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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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개조)는 1962년 11월 16일에 발족한 이케다 하야토 내각의 두 번째 개조 내각이다. 1962년 7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이케다 하야토가 재선에 성공한 후, 당내 비판 세력을 반영하여 내각과 자민당 임원을 개선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오히라 마사요시, 다나카 가쿠에이 등이 있으며, 신도쿄 국제공항 건설 방침 결정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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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7월 18일에 출범한 제2차 이케다 내각을 1962년 7월에 개조하여 새롭게 구성한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는 이케다 하야토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며,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사임 후 이케다 하야토가 경제기획청 장관직을 겸임하게 된 것이 특징이다.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개조) | |
---|---|
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내각 |
일본어 표기 | 第2次池田第2次改造内閣 (다이니지 이케다 다이니지 가이조 나이카쿠) |
대수 | 59대 |
수상 이름 | 이케다 하야토 |
성립 연도 | 1962년 |
성립 날짜 | 7월 18일 |
종료 연도 | 1963년 |
종료 날짜 | 7월 18일 |
여당 | 자유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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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립 배경 및 정치적 상황
1962년 7월 14일에 치러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현직 총재인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단독으로 출마하여 사실상 이케다 총재의 재신임을 묻는 투표가 되었다. 이케다는 391표를 얻어 재선되었지만, 무효표 등을 합하면 135표의 비판표가 나와 내각 개조와 자민당 임원 인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개조)은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1962년 7월 18일에 단행한 내각 개조이다.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내각과 비교하면, 개조 전에는 당내 실력자들을 망라했지만 사토 에이사쿠, 미키 다케오,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각료에서 물러나고 고노 이치로가 잔류했다. 또한, 내각관방장관 구로가네 야스미는 고노에게 기울어, 사토(관료파)와 고노(당인파)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와 대장대신 다나카 가쿠에이가 외교와 재정을 장악하며 젊은 실력자로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든 점도 주목할 만하다.
내각은 1962년 11월 16일에 제2 국제공항 건설 방침을 각의 결정했지만, 관료파와 당인파의 대립이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미궁에 빠뜨리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나리타 공항 문제)
3. 내각 구성
개각 당시 내각의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각 부처별 정무차관은 다음과 같다.
부처 | 정무 차관 |
---|---|
법무성 | 노모토 시나키치 |
외무성 | 이이즈카 사다스케 |
대장성 | 하라다 겐, 이케다 기요시 |
문부성 | 다나카 게이이치 |
후생성 | 도카이 겐사부로 |
농림성 | 쓰시마 분지, 오타니 요시오 |
통상산업성 | 히로세 마사오, 고바야시 다다지 |
운수성 | 오이시 부이치 |
우정성 | 야스오카 다케히사 |
노동성 | 다무라 하지메 |
건설성 | 마쓰자와 유조 |
자치성 | 후지타 요시미쓰 |
행정관리청 | 우다 구니에 |
홋카이도 개발청 | 고니시 히데오 |
방위청 | 이쿠타 히로카즈 |
경제기획청 | 다테바야시 미키오 |
과학기술청 | 우치다 쓰네오 |
3. 1. 각료 명단
직책 | 이름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이케다 하야토 | 이케다파 |
법무대신 | 나카가키 구니오 | 이시이파 |
외무대신 | 오히라 마사요시 | 이케다파 |
대장대신 | 다나카 가쿠에이 | 사토파 |
문부대신 | 아라키 마스오 | 이케다파 |
후생대신 | 니시무라 에이이치 | 사토파 |
농림대신 | 시게마사 세이시 | 고노파 |
통상산업대신 | 후쿠다 하지메 | 오노파 |
