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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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창모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화단에 입문하여 활동하다가 6·25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강제 월북한 한국화가이다. 월북 후 조선화가로 활동하며 풍경화와 화조화, 특히 몰골법에 능했다. 2000년 남한을 방문하여 가족을 만났으며, 2010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금강산 계곡》과 《만경대의 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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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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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아호 | 효원(曉園) |
출생일 | 1931년 12월 16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전주군 |
사망일 | 2010년 7월 25일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평양시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활동 기간 | 1942년 ~ 2010년 |
분야 | 동양화 수묵화 조선화 |
직업 | 동양화가 수묵화가 조선화가 |
작품 정보 | |
주요 작품 | 《금강산 계곡》 《만경대의 봄》 |
가족 정보 | |
부모 | 정숭용(부), 부여 서씨 부인(모) |
형제 | 3남 2녀 중 차남이자 넷째 |
학력 정보 | |
학력 | 평양미술대학교 조선화미술학과 학사(1963년) |
경력 정보 | |
경력 | 로동당 당무위원(1953년 ~ 1958년) 평양미술대학교 조선화미술학과 교수(1971년 ~ 1972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 |
사제 정보 | |
영향 줌 | 김기만(金基萬)의 사제(師弟)이며 선우 영(鮮于 英)의 스승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두피디아 정창모 |
2. 생애
정창모는 함평(咸平)를 본관으로 하며 호는 효원(曉園)이다. 전라북도 전주의 중농 집안에서 3남 2녀 중 차남(5남매 중 넷째)으로 출생하였다. 1942년 동양화가로 일제강점기 말기 화단에 첫 입문하였으며, 1944년 수묵화가로도 활동하였다. 8·15 광복 이후 미 군정 남조선 과도정부 시대에 동양화가 겸 수묵화가로 활약하다가,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 북괴 인민의용군 사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월북하였다.
1953년 8월 23일 북괴 인민의용군에서 군필 제대 조치되었고, 1959년 평안남도 평양미술대학교 조선화미술학과에 입학하여 1963년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조선화가로 활동하였으며, 1971년 3월부터 1972년 9월까지 평양미술대학교 교수를 잠시 역임하였다. 한국 전쟁 때 북괴 인민의용군 사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강제 월북한 후,[1] 군필 제대 이후에는 조선화가로 활동하면서 특히 풍경화와 화조화를 많이 그렸으며, 밑그림 없이 한 번에 그려내는 몰골법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2000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에 왔던 이산가족 방문단에 참여하여 남동생 등의 가족을 만났다. 2010년 7월 25일에 지병으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2. 1. 초기 생애와 월북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호(號)는 효원(曉園)이며, 전라북도 전주의 중농 집안에서 3남 2녀 중 차남(5남매 중 넷째)으로 출생하였다. 1942년 동양화가로 일제강점기 말기 화단에 첫 입문하였으며, 1944년 수묵화가로도 활동하였다. 8·15 광복 이후 미 군정 남조선 과도정부 시대에 동양화가 겸 수묵화가로 활약하다가,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 북괴 인민의용군 사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월북하였다.1953년 8월 23일 북괴 인민의용군에서 군필 제대 조치되었고, 1959년 평안남도 평양미술대학교 조선화미술학과에 입학(당시 29세)하여 1963년 학사 학위를 취득(당시 33세)하였다. 이후 조선화가로 활동하였으며, 1971년 3월부터 1972년 9월까지 평양미술대학교 교수를 잠시 역임하였다.
2. 2. 북한에서의 활동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 북괴 인민의용군 사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강제 월북하였다.[1] 이후 1953년 8월 23일 북괴 인민의용군에서 군필 제대 조치되었고, 1959년 평안남도 평양미술대학교 조선화미술학과에 입학(당시 29세)하여 1963년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당시 33세). 조선화가로 활동하였고 1971년 3월부터 1972년 9월까지 평양미술대학교 교수를 잠시 지냈다.정창모는 한국 전쟁 때 북괴 인민의용군 사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강제 월북하였다.[1] 군필 제대 이후에는 조선화가로 활동하면서 특히 풍경화와 화조화를 많이 그렸으며, 밑그림 없이 한 번에 그려내는 몰골법의 대가이다.
2. 3. 남한 방문과 사망
2000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에 왔던 이산가족 방문단에 참여하여 남동생 등의 가족을 만났다.뉴스 보도에 따르면, 정창모는 2010년 7월 25일에 지병으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3. 주요 작품
정창모는 금강산 계곡, 만경대의 봄 등을 그린 화가이다.
3. 1. 대표작
- 금강산 계곡
- 만경대의 봄
4. 학력
- 전라북도 전주완산국민학교 졸업 (1944년 3월)
- 전라북도 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1950년 2월)
- 평안남도 평양미술대학교 조선화미술학과 졸업 (1963년 3월) 학사
참조
[1]
문서
장승업의 계승자로 추앙받으며 결국, 미술계의 계보를 형성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술인들의 최고 영예인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2010-09-06
[2]
뉴스
북 정창모 화백 수상작 인터넷 경매중
http://www.tongilnew[...]
통일뉴스
2010-09-06
[3]
뉴스
北 효원 정창모 화백, 지난 7월 타계
http://sports.kbs.co[...]
KBS NEWS
201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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