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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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 이치로는 1898년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이다.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사에 근무하다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이누카이 내각에서 비서관을 지냈으며, 일본자유당 간사장을 거쳐 농림상, 경제기획청 장관, 건설상, 농림수산성 장관 등을 역임했다.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일소 국교 회복을 위한 협상을 이끌었고,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기여했다. 1965년 대동맥류 파열로 사망했으며, 그의 파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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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이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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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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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노 이치로 |
원어 이름 | 河野 一郎 |
로마자 표기 | Kōno Ichirō |
출생일 | 1898년 6월 2일 |
출생지 |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촌 (현 오다와라시) |
사망일 | 1965년 7월 8일 |
정당 | 자유민주당 |
자녀 | 고노 요헤이 |
학력 |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
직업 | 일본의 정치인 |
관직 | |
총리 |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
임기 시작 | 1964년 7월 18일 |
임기 종료 | 1965년 7월 8일 |
선임자 | 직위 신설 |
후임자 | 직위 폐지 |
총리1 | 이케다 하야토 |
임기 시작1 | 1962년 7월 18일 |
임기 종료1 | 1964년 7월 18일 |
선임자1 | 나카무라 우메키치 |
후임자1 | 고야마 오사노리 |
총리2 | 이케다 하야토 |
임기 시작2 | 1961년 7월 18일 |
임기 종료2 | 1962년 7월 18일 |
선임자2 | 스토 히데요 |
후임자2 | 시게마사 세이시 |
총리3 | 기시 노부스케 |
임기 시작3 | 1957년 7월 10일 |
임기 종료3 | 1958년 6월 12일 |
선임자3 | 우다 고이치 |
후임자3 | 미키 다케오 |
총리4 | 하토야마 이치로 |
임기 시작4 | 1955년 11월 22일 |
임기 종료4 | 1956년 12월 23일 |
선임자4 | 가와시마 쇼지로 |
후임자4 | 오쿠보 도메지로 |
총리5 | 하토야마 이치로 |
임기 시작5 | 1954년 12월 10일 |
임기 종료5 | 1956년 12월 23일 |
선임자5 | 호리 시게루 |
후임자5 | 이데 이치타로 |
기타 관직 | |
임기 시작6 | 1964년 7월 18일 |
임기 종료6 | 1964년 11월 9일 |
임기 시작7 | 1963년 7월 10일 |
임기 종료7 | 1964년 7월 18일 |
임기 시작8 | 1962년 11월 2일 |
임기 종료8 | 1964년 7월 18일 |
임기 시작9 | 1962년 7월 18일 |
임기 종료9 | 1964년 7월 18일 |
임기 시작10 | 1954년 12월 10일 |
임기 종료10 | 1956년 12월 23일 |
임기 시작11 | 1961년 7월 18일 |
임기 종료11 | 1962년 7월 18일 |
임기 시작12 | 1957년 7월 10일 |
임기 종료12 | 1958년 6월 12일 |
임기 시작13 | 1955년 11월 22일 |
임기 종료13 | 1956년 12월 23일 |
의정 활동 | |
선거구 | 가나가와현 제3구 |
당선 횟수 | 11회 |
임기 시작14 | 1932년 2월 21일 |
임기 종료14 | 1946년 6월 22일 |
임기 시작15 | 1952년 10월 2일 |
임기 종료15 | 1965년 7월 8일 |
정당 활동 | |
총재 | 기시 노부스케 |
임기 시작16 | 1958년 |
임기 종료16 | 1959년 |
임기 시작17 | 1953년 |
임기 종료17 | 1954년 |
훈장 | |
훈장 | 종2위 |
훈장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가족 | |
아버지 | 고노 지헤이 |
동생 | 고노 겐조 |
배우자 | 고노 데루코 |
자녀 | 고노 요헤이, 고노 다로 |
경력 | |
전직 | 아사히 신문사 사원, 농림대신 비서관 |
2. 생애
고노 이치로는 1898년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촌(지금의 오다와라시)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1] 어릴 때부터 정치가의 길을 걷도록 키워졌으며,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1] 대학 졸업 후 아사히 신문사에서 근무하다가 1932년 입헌정우회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고노 이치로는 미군 점령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가,[1] 1951년 복권되어 하토야마 이치로가 자유당을 창당하는 것을 도왔다.[1] 1955년에는 보수합동을 통해 자유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6년, 고노는 '춘추회'라는 연구 모임을 설립하여 자신의 파벌을 만들었다. 이후 경제기획청 장관(1957-1958), 농림수산성 장관(1961-1962), 건설성 장관(1962-1964), 1964년 도쿄 올림픽 담당 국무대신(1964-1965) 등 여러 당직 및 각료직을 역임했다.
