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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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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 사망 후 왕위 계승 분쟁과 잉글랜드의 개입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려 했고, 이에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루 모레이가 저항했다.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폴커크 전투에서 패배하며 월리스는 섭정직에서 물러나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로버트 브루스가 왕위에 올라 독립 전쟁을 이끌었고, 배넉번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확립했다. 1320년 아브로스 선언과 1328년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고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관계를 재정립하는 등 중세 유럽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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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는 스코틀랜드 왕위 공백 시 왕국을 통치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1286년 알렉산더 3세 사망 이후 여러 인물들이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배넉번 전투
배넉번 전투
분쟁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날짜1296년 3월 26일 – 1328년 5월 1일 (32년 35일)
장소영국 제도
결과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로부터 독립 유지
아일랜드에서의 잉글랜드 승리
알렉산데르 3세 통치 시절의 앵글로-스코틀랜드 국경 복원
교전 세력
교전국 1스코틀랜드 왕국
게일 아일랜드:
코나흐트 왕국
토몬드 왕국
위 머니 왕국
티르코넬
브레프네 오루르크 왕국
오리엘 왕국
데스먼드 왕국
마그 루이르그 왕국
교전국 2잉글랜드 왕국
아일랜드 영지
지휘관
스코틀랜드존 발리올(사망)
윌리엄 월레스(처형, 1305년까지 총사령관)
로버트 1세(1305년부터 총사령관)
존 코민 3세(암살)
앤드루 모레이(전사)
윌리엄 더 하디(사망)
제임스 더글러스(블랙 더글러스)
토머스 랜돌프, 초대 머레이 백작(머레이 백작)
에드워드 브루스(전사)
사이먼 프레이저 (1306년 사망)(처형)
옹후스 오그 오브 이슬레이(앵거스 오그 맥도날드)
월터 스튜어트, 제6대 스코틀랜드 고등 스튜어드(월터 스튜어드)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사망, 1296–1307)
에드워드 2세(1307–1327)
에드워드 3세(1327–1328)
존 드 워렌, 제6대 서리 백작(서리 백작, 사망)
아이머 드 발렌스, 제2대 펨브룩 백작(펨브룩 백작, 사망)
존 오브 브리타니, 리치먼드 백작(리치먼드 백작)
에드몽 드 카이유(전사, 레이몽 카이유)
존 드 버밍엄, 제1대 라우스 백작(라우스 백작)
에드먼드 버틀러, 캐릭 백작(캐릭 백작, 사망)
모리스 피츠제럴드, 제1대 데스먼드 백작(데스먼드 백작)
앤서니 벡 (더럼 주교)(앤서니 벡, 사망)
병력 규모
스코틀랜드20,000명 이하
잉글랜드100,000명 이하
관련 항목
관련 전투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영국-스코틀랜드 전쟁
참고 자료

2. 배경

스코틀랜드 국왕 알렉산더 3세(알락산다르 막 알락산다르/Alaxandair mac Alaxandairgmq; 현대 게일어: 알라스다르 막 알라스다르/Alasdair Mac Alasdairgd)의 치세는 평화와 경제적 안정을 가져왔으나, 1286년 그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왕위는 노르웨이의 마가렛에게 돌아갔지만, 그녀는 스코틀랜드로 오던 중 1290년 사망했다. 왕위 계승자가 불분명해지자, 여러 가문이 왕위를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왕위 경쟁자" 시기가 도래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내전을 우려하여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중재를 빌미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최고 영주 지위를 요구했고, 1292년 존 발리올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존 발리올은 잉글랜드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고, "Toom Tabard" (Empty Coat)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나약한 왕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영주들의 판결을 무시하고 존 발리올을 잉글랜드 법정에 소환하는 등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결국 존 발리올은 1296년 3월 잉글랜드와의 봉신 관계를 파기했다.

같은 달,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침공을 감행, 버릭어폰트위드를 공격했다. 4월에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을 격파했다. 7월, 에드워드 1세는 존 발리올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았다.

