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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라우던 백작 존 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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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대 라우던 백작 존 캠벨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731년 부친의 작위를 상속받아 라우던 백작이 되었다. 그는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당시 하노버 왕국 정부 편에 서서 라우던 하이랜더스 연대를 창설해 지휘했으며, 1756년에는 북미 총사령관 겸 버지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루이부르 요새 점령 작전을 실패하고 7년 전쟁에서 군 개혁을 시도했다. 1762년에는 포르투갈 침공에 맞서 영국군 부사령관으로 참전했으며, 이후 에든버러 성 총독을 역임하고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원예에 관심을 가져 영지를 조경했으며, 여러 지명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782년 사망했으며, 사촌 제임스 뮤어-캠벨이 백작위를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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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라우던 백작 존 캠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우든 백작, 1747년경
이름존 캠벨
작위라우든 백작
출생일1705년 5월 5일
출생지스코틀랜드
사망일1782년 4월 27일
사망지에든버러 성
국적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군사 복무영국 육군
복무 기간불명
최종 계급원수
참전재커바이트 봉기 (1745년)
로커버와 시라모어 습격
7년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
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

2. 초기 생애 및 경력

존 캠벨은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휴 캠벨이 중요한 인물이었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창설되기 2년 전이었다. 캠벨은 1731년에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상속받아 라우던 경이 되었다.

그는 보병으로 이루어진 하이랜드 연대, 라우던 하이랜더스를 창설했으며, 이 연대는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에서 하노버 왕국 정부 편에 참전했다. 이 연대는 12개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라우던이 연대장, 존 캠벨 (후에 제5대 아가일 공작)이 부연대장을 맡았다. 이 연대는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복무했다. 남부에서 모집된 12개 중대 중 3개 중대가 프레스턴팬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라우던 경의 지휘하에 있던 8개 중대는 인버네스에 주둔했다. 라우던은 1746년 2월에 그의 연대 병력과 여러 독립 중대를 이끌고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체포하려 했다. 이 원정은 단 4명의 자코바이트가 벌인 기만 전술에 의해 저지되었는데, 이는 스튜어트를 보호하는 대규모 병력이 있다는 암시였고, 결국 전투 없이 돌아왔다.

이 사건은 후에 모이의 패주로 알려졌다. 라우던은 이후 컴벌랜드 공작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물러났고, 반군에게 인버네스 마을을 넘겨주었다. 컬로든 전투 이후, 라우던은 정규군, 민병대 및 하이랜더를 혼합한 부대를 이끌고 로커버 및 시라모어 습격에서 잔존하는 반군을 소탕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2. 1. 스코틀랜드 출생과 가문

존 캠벨은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휴 캠벨이 중요한 인물이었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창설되기 2년 전이었다. 캠벨은 1731년에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상속받아 라우던 경이 되었다.

2. 2. 라우든 경 즉위

존 캠벨은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휴 캠벨이 중요한 인물이었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창설되기 2년 전이었다. 1731년, 캠벨은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상속받아 라우던 백작이 되었다.

2. 3. 자코바이트 반란 진압

존 캠벨은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세워지기 2년 전인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1731년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귀족 지위를 상속받아 '''라우던 경'''(Lord Loudoun)이 되었다.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에서 하노버 왕국 정부 측에 가담하여 라우던 하이랜더스 보병 연대를 창설하고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존 캠벨(후에 제5대 아가일 공작)이 부연대장을 맡았다.

이 연대는 스코틀랜드 여러 지역에서 복무했는데, 남쪽에서 소집된 12개 중대 중 3개 중대는 프레스턴팬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라우던 경이 직접 지휘한 8개 중대는 인버네스에 주둔했다. 1746년 2월, 라우던은 자신의 연대와 여러 독립 중대를 이끌고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체포하려 했으나, 모이의 패주로 알려진 사건에서 단 4명의 자코바이트가 벌인 기만 전술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는 스튜어트를 보호하는 대규모 병력이 있다는 암시였고, 결국 전투 없이 돌아왔다.