1955년 체제하에서, 1959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3선에 도전하려 하자 사토 에이사쿠, 오노 반보쿠와 비밀리에 합의하여 기시의 임기가 끝난 후 오노, 고노, 사토 순으로 총리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기시가 미일 안보 조약 개정을 강행하면서 안보 투쟁이 발생하자, 고노는 기시 내각을 붕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3][4]
안보 투쟁 이후, 고노는 1963년 우익 세력의 암살 음모에 휘말리기도 했다.[7]
1964년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후두암으로 사임하자, 고노는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유력한 후임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이케다의 유지에 따라 사토를 지지하고 부총리 겸 체육청 장관직을 맡았다.
1965년 7월 8일, 고노는 대동맥류 파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고노의 파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계승되었다.[1]
2. 1. 학창 시절
고노 이치로는 1898년 6월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촌(지금의 오다와라시)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형이 있었으나 태어난 지 몇 개월 만에 요절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자랐다. 어릴 적 고노는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했고, 부모는 호적상 생일(6월)을 3월로 고쳐 1년 일찍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훗날 이 사실이 발각되어 고노의 아버지는 호적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다.소학교 졸업 후 가나가와현립 오다와라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영어 교사를 배척하는 시위를 주도하여, 이 일로 고노를 포함한 10여 명이 낙제점을 받아 1년 유급했다. 한편, 다케다 유키치 교사에게는 '도마뱀'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친구가 칠판에 진짜 도마뱀을 올려놓아 놀라게 하는 등 장난을 쳤다. 다케다는 결국 교사직을 그만두었는데, 훗날 고노는 자신이 다케다를 괴롭혀 내쫓은 것에 대해 "참괴한 심정을 견딜 수 없다"라며 반성했다.
중학교 졸업 무렵 일본은 구하라 광업의 전성기로,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고노는 광산학을 공부하고자 와세다 대학 이공과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했고, 1년간 재수했다. 재응시에서도 이공과에는 불합격했지만, 대학 측에서 다른 학과라면 괜찮다는 제안에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동생 고노 겐조와 함께 경주부의 육상 장거리 선수로 활약했으며, 하코네 역전에서 우승하기도 했다.[38]
2. 2. 정계 입문
대학을 졸업한 뒤 아사히 신문사 입사 시험에 응시했다. 1차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2차 시험에서 낙방했는데 스기우라 주고의 추천으로 부사장 시모무라 히로시를 찾아가서 입사할 수 있었다.[1]1931년 이누카이 내각의 농림상 야마모토 데이지로의 비서관이 되었으며 다음 해인 1932년 입헌정우회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1] 총재 스즈키 기사부로의 후계를 둘러싼 당내 정쟁 때 하토야마 이치로를 도와 분투했지만 나카지마 지쿠헤이가 우위에 섰다. 고노는 이후 구하라 후사노스케를 옹립하여 나카지마에게 대항해 정우회는 구하라파인 정통파와 나카지마파인 혁신파로 분열됐다. 1942년 총선 때는 비추천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 3. 전후
1945년 11월, 고노 이치로는 일본자유당을 결성하고 초대 간사장이 되었다.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성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하토야마가 공직 추방을 당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요시다 시게루를 후임 총재로 추대했지만, 요시다가 군부에 영합한 전전의 정당 정치인들을 배제하려는 인사를 구상하자 이에 반발했다. 1946년 6월, 고노 자신도 공직 추방 명령을 받았다.[39] 1948년에는 정치 자금 문제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소환되기도 했다.[39]1951년 8월 공직 추방에서 해제된 후, 미키 부키치와 함께 자유당에 복당하여 반(反)요시다 노선을 걸었다. 1952년 총선에서 요시다가 이시바시 단잔과 고노를 제명하려 했으나 미키의 개입으로 취소되었고, 고노는 이 선거에서 당선되어 6년 만에 중의원에 복귀했다. 1953년 3월, 하토야마, 미키 등과 함께 요시다의 자유당에서 탈당하여 일본자유당을 창당하고, 일본사회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져 바카야로 해산을 초래했다. 11월에 하토야마 등이 요시다의 자유당에 복당했지만, 미키와 고노 등은 일본자유당에 남아 개진당과 제휴를 모색, 1954년 11월에 일본민주당을 창당했다.
