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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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1407년부터 1427년까지 명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한 시기를 말한다. 1400년 호귀리가 쩐 왕조를 찬탈하고 왕위를 빼앗자, 명나라는 쩐 왕조 복고를 명분으로 침략하여 베트남을 교지성으로 편입했다. 명나라는 베트남을 식민 통치하며 경제적 수탈과 문화적 동화 정책을 펼쳤으나, 레러이를 중심으로 한 베트남의 저항으로 1428년 독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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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 |
---|---|
개요 | |
공식 명칭 | 제4차 북속 시대 |
로마자 표기 | Bak thuoc lan thu tu |
한자 표기 | 北屬吝次四 |
지위 | 중국 명나라의 성 |
정치 체제 | 성 |
역사 | |
시작 | 대우의 군사적 패배 |
시작일 | 1407년 |
주요 사건 | 쩐 왕자들의 반란 진압 (1413년) |
종료 | 람손 봉기 종결 |
종료일 | 1427년 |
이전 국가 | 호 왕조 |
이전 국가 | 후 쩐 왕조 |
계승 국가 | 후 레 왕조 |
위치 | |
![]() | |
수도 | |
수도 | 동관 (현재의 하노이) |
언어 | |
공용어 | 베트남어 |
종교 | |
통화 | |
통화 | 엽전 |
지도자 | |
첫 번째 황제 | 영락제 |
재임 기간 | 1407년–1424년 |
두 번째 황제 | 홍희제 |
재임 기간 | 1424년–1425년 |
마지막 황제 | 선덕제 |
재임 기간 | 1425년–1427년 |
첫 번째 부관 | 황부 |
재임 기간 | 1407년–1424년 |
마지막 부관 | 진교 |
재임 기간 | 1424년–1426년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베트남 |
2. 명나라의 베트남 침공과 지배 (1407년 ~ 1427년)
14세기 중후반, 대월(베트남 북부)은 생태계 파괴와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이 시기에 급진적인 개혁가 호귀리가 1400년에 쩐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대구(大虞)로 바꾸었다. 1404년, 쩐 왕조의 왕족이라 주장하는 Trần Thiêm Bình이 명나라에 호귀리의 찬탈을 알리고 복위를 요청하자, 영락제는 쩐 왕조 복고를 명분으로 내세워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랑선 부근에서 호귀리 군대의 매복으로 쩐 왕족이 살해되자, 영락제는 호귀리를 처벌하기 위해 1406년 11월, 장부와 무성이 이끄는 21만 5천 명의 대규모 군대를 보내 대월을 침공했다.[2]
명나라 군대는 홍하 삼각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호귀리 군대를 격파했다. 호귀리와 그의 아들은 1407년 6월 16일에 사로잡혀 남경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명나라는 베트남을 교지라 칭하고 직할 통치를 시작했다.
2. 1. 명나라의 침공 배경
14세기 중후반, 대월(베트남 북부) 왕국은 생태계 파괴를 겪으며 혼란에 빠졌다.[1] 이 혼란기에 급진적인 지식인이자 개혁가인 호귀리(c. 1336 – 1408)가 등장했다. 1400년, 호귀리는 쩐 왕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후 국호를 호 왕조(대구)로 바꾸었다. 1402년, 그는 아들 호한상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1404년 10월, 쩐 왕조의 왕족이라고 주장하는 Trần Thiêm Bình이 명나라 황실이 있던 남경에 도착했다. 그는 호귀리의 배신 행위를 알리고 왕위 복고를 호소했다.
영락제는 쩐 왕조의 복고를 요구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랑선 국경에서 호귀리의 군대가 매복하여 명나라 호송대가 호위하던 쩐 왕족을 살해했다.[2]
이에 영락제는 호귀리를 처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1406년 11월, 장부와 무성이 이끄는 21만 5천 명의 명나라 군대가 대월을 침략하여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호귀리의 군대를 물리쳤다. 호귀리와 그의 아들은 사로잡혀 남경으로 끌려갔다. 이후 장부는 명나라 조정에 대월을 중국의 한 성으로 병합할 것을 건의했다.