운수대신 | 아야베 겐타로 | 후지야마파 |
우정대신 | 데시마 사카에 | 참의원 의원 |
우정대신 | 오자와 규타로 | 1963년 1월 8일 ~ |
노동대신 | 오하시 다케오 | 이케다파 |
건설대신 | 고노 이치로 | 고노파 |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 가와시마 쇼지로 | 가와시마파, 겸무 |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 고노 이치로 | 겸무, 1962년 11월 2일 ~ |
긴키권 정비 장관 | 고노 이치로 | 겸무, 고노파, 1963년 7월 10일 설치 |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시노다 고사쿠 | 이시이파 |
행정관리청 장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가와시마 쇼지로 | 구 기시파, 가와시마파 |
방위청 장관 | 시가 겐지로 | 미키파 |
경제기획청 장관 | 미야자와 기이치 | 참의원 의원, 이케다파 |
과학기술청 장관 | 곤도 쓰루요 | 참의원 의원, 오노파 |
내각관방장관 | 구로가네 야스미 | 이케다파 |
총리부 총무장관 | 도쿠야스 지쓰조 | 오노파 |
3. 2. 기타 주요 직책
- 내각법제국 장관: 하야시 슈조
-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핫타 사다요시 (1962년 7월 27일 ~ )
- 내각관방부장관 (사무): 호소야 기이치
- 총리부 총무부장관: 후루야 도루
3. 3. 정무 차관
부처 | 정무 차관 |
---|---|
법무성 | 노모토 시나키치 |
외무성 | 이이즈카 사다스케 |
대장성 | 하라다 겐, 이케다 기요시 |
문부성 | 다나카 게이이치 |
후생성 | 도카이 겐사부로 |
농림성 | 쓰시마 분지, 오타니 요시오 |
통상산업성 | 히로세 마사오, 고바야시 다다지 |
운수성 | 오이시 부이치 |
우정성 | 야스오카 다케히사 |
노동성 | 다무라 하지메 |
건설성 | 마쓰자와 유조 |
자치성 | 후지타 요시미쓰 |
행정관리청 | 우다 구니에 |
홋카이도 개발청 | 고니시 히데오 |
방위청 | 이쿠타 히로카즈 |
경제기획청 | 다테바야시 미키오 |
과학기술청 | 우치다 쓰네오 |
4. 주요 정책 및 사건
1962년 7월 14일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단독 입후보하여 사실상 신임 투표가 진행되었다. 이케다는 391표를 얻어 재선되었으나, 무효표 등을 포함한 135표의 반대표가 나와 내각 및 당 개편에 영향을 주었다.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 내각과 비교하면, 이전 내각은 당내 실력자들을 대거 기용했으나, 이번 개각에서는 사토 에이사쿠, 미키 다케오,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물러나고 고노 이치로가 잔류하였다. 구로가네 야스미 내각 관방장관은 고노에게 기울어, 사토 (관료파)와 고노 (당인파) 간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다.
4. 1. 경제 정책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과 다나카 가쿠에이 대장대신이 각각 외교와 재정을 장악하면서 젊은 실력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이후 일본의 경제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오히라-다나카 라인'을 형성하게 된다.4. 2. 외교 정책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과 다나카 가쿠에이 대장대신이 각각 외교와 재정을 장악하여, 젊은 실력자로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4. 3. 국내 정치
1962년 11월 16일, 내각은 제2국제공항 건설 방침을 각의에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관료파와 당인파의 대립은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지연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나리타 공항 문제)5. 평가 및 영향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 내각과 비교하면, 개조 이전에는 당내 실력자들을 망라한 내각이었지만 사토 에이사쿠, 미키 다케오, 후지야마 아이이치로는 각료에서 물러나고 고노 이치로가 잔류했다. 내각 관방 장관 구로가네 야스미는 고노에게 기울었고, 사토 (관료파)와 고노 (당인파)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1962년 11월 16일, 내각은 제2 국제공항 건설 방침을 각의 결정했지만, 관료파와 당인파의 대립으로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이 迷走(미로)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나리타 공항 문제)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 대신과 다나카 가쿠에이 대장 대신이 외교와 재정을 장악하여, 젊은 실력자로서 부상하는 계기가 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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