1954년 조선 의옥으로 요시다 내각이 무너지자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성립되었고, 고노는 농림상으로 입각했다. 1955년 보수합동에 앞장서 자유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자민당 창당 후에는 대파벌인 춘추회를 이끌었다.

1956년, 고노는 '춘추회'라는 연구 모임을 설립하여 의회 내 강력한 파벌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경제기획청 장관(1957-1958), 농림수산성 장관(1961-1962), 건설성 장관(1962-1964), 1964년 도쿄 올림픽 담당 국무대신(1964-1965) 등 여러 당직 및 내각직을 역임했다.
1959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세 번째 임기를 추구하려 하자, 고노는 사토 에이사쿠, 오노 반보쿠와 함께 기시의 임기 후 오노, 고노, 사토 순으로 총리가 되는 비밀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기시가 안보 투쟁을 초래한 미일 안보 조약 갱신을 강행하자, 고노는 기습 투표에서 의도적으로 자신과 파벌을 제외시켜 항의하고 기시 내각 붕괴에 전념했다. 이로 인해 고노는 이케다 하야토의 첫 번째 내각에서 제외되었으나, 1960년 8월 자유민주당 탈당 위협 끝에 잔류하고 1961년 농림수산성 장관으로 복귀했다.[6]
안보 투쟁 이후 우익 폭력의 물결 속에서 1963년 고노 암살 음모가 발각되기도 했다.[7]
1964년, 이케다 총리는 고노에게 1964년 도쿄 올림픽 감독 임무를 맡겼고,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고노는 효과적인 경영으로 칭찬받았다.[8] 이케다가 후두암으로 사임하게 되자, 고노는 사토와 함께 유력한 후임 총리 후보였으나, 이케다의 유지에 따라 사토를 지지하고 부총리 겸 체육 장관직을 받았다.
1965년 7월 8일, 고노는 대동맥류 파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고노의 파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계승되었다.[1]
2. 4. 일소 교섭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 하토야마 이치로는 일본국 헌법 개정을 주요 정치 과제로 추진했으나, 혁신 야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자 헌법 개정을 포기했다. 대신 일소 교섭에 정치적 생명을 걸었다.[40]1955년 6월 3일 런던에서 일소 국교 회복을 위한 교섭이 시작됐지만 홋포 지역 문제를 둘러싸고 충돌해 결렬됐다. 소련은 2개 섬을 반환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어업제한구역을 설정해 일본 어선의 출입을 금지하는 보복을 했다. 그러자 일본 수산업계가 큰 타격을 입었고, 이에 수산업을 관장하는 농림성의 수장인 고노 이치로가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노는 소련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했다.[40]
1956년 4월 29일 소련 어업상 알렉산더 이시코프와 교섭이 시작됐지만 난항을 겪었다. 이에 정부수반 니콜라이 불가닌과 직접 교섭에 나섰다. 불가닌이 "러일 전쟁에서 귀국이 이겼을 때는 가라후토를 취하고 어업 권익도 취했다. 이번엔 졌으니까 우리가 하는 말을 듣는 게 상도가 아닌가"라며 "우리 입장에선 쿠나시르섬과 이투루프섬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귀국의 얘기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문제는 해결된 거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고노는 "당신이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당면한 어업 문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정도의 문제를 소련 정부수반이 해결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게 불가능하다면 복잡한 의논은 할 필요가 없다"라고 받아쳤다. 이에 불가닌은 이시코프에게 협력할 것을 지시하여 어업 조약이 체결됐으며 7월 31일까지 국교 정상화 교섭도 개시할 것에 합의했다. 조인식을 끝내고 고노가 귀국했을 때 도쿄 국제공항에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40]
이후 하토야마는 1956년에 소련공산당 제1서기 니키타 흐루쇼프와 회동하여 10월에 일소공동선언을 발표해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됐다. 조인식을 위해 하토야마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고노도 동행했다.[40]
2. 5. 만년
