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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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융은 신나라 말기부터 후한 초기에 활동한 군웅으로, 이릉을 근거지로 세력을 키웠다. 처음에는 이릉에서 도적질을 하다가, 경시 원년에 이릉을 함락시키고 소지대장군을 자칭하며 주성왕이 되었다. 이후 후한에 항복하려다 실패하고 진풍에게 의탁했으며, 다시 공손술에게 항복하여 익강왕에 봉해졌다. 공손술 휘하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나, 건무 12년에 후한의 풍준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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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년 사망 - 공손술
공손술은 전한 시대 인물로, 신나라 멸망 후 촉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성가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후한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성가가 멸망했다. - 36년 사망 - 연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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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
작위 | 주성왕 (자칭) |
재위 | ? ~ ? |
작위2 | 성가의 익강왕 |
재위2 | 29년 - 36년 |
군주2 | 공손술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신신(辛臣)의 여동생 진풍의 딸 |
사망 정보 | |
사망일 | 36년 음력 7월 |
사망지 | 충칭시 |
2. 생애
전융은 신말후한초의 군웅 중 한 명으로, 이릉(남군)을 근거지로 하였다. 이후 촉(성가)의 공손술의 부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동향인 진의와 함께 이릉에서 군도(群盜) 노릇을 했다. 경시 원년(23년), 전융과 진의는 이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전융은 소지대장군(埽地大將軍)을, 진의는 여구대장군(犁丘大將軍)을 각각 자칭했다.[1] 이후 전융은 각 군현을 공략하여 수만 명의 군세를 거느렸다.
건무 3년(27년) 7월, 후한의 정남대장군 잠팽이 초려왕(草廬王) 진풍을 여구향(남군 의현)에 포위하자, 전융은 처남인 신신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후한에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건무 4년(28년) 봄, 전융은 신신에게 이릉의 유수(留守)를 맡기고 려구향으로 향하여 기일을 정해 후한에 항복하려 했다. 그러나 신신이 변심하여 전융의 보물을 훔쳐 이릉에서 도망쳐 후한에 항복하고, 서면을 보내 전융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신신이 자신을 팔았다고 의심한 전융은 결국 후한에 항복하는 대신 진풍에게 투항했다.[2]
그러나 전융은 잠팽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부장인 오공(伍公)은 후한에 항복했으며, 전융은 이릉으로 철수했다. 건무 5년(29년), 진풍이 약화되자 잠팽이 이끄는 남정군(南征軍)의 주력은 전융에게 향했다. 같은 해 3월, 전융은 잠팽과 진향(津鄕, 남군 강릉현)에서 싸워 패배했다. 잠팽에게 이릉을 공략당하고, 도주한 지귀(枳歸, 남군)에서도 추격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진풍이 멸망하자 연잠과 함께 공손술에게 항복했다.[7] 공손술은 전융을 익강왕(翼江王)에 봉했다. 전융은 성나라의 장군 임만(任滿)과 함께 강관(江關)에서 출진해 임저(臨沮)와 이릉 사이를 함락하고 옛 부하들을 모아 형주로 진출하고자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4]
건무 6년(30년), 외효가 공손술에게 칭신하자, 기도위 형한(荊邯)이 광무제에게 천하를 겨룰 계책을 아뢰며 연잠에게 한중을 나와 관중 일대를 평정하고 전융에게도 별도로 출진하게 할 것을 말했다. 그러나 촉 사람들은 멀리 원정하기를 싫어해 반대했다. 전융은 연잠과 함께 공을 세우고 싶어 공손술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의심만 사고 실패했다.[4]
건무 9년(33년), 전융은 임만·정범(程汎)과 함께 수만 군을 지휘해 뗏목[枋箄]을 타고 후한 군을 무찔렀다. 강관에 주둔한 후한의 위로장군 풍준(馮駿)·이릉에 주둔한 후한의 도위 전홍(田鴻)·이도(夷道)에 주둔한 후한의 영군 이현(李玄)을 모조리 쫓아내고 이릉과 이도를 함락해 형문산(荊門山)과 호아산(虎牙山)에 주둔했다. 강을 가로질러 부교(浮橋)를 놓고 물길을 끊고 산에 영채를 세워 후한군과 맞섰으며, 잠팽의 몇 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했다. 그러나 건무 11년(35년) 윤월,[9] 오한 등의 증원을 받고 수군을 갖춘 잠팽이 바람을 타 화공(火攻)을 펼치자 부교와 누각이 모두 불타버렸고, 혼란에 빠져 수천 명이 빠져 죽었다. 임만은 전사했고 정범은 생포됐으며, 전융은 홀로 살아남았으나 앞서 점령한 이릉·이도를 지나 처음 출진한 강관까지 도주했다. 잠팽은 풍준에게 강관을 포위하게 하고 장궁 등과 함께 강관을 우회해 성나라 깊숙이 쳐들어갔다.[8]
건무 12년(36년) 7월, 풍준의 공격으로 강관이 함락되어 사로잡혔고,[9] 10월에 참수되었다.[10]
2. 1. 이릉의 군벌
