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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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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대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는 잉글랜드의 정치인이자 해군 제독으로,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에 기여하여 샌드위치 백작 작위를 받았다.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로 활동했으며, 프랑스-스페인 전쟁과 제2차,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특히, 1660년 찰스 2세를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데려와 즉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72년 솔베이 해전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고손자는 샌드위치 식빵의 유래로 알려진 제4대 샌드위치 백작 존 몬태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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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피터 렐리 그림
피터 렐리 그림
존칭 접두사각하
이름샌드위치 백작
존칭 접미사KG, PC, FRS, JP
출생 이름에드워드 몬태규
출생일1625년 7월 27일
출생지노샘프턴셔 반웰, 잉글랜드
사망일1672년 5월 28일
사망 장소서퍽 주 솔베이
안장 장소웨스트민스터 사원
국적잉글랜드
배우자제미마 크루 (1642년 결혼)
자녀10명, 에드워드, 시드니, 존 포함
부모경 시드니 몬태규, 폴리나 펩시
거주지힌칭브룩 하우스
직업육군 및 해군 장교, 외교관
군 경력
충성잉글랜드
복무 연도1642년 ~ 1672년
소속잉글랜드 군
계급장군
참전세 왕국 전쟁
마스턴 무어
요크 공성전
제2차 뉴베리
나스비 전투
브리스톨
영국-스페인 전쟁 (1654년~1660년)
덩케르크
제2차 앵글로-네덜란드 전쟁
로웨스토프트
보겐
제3차 앵글로-네덜란드 전쟁
솔베이 해전(전사)
정치 경력
직책스페인 대사
임기 시작1666년
임기 종료1668년
직책포르투갈 대사
임기 시작1661년
임기 종료1662년
직책헌팅던셔 주 공동 헌팅던셔 주
임기 시작1660년 9월
임기 종료1672년 5월
선거구도버
임기 시작1660년 5월
임기 종료1660년 8월
직책잉글랜드 국무원
임기 시작1653년
임기 종료1659년
선거구헌팅던셔
임기 시작1645년 10월
임기 종료1657년 12월
직책해상 장군
임기 시작1656년
임기 종료1660년

2. 생애

에드워드 몬태규는 잉글랜드 의회 하원 의원 시드니 몬태규 경과 폴리나 핍스의 아들로 태어나, 헌팅던셔(현재 케임브리지셔의 일부)의 힌칭브룩 가문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문은 맨체스터 백작 등 유력 인사를 배출했으며, 일기 작가 새뮤얼 피프스와도 인척 관계였다.[9]

1643년 보병 연대에 합류하여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 소속으로 싸웠고, 올리버 크롬웰 휘하에서 마스턴 무어 전투와 네이스비 전투 등에 참전했다. 1645년에는 장기의회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9] 잉글랜드 공화국 시기에도 군 경력을 이어가 1656년 잉글랜드 해군 제독(General at sea)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스페인 전쟁과 발트해에서의 작전에 참여했다.[9]

1660년 왕정복고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조지 뭉크의 명령에 따라 함대를 이끌고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를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안전하게 호송하여 즉위를 도왔다.[10] 이 공로로 찰스 2세는 그에게 샌드위치 백작 작위를 수여했으며, 이후 해군 및 궁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의 비서였던 새뮤얼 피프스 역시 이 시기 해군 관료로 등용되었다.[10]

찰스 2세 치하에서 그는 1662년 왕비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를 포르투갈에서 데려오는 임무를 수행했으며,[11]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에서는 해군 지휘관으로 로스토프트 해전 등에 참전했다. 그러나 전리품 처리 문제로 논란에 휩싸여 1666년 스페인 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11]

1672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에 복귀하여 솔베이 해전에 참전했다. 그는 기함 로열 제임스를 타고 선두에서 싸웠으나, 미힐 데 로이터가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의 화공선 공격으로 배가 불타는 혼란 속에서 다른 배로 옮겨 타려다 보트가 전복되어 전사했다.[11] 그의 유해는 수습되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12] 작위는 아들 에드워드가 계승했으며, 그의 후손 중에는 제임스 쿡의 항해를 지원하고 샌드위치 이름의 유래가 된 것으로 알려진 제4대 샌드위치 백작 존 몬태규가 있다.[11]

2. 1. 가문과 초기 이력

피터 렐리 경이 1666년경 그린 샌드위치의 초상화. 로스토프트의 기함 시리즈 중 하나.