2. 1.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분쟁

1286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국왕 알렉산더 3세가 말에서 떨어져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는 권력 공백 상태에 놓였다. 알렉산더 3세의 손녀 노르웨이의 마가렛이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었으나, 마가렛은 스코틀랜드로 오는 도중 1290년 9월 26일 오크니에서 사망했다. 명확한 왕위 계승자가 사라지자, 여러 가문이 왕위를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왕위 경쟁자 시기가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내전 위기가 고조되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중재에 앞서 모든 경쟁자들에게 자신을 최고 영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고, 1292년 11월 버릭어폰트위드 성에서 열린 법정에서 존 발리올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2. 2. 잉글랜드의 개입과 지배 야욕

알렉산더 3세의 치세는 평화와 경제적 안정을 가져왔으나, 1286년 그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왕위는 노르웨이의 마가렛에게 돌아갔지만, 그녀는 스코틀랜드로 오던 중 1290년 사망했다. 왕위 계승자가 불분명해지자, 여러 가문이 왕위를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왕위 경쟁자" 시기가 도래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내전을 우려하여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중재를 빌미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최고 영주 지위를 요구했고, 1292년 존 발리올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존 발리올은 잉글랜드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고, "Toom Tabard" (Empty Coat)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나약한 왕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영주들의 판결을 무시하고 존 발리올을 잉글랜드 법정에 소환하는 등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결국 존 발리올은 1296년 3월 잉글랜드와의 봉신 관계를 파기했다.

같은 달,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침공을 감행, 버릭어폰트위드를 공격했다. 4월에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을 격파했다. 7월, 에드워드 1세는 존 발리올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았다.

3. 앤드루 모레이와 윌리엄 월리스의 저항

잉글랜드 왕가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면서 스코틀랜드 전역에 불만과 혼란이 널리 퍼져 있었다. 반항적인 행위는 지역 잉글랜드 관리들을 겨냥했다. 1297년, 나라는 공개적인 반란으로 들끓었다. 앤드루 드 모레이와 윌리엄 월리스가 스코틀랜드의 첫 번째 중요한 애국자로 부상했다.[1]

; 앤드루 모레이의 북부 봉기

앤드루 드 모레이는 북부 지주인 페티의 앤드루 드 모레이의 아들로, 1296년 4월 던바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포로로 잡혔으나, 1296-97년 겨울 체스터 성에서 탈출했다.[1] 그는 모레이 만 북쪽 해안의 아보크에 있는 아버지의 성으로 돌아가 존 발리올의 이름으로 깃발을 올리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밴프에서 인버네스에 이르는 잉글랜드 수비대를 공격하여 파괴했다.[1] 곧 모레이 지방 전체가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모레이는 이 지역을 확보한 뒤 스코틀랜드 북동부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1]

; 윌리엄 월리스의 등장과 활약

1297년, 윌리엄 월리스는 라나크에서 잉글랜드 보안관 윌리엄 해즐릭을 살해하고 라나크 주둔군을 공격하며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의 선봉에 섰다.[2] 이 소식이 스코틀랜드 전역에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월리스에게 합류했고,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샤트의 지원은 월리스와 그의 군대에 대한 귀족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1] 이전에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그들을 단순한 불법자들로 여겼으나, 위샤트 주교의 지지로 인해 월리스군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월리스는 윌리엄 더글러스와 함께 잉글랜드가 임명한 스코틀랜드의 법무관인 윌리엄 드 오름스비의 거처인 스코틀랜드 스콘을 공격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내고자 했다.[1] 스콘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신성하게 여겨지는 장소였기에, 이곳에서의 승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오름스비는 월리스의 공격을 미리 알고 도망쳤다.[1]

라나크의 윌리엄 월리스 동상


한편, 귀족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 1세는 헨리 퍼시와 로버트 클리포드에게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가도록 했다. 또한, 로버트 브루스에게는 더글러스의 요새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3] 그러나 브루스는 스코틀랜드의 대의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어떤 사람도 자신의 살과 피를 미워하지 않으며,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나의 백성과 내가 태어난 국가에 합류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스코틀랜드군에 합류했다.[3]

1297년 7월,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군은 어바인 근처에서 만났지만, 스코틀랜드 진영 내 불화로 인해 전투는 제대로 시작되지 못했다.[4] 지도자들은 길고 무익한 협상을 이끌었는데, 이는 월리스가 병사를 징집하고 훈련할 시간을 벌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으로 추측된다.[4] 이후 월리스와 앤드루 모레이는 군대를 나누어 잉글랜드군을 던디 성까지 몰아냈다.[1]

;스털링 다리 전투 (1297)

던디 성을 포위하는 동안 월리스는 잉글랜드 군대가 다시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으며 이번에는 존 드 와렌 백작의 지휘하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월리스는 던디 마을의 주요 인물들에게 성 포위를 맡기고 잉글랜드 군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이동했다. 최근 군대를 합친 월리스와 모레이는 스털링 강을 건너는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오킬 언덕에 배치되어 잉글랜드 군과 전투를 준비했다.