1956년 총재 선거에서 기시 노부스케를 지지했으나 이시바시 단잔에게 패배한 고노 이치로는, 이시바시의 병환 퇴진 후 기시가 총재가 되자 제1차 기시 내각 (개조)에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입각했다.[41] 제2차 기시 내각에서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이 되었으나, 간사장 자리를 요구하다 거절당한 후 반주류파로 돌아섰다.[41]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때 기시 내각을 비판하며 조약 비준 표결에 불참했다.[41]1960년 기시 퇴진 후 오노 반보쿠 등을 옹립하려 했으나 이케다 하야토에게 패배했고, 자민당 탈당까지 고려했으나 오노 등의 설득으로 단념했다.[41] 1961년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에 농림상,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개조)에 건설상으로 입각하여 1964년 하계 올림픽 준비에 힘썼다.[41] 제3차 이케다 내각 (개조)에서는 부총리 겸 도쿄올림픽 담당 국무상이 되었으나, 올림픽 준비는 거의 끝났다고 언급하며 달가워하지 않았다.[41] 1963년에는 우익 인사 노무라 슈스케가 고노의 집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노무라는 고노의 파벌 항쟁 격화를 범행 동기로 밝혔다.[41]
1964년 이케다 퇴진 후 고노는 후계 총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이케다가 지명한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로 추대되었다.[41] 제1차 사토 내각에서 부총리 겸 체육 진흥 스포츠 담당 대신을 맡았지만, 1965년 내각 개조 때 유임을 거부하고 1개월 뒤 대동맥 박리로 급사했다.[41] 향년 67세.[41] 아들 고노 요헤이는 고노의 마지막 말이 "괜찮아, 안 죽어"였다고 밝혔다.[41]
고노는 1956년 "춘추회"(春秋会)라는 연구 모임을 설립하여 의회 내 강력한 파벌의 기반을 다졌다.[1] 이후 자민당 당내 선거에서 총리직에 도전하며 여러 당직 및 내각직을 역임했다.[1]
1959년 기시 총리가 세 번째 임기를 추구하며 고노와 비밀 합의를 맺었으나, 안보 투쟁으로 인해 고노는 기시 내각을 붕괴시키는 데 전념했다.[2][3][4] 1960년에는 자민당 탈당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결국 잔류했다.[5]
안보 투쟁 이후 우익 폭력의 물결 속에서 1963년 고노 암살 음모가 발각되기도 했다.[7]
고노는 여러 내각에서 활약하며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8] 1964년 이케다 총리 사임 당시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유력한 총리 후보였으나, 이케다의 유지에 따라 사토를 지지했다.[9]
1965년 7월 8일 대동맥류 파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고노의 파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계승되었다.[1]
3.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논란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당시 건설상이었던 고노 이치로는 기사라즈 앞바다를 매립하여 공항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1963년 8월 27일, 운수상 아야베 겐타로는 하네다 공항과의 관제 문제 등을 이유로 기사라즈 안에 반대하고, 대신 도미사토나 가스미가우라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에 고노 이치로는 "도대체 도로나 하천 개수는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건설성의 도움을 받지 않고 뭘 할 수 있다는 건가. 하네다 같은 건 폐항시켜 버려라. 하네다는 자갈이나 시멘트 같은 건설 자재의 유통 기지로 존속하는 게 좋다. 신공항은 기사라즈다"라며 매우 격분했다.[42][43][44]
1963년 12월 11일, 운수성 항공심의회가 도미사토를 유력한 후보지로 선정한 후에도 고노 이치로는 도쿄만 매립을 계속 주장했다.[45][46] 그는 "왜 이리도 (공항 문제에) 화를 내는가 물으면 나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 의료 문제, 미쓰야 연구 문제 등 당면한 문제가 많은데 5년 뒤, 8년 뒤의 문제에 정신이 팔려서 뭘 하겠는가. 애초에 그 때쯤엔 나도 (운수상) 마쓰우라 슈타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노 이치로는 나리타 공항이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다.[43]
고노 이치로의 반대로 진전이 없던 공항 건설 부지는 그가 사망하고 4개월 뒤 도미사토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부 내 격론과 달리 현지 주민과의 소통 부재로 신공항 건설은 엄청난 반대 운동에 직면했다.[43] 결국 1966년, 공항 규모를 축소하고 도미사토에서 4km 떨어진 산리즈카에 공항을 짓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4. 평가
고노 이치로는 동료는 끝까지 보호하고 아끼지만, 적은 철저하게 응징하는 인물로 평가받았다.[31] 중젠 코하쿠(中曽根康弘)는 고노에 대해 "지방 유력자 특유의 일족 중시주의를 신조로 삼아, 자신의 세력 내에서는 단결과 우정을 중시했지만, 아군은 무조건 옹호하고 적은 무조건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31]