장부는 베트남 엘리트 1,100명이 중국에 흡수되기를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명나라의 베트남계 협력자 중에는 막정지의 손자인 막수이가 있었다. 이후 중국은 베트남 땅의 이름을 한나라 시대의 이름인 교지(交趾)로 바꾸고 제국에 편입했다.
2. 2. 명나라의 군사 작전과 베트남 점령
1406년 11월, 장부와 무성이 이끄는 21만 5천 명의 명나라 군대가 광서성과 운남성에서 출발하여 대월을 침략했다. 같은 해 11월 19일, 명나라 군대는 2개의 수도와 홍하 삼각주의 다른 중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호귀리의 군대를 빠르게 격파하여 나라를 점령했다. 호귀리와 그의 아들은 1407년 6월 16일에 사로잡혀 우리에 갇힌 채 남경의 영락제에게 포로로 끌려갔다.
2. 3. 명나라의 통치 체제
명나라는 1407년 7월, 안남(安南)을 옛 한나라 시대 명칭인 교지(交趾)로 바꾸고 중국의 한 성으로 만들었다. 교지성에 행정청, 감찰청, 지역 군사 총독부를 설치하여 식민 통치 기구를 구축했다.[1] 군사 총독은 루이(陸儀), 부총독은 황중(黃衷)이 임명되었고, 황부(黃府)는 성장(省長)과 감찰사를 겸임했다.[1] 교지성은 15개의 부(府), 41개의 주(州), 210개의 현(縣)으로 세분되었다.[1]1408년까지 300만 명의 주민과 200만 명이 넘는 만인(蠻人,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472개의 군사 및 민정 기관이 설치되었고, 1419년에는 그 수가 약 1,000개에 달했다.[2] 점령 지역의 주요 도시에는 해자와 성벽이 추가되었고, 군대는 방어와 농업 임무를 번갈아 수행하여 식량을 자급했다.[2] 명나라 점령군은 8만 7천 명의 정규군으로 구성되었고, 북베트남의 39개 성채와 도시에 분산 배치되었지만, 홍강 삼각주(Red River Delta)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2]
명나라는 베트남 왕국의 쌀 1,360만 석을 압수하고, 화기 전문가인 후원중(胡元澄, Hồ Nguyên Trừng)을 포로로 잡아 우수한 머스킷총과 폭발성 무기를 제조하게 했다.[2]
명나라는 베트남인들에게 중국 문화를 강요했다. 유교 이념과 관료제, 고전 중국어 학습을 강요하고, 한복(漢服)과 같은 중국식 의복을 입도록 강제했다.[2] 또한, 문신, 미혼 남녀의 단발, 여성의 짧은 치마 등 현지 관습을 금지했다.[2] 1416년에는 다수의 유교 학교, 음양(陰陽) 학교, 의학교가 설립되었고, 1411년에는 현지 관료를 위한 시험이 공식화되었으며, 1419년에는 중국의 제례와 상례가 교지 관료들에게 도입되었다.[2]
명나라는 베트남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상업세무소, 어업세무소, 운송국, 소금세무소를 설립하거나 부활시켰다.[2] 1408년에는 금 채굴 감독을 위한 새로운 금광 사무소가 설립되었고, 1416년에는 금속과 향신료 제품의 개인 수출이 금지되었다.[2] 또한, 보석, 옥, 금, 예술품과 같은 귀중한 유물과 장인들을 중국으로 이송했다.[2]
3. 베트남의 저항과 독립 운동
명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맞서 베트남인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명나라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초기 저항은 레 로이가 주도한 람선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레러이(Lê Lợi)는 1428년 명나라를 몰아내고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한 영웅이다. 1426년 토뜨동 전투에서 왕통(王統)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며 승기를 잡았다. 이후 베트남은 명나라 포로들을 송환하고 대월(大越)을 재건했으며, 명나라는 레 로이를 안남왕으로 인정했다. 베트남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다.
