월, 장징후이는 제53여단을 이끌고 직계 군벌을 압박했으며, 일본에서 무기를 구매하여 7개 혼성여단을 조직했다. 장쭤린은 장징후이를 임시 편성 봉군 제1사단장 및 봉군 지역 사령관에 임명했다. 같은 해 8월, 장징후이는 양위팅, 쉬수정과 연합하여 봉군 명의로 4개 여단을 추가 모집하여 세력을 강화하고 장쭤린에게 비밀리에 알렸다. 이후 장징후이는 봉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장쭤린 대리역으로 베이징에 주재했다. 1920년 9월,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는 장징후이를 차하얼 도통(都統) 겸 중화민국 육군 제16사단장으로 임명했다.[1]

제2차 직봉전쟁에서 장징후이는 봉군 서로총사령관을 맡았으나, 결단력 부족과 느린 행동으로 서로군이 참패했다. 베이징에 머물던 중 직계 군벌 차오쿤이 부정선거로 대총통이 되어 전국국도국(全國國道局)을 신설하자 장징후이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장쭤린은 이러한 장징후이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겼다. 1925년 겨울, 장징후이는 모친 위독 소식에도 장쭤린의 지배 지역인 고향에 갈 수 없었다. 장쭤린 부하들을 통해 용서를 빌었고, 장쭤린은 장례를 허락했다.[1]

장징후이는 펑톈(선양)에 가서 장쭤린에게 사죄했고, 장쭤린은 그를 용서하고 봉군 독군서참의(督軍署參議)에 임명했다. 이후 장징후이는 장쭤린을 대리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활동했다.[1]

1926년 장쭤린이 베이징을 장악하자 장징후이는 육군총장과 실업총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펑톈으로 돌아가던 중 일본의 음모로 철도가 폭파되어 암살당했을 때 장징후이도 크게 다쳤다.[1]

1928년 말,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장징후이를 동성특별장관(東省特別長官)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쉐량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항복한 후 장징후이는 난징에서 군사참의원 원장을 맡았다.[1]

3. 3. 배신과 용서

1920년 장징후이는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쑨원의 중화민국 광둥 정부와 다름)로부터 차하얼 도통(都統) 겸 중화민국 육군 제16사단장에 임명되었다.[1]

제2차 직봉전쟁에서 장징후이는 봉군 서로총사령관을 맡았으나, 결단력 부족과 느린 행동으로 인해 서로군은 참패했다. 이후 베이징에 머물던 중, 직계 군벌 차오쿤이 부정선거로 대총통이 되면서 신설한 전국국도국(全國國道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장쭤린은 이러한 장징후이의 배신에 분노했다.[1] 1925년 겨울, 장징후이는 모친상을 당했으나 장쭤린의 영지인 고향에 갈 수 없었다. 장쭤린의 부하들을 통해 용서를 구했고, 장쭤린은 이를 허락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하였다.[1]

이후 장징후이는 펑톈(선양)으로 가서 장쭤린에게 사죄했다. 장쭤린은 옛 동지였던 그를 용서하고 봉군 독군서참의(督軍署參議)에 임명,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장쭤린을 대리했다.[1]

3. 4. 장쭤린 암살 사건

1928년 국민당 장제스의 북벌로 장쭤린이 실각하자, 장징후이도 동시에 실각했다. 만회를 꾀하기 위해 펑톈으로 돌아가려던 장쭤린이 탄 열차가 폭파되었고(장쭤린 폭살 사건), 수행하던 장징후이도 중상을 입었다.[1]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국내 다른 세력과 연합해서라도 여러 외국에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갖는다"는 기본 방침을 가졌기 때문에, 1929년 1월에 장제스의 난징 국민 정부에 귀순했다. 장징후이도 이에 따라 난징 국민 정부에서 군사 참의원 원장을 맡았다.

4. 만주국에서의 활동

만주사변 이후 만주 전역이 일본 관동군에 점령되자, 장징후이는 하얼빈으로 가서 "특별구 비상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일본의 만주 분리 독립에 동조하였다. 동북군의 마진산이 패주한 이후에는 만주를 자치령으로 선언하고 일본과 타협하여 만주국헤이룽장성 성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본거지인 하얼빈을 떠나기를 거부하여 관동군과 갈등을 빚었다.