에드워드 몬태규는 1625년 7월 25일, 잉글랜드 의회 하원 의원이었던 시드니 몬태규 경과 그의 첫 부인 폴리나 핍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9] 그는 헌팅던셔(현재 케임브리지셔의 일부)의 힌칭브룩 하우스에서 자랐다.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의 유력 가문으로, 초대 맨체스터 백작 헨리 몬태규는 그의 아버지 쪽 큰아버지였고, 청교도 혁명 당시 의회파 사령관이었던 제2대 맨체스터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는 아버지의 사촌이었다. 또한 시인이자 제1 재무경을 지낸 핼리팩스 백작 찰스 몬태규는 그의 아버지 쪽 종손(從孫, 조카의 아들)에 해당한다.[9] 유명한 일기 작가 새뮤얼 피프스는 그의 어머니 쪽 종손이었는데, 피프스는 몬태규의 비서로 경력을 시작하여 해군 관료로 성장하며 해군 개혁에 기여했다.[9]

1642년 11월 7일, 몬태규는 존 크루, 초대 크루 남작과 제미마 월드그레이브의 딸인 제미마 크루와 결혼했다. 새뮤얼 피프스는 그의 일기에서 제미마를 "나의 귀부인"이라 칭하며 큰 애정을 드러냈다. 부부는 슬하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
제미마1646–1671
에드워드1648–1688
폴리나1649–1669
시드니1650–1727
올리버c. 1655–1689
c. 1655–1729
찰스1658–1721
1660–1729
캐서린1661–1757
제임스1664년 출생



그의 아버지가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1642년 8월에 발발하자 몬태규는 의회파였던 사촌 맨체스터 백작이 이끄는 동부 연합 군대에 합류했다. 그는 보병 연대를 창설하여 1643년에 정식으로 연대에 소속되었다.[9] 1644년에는 마스턴 무어 전투, 요크 포위전, 제2차 뉴베리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맨체스터 백작이나 제3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의 소극적인 전쟁 수행 방식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645년 2월, 군 지휘관이 의회 의원직을 겸직하지 못하게 하는 자기 부인 조례가 통과되고 뉴 모델 아미가 창설되었다. 귀족 신분으로 자동 해임된 맨체스터 백작과 달리, 몬태규는 뉴 모델 아미에 합류하여 1645년 6월 네이스비 전투와 이후 브리스톨 점령에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그는 1644년 9월 사망한 아버지가 맡았던 헌팅던셔 지역구의 장기의회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자기 부인 조례에 따라 군직에서 물러났다.[9]

몬태규는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1648년 12월 프라이드의 숙청 이후 의회에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나 1653년, 그의 이웃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베어본즈 의회 의원으로 지명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무원 위원으로도 임명되어 1659년 해산될 때까지 활동했으며, 1654년 제1차 호국경 의회와 1656년 제2차 호국경 의회에도 헌팅던셔 대표로 선출되었다.

1656년, 그는 잉글랜드 해군의 지휘관인 해군 제독(General at sea)으로 임명되었다. 영국-스페인 전쟁 (1654–1660) 중에는 로버트 블레이크와 함께 지중해 원정에 참여했으며, 이 경험을 통해 지중해에 영국 해군 기지를 설립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구상은 훗날 1661년 영국령 탕헤르 확보로 일부 실현되었다. 1657년 2월에는 크롬웰에게 왕위를 제안하고 국교회를 재건하자는 내용의 겸손한 청원과 조언을 지지하는 소위 '신 크롬웰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군부 급진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58년 6월, 그는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프랑스와 협력하여 덩케르크 항구를 봉쇄하는 해군 함대를 지휘했다.[9] 크롬웰 사후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에게 충성을 유지했지만, 리처드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659년 초, 몬태규는 칼 구스타프 전쟁으로 불안정한 발트해 지역에서 스웨덴덴마크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해군과 함께 스웨덴을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나,[9] 망명 중이던 찰스 2세 및 공화주의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결국 연말 잉글랜드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급히 귀국했고,[9] 새로 구성된 럼프 의회로부터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에 대한 증거가 없어 해임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2. 2. 청교도 혁명과 잉글랜드 공화국 시기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1642년 8월 시작되자, 비록 그의 아버지는 왕당파였지만 몬태규는 의회파 사촌인 제2대 맨체스터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가 이끄는 동부 연합 군대에 합류했다. 1643년 그는 보병 연대를 창설하여 복무했으며, 1644년에는 마스턴 무어 전투, 요크 포위전, 제2차 뉴베리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맨체스터 백작과 에식스 백작의 소극적인 전쟁 수행 방식에 불만을 품은 의회 내 인물들을 지지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645년 2월, 보다 효율적인 군대인 뉴 모델 아미가 창설되었고, 군 지휘관이 의회직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기 부인 조례가 통과되었다. 귀족원 의원이었던 맨체스터 백작과 에식스 백작은 자동으로 군 지휘권을 잃게 되었다. 몬태규의 연대는 뉴 모델 아미에 통합되었고, 그는 1645년 6월 네이스비 전투와 이후 브리스톨 점령에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그는 1644년 9월 사망한 아버지가 과거에 차지했던 헌팅던셔 지역구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자기 부인 조례에 따라 군직에서 물러났다.