3. 1. 쩐 왕조의 저항
중국군은 점령군으로 변모했다. 베트남 사회 일부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지역 저항으로 명나라는 후퇴해야 했다.[1] 명나라에 대항하는 베트남 민중의 여러 반란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반란을 이끈 사람들 중에는 쩐응에통의 어린 아들 쩐응오이(1407~1409년 반란)와 조카 쩐꾸이꽝이 있었다. 이러한 반란들은 수명이 짧고 계획이 부실했지만, 레 로이의 독립 전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쩐 왕조의 반란이 진압된 후인 1415년부터 1424년 사이, 베트남 민족주의에 영감을 받은 불교 승려들을 포함한 봉기 지도자들이 랑장, 응에안, 하노이, 닌끼우, 랑선 등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여러 현의 중심지에서 등장했다.[2] 한편, 반중국 운동가들은 순국선열들의 영웅적인 행위를 이용하여 베트남 애국심을 고취하고 식민 지배자들에 대한 투쟁을 계속했다.
3. 2. 민중 봉기와 독립 운동
명나라의 지배에 맞서 베트남 백성들은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했다. 쩐응에통의 아들 쩐응오이(1407~1409년 반란)와 조카 쩐꾸이꽝 등이 반란을 이끌었으나, 이들의 반란은 단명했고 계획도 허술했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은 레 로이가 주도하는 독립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쩐 왕조의 반란이 진압된 후 1415년부터 1424년 사이, 민족주의에 고취된 불교 승려를 비롯한 봉기 지도자들이 랑장, 응에안, 하노이, 닌끼우, 랑선 등 명나라 군대가 주둔한 여러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한편, 반중국 운동가들은 순국선열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통해 베트남인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식민 지배에 맞선 투쟁을 이어갔다.[1]
3. 3. 람선 봉기와 레러이
레러이(Lê Lợi)는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 중 한 명으로, 1428년 명나라의 지배에서 나라를 구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유한 지주 가문 출신인 그는 명나라에 봉사하는 것을 거부했다.[1]명나라는 처음에 레러이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1425년 명나라 황제 주전제(朱瞻基)는 베트남에서의 명나라 통치가 재정적 손실을 가져다주었고 북쪽 국경에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기에, Trần 왕조를 복원하고 예전의 조공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2] 1426년 장복(張福)이 악화되는 베트남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명나라 교지군 사령관직을 재개할 허가를 요청했을 때, 황제는 거절했다. 같은 해 주전제는 일반적인 사면을 선포하고, 명나라 주둔군에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쌀로 납부되는 토지세를 제외한 교지의 모든 세금을 폐지했다.[2]
1426년 11월 초, 레러이가 이끄는 3,000명의 베트남 반군은 왕통(王統)이 이끄는 약 30,000명의 중국군을 상대로 토뜨동(하노이 남쪽 32km)에서 기습 승리를 거두었고, 많은 중국군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홍강 삼각주의 사람들은 람선군이 오는 곳마다 환영하고 지지했다.