1959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전례 없는 3선 연임을 시도하며 오노 반보쿠,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고노 이치로와 비밀 서면 합의를 맺었다.[2] 이 합의는 기시의 임기 후 오노, 고노, 사토 순으로 총리가 되는 조건으로 세 지도자가 기시를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고노는 미일 안보 조약 개정안 기습 표결에 항의하며 의도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파벌을 투표에서 제외시켰다.[4] 이후 기시 내각을 붕괴시키려 했고, 처벌로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배제되었다.[4] 1960년 8월에는 자유민주당 탈당을 시도하기도 했다.[5]
1963년에는 우익 폭력의 일환으로 고노 암살 음모가 발각되기도 했다.[7] 같은 해 7월, 노무라 슈우케이(野村秋介)가 이끄는 우국도시회(憂国道志会)에 의해 자택 방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4. 1. 긍정적 평가
고노 이치로는 여러 내각에서 활기차고 신중한 내각 장관으로 명성을 얻었다.[8] 1964년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고노에게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감독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8] 올림픽은 일본 언론과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으로 찬사를 받았고, 고노는 효과적인 경영으로 칭찬을 받았다.[8]건설상 시절, 국립교토국제회관 건설 계획이 있었는데, 선거구 내 하코네에 건설해야 한다는 지역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본에서 국제회의장에 적합한 곳은 교토다…”라는 생각으로 교토시의 보가이케에 건설을 결정했다. 이는 지역의 청원을 억누르고 내린 결정이었다.
경주마 오너이자 목장주(나스노 목장)로도 유명하며, 대표 소유마로 1966년 국화상 우승마이자 다음 해 천황상(봄)에서 최후를 맞이한 나스노코토부키 등 이른바 “나스노” 군단이 있다.
도쿄 올림픽 개최 반납 논의가 뜨겁게 일어났을 때, 제국의회에서 그 선봉에 서 있던 것이 고노였다.[34] 전후 도쿄 올림픽 개최에 있어서는 건설상 겸 올림픽 담당 국무대신을 역임했다. 고노는 담당 대신으로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올림픽을 “스포츠 이벤트”에서 정치 개입이 있는 국가적 프로젝트로 변모시킨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치카와 곤이 감독한 기록영화에 대해 “기록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며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도 고노였다. 하지만 그 후 타카미네 히데코의 요청을 받아 이치카와와 면담하고 영화를 용인했다.[35]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지만, 흐루쇼프에게 코냑을 권유받았을 때, “국익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마셨다”고 한다. 흐루쇼프 등과 일소 어업 협상에서 흥분하여 테이블을 두드린 탓에 티컵이 넘어져 테이블보가 홍차로 더러워지자, 고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는데, 이것이 흐루쇼프 등의 고노에 대한 인상을 호전시켰다고 한다.
농림상 시절과 건설상 시절에 각각 장관으로서의 권한을 발휘하여, 사무관과 기술관의 분담 등의 구례를 무시하는 형태로 관료 인사를 단행했다.[36][37]
4. 2. 부정적 평가
고노 이치로는 동료를 끝까지 보호하고 아끼지만, 적은 철저하게 응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31] 지방 유력자 특유의 일족 중시주의를 신조로 삼아, 자신의 세력 내에서는 단결과 우정을 중시했지만, 아군은 무조건 옹호하고 적은 무조건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비판을 받았다.[31]1959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전례 없는 3선 연임을 시도하며 고노 이치로, 오노 반보쿠, 사토 에이사쿠와 비밀 서면 합의를 맺었다.[2] 이 합의는 기시의 임기 후 오노, 고노, 사토 순으로 총리가 되는 조건으로 세 지도자가 기시를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고노는 미일 안보 조약 개정안 기습 표결에 항의하며 의도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파벌을 투표에서 제외시켰다.[4] 이후 기시 내각을 붕괴시키려 했고, 처벌로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배제되었다.[4] 1960년 8월에는 자유민주당 탈당을 시도하기도 했다.[5]
1963년에는 우익 폭력의 일환으로 고노 암살 음모가 발각되기도 했다.[7]
5. 이야깃거리
고노는 경주마와 목장을 소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노의 말은 1966년 국화상과 1967년 천황상(봄)에서 활약했으며 목장은 고노의 사후에도 이어졌지만 차남인 고노 요헤이가 자민당을 탈당해 신자유클럽을 결성할 때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처분해 버렸다.[1] 다만 고노 요헤이는 일본경종마협회 이사를 지내는 등 경마와의 인연을 이어갔고 그 아들의 대에 이르러 다시 목장의 운영권을 되찾았다.