이후 라우던은 컴벌랜드 공작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물러났고, 반군에게 인버네스 마을을 넘겨주었다. 컬로든 전투 이후, 라우던은 정규군, 민병대 및 하이랜더를 혼합한 부대를 이끌고 로커버 및 시라모어 습격에서 잔존하는 반군을 소탕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3. 7년 전쟁

40대 남성이 붉은 영국 육군 코트와 붉고 검은 타탄 연대 킬트를 입고 가루 가발, 다이즈 호스, 버클 부착된 브로그를 착용하고 있으며, 푸른 보닛과 바스켓 힐티드 광검을 들고 있는 전신 유화
1747년 앨런 램지가 그린 라우던의 모습, 그의 하이랜드 연대 제복을 입고 있다(붉은 킬트는 그 자신의 것임)


1756년 라우던은 북미 총사령관 겸 버지니아 총독으로 북미에 파견되었지만, 현지의 많은 식민지 지도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다.[7] 그는 일부 상인들이 프랑스와 여전히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 할 때 일시적으로 모든 미국 항구를 폐쇄했다.[7] 그가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757년에 페어팩스에서 분리되어 형성된 라우던 카운티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

사령관으로서, 그는 1757년 프랑스로부터 루이부르를 점령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지만, 프랑스군의 전력이 그가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취소했는데, 이 정보에는 프랑스의 기만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라우던이 캐나다에서 이처럼 활동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윌리엄 헨리 요새를 영국으로부터 점령했고, 그는 제임스 애버크롬비로 교체되어 런던으로 돌아갔다.[1] 19세기 7년 전쟁 역사가인 프랜시스 파크먼은 라우던의 이 작전에 대한 군사적 지휘를 형편없다고 평가한다.[1]

라우던은 7년 전쟁에서 군대 개혁을 시작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7] 그는 일반 머스킷을 정확성이 더 높은 부싯돌 머스킷으로 교체했다. 군대 보급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도로 개선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전통적인 보급선을 군용 마차로 교체했다. 보급 체계 중앙집중화에 초점을 맞추어 핼리팩스와 올버니에 창고를 건설했다. 또한, 운송 수단으로서 수로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특히, 그는 정규군을 현지 민병대와 통합시켰고, 영국군이 이전에 훈련받았던 직선형의 유럽식 전투와는 다른 종류의 전쟁에 맞서기도 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라우던 백작의 북미 시절에 대한 여러 일화를 기록했다.[2] 프랭클린은 라우던 백작의 우유부단함과 비효율적인 면모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했다.

프랭클린에 따르면, 라우던 백작은 뉴욕에서 소형 우편선을 보내는 시간을 결정하는 데 있어 매우 우유부단했다. 프랭클린이 출항 시간을 묻자 백작은 "다음 주 토요일"이라고 답했지만, "우리끼리"라며 월요일 아침까지 와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프랭클린이 월요일에 도착했을 때 배는 여전히 항구에 있었고, 다음 날까지 출항하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이 일화를 통해 백작의 성격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결정 장애"라고 지적했다.[2]

프랭클린은 4월 초에 뉴욕에 도착했지만, 6월 말이 되어서야 출항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두 척의 소형 우편선이 항구에 있었지만, 백작의 편지를 기다리느라 오랫동안 묶여 있었다. 다른 배가 도착하고, 또 다른 배가 기다리는 동안에도 백작의 편지는 준비되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백작을 방문한 사람들이 항상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있는 백작을 보고 그가 많은 글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묘사했다.[2]

프랭클린은 또 다른 일화를 소개했다. 필라델피아의 메신저 이니스는 데니 총독의 편지를 백작에게 전달하기 위해 급히 왔지만, 백작의 답장을 받기 위해 2주 동안 매일 백작을 방문해야 했다. 프랭클린은 이니스의 말을 인용하며 백작을 "간판에 있는 성 조지와 같아서 항상 말 위에 있지만, 결코 말을 타지 않는다"라고 비꼬았다.[2]

프랭클린은 백작이 루이스버그 요새를 포위하고 점령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사건도 언급했다. 백작은 소형 우편선들을 핼리팩스로 데려가 가짜 요새 공격 연습을 한 후, 군대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프랭클린은 백작의 부재중에 프랑스군과 원주민들이 조지 요새를 점령하고 수비대를 학살한 사건을 언급하며, 이러한 중요한 임무에 백작이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2]

1762년, 제4대 라우던 백작 존 캠벨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에 맞서기 위해 영국군 부사령관으로 포르투갈에 파견되었다. 1763년에는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알메이다 공방전에서 패배했지만, 영국군은 곧 반격을 시작하여 침략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3. 1. 북미 총사령관 임명과 식민지 통치

1756년 라우던은 북미 총사령관 겸 버지니아 총독으로 북미에 파견되었지만, 현지의 많은 식민지 지도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다.[7] 그는 일부 상인들이 프랑스와 여전히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 할 때 일시적으로 모든 미국 항구를 폐쇄했다.[7] 그가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757년에 페어팩스에서 분리되어 형성된 라우던 카운티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

사령관으로서, 그는 1757년 프랑스로부터 루이부르를 점령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지만, 프랑스군의 전력이 그가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취소했는데, 이 정보에는 프랑스의 기만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라우던이 캐나다에서 이처럼 활동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윌리엄 헨리 요새를 영국으로부터 점령했고, 그는 제임스 애버크롬비로 교체되어 런던으로 돌아갔다.[1] 19세기 7년 전쟁 역사가인 프랜시스 파크먼은 라우던의 이 작전에 대한 군사적 지휘를 형편없다고 평가한다.[1]