1427년까지 포로로 잡힌 북쪽 사람들은 반군에게 포위 공격 기술, 원시적인 전차, 날으는 말 마차, 무슬림 트레뷰셋(회회포, hui hui pao 回回砲), 그리고 중국인들이 "천구뢰포(千球雷砲)"라고 부르는 또 다른 포병 무기를 제공했다. 명나라 선덕제(宣德帝)는 베트남 북부에서의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이 최종 승리 후, 베트남은 86,640명의 명나라 포로를 중국으로 송환하고 모든 무기를 압수했다. 중국은 360년 동안 다시는 남쪽 이웃을 침략하지 않았다. 레러이는 공식적으로 대월(大越)을 재건했고, 명나라 선덕제(宣德帝)는 레러이를 안남왕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대신 레러이는 명나라 황실에 외교 서한을 보내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명목상의 조공국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을 약속했다. 명나라 황실은 조선 왕조하의 조선(Korea)의 봉신 지위를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합의를 받아들였다. 베트남 군주 레러이의 경우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면서 중국의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4. 베트남의 독립과 명나라의 철수
레뢰이(Lê Lợi)가 이끈 람선 봉기는 1427년에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했다. 이 승리 이후, 베트남은 86,640명의 명나라 포로를 중국으로 송환하고 모든 무기를 압수했으며, 이후 360년 동안 중국은 다시는 베트남을 침략하지 않았다. 레뢰이는 대월(大越)을 재건했고, 명나라 선덕제(宣德帝)는 레뢰이를 안남왕으로 공식 인정했다. 레뢰이는 명나라에 조공국으로서 충성과 협력을 약속했고, 명나라는 조선 왕조 하의 조선(Korea)의 봉신 지위를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합의를 받아들였다.
4. 1. 토촉동 전투와 명나라의 패배
1426년 11월 초, 레뢰이(Lê Lợi)가 이끄는 3,000명의 베트남군은 왕통(王統)이 이끄는 약 30,000명의 명나라 군대를 상대로 토뜨동(하노이 남쪽 32km)에서 기습하여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많은 명나라 군대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홍강 삼각주 사람들은 람선군이 오는 곳마다 환영하며 지지했다.4. 2. 명나라의 철수와 대월의 재건
레러이(Lê Lợi)는 1428년 명나라의 지배로부터 베트남을 구원한 영웅이다. 그는 명나라에 봉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1] 1425년, 명나라 황제 주전제(朱瞻基)는 베트남 통치가 재정적 손실을 가져온다고 판단하여 Trần 왕조를 복원하고 조공 관계로 돌아가려 했다.[2] 그러나 1426년, 레러이의 군대는 토뜨동에서 명나라 군대를 상대로 승리했다.1427년, 포로로 잡힌 북쪽 사람들은 반군에게 포위 공격 기술 등을 제공했다. 명나라 선덕제(宣德帝)는 베트남 북부에서의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베트남은 86,640명의 명나라 포로를 송환하고, 레러이는 대월(大越)을 재건했다. 명나라는 레러이를 안남왕으로 인정하고 조공 관계를 맺었다. 이는 조선 왕조가 조선(Korea)의 봉신 지위를 받아들인 것과 유사했다.
5. 명나라 지배의 영향
명나라는 교지성(交趾省)을 설치하여 베트남을 식민 통치하였다. 1407년 7월, 영락제는 안남(安南)의 이름을 옛 한나라 시대 명칭인 교지(交趾)로 바꾸고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시켰다.[1] 명나라는 행정청, 감찰청, 지역 군사 총독부를 설치하고, 15개의 부(府), 41개의 주(州), 210개의 현(縣)으로 세분화하여 베트남을 통치했다.[1]
명나라 군대는 15세기 이전에도 화기를 사용했지만, 베트남 원정에서 안남의 우수한 무기를 획득했다. 명나라는 베트남 최고의 화기 전문가 중 한 명인 호귀리(胡季犛)의 장남 후원중(胡元澄, 1374~1446)을 포로로 잡아 머스킷총과 폭발성 무기를 제조하게 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포병영(砲兵營)이 설립되어 명나라 군인들을 교육했다. 대월(大越)에서 화기를 처음 사용한 기록은 1390년으로, 베트남 군인들이 대포를 사용하여 참파의 제봉아(制蓬峩) 왕을 죽인 사건이다.
명나라 정부는 수도 하노이(승룡)에서 베트남인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았지만, 주변 지역에서는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식민 통치에 대한 불만은 컸다. 명나라가 베트남에 진입했을 때 명실록(明實錄)에 기록된 인구는 520만 명이었지만, 역사가들은 과장된 수치로 추정한다. 1427년 명나라의 대월 지배가 끝날 무렵, 베트남의 인구는 190만 명으로 감소했다.