1932년 2월 마진산이 일본과 강화를 맺으면서 헤이룽장 성장 자리를 잃었으나, 마진산이 4월에 일본에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헤이룽장 성장이 되었고, 만주국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국정부 총장이 되었다. 1935년 5월 21일에는 관동군의 입김으로 정샤오쉬의 뒤를 이어 만주국 총리대신이 되었으나, 푸이는 이에 반대했다.

만주국 총리로서 장징후이는 수동적이고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 관동군이 임명한 일본인 고문들이 행정을 실제로 책임졌고, 그는 불경을 베끼는 것으로 소일하여 "두부총리대신"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만, 일본인에게 땅을 강제로 불하하려는 의도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는 1932년 3월 9일부터 1945년 8월 18일까지 만주국 총리대신으로 재임했으며, 1945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강덕제 푸이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

4. 1.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1931년 만주 전역이 일본 관동군에 점령되자, 장징후이는 하얼빈으로 돌아와 1931년 9월 27일 "특별구 비상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는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 동조한 것이다.[1] 장징후이는 하얼빈에서의 자신의 기반과 봉천파 시대부터의 관동군과의 연계를 활용하여 헤이룽장성 성장에 취임했다.[7]

일본군에 끝까지 저항하던 동북군의 잔존세력인 마진산이 치치하얼에서 패주하자, 장징후이는 만주가 자치령이라고 선언했다. 장징후이는 일본과 타협하여 만주국헤이룽장성 성장에 임명되었다.[1]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거지인 하얼빈을 떠나 치치하얼에서 거주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것때문에 관동군 인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2]

1932년 2월 마진산이 일본과 강화를 맺고, 그 조건으로 헤이룽장 성장으로 취임하여 장징후이는 잠시 그 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마진산이 1932년 4월 일본에 반란을 일으키자, 장징후이는 다시 헤이룽장 성장이 되었고, 만주국의 국정부 총장(국방장관)이 되었다. 1932년 2월에는 동북 행정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일본 군정에 협력했다. 1932년 3월 9일에 만주국이 정식으로 성립되자, 다음 날인 10일 참의부 의장에 임명되었으며[7], 14일에는 동성 특별구 장관도 겸임했다.[8] 또한 같은 해 8월 3일, 만주국 국무원 군정부 총장을 겸임했다.[9]

4. 2. 만주국 총리 재임

만주사변 이후 1935년 5월 21일, 장징후이는 관동군의 압력으로 정샤오쉬의 뒤를 이어 만주국 총리대신이 되었다. 푸이는 이에 반대했지만, 관동군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3]

만주국 총리가 된 장징후이는 수동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실제 행정은 관동군이 임명한 일본인 고문들이 담당했고, 장징후이는 주로 불경을 베끼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두부총리대신"이라는 경멸적인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4]

1932년 3월 9일부터 1945년 8월 18일까지 만주국 총리대신으로 재임하면서, 1945년 8월 16일부터 8월 18일까지는 만주국 군주 강덕제 푸이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

4. 2. 1. 대동아 회의 참석

1943년 11월, 장징후이는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 회의에 만주국 대표로 참석했다.[5] 당시 그는 만주국의 국무총리 대신이었으나, 관동군이 실질적으로 만주국을 지배했기 때문에 정치적 실권은 거의 없었다.[10]

5. 몰락과 최후

장은 일본 제국이 항복한 이후 만주국이 붕괴할 때까지 10여 년간 총리대신으로 재임하였다. 도조 히데키가 주도한 대동아회의에 만주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압송되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중국으로 인도되어 푸순 전범 관리소에 수용되었으며, 그곳에서 1959년에 사망했다.