많은 역사가들은 그가 7년 전쟁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그는 일반 머스킷을 정확성이 더 높은 플린트락 머스킷으로 교체하는 등 군대 개혁을 시작했으므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는 도로 개선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전통적인 보급선을 군용 마차로 교체하면서 군대를 보급할 필요성을 인식하여 개선을 이루었다. 그의 초점은 보급 시스템의 중앙 집중화였으며, 핼리팩스와 올버니에 창고를 건설하고 수로를 운송 수단으로 인식했다. 특히, 그는 정규군을 지역 민병대와 통합했으며, 불규칙군은 영국군이 이전에 훈련받았던 유럽식 선형 전쟁과는 다른 종류의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3. 2. 루이스버그 원정 실패

1756년, 라우던은 북미 총사령관 겸 버지니아 총독으로 북미에 파견되었지만, 현지 식민지 지도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다.[7] 그는 일부 상인들이 프랑스와 여전히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든 미국 항구를 폐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57년 페어팩스에서 분리되어 형성된 라우던 카운티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

사령관으로서, 그는 1757년 프랑스로부터 루이부르를 점령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다.[7] 그러나 정보 수집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전력이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정 계획을 취소했다. 이 정보에는 프랑스군의 기만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7] 라우던이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윌리엄 헨리 요새를 영국군으로부터 점령했다.[7] 결국 라우던은 제임스 애버크롬비로 교체되어 런던으로 소환되었다.[7] 19세기 7년 전쟁 역사가인 프랜시스 파크먼은 라우던의 군사적 지휘를 혹평했다.[7]

3. 3. 윌리엄 헨리 요새 함락

1756년 라우던은 북미 총사령관 겸 버지니아 총독으로 북미에 파견되었으나, 현지의 많은 식민지 지도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다.[7] 그는 일부 상인들이 프랑스와 여전히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 할 때 일시적으로 모든 미국 항구를 폐쇄했다.[7] 1757년, 라우던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스버그 요새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지만, 프랑스군의 기만책을 포함한 정보 수집 결과, 프랑스군이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하다고 판단하여 계획을 취소했다.[7]

라우던이 루이부르 원정에 집중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윌리엄 헨리 요새를 영국군으로부터 빼앗았다.[7] 이 사건으로 라우던은 제임스 아베크롬비로 대체되어 런던으로 소환되었으며, 7년 전쟁을 연구했던 19세기 역사학자 프란시스 파크먼은 그의 군 지휘에 대해 혹평했다.[7]

3. 4. 군사 개혁

라우던은 7년 전쟁에서 군대 개혁을 시작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7] 그는 일반 머스킷을 정확성이 더 높은 부싯돌 머스킷으로 교체했다. 군대 보급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도로 개선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전통적인 보급선을 군용 마차로 교체했다. 보급 체계 중앙집중화에 초점을 맞추어 핼리팩스올버니에 창고를 건설했다. 또한, 운송 수단으로서 수로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특히, 그는 정규군을 현지 민병대와 통합시켰고, 영국군이 이전에 훈련받았던 직선형의 유럽식 전투와는 다른 종류의 전쟁에 맞서기도 했다.

3. 5. 벤저민 프랭클린의 일화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라우던 백작의 북미 시절에 대한 여러 일화를 기록했다.[2] 프랭클린은 라우던 백작의 우유부단함과 비효율적인 면모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했다.

프랭클린에 따르면, 라우던 백작은 뉴욕에서 소형 우편선을 보내는 시간을 결정하는 데 있어 매우 우유부단했다. 프랭클린이 출항 시간을 묻자 백작은 "다음 주 토요일"이라고 답했지만, "우리끼리"라며 월요일 아침까지 와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프랭클린이 월요일에 도착했을 때 배는 여전히 항구에 있었고, 다음 날까지 출항하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이 일화를 통해 백작의 성격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결정 장애"라고 지적했다.[2]

프랭클린은 4월 초에 뉴욕에 도착했지만, 6월 말이 되어서야 출항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두 척의 소형 우편선이 항구에 있었지만, 백작의 편지를 기다리느라 오랫동안 묶여 있었다. 다른 배가 도착하고, 또 다른 배가 기다리는 동안에도 백작의 편지는 준비되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백작을 방문한 사람들이 항상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있는 백작을 보고 그가 많은 글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묘사했다.[2]