당시 월리스와 모레이는 모두 20대 후반이었고, 아직 스코틀랜드의 국민 영웅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스코틀랜드 귀족 중 일부는 잉글랜드의 충성 요구에 굴복했지만(스코틀랜드 대의를 계속 지지하면서), 월리스의 군대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한 투쟁에 확고히 헌신했다.[1]

3. 1. 앤드루 모레이의 북부 봉기

앤드루 드 모레이는 북부 지주인 페티의 앤드루 드 모레이의 아들로, 1296년 4월 던바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포로로 잡혔으나, 1296-97년 겨울 체스터 성에서 탈출했다.[1] 그는 모레이 만 북쪽 해안의 아보크에 있는 아버지의 성으로 돌아가 존 발리올의 이름으로 깃발을 올리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밴프에서 인버네스에 이르는 잉글랜드 수비대를 공격하여 파괴했다.[1] 곧 모레이 지방 전체가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모레이는 이 지역을 확보한 뒤 스코틀랜드 북동부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1]

3. 2. 윌리엄 월리스의 등장과 활약

1297년, 윌리엄 월리스는 라나크에서 잉글랜드 보안관 윌리엄 해즐릭을 살해하고 라나크 주둔군을 공격하며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의 선봉에 섰다.[2] 이 소식이 스코틀랜드 전역에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월리스에게 합류했고,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샤트의 지원은 월리스와 그의 군대에 대한 귀족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1] 이전에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그들을 단순한 불법자들로 여겼으나, 위샤트 주교의 지지로 인해 월리스군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1]

월리스는 윌리엄 더글러스와 함께 잉글랜드가 임명한 스코틀랜드의 법무관인 윌리엄 드 오름스비의 거처인 스코틀랜드 스콘을 공격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내고자 했다.[1] 스콘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신성하게 여겨지는 장소였기에, 이곳에서의 승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오름스비는 월리스의 공격을 미리 알고 도망쳤다.[1]

한편, 귀족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 1세는 헨리 퍼시와 로버트 클리포드에게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가도록 했다. 또한, 로버트 브루스에게는 더글러스의 요새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3] 그러나 브루스는 스코틀랜드의 대의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어떤 사람도 자신의 살과 피를 미워하지 않으며,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나의 백성과 내가 태어난 국가에 합류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스코틀랜드군에 합류했다.[3]

1297년 7월,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군은 어바인 근처에서 만났지만, 스코틀랜드 진영 내 불화로 인해 전투는 제대로 시작되지 못했다.[4] 지도자들은 길고 무익한 협상을 이끌었는데, 이는 월리스가 병사를 징집하고 훈련할 시간을 벌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으로 추측된다.[4] 이후 월리스와 앤드루 모레이는 군대를 나누어 잉글랜드군을 던디 성까지 몰아냈다.[1]

3. 3. 스털링 다리 전투 (1297)

1297년 9월 11일, 앤드루 모레이와 윌리엄 월리스의 공동 지휘를 받는 스코틀랜드군은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서리 백작의 군대와 맞붙었다. 스코틀랜드군은 다리의 북동쪽에 배치되어 잉글랜드군 선봉대가 다리를 건너오도록 한 뒤 공격을 가했다. 잉글랜드 기병대는 다리 주변의 늪지대에서 무력함을 드러냈고, 그들 중 다수가 살해당했다. 잉글랜드 증원군이 건너는 동안 다리가 붕괴되었고, 강 반대편에 있던 잉글랜드군은 전장에서 도망쳤다.[1]

스털링 다리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


스코틀랜드군은 비교적 가벼운 사상자를 냈지만, 앤드루 모레이가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의 대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스털링 다리 전투는 스코틀랜드에게 첫 번째 주요 승리였다.[1]