중일 전쟁이 격화되자 제국의회에서 1940년 하계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는데 고노가 가장 선봉에 섰다. 하지만 전후에 열린 1964년 하계 올림픽 때 고노는 건설상과 올림픽 담당 국무상을 맡아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이끌었다. 이에 대해 국제 스포츠 대회인 올림픽을 정치가 개입하는 국가적 프로젝트로 변모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안보 투쟁 이후 일본에서는 주요 정치 인물에 대한 우익 폭력의 물결이 일었고, 이러한 물결의 일환으로 경찰은 1963년 고노 암살 음모를 발각했다.[7]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일본 언론과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으로 찬사를 받았고, 고노는 효과적인 경영으로 칭찬을 받았다.[8]
이 외에도 츄부 이키지로, 츄부 켄키치, 츄부 케이지로, 우에노 주조 등과 친척 관계에 있다.
고노 이치로는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하코네 역전 경주에 출전한 경험이 있다. 다음은 고노 이치로의 하코네 역전 경주 출전 기록이다.
년 | 대회 | 소속 | 구간 | 순위 | 기록 |
---|---|---|---|---|---|
1920 | 제1회 도쿄-하코네 간 왕복 대학 역전 경주 | 와세다 대학 | 7구간 | 구간 3위 | 1시간 27분 40초 |
1921 | 제2회 도쿄-하코네 간 왕복 대학 역전 경주 | 와세다 대학 | 4구간 | 구간 3위 | 1시간 19분 40초 |
1922 | 제3회 도쿄-하코네 간 왕복 대학 역전 경주 | 와세다 대학 | 7구간 | 구간 1위 | 1시간 20분 55초 |
1923 | 제4회 도쿄-하코네 간 왕복 대학 역전 경주 | 와세다 대학 | 7구간 | 구간 2위 | 1시간 21분 04초 |
6. 가족 관계
고노 지헤이는 고노 이치로의 아버지로, 가나가와현의회 의장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고노 이치로의 장인은 상인 출신 정치인 다가와 헤이사부로이다. 동생은 일본 참의원 의장을 지낸 5선 의원 고노 겐조이며, 차남은 일본 중의원 의장을 지낸 14선 의원 고노 요헤이이다. 손자는 9선 의원을 지낸 현역 정치인 고노 다로이다. 고노 이치로는 일본 정치계의 정치 명가를 세웠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고노 지헤이 | 가나가와현의회 의장 역임 |
장인 | 다가와 헤이사부로 | 상인 출신 정치인 |
동생 | 고노 겐조 | 일본 참의원 의장 역임 (5선 의원) |
차남 | 고노 요헤이 | 일본 중의원 의장 역임 (14선 의원) |
손자 | 고노 다로 | 9선 의원, 현역 정치인 |
7.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1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석 | 입헌정우회 | (미실시) | 무투표 당선 | |||
제1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2석 | 입헌정우회 | 6,854표 | 41.1 | 1위 | ||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3석 | 입헌정우회 | 8,194표 | 24.2 | 2위 | ||
제1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4석 | 입헌정우회 | 7,974표 | 24.1 | 2위 | ||
제1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5석 | 입헌정우회 | 10,656표 | 31.7 | 1위 | ||
제1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6석 | 입헌정우회 | 8,141표 | 23.1 | 2위 | ||
제2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7석 | 입헌정우회 | 9,443표 | 26.9 | 2위 | ||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8석 | 익찬정치체제협의회 | 6,645표 | 17.1 | 2위 | ||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9석 | 일본자유당 | 28,565표 | 11.9 | 4위 | ||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0석 | 민주자유당 | 29,043표 | 18.9 | 1위 | ||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1석 | 민주자유당 | 36,532표 | 23.6 | 1위 | ||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2석 | 자유당 | 40,845표 | 24.3 | 1위 | ||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3석 | 자유당 | 32,845표 | 19.0 | 2위 | ||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4석 | 일본민주당 | 44,068표 | 23.4 | 1위 | ||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5석 | 자유민주당 | 47,688표 | 25.4 | 1위 | ||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6석 | 자유민주당 | 43,898표 | 24.6 | 1위 | ||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17석 | 자유민주당 | 47,898표 | 23.6 |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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