몬태규는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1648년 12월 프라이드의 숙청 이후 의회에서 물러나 은둔했다. 그러나 1653년, 그의 이웃이자 당시 유력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베어본즈 의회 의원으로 지명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무원 위원으로 임명되어 1659년 해산될 때까지 활동했으며, 1654년 제1차 호국경 의회와 1656년 제2차 호국경 의회에도 헌팅던셔 대표로 선출되었다.

영국-스페인 전쟁 중인 1656년, 몬태규는 로버트 블레이크와 함께 바다의 장군(General at Sea영어)으로 임명되어 지중해 원정에 참여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지중해에 영국 해군 기지를 설립할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는 훗날 1661년 탕헤르 확보로 실현되었다. 1657년 2월, 그는 크롬웰에게 왕위를 권하고 국교회를 재건하자는 내용의 겸손한 청원과 조언을 지지하는 소위 '신 크롬웰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찰스 플리트우드와 존 램버트 등 군부 급진파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1658년 6월, 몬태규는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프랑스와 협력하여 덩케르크 항구를 봉쇄하는 해군 함대를 지휘했다. 같은 해 9월 크롬웰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에게 충성을 다했다. 리처드 크롬웰의 짧고 불안정한 통치 기간 동안 몬태규는 주로 해상에 머물렀다. 1659년 초, 그는 칼 구스타프 전쟁으로 불안정한 발트해 지역에 파견되어 스웨덴덴마크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고 네덜란드 해군과 함께 스웨덴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망명 중인 찰스 2세 및 공화주의자 앨저넌 시드니, 로버트 허니우드 등과 비밀리에 연락했다는 의심을 받아 소환되었다. 새로 구성된 럼프 의회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군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었다.[9]

2. 3. 왕정복고와 찰스 2세 시대

1659년 말 영국이 혼란에 빠지자 새로운 선거와 군정 종식 요구가 거세졌다. 1660년 2월, 스코틀랜드 주둔군 사령관 조지 뭉크는 런던으로 진군하여 존 램버트가 이끄는 공화파에 맞서 잔부의회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몬태규는 해군 지휘권을 되찾았고, 4월 임시 국회 선거에서 도버와 웨이머스 멜컴리지스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9]

이로써 그는 왕정복고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의회가 찰스 2세를 왕으로 선포하고 귀국을 요청하자, 몬태규는 1660년 5월 24일 찰스 2세를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영국으로 데려오는 함대를 지휘하는 공을 세웠다. 찰스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같은 해 7월 12일 몬태규에게 '''세인트 네오츠의 몬태규 남작''', '''힌칭브룩 자작''', '''샌드위치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또한 가터 훈장 기사로 서임하고, 대 의상 관리관, 좁은 해역(영국 해협과 남부 북해)의 제독, 그리고 해군 최고 사령관(해군경)인 요크 공작 제임스(훗날 제임스 2세)의 중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찰스 2세의 대관식에서 성 에드워드의 홀을 드는 영예를 안았다. 당시 클래런던 백작은 이러한 파격적인 대우가 망명 생활을 함께 했던 왕당파들의 불만을 샀으며, 그들이 몬태규를 "고집불통" 크롬웰파로 여겼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몬태규의 매력적인 태도 때문에 그를 싫어하기는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그의 먼 친척이자 비서였던 새뮤얼 피프스도 해군 위원회 장관으로 발탁되어 이후 해군 본부 서기관장으로서 요크 공작과 함께 해군 육성에 힘썼다.[10]

1661년 포르투갈 대사로 임명된 몬태규는 찰스 2세와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의 결혼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이 결혼으로 잉글랜드는 뭄바이탕헤르를 얻게 되었다. 그는 탕헤르가 국제 무역 중심지로서 잠재력이 크다고 보고, 1662년 1월 함대를 이끌고 탕헤르를 점령했으며 그곳에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대사 임무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올 때는 새로운 왕비가 된 카타리나를 리스본에서부터 호송했다.