잉글랜드군을 스코틀랜드에서 몰아낸 후, 월리스는 국가 행정에 관심을 돌렸다. 그의 초기 의도 중 하나는 유럽과의 상업적 및 외교적 관계를 재건하고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 시대에 스코틀랜드가 누렸던 해외 무역을 되찾는 것이었다. 뤼베크의 한자 동맹 도시에 보관된 라틴어 문서가 하나 있는데, 이는 1297년 10월 11일에 "스코틀랜드 왕국과 왕국의 공동체의 지도자 앤드루 드 모레이와 윌리엄 월리스"가 보낸 것이다. 이 문서에는 뤼베크와 함부르크의 상인들에게 신의 은총으로 전쟁을 통해 잉글랜드로부터 회복된 스코틀랜드 왕국의 모든 지역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렸다.[1] 이 문서가 서명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월리스는 잉글랜드 침공을 감행했다. 노섬벌랜드로 건너간 스코틀랜드군은 엉망이 된 채 남쪽으로 도망치는 잉글랜드군을 뒤따랐다. 스코틀랜드군은 컴벌랜드로 서쪽으로 돌기 전까지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코커머스까지 약탈한 후, 월리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노섬벌랜드로 돌아와 700개의 마을에 불을 질렀다. 전리품을 가득 싣고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월리스는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1]

1298년 3월, 월리스는 스코틀랜드의 주요 귀족 중 한 명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망명 중인 국왕 존 발리올을 대신하여 스코틀랜드 왕국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

4. 월리스의 섭정과 폴커크 전투 (1298)

1297년 9월 11일, 모레이윌리엄 월리스의 공동 지휘를 받는 스코틀랜드군은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서리 백작의 군대와 맞붙었다. 스코틀랜드군은 다리의 북동쪽에 배치되어 잉글랜드군 선봉대가 다리를 건너오도록 한 뒤 공격을 가했다. 잉글랜드 기병대는 다리 주변의 늪지대에서 무력함을 드러냈고, 그들 중 다수가 살해당했다. 잉글랜드 증원군이 건너는 동안 다리가 붕괴되었다. 강 반대편에 있던 잉글랜드군은 전장에서 도망쳤다. 스코틀랜드군은 비교적 가벼운 사상자를 냈지만, 앤드루 모레이가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의 대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스털링 다리 전투는 스코틀랜드에게 첫 번째 주요 승리였다.[1]

잉글랜드군을 스코틀랜드에서 몰아낸 후, 월리스는 국가 행정에 관심을 돌렸다. 그의 초기 의도 중 하나는 유럽과의 상업적 및 외교적 관계를 재건하고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 시대에 스코틀랜드가 누렸던 해외 무역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의 행정적 수완에 대한 증거는 그의 처형 후 에드워드의 관리들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뤼베크의 한자 동맹 도시에 보관된 라틴어 문서가 하나 있는데, 이는 1297년 10월 11일에 "스코틀랜드 왕국과 왕국의 공동체의 지도자 앤드루 드 모레이와 윌리엄 월리스"가 보낸 것이다. 이 문서에는 뤼베크와 함부르크의 상인들에게 신의 은총으로 전쟁을 통해 잉글랜드로부터 회복된 스코틀랜드 왕국의 모든 지역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렸다.[1]

이 문서가 서명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월리스는 잉글랜드 침공을 감행했다. 노섬벌랜드로 건너간 스코틀랜드군은 엉망이 된 채 남쪽으로 도망치는 잉글랜드군을 뒤따랐다. 두 군대 사이에 갇힌 수백 명의 난민들이 뉴캐슬 성벽 뒤로 피신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컴벌랜드로 서쪽으로 돌기 전까지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코커머스까지 약탈한 후, 월리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노섬벌랜드로 돌아와 700개의 마을에 불을 질렀다. 전리품을 가득 싣고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월리스는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1]

1298년 3월, 월리스는 스코틀랜드의 주요 귀족 중 한 명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망명 중인 국왕 존 발리올을 대신하여 스코틀랜드 왕국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에드워드와의 대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1]

1298년 1월,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스코틀랜드를 포함하지 않는 휴전 조약을 에드워드와 체결하여 스코틀랜드 동맹을 버렸다. 에드워드는 3월에 프랑스에서 전투를 벌이다 잉글랜드로 돌아와 군대를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정부의 소재지를 요크로 옮겼다.

7월 3일 그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월리스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궤멸시키려 했다. 7월 22일, 에드워드의 군대는 폴커크 전투 근처에서 월리스가 이끄는 훨씬 소규모의 스코틀랜드군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기술적 우위를 점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멀리서 수많은 화살을 쏘아 월리스의 창병과 기병을 학살했다. 폴커크 전투에서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죽었다. (사망자 수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와 그의 군대는 곧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따라서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패배는 월리스의 군사적 명성을 무너뜨렸다. 그는 근처의 빽빽한 숲으로 물러났고 12월에 섭정직을 사임했다.