5. 1. 경제적 수탈과 사회 변화
명나라는 베트남을 교지성으로 칭하고 식민 통치 기구를 설치하여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다. 1407년, 영락제는 베트남을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시키고, 행정청, 감찰청, 지역 군사 총독부를 설치했다.[1] 명나라는 베트남의 쌀 1,360만 석을 압수하고, 15개의 부, 41개의 주, 210개의 현으로 세분화하여 통치했다.[1]명나라는 노동력 통제와 경제적 착취를 목표로 삼았다. 1407년 초, 영락제는 베트남의 지식인, 기술자들을 중국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7,700명의 베트남 장인과 기술자들이 베이징으로 보내졌고, 명나라 정부는 상업세무소, 어업세무소, 운송국, 소금세무소를 설치하거나 부활시켜 베트남의 해상 무역 수입을 장악했다. 1408년에는 금 채굴 감독을 위한 금광 사무소가 설립되었고, 1416년에는 금속과 향신료 제품의 개인 수출이 금지되었다.
명나라는 금, 은, 보석, 옥, 예술품 등 귀중한 자원과 장인들을 중국으로 가져갔다. 금, 은 광산 개발을 장려했지만, 채굴된 자원은 대부분 중국으로 보내졌다. 소금세를 부과했고,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소금에는 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영락제는 베트남에 열대 조류의 깃털, 금, 안료, 부채, 비단 직물, 샌달우드 등 특산품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이러한 가혹한 수탈 정책으로 인해 베트남은 중국에 쌀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했고, 오히려 중국의 자원을 소모하는 지역이 되었다.
5. 2. 문화적 동화 정책과 그 한계
명나라는 베트남을 식민 통치하면서 유교 이념과 관료제, 고전 중국어 학습을 강요하고, 중국식 의복인 한푸((漢服|한푸중국어))를 입도록 강제했다. 또한 문신, 미혼 남녀의 단발, 여성의 짧은 치마 등 베트남 고유의 풍습을 금지하며 "북방의 풍습에 맞추기 위해 관습을 바꾸려고" 했다.[2] 1416년에는 교지성(交趾省) 내에 다수의 유교 학교, 음양 학교, 의학교가 설립되었고, 1411년에는 현지 관료를 위한 시험이 공식화되었다. 1419년에는 중국의 제례와 상례가 교지 관료들에게 도입되었다.영락제는 베트남의 모든 책과 기록, 심지어 민간 전래 이야기와 어린이 책까지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안남이 세운 비석은 모두 파괴하여 한 글자도 남기지 않도록 했다.[2] 이는 베트남의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동화 정책은 베트남인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명나라의 가혹한 통치와 문화 말살 정책은 오히려 베트남인들의 민족 의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독립을 되찾은 레 성종(黎聖宗)은 1474년 왕실 칙령을 발표하여 베트남인들이 외국 풍습을 따르는 것을 금지하고, 명나라가 강요했던 관습을 폐지했다.
5. 3. 명나라 지배에 대한 역사적 평가
명나라의 베트남 지배는 침략과 식민 통치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1407년 영락제는 안남의 이름을 교지로 바꾸고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시켰다.[1] 명나라는 행정청, 감찰청, 지역 군사 총독부 등을 설치하고, 베트남 왕국의 쌀 1,360만 석을 압수하는 등 수탈을 자행했다.[1]그러나 이러한 지배는 베트남인들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명나라 정부는 수도 승룡에서는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지만, 주변 지역에서는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식민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컸으며, 1427년 명나라 지배가 끝날 무렵 베트남의 인구는 190만 명으로 감소했다. 이는 명나라의 가혹한 통치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이다.
이러한 명나라의 지배는 베트남의 독립 의지를 강화하고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으로 작용했다.
6. 명나라 교지성 통치자
(承宣布政使)
(承宣布政使)
(提刑按察使)
(提刑按察使)
(都指揮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