몬태규는 1667년에 출판된 ''영국 왕립 모험가 회사에서 아프리카 무역에 관한 여러 선언''의 서명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이는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2][3]

1665년부터 1667년까지 이어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그는 요크 공작과 함께 해군을 이끌었다. 로스토프트 해전에서는 영국이 승리했지만, 베르겐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현역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소속 나포선 여러 척에서 귀중한 향신료를 선원들이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관례상 선원들은 갑판 위의 물건은 가질 수 있었으나, 선창 약탈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금전 문제에 어둡고 성격이 유순했던 몬태규는 이를 묵인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몬태규가 불법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는 소문이 퍼졌고(실제로는 정당한 몫보다 적게 챙겼을 가능성이 높다), 런던 대역병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중은 격분했다. 이 사건은 "전리품 스캔들"로 불리며 전국적인 문제로 비화했다. 클래런던 백작은 몬태규가 워낙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 개인적인 적은 없다고 했지만, 해군 본부의 상관이자 정치적 반대파였던 요크 공작 제임스와 그의 비서 윌리엄 코벤트리 등은 이 스캔들을 이용하려 했다. 결국 몬태규는 국왕에게 사면을 요청해야 했고, 찰스 2세는 왕정복고 당시 그의 공을 고려하여 이를 승인했다.[11][3]

1666년 몬태규는 스페인 대사로 좌천되어 리처드 팬쇼 경의 뒤를 이었다. 이는 그가 인기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클래런던 백작처럼 그의 입지도 약화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런던 대화재 이후, 그는 스페인 국왕에게 피해 규모를 축소하여 보고하기도 했다.

스페인 대사로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667년 앵글로-스페인 상업 조약(마드리드 조약) 체결에 기여한 것이다. 이 조약은 이후 1세기 이상 지속된 양국 간 무역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여 1668년 리스본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그러나 대사관 운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사업 감각이 부족했던 그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1668년 가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사촌인 새뮤얼 피프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귀국길에 그는 다시 탕헤르에 들러 주둔지 상황을 보고했다.

1670년에는 국왕의 여동생인 잉글랜드의 헨리에타, 오를레앙 공작 부인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녀는 오빠 찰스 2세와 프랑스 루이 14세 사이의 도버 밀약 협상을 위해 온 것이었으나, 몬태규는 이 조약의 비밀 내용(특히 찰스 2세의 가톨릭 개종 약속)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같은 해, 그는 국제 무역에 대한 깊은 관심 덕분에 해외 식민지 문제를 다루는 추밀원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찰스 2세가 1660년 5월 24일 네덜란드 공화국을 떠나 영국으로 향하다

2. 4.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과 전사

1672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에 복귀하여 다시 네덜란드 해군과 싸우게 되었다. 그는 청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Blue)으로 임명되어 ''로열 제임스''를 기함으로 삼았다.

1672년 5월 28일 벌어진 솔베이 해전에서 그의 기함 ''로열 제임스''는 선두에 섰으나, 미힐 더 라위터르가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혼란 속에서 여러 척의 화공선이 ''로열 제임스''를 공격했고, 배는 결국 파괴되어 불타게 되었다.[11] 몬태규는 다른 배로 옮겨 타려 했지만, 그가 탄 보트가 전복되면서 익사했다.

그는 전쟁에 반대했으며, 출항하기 직전 친구인 존 이블린에게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전투 일주일 후 해안으로 밀려왔으며, 옷으로만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신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1672년 7월 3일 수요일, 뎁트포드에서 템스 강을 따라 다섯 척의 장식된 바지선이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된 국장(國葬) 절차를 거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시신은 오후 5시경 웨스트민스터에 상륙하여 성대한 행렬 속에서 사원으로 운구되었다.[12]

3. 가족 관계

에드워드 몬태규는 시드니 몬태규 경과 그의 첫 부인 폴리나 핍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폴리나 핍스는 유명한 일기 작가 사무엘 핍스의 고모 할머니이기도 하다.