4. 1. 스코틀랜드 수호자 월리스

윌리엄 월리스는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스코틀랜드에서 몰아낸 후, 국가 행정 개혁과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 시대에 스코틀랜드가 누렸던 해외 무역을 되찾는 등 유럽과의 상업적 및 외교적 관계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1] 1297년 10월 11일, 월리스는 뤼베크함부르크에 서신을 보내, 전쟁을 통해 잉글랜드로부터 회복된 스코틀랜드 왕국의 모든 지역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알리며 스코틀랜드와의 교역 재개를 요청했다.[1]

월리스는 잉글랜드 침공을 감행하여 노섬벌랜드를 거쳐 컴벌랜드까지 약탈하고 700개의 마을에 불을 질렀으며, 이로써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1] 1298년 3월, 월리스는 스코틀랜드의 주요 귀족 중 한 명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망명 중인 국왕 존 발리올을 대신하여 스코틀랜드 왕국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

4. 2. 잉글랜드 침공과 폴커크 전투

1298년, 윌리엄 월리스는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노섬벌랜드와 컴벌랜드를 약탈했다.[1] 그러나 같은 해 7월, 폴커크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장궁병에 의해 스코틀랜드군은 대패하고, 월리스는 섭정직을 사임했다.[1] 이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대의를 위한 지원을 얻기 위해 유럽으로 보내졌고, 필리프 4세의 지원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으며, 아마 로마로도 갔을 것이다.[1]

월리스의 사임 이후, 로버트 브루스와 존 코민이 공동으로 왕국 수호자로 임명되었지만, 개인적인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1] 1299년, 프랑스와 로마의 외교적 압력으로 에드워드는 감옥에 갇힌 존 왕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보호 아래 석방하도록 설득했다.[1] 교황은 또한 교황 칙서인 ''Scimus, Fili''에서 에드워드의 스코틀랜드 침공과 점령을 비난하며 공격 중단과 협상 시작을 명령했지만, 에드워드는 이를 무시했다.[1] 한편, 스코틀랜드인들은 스털링 성을 재탈환했다.[1]

1300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애넌데일과 갤러웨이를 침공했다.[1] 이 원정에서 에드워드 1세는 16,000명의 보병을 요청했지만 9,000명만 소집할 수 있었고, 총 10,000명 정도의 군대를 이끌었다.[5][6][7] 영국군은 카엘라버록 성을 장악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8월에 교황의 철수 요구 서한을 받은 에드워드는 10월 30일에 스코틀랜드인들과 휴전을 맺고 영국으로 돌아갔다.[1]

1301년 7월,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정복을 위한 6번째 원정을 시작하여 양면 공격을 감행했다.[1] 웨일스 공이 지휘하는 군대는 남서부 지역을, 에드워드 자신이 지휘하는 더 큰 군대는 동쪽으로 진격했다.[1] 스코틀랜드군은 로크마벤에서 왕자의 군대를 공격하고 보스웰에서 왕의 군대를 위협했지만, 두 영국군은 린리스코에서 겨울을 맞이했다.[1] 1302년 1월, 에드워드는 9개월 휴전에 동의했다.[1]

이 무렵, 로버트 브루스는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이는 그가 존 발리올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혐오스러워했기 때문일 수 있다.[1] 또한,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교황의 지지 상실도 스코틀랜드 애국자들에게 큰 타격이었다.[1] 필리프 4세는 국내 문제로 인해 스코틀랜드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결국 에드워드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보호 조항을 생략했다.[1]

1303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다시 침공을 시작하여 에든버러를 거쳐 퍼스까지 진격했다.[1] 코민은 소규모 군대로 에드워드의 군대에 맞설 수 없었고, 에드워드는 던펌린에서 겨울을 보냈다.[1] 1304년 초, 에드워드는 기습대를 보내 프레이저와 월리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격퇴했다.[1] 대부분의 스코틀랜드인들이 에드워드에게 항복했지만, 월리스는 항복을 거부했다.[1] 에드워드는 스털링 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

한편, 로버트 브루스는 비밀리에 윌리엄 램버턴과 협정을 맺어 미래의 독립에 대한 헌신을 나타냈다.[1] 1305년, 스코틀랜드는 방어 능력을 상실했고,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와 합병하기 시작했다.[1] 같은 해 8월, 윌리엄 월리스는 글래스고 근처의 로브로스턴에서 체포되어 런던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1]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에 꽂혔고, 사지는 뉴캐슬, 베릭, 스털링, 퍼스에 전시되었다.[1]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갤러리의 D. W. 스티븐슨의 월리스 동상, 에든버러