5. 1. 만주국 붕괴와 체포

일본의 항복과 만주국 붕괴 이후, 장징후이는 10여 년간 총리대신 직을 유지했다. 도조 히데키가 주도한 대동아회의만주국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5] 일본 항복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압송되었다.[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중국으로 인도되어 푸순 전범 관리소에 수용되었으며, 1957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5. 2. 전범 수용과 죽음

일본 항복 이후, 장징후이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1]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중국으로 인도되어 푸순 전범 관리소에 수용되었다.[1]

1950년 중국으로 인도된 장징후이는 푸순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었다.[1] 80세 무렵, 그는 거의 모든 치아가 빠져 관리인이 치과 의사를 불렀고, 식사는 하루 5번의 유동식으로 바뀌었다. 그는 "나는 정부에 매우 큰 죄를 지었는데, 이렇게 정성껏 돌봐주다니 생각지도 못했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표현했다고 한다.

1959년 1월 11일 13시, 장징후이는 옥중에서 동맥경화로 인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1] 푸이에 따르면, 장징후이는 "정신이 흐릿해져 평소에는 일도 하지 않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6. 가족 관계

장징후이의 제6남 장멍스(张梦实)는 베이징국제관계학원의 일본학부 주임을 역임했고, 2004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제7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되었다.[1]

장징후이의 제7부인 서지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장징후이의 여섯째 아들) 장사기(개명 후 장멍실)는 와세다 대학 유학 당시 도조 히데키가 신원 보증인이 되었으나[12], 중국 공산당의 지하 조직에도 참여했다. 종전 후에는 푸순 전범 관리소의 간수가 되어 장징후이를 면회하고 자신과 가족에 대한 관대한 정부 조치에 감사를 표하는 자백을 받아냈다.[13] 이후 베이징 국제 관계 학원의 일본어 학부 주임이 되었으며, 2004년 중화인민공화국 제7기 전국정협 위원이 되었다.

7. 평가와 논란

장징후이는 만주국 총리로서 소극적인 역할을 하며 일본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받았고, "두부 총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 그는 1943년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 회의에 만주국 공식 대표로 참석했다. 같은 해 ''타임'' 지에는 장징후이가 가족을 독살하고 일본인 고문 등을 살해한 후 자살했다는 허위 보도가 실리기도 했다.[5]

장징후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종합적 평가 등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며,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7. 1. 긍정적 평가

대동아회의에서의 장징후이


실제로는 일본에 대항심을 품고 그 횡포를 우려했다고 전해지지만, 푸이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에서는 만주국 시대에 일본에 아첨하여 출세한 비굴한 인물로 묘사되었고,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도 아편 밀매로 군비를 조달하려는 일본에, 마약 거래에 암약한 실적을 인정받아 총리가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쉽다. 그러나 소련군의 만주 침략 당시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등 굳건한 면모도 보였다.

또한 황제 동생 푸제의 부인 사가 히로의 자서전에 따르면, 관동군에게 냉대받던 푸제 부부에게 여러 편의를 봐주고 "(영웅이라고 불리는 마적 중에서도) 장작림은 정략이 뛰어나고 인물은 장징후이가 낫다"라고 평했다는 증언도 있는 등, 인정 많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집무실에서 좌선을 하고, 각의에서도 거의 발언하지 않고 부하의 보고에는 반드시 "좋다(好)"고 대답했기 때문에, "하오하오 선생(好好先生)"이라는 별명이 붙어 매우 칭송받았다.

7. 2. 부정적 평가 (비판적 관점)

장징후이는 만주국 총리로서 소극적인 역할을 하며 일본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일본인 고문들이 행정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고 자신은 불교 경전을 베끼는 데 시간을 보냈으며, "두부 총리"라는 별명을 얻었다.[4] 그는 일본의 정책에 대해 거의 반대하지 않았는데, 일본인 식민지 주민에게 토지를 강제 매각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 유일한 불만이었다.