처음에는 같은 군 사람 진의(陳義)와 함께 이릉에서 객으로 지내다가 도둑이 되었다. 경시 원년(23년) 진의와 함께 이릉을 함락하고 장군을 자칭하며 자신은 소지대장군(埽地大將軍)이 되었다.[5] 진의와 함께 왕을 자칭해 주성왕(周成王)이 되었다.[6] 《후한서》에서는 경시 2년(24년) 광무제가 소왕으로 봉해졌을 때 유영, 공손술, 이헌, 진풍, 장보, 동헌, 연잠과 함께 전융을 군웅의 하나로 언급했다.[7]초려왕 진풍이 후한의 장군 잠팽에게 져 포위되었다. 전융은 아내의 오빠 신신(辛臣)과 항복할 것을 논의했는데, 신신은 아직 군웅이 많이 있으므로 형세를 더 지켜보자고 했으나 전융은 그 군웅 중 하나이던 진풍이 포위되었으니 자신들은 항복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결국 건무 4년(28년) 봄에 신신을 남겨 이릉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군을 거느리고 물길을 따라 내려와 날을 정해 항복하기로 했다. 그런데 신신은 보물을 훔쳐 샛길로 가 먼저 잠팽에게 투항하고 전융에게 글을 보내 초청했다. 전융은 신신이 자신을 팔았다고 의심했다. 또 거북점을 쳐 보니 결과가 불길했다.[5] 마침내 항복하지 않고 거꾸로 진풍에게 합류했으나, 몇 달 후 잠팽에게 격파당하고 전융의 대장 오공(伍公)도 잠팽에게 항복해 이릉으로 달아났다.[8] 한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떠돌이 군웅으로 마침 진풍에게 의탁한 연잠과 함께 진풍의 사위가 되었다.[4] 이후 광무제의 명으로 진풍 포위는 주우에게 맡긴 잠팽과 부준에게 함께 공격을 받아 이릉성은 함락되었다. 전융은 수십 기만 거느리고 겨우 성가로 달아났고, 처자와 선비와 수만 명의 수하들은 후한의 포로가 되었다.[8] 건무 5년(29년) 3월, 잠팽과 진향(津鄕)에서 싸워 대파됐다.[7]
신말후한초의 군웅 중 한 명으로, 이릉(남군)을 근거지로 하였다. 후에 촉(성가)의 공손술의 부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동향의 진의와 함께 이릉으로 가서 군도를 하였다. 경시 원년 (23년)에는 전융과 진의가 이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전융은 소지대장군을, 진의는 여구대장군을 각각 자칭했다.[1] 그 후, 전융은 각 군현을 공략하여 수만 명의 군세를 거느렸다.
건무 3년 (27년) 7월, 한의 정남대장군 잠팽이 초려왕 진풍을 려구향 (남군 의현)에 포위하자, 처남인 신신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전융은 한에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건무 4년 (28년) 봄, 전융은 신신에게 이릉의 유수를 맡기고 려구향으로 향하여 기일을 정하여 한에 항복하려 했다. 그러나 신신이 변심하여 전융의 보물을 훔쳐 이릉에서 도망쳐 한에 항복하고, 아울러 서면을 전융에게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신신이 자신을 팔았다고 의심한 전융은 결국 한에의 항복을 그만두고 진풍에게 붙기로 했다.[2]
그러나 전융은 잠팽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 부장인 오공은 한에 항복했으며, 전융은 이릉으로 철수했다. 건무 5년 (29년)이 되자, 진풍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잠팽이 이끄는 남정군 주력의 창끝은 전융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같은 해 3월, 전융은 잠팽과 진향(남군 강릉현)에서 싸워 패배한다. 더욱이 잠팽에게 이릉을 공략당하고, 도주한 지귀(남군)에서도 추격을 받았다.
2. 2. 성나라의 제후왕
건무 5년(29년) 6월, 진풍이 멸망하자 연잠과 함께 공손술에게 항복했다.[7] 공손술에게서 익강왕(翼江王)에 봉해졌다. 성나라의 장군 임만(任滿)과 함께 강관에서 출진해 임저와 이릉 사이를 함락하고 옛 부하들을 모아서 형주로 진출하고자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4]건무 6년(30년), 외효가 공손술에게 칭신하자, 기도위 형한(荊邯)이 광무제와 천하를 겨룰 계책을 아뢰며 연잠에게 한중을 나와 관중 일대를 평정하고 전융에게도 별도로 출진하게 할 것을 말했다. 그러나 촉 사람들은 멀리 원정하기를 싫어해서 반대했다. 전융은 연잠과 함께 공을 세우고 싶어서 공손술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했지만, 의심만 사고 실패했다.[4]
건무 9년(33년), 임만·정범(程汎)과 함께 수만 군을 지휘해, 뗏목[枋箄]을 타고 후한 군을 무찔렀다. 강관에 주둔한 후한의 위로장군 풍준(馮駿)·이릉에 주둔한 후한의 도위 전홍(田鴻)·이도에 주둔한 후한의 영군 이현(李玄)을 모조리 쫓아내고 이릉과 이도를 함락해 형문산과 호아산에 주둔했다. 강을 가로질러 부교를 놓고 물길을 끊고 산에 영채를 세워 한군과 맞섰으며, 잠팽의 몇 차례의 공격을 모두 격퇴했다. 그러나 건무 11년(35년) 윤월,[9] 오한 등의 증원을 받고 수군을 갖춘 잠팽이 바람을 타 화공을 펼치자 부교와 누각이 모두 불타버렸고 혼란에 빠져 수천 명이 빠져죽었다. 임만은 전사했고 정범은 생포됐고, 전융은 홀로 살아남았으나 앞서 점령한 이릉·이도를 지나 처음 출진한 강관까지 도주했다. 잠팽은 풍준에게 강관을 포위하게 하고 장궁 등과 함께 강관을 우회해 성나라 깊숙히 처들어갔다.[8]
건무 12년(36년) 7월, 풍준의 공격으로 강관이 함락되어 사로잡혔고[9] 10월에 참수되었다.[10]
참조
[1]
서적
後漢書
[2]
서적
後漢書
[3]
서적
後漢書
[4]
서적
후한서
[5]
서적
동관한기
[6]
서적
양양기구기
[7]
서적
후한서
[8]
서적
후한서
[9]
서적
후한서
[10]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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