5. 폴커크 전투 이후와 월리스의 처형

폴커크 전투 이후, 로버트 브루스와 존 코민이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들은 개인적인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다.[1] 1299년, 프랑스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외교적 압력으로 에드워드 1세존 발리올을 교황의 보호 아래 석방했다. 교황은 또한 교황 칙서 ''Scimus, Fili''에서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침공과 점령을 비난하며 공격 중단과 협상을 명령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이를 무시했다.[1]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대의를 위한 추가 지원을 얻기 위해 유럽으로 보내졌다. 월리스는 필리프 4세의 지원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고, 아마 로마로 갔을 것이다.[1] 윌리엄 램버턴, 성 앤드루스 주교는 브루스와 코민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세 번째 중립적인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또한 스털링 성을 재탈환했다.[1]

1300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이끌어 애넌데일과 갤러웨이를 침공했다. 그러나 8월에 교황은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성공을 거두지 못한 에드워드 1세는 10월 30일에 스코틀랜드인들과 휴전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1]

그 해, 로버트 브루스는 공동 수호자직에서 사임했고, 잉그람 드 움프라빌로 대체되었다. 1301년 5월, 드 움프라빌, 존 코민, 윌리엄 램버턴은 공동 수호자직에서 사임했고, 존 드 소울리스가 단독 수호자로 대체되었다. 소울리스는 브루스나 코민 진영의 일원이 아니고 애국자였기 때문에 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왕좌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을 재개했다.[1]

1301년 7월,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정복을 목표로 6번째 스코틀랜드 원정을 시작했다. 1302년 1월, 에드워드 1세는 9개월 휴전에 동의했다.[1] 이 무렵, 로버트 브루스는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가 돌아선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존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좌를 되찾을 것이라는 소문과, 브루스 가문이 왕좌를 얻을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 등이 있었다.[1] 또한, 로버트의 아버지는 늙고 병들어 에드워드 1세와 평화를 모색하기를 바랐을 것이다.[1] 그러나 브루스는 1302년 3월 멜로즈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적 소집이 없었을 때 수도승들을 자신의 군대에 소집한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앞으로는 "온 왕국의 공동 군대"가 아닌 한 수도승들에게 봉사를 요구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1]

스코틀랜드 애국자들에게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교황으로부터의 지지 상실이 더 심각했다. 필리프 4세는 국내 반란에 직면하여 스코틀랜드인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필리프 4세의 영향력 없이 교황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지는 사라졌다. 필리프 4세는 스코틀랜드인들을 위한 보호 조항이 없는 에드워드 1세와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 1302년 11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임시 휴전이 끝났을 때, 에드워드 1세는 존 세그레이브와 군대를 에든버러 서부 지역으로 정찰 원정대로 보냈다. 그들은 사이먼 프레이저와 코민에게 매복되었다. 그러나 1303년 5월,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스코틀랜드인들을 위한 고려 사항을 생략했을 때, 그들의 성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5. 1. 공동 섭정 체제와 외교적 노력

폴커크 전투 이후, 로버트 브루스와 존 코민이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어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을 이어갔지만, 개인적인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 1299년, 프랑스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외교적 압력으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존 발리올을 교황의 보호 아래 석방해야 했다. 교황은 ''Scimus, Fili'' 칙서를 통해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침공을 비난하고 공격 중단과 협상을 명령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이를 무시했다.[1]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한 지원을 얻기 위해 유럽으로 파견되어 필리프 4세의 지원을 요청하고 로마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1] 윌리엄 램버턴은 브루스와 코민 사이의 질서 유지를 위해 세 번째 중립적인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스털링 성을 재탈환했다.[1]

1300년, 에드워드 1세는 애넌데일과 갤러웨이를 침공했지만, 교황의 철수 요구 서한을 받고 10월 30일에 스코틀랜드와 휴전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1] 그 해, 로버트 브루스는 공동 섭정직에서 사임하고 잉그람 드 움프라빌로 대체되었다.[1] 1301년, 드 움프라빌, 존 코민, 윌리엄 램버턴은 공동 섭정직에서 사임하고, 존 드 소울리스가 단독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존 발리올의 복위를 위해 노력했다.[1]