푸이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에서는 장징후이가 일본에 아첨하여 출세한 비굴한 인물로 묘사되었고,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도 아편 밀매로 군비를 조달하려는 일본에 협력하여 총리가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하지만, 소련군의 만주 침략 당시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등 굳건한 면모도 보였고, 사가 히로의 자서전에 따르면 관동군에게 냉대받던 푸제 부부에게 여러 편의를 봐주고 장쭤린보다 낫다고 평가했다는 증언도 있어, 인정 많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공식 석상에서는 거의 원고대로 말하고,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있으면 부하에게 물어보는 등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여 일본인들에게 "다루기 쉽다"라고 여겨졌다는 시각도 있다. 마적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가볍게 여겨지기 쉽지만, 일본 방문 시에는 완벽한 테이블 매너를 보여 일본 측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부하가 일본의 전횡을 호소하자 "급료만 지급하면 무엇이든 할 테니 괜찮지 않은가"라고 타이르고, 일본의 패전을 알았을 때 "전쟁이란 8할 정도의 승리에서 멈추고 교섭으로 가져가는 법인데, 일본은 멈추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했다. 아까운 군대를 잃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대동아회의 자리에서는 이 회의를 얕보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당시 대동아회관 지배인이었던 미카미 료조는 말했다.

7. 3. 종합적 평가



실제로는 일본에 대항심을 품고 그 횡포를 우려했다고 전해지지만, 푸이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에서는 만주국 시대에 일본에 아첨하여 출세한 비굴한 인물로 묘사되었다.[2]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도 아편 밀매로 군비를 조달하려는 일본에, 마약 거래에 암약한 실적을 인정받아 총리가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쉽다.[2] 그러나 소련군의 만주 침략 당시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등 굳건한 면모도 보였다.[2] 또한 황제 동생 푸제의 부인 사가 히로의 자서전에 따르면, 관동군에게 냉대받던 푸제 부부에게 여러 편의를 봐주고 "(영웅이라고 불리는 마적 중에서도) 장작림은 정략이 뛰어나고 인물은 장징후이가 낫다"라고 평했다는 증언도 있는 등, 인정 많은 인물이었다고 한다.[2]

평소에는 집무실에서 좌선을 하고, 각의에서도 거의 발언하지 않고 부하의 보고에는 반드시 "좋다(好)"고 대답했기 때문에, "하오하오 선생(好好先生)"이라는 별명이 붙어 매우 칭송받았다.[2] 또한, 공식적인 인사 및 연설은 거의 원고대로였고, 연설 원고에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있으면 중단하고 부하에게 물어보는 등, 문인이었던 전임자 정효서만큼 문화적 소양이 없어, 이러한 점이 일본인들에게 "다루기 쉽다"라고 여겨져 장기간 국무총리 대신의 지위에 있을 수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2] 마적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가볍게 여겨지기 쉽지만, 일본 방문 시의 만찬회에서는 완벽한 테이블 매너를 보여 일본 측을 놀라게 하기도 하는 등, 결코 일부 대립 관계에 있는 인물이 주장하는 비천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2]

그 한편, 부하가 일본의 전횡을 호소하자 "급료만 지급하면 무엇이든 할 테니 괜찮지 않은가"라고 타이르고, 일본의 패전을 알았을 때 "전쟁이란 8할 정도의 승리에서 멈추고 교섭으로 가져가는 법인데, 일본은 멈추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했다. 아까운 군대를 잃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 한편 대동아회의 자리에서는 이 회의를 얕보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당시 대동아회관 지배인이었던 미카미 료조는 말했다.[2]

참조

[1] 서적 The Manchurian Myth
[2] 서적 The Manchurian Myth
[3] 서적 Manchuria Under Japanese Domination
[4] 웹사이트 Japanese wikipedia
[5] 뉴스 CHINA: Noble End of Chang Ching-hui http://www.time.com/[...] 1943-01-04
[6] 간행물 中央檔案館編 2000
[7] 뉴스 満洲政府の閣員 昨日正式に発表 1932-03-11
[8] 뉴스 東省特別区長官に張景恵氏 1932-03-15
[9] 간행물 郭主編 1990
[10] 뉴스 鄭総理辞表を捧呈 張景恵氏に大命降下 1935-05-22
[11] 서적 シベリア抑留全史 原書房 2013-08-08
[12] 간행물 別冊正論EXTRA18 産経新聞社 2012-09-21
[13] 웹사이트 偽満洲国総理大臣張景恵家の革命者 http://www.chinanews[...] 中新网 201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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