1642년 11월 7일, 몬태규는 존 크루와 제미마 월드그레이브의 딸인 제마이마 크루와 결혼했다. 부부는 슬하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제마이마 몬태규1646년 ~ 1671년필립 카트렛 경과 결혼, 제2대 그랜빌 백작 존 카트렛의 할머니
에드워드 몬태규1648년 ~ 1688년제2대 샌드위치 백작 작위 계승
폴리나 몬태규1649년 ~ 1669년2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아버지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시드니 몬태규1650년 ~ 1727년
올리버 몬태규1655년경 ~ 1689년
존 몬태규1655년경 ~ 1729년
찰스 몬태규1658년 ~ 1721년
앤 몬태규1660년 ~ 1729년리처드 엣지컴(Richard Edgecumbe)과 결혼 후 크리스토퍼 몬태규(Christopher Montagu)와 재혼
캐서린 몬태규1661년 ~ 1757년니콜라스 베이컨(Nicholas Bacon)과 결혼 후 발타자르 가드먼(Balthazar Gardeman)과 재혼
제임스 몬태규1664년 출생


4. 새뮤얼 피프스와의 관계

새뮤얼 피프스는 몬태규의 외사촌으로, 처음에는 몬태규 가문의 하급 구성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9][10] 피프스는 몬태규의 후원으로 의상실 근무를 거쳐 해군 본부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해군 위원회 장관을 거쳐 해군 본부 서기관장(사무차관급)까지 승진하며 찰스 2세의 동생이자 해군경인 요크 공작제임스와 함께 해군 발전에 기여했다.[10] 피프스가 남긴 일기는 1660년대 몬태규의 경력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었으나 갈등도 있었다. 1663년, 피프스는 몬태규가 런던 첼시에서 정부 엘리자베스 베크와 공공연하게 동거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여 심각한 말다툼을 벌였다. 피프스는 이 일이 가문의 명성을 훼손하고 몬태규가 공무를 소홀히 하여 궁정 내 영향력을 잃을 위험이 있으며, 자신이 존경했던 몬태규의 아내 제미마 크루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피프스는 자신의 후원자에게 이러한 직언을 하는 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고, 직접 대면하는 대신 편지로 의견을 전달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잠시 소원해졌고 이전처럼 가깝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몬태규의 유언장에는 피프스가 언급되지 않았다.

1668년, 피프스의 아내 엘리자베스 피프스는 남편이 하녀 데브 윌렛과 불륜 관계임을 알게 된 후 벌인 격렬한 부부 싸움 도중, 과거 몬태규가 자신에게 정부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었다고 폭로하여 피프스를 당황하게 했다.[7] 그러나 피프스는 아내가 거절했음을 믿었기에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아내가 로마 가톨릭 미사에 참석했다고 거짓말했던 것처럼, 분노 속에서 자신을 화나게 하려고 이야기를 꾸며냈을 가능성도 고려했다. 이후 몬태규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계속되었고, 몇 달 후 몬태규는 피프스의 집에서 식사하기도 했다.[8]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피프스는 몬태규와 그의 아내(1674년 사망)에 대해 항상 애정과 감사를 표했으며, 훗날 몬태규를 "그 고귀하고 비할 데 없는 귀족"이라고 칭했다.

참조

[1] 서적 The Royal African Company https://www.worldcat[...] Routledge/Thoemmes Press 1999
[2] 서적 Freedom's debt : the Royal African Company and the politics of the Atlantic slave trade, 1672-1752 https://www.worldcat[...]
[3] ODNB Montagu [Mountagu], Edward, first earl of Sandwich https://www.oxforddn[...] 2008-01-03
[4] 서적 By permission of heaven: the story of the Great Fire of London https://books.google[...] Jonathan Cape
[5] 서적 Diary of Samuel Pepys Reprint Society edition
[6] 서적 Samuel Pepys- the man in the making Reprint Society edition
[7] 문서 Diary of Samuel Pepys 1668-11-10
[8] 문서 Diary 1669-01-23
[9] 문서 友清、P34、小林、P189
[10] 문서 友清、P45 - P46、小林、P192 - P197
[11] 문서 友清、P49、P59 - P64、P161 - P163、小林、P199 - P202、P212 - P214
[12] 문서 Ollard pp.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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