1301년 7월, 에드워드 1세는 6번째 스코틀랜드 원정을 시작했지만, 1302년 1월에 9개월 휴전에 동의했다.[1] 이 무렵, 로버트 브루스는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이는 존 발리올의 복귀 가능성과 부친의 영향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1] 그러나 브루스는 1302년 3월 멜로즈 수도원 수도승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적 소집이 아닌 경우에는 봉사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여전히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1]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교황의 지지를 상실하면서 위기에 처했다. 필리프 4세는 국내 문제로 인해 스코틀랜드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교황의 지지도 사라졌다.[1]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보호 조항을 포함시키지 않았다.[1] 1302년 11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의 휴전이 끝난 후, 에드워드 1세는 존 세그레이브를 보내 정찰을 시켰으나, 사이먼 프레이저와 코민에게 격퇴되었다.[1] 그러나 1303년 5월,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고려를 생략하자,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5. 2. 월리스의 체포와 처형 (1305)

1305년 8월 3일, 윌리엄 월리스글래스고 근처 로브로스턴에서 존 멘테이스 경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잉글랜드군에게 넘겨졌다.[1] 그는 즉시 런던으로 압송되어 공개 재판을 받았다.[1] 1305년 8월 23일, 윌리엄 월리스는 스미스필드의 엘름에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1] 그는 교수형에 처해진 후 내장이 제거되고 사지가 찢기는 극형을 당했으며,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에 꽂혔다.[1] 잉글랜드 정부는 그의 사지를 뉴캐슬, 베릭, 스털링, 퍼스에 각각 전시하여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경고했다.[1]

6. 로버트 브루스의 등장과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전환

6. 1. 로버트 브루스의 왕위 계승

로버트 브루스는 윌리엄 월리스가 처형된 후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의 지도자로 부상했다.[1] 브루스는 캐릭 백작이자 애넌데일의 제7대 영주로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1] 그는 왕위를 주장할 경우 발생할 또 다른 전쟁에 대해 고심했지만, 결국 왕이 되기로 결심한다.

1306년, 브루스는 경쟁자였던 존 코민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1] 브루스는 코민에게 자신의 왕위 계승을 지지해 줄 것을 제안했고, 코민은 이를 수락하는 듯 했다. 그러나 코민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사실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밀고했고, 브루스는 이를 피해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1]

브루스는 덤프리스에서 코민을 만나 그의 배신을 추궁했다. 격분한 브루스는 코민을 칼로 찔렀고, 그의 부하들이 코민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브루스는 파문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스코틀랜드 교회의 지지를 얻어 1306년 3월 25일 스콘 수도원에서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로 즉위했다.[1]

배넉번의 로버트 1세 동상


로버트 1세는 즉위 후 잉글랜드로부터 왕국을 해방하기 위한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으나, 메스벤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때 스코틀랜드 본토에서 쫓겨나기도 했다.[1] 그의 가족들은 잉글랜드 군에게 붙잡혔고, 세 형제는 처형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1307년, 은신에서 돌아온 로버트 1세에게 스코틀랜드인들이 합류하였고, 여러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은 잉글랜드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잉글랜드는 브루스의 여성 친척들을 석방하였다.[1]

1320년 아브로스 선언을 통해 교황에게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받았고,[1] 1328년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로부터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과 로버트 1세의 왕위를 인정받았다.[1]

6. 2. 배넉번 전투 (1314)

7. 스코틀랜드의 독립 인정과 전쟁의 종결

7. 1. 아브로스 선언 (1320)

7. 2.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 (1328)

8. 역사적 의의

8. 1. 스코틀랜드 민족 정체성 확립

8. 2.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관계 재정립

8. 3. 중세 유럽 정치 지형 변화

8. 4.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Scotland's History: The Wars of Independence http://www.bbc.co.uk[...]
[1] 웹사이트 The Scottish Wars of Independence, 1286–1328 http://www.education[...]
[2] 웹사이트 New Information on the Guardians' appointment in 1286 and on Wallace's Rising in 1297 http://www.breakingo[...] 2015-05-19
[3] 간행물 The Wars of the Bruces: England and Ireland 1306–1328 Donald
[4] 서적 Robert Bruce and the Community of the Realm of Scotland
[5] 서적 Edward I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1997
[6] 문서 An Exercise in Frustration: The Scottish Campaign of Edward I, 1300 Durhan 1999
[7] 문서 Republic of Le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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