프랭클린은 또 다른 일화를 소개했다. 필라델피아의 메신저 이니스는 데니 총독의 편지를 백작에게 전달하기 위해 급히 왔지만, 백작의 답장을 받기 위해 2주 동안 매일 백작을 방문해야 했다. 프랭클린은 이니스의 말을 인용하며 백작을 "간판에 있는 성 조지와 같아서 항상 말 위에 있지만, 결코 말을 타지 않는다"라고 비꼬았다.[2]

프랭클린은 백작이 루이스버그 요새를 포위하고 점령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사건도 언급했다. 백작은 소형 우편선들을 핼리팩스로 데려가 가짜 요새 공격 연습을 한 후, 군대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프랭클린은 백작의 부재중에 프랑스군과 원주민들이 조지 요새를 점령하고 수비대를 학살한 사건을 언급하며, 이러한 중요한 임무에 백작이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2]

3. 6. 포르투갈 파견

1762년, 제4대 라우던 백작 존 캠벨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에 맞서기 위해 영국군 부사령관으로 포르투갈에 파견되었다. 1763년에는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알메이다 공방전에서 패배했지만, 영국군은 곧 반격을 시작하여 침략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4. 후기 생애

1763년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여 에든버러 성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3] 이 직책을 평생 동안 유지했다. 1770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4] 라우던은 원예에 관심이 많아 그의 영지는 조경으로 유명해졌으며, 전 세계에서 버드나무 종을 수집하기도 했다. 1773년 1월 23일, 뉴햄프셔주 라우던 타운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뉴욕주 라우던빌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매사추세츠주 라우던도 미편입 자치구로 있다가 설립되면서 오티스로 개명되었다. 캠벨은 독신으로 지냈으며 1782년 사망하자 그의 사촌인 제임스 뮤어-캠벨이 백작위를 승계했다.

4. 1. 스코틀랜드 귀환과 에든버러 성 총독 임명

1763년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여 에든버러 성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3] 이 직책을 평생 동안 유지했다. 1770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4] 라우던은 원예에 관심이 많아 그의 영지는 조경으로 유명해졌으며, 전 세계에서 버드나무 종을 수집하기도 했다. 1773년 1월 23일, 뉴햄프셔주 라우던 타운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뉴욕주 라우던빌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매사추세츠주 라우던도 미편입 자치구로 있다가 설립되면서 오티스로 개명되었다. 캠벨은 독신으로 지냈으며 1782년 사망하자 그의 사촌인 제임스 뮤어-캠벨이 백작위를 승계했다.

4. 2. 장군 승진

1763년 에든버러 성의 총독이 된[3] 존 캠벨은 1770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4][8]

4. 3. 원예 활동

라우던은 원예에 관심이 많아 그의 영지는 조경으로 유명해졌다.[3] 그는 특히 전 세계에서 버드나무 종을 수집했다.

4. 4. 사망과 작위 승계

캠벨은 독신으로 지냈으며 1782년 사망하자 그의 사촌인 제임스 뮤어-캠벨이 백작위를 승계했다.[4][8]

5. 캠벨의 이름을 딴 지명

뉴햄프셔주의 라우던[9]이라는 마을은 캠벨의 이름을 따서 지명되었다.

6. 문장

캠벨 가문의 문장


라우던 백작의 문장은 8개의 에르민과 붉은색의 혼합 문양 방패와 불꽃 속의 두 목을 가진 독수리로 구성되어 있다.[6] 방패의 오른쪽에는 어깨에 곡괭이를 든 무장한 남자가 서 있고, 왼쪽에는 왼쪽 손에 봉인 편지를 든 부유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서 있다.[6] 문장 상단에는 백작의 관이 위치한다.[6] 이 문장의 모토는 "나는 내 시간을 기다린다"이다.[6]

참조

[1] 웹사이트 About Loudoun > History http://loudoun.gov/i[...] Loudoun County 2013-01-03
[2] 서적 The Autobiography of Benjamin Franklin https://www.gutenber[...] 1791
[3] 서적 A Short History of Edinburgh Castle Moray Press 1948
[4] 서적 Haydn's Book of Dignities https://archive.org/[...] 1851
[5] 서적 Notes on the first planting of New Hampshire and on the Piscataqua patents https://books.google[...] New Hampshire (Colony) Probate Court
[6] 서적 The general armory of England, Scotland, Ireland, and Wales; comprising a registry of armorial bearings from the earliest to the present time https://archive.org/[...] Harrison & sons 1884
[7] 웹인용 About Loudoun > History http://loudoun.gov/i[...] Loudoun County 2013-01-03
[8] 서적 Haydn's Book of Dignities https://books.google[...] 1851
[9] 서적 Notes on the first planting of New Hampshire and on the Piscataqua patents https://books.google[...] New Hampshire (Colony) Probate Court 201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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