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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함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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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함대 사건은 1935년 9월, 일본 해군 제4함대가 태풍 속에서 훈련을 강행하다가 발생한 사고이다. 이 훈련으로 인해 함정 41척 중 19척이 손상되었으며, 구축함 2척이 침몰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주요 원인으로는 당시 부족했던 용접 기술과 더불어,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한 선체 경량화, 그리고 태풍의 위력에 대한 예측 부족 등이 지목되었다. 사건 이후 일본 해군은 함선 정비 및 기술 개선을 진행했으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미흡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얻은 기상 관측 데이터는 태풍 연구에 기여했으며, 관련 소설이 출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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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함대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제4함대 사건
다른 이름제4함대 태풍 조우 사건
발생일1935년 9월 26일
위치일본 제국 태평양 해상
원인태풍과의 조우, 일본 해군의 기상 정보 경시, 함대 지휘관의 안이한 판단
결과일본 해군 함정 다수 손실, 인명 피해 발생, 일본 해군의 체면 손상
배경
시대적 배경1930년대 초 일본 제국의 만주사변 이후 해군력 증강 시기
미국과의 해군력 격차에 대한 위기감 고조
경과
1935년 9월 21일제4함대, 센다이시 앞바다에서 특별 대연습 실시 후 귀환 중
1935년 9월 25일이와테현 동쪽 해상에서 제4함대가 태풍과 조우
1935년 9월 26일새벽, 제4함대가 태풍 중심에 진입하여 큰 피해 발생
구축함 '야요이', '미카즈키', '시나노' 등 다수 함정 손상
피해 상황침몰 함정은 없었으나, 다수의 함정이 큰 손상을 입음
사망 및 행방불명자 54명, 부상자 34명 발생
원인 분석
근본적인 원인일본 해군의 가미카제 정신을 강조하는 경향
직접적인 원인태풍에 대한 정보 부족 및 예측 실패
함대 지휘관의 안이한 판단과 부적절한 대응
함정 설계 및 건조상의 문제점 (용골 강도 부족, 용접 기술 미흡 등)
책임 소재당시 제4함대 사령장관 마쓰시타 하지메 중장이 모든 책임을 짐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해군 전체의 문제점이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
결과 및 영향
일본 해군의 대응사고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원인 규명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
함정 설계 및 건조 기준 강화
기상 정보 수집 및 분석 시스템 강화
사회적 영향일본 해군의 체면 손상 및 국민들의 해군에 대한 불신감 증가
해군력 강화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 확산
교훈과학적인 정보 분석과 합리적인 판단의 중요성 강조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각심 고취
전시 상황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안전 관리에 대한 중요성 인식
참고 자료
관련 서적'일본 해군 함정 설계 사상' (일본어 원제: 日本海軍艦艇設計思想)
'일본 해군사' (일본어 원제: 日本海軍史)
관련 문서일본 해군 공식 기록, 당시 신문 기사 등

2. 사건 경과

1935년 9월 26일, 일본 제국 해군제4함대이와테현 동쪽 200해리 해상에서 훈련 중 태풍과 조우했다. 이미 태풍 접근이 보고되었으나, 함대 지휘부는 태풍을 회피하는 대신 훈련을 강행했다. 이는 해상 상황 악화로 인한 함선 간 충돌 우려와 더불어, 태풍 극복을 훈련의 중요한 부분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주력 부대는 태풍 중심부로 들어가 최저 기압 960hPa, 최대 풍속 34.5m/s를 관측했고, 수뢰전대는 최대 풍속 36m/s, 파고 20m의 삼각파를 만났다. 이로 인해 참가 함정 41척 중 절반가량인 19척이 손상되었으나, 침몰한 함정은 없었다.[1]

특히, 최신예 후부키급 구축함인 하쓰유키와 유기리는 함수가 절단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하고로[2]가 하쓰유키의 함수 예인을 시도했으나 높은 파도로 인해 실패했다. 함대 지휘부는 암호 해독표 등 기밀 서류 유출을 우려하여, 생존자 확인 없이 함수를 함포 사격으로 침몰시켰다. 이는 인도적 차원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 조치였다.

2. 1. 사고 전

일본 제국 해군은 1934년에 일어난 수뢰정 도모즈루 전복 사건 이후 보유 함정의 복원성 개선 공사를 완료하였다. 또한 런던 해군 군축 조약 파기와 국제 정세 악화에 따라 해군 전력 확충에 힘썼다.

1935년 해군 대연습을 위해 임시 편성된 제4함대 (제2기 편성, 사령장관 마쓰시타 하지메 중장)는 이와테현 동쪽 200해리 해상에서 함대 대응 연습을 위해 9월 24일부터 25일에 걸쳐 보급 부대, 수뢰전대, 주력 부대, 잠수전대가 하코다테 항을 출항하였다.

2. 2. 사고 발생

이미 태풍 접근이 보고되었으나, 9월 26일 아침 기상 정보에 따라 오후에는 함대와 태풍이 조우할 것이 예상되었다. 태풍을 회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이미 해상 상황은 악화되어 다수의 군함이 회피 기동을 할 경우 접촉 및 충돌이 우려되었다. 또한, 함대 지휘부는 "대전(大戰)에 있어서 태풍이라는 험악한 날씨에서의 개전(開戰)도 있을 것이다"라며 태풍 극복도 훈련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판단하여 예정대로 항해를 계속하였다. 주력 부대는 태풍의 중심부로 돌입하여 최저 기압 960hPa, 최대 풍속 34.5m/s를 관측하였고, 우측 회전 반원으로 들어간 수뢰전대는 36m/s를 기록하며 파고 20m에 달하는 큰 파도(삼각파)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전복 및 침몰한 군함은 없었으나, 참가한 함정 41척 중 약 절반인 19척이 손상을 입었다.[1]

특히 당시 최신예 군함이었던 후부키급 구축함 2척(하쓰유키, 유기리)은 함교 부근에서 앞쪽 함수가 절단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하쓰유키의 함수를 발견한 하고로[2]는 예인을 시도하려 했으나, 높은 파도로 인해 포기하였다. 더욱이 함수부에는 암호 해독표 등 기밀 서류를 보관하는 전신실이 있었고, 이 서류들이 표류하여 타국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함대 지휘부는 함수부에 있다고 추정되는 생존자 24명에 대한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함포 사격으로 침몰시켰다. 이는 구조의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전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 조치였다.

3. 원인

1935년 9월 26일, 훈련 중이던 일본 제4함대는 강력한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의 원인으로는 최신예 군함에 적용되었던 용접 기술의 강도 부족이 지목되었으나, 현재는 태평양의 태풍에 대한 이해 부족과 그로 인한 선체 설계 강도의 문제가 더 큰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3]

사건 발생 후, 노무라 기요사부로 대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어 원인 규명에 나섰다.[3] 조사 결과,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및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따른 해군 측의 무리한 경량화 요구로 인해 선체 강도가 부족했던 점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밝혀졌다.[3]

이러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4함대 사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3. 1. 기술적 문제

당시 일본 해군은 최신예 군함에 대규모로 용접 기술을 적용하였으나, 용접부의 강도 부족이 문제점으로 지목되었다.[3] 그러나 현재는 태평양의 태풍권 파도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인한 함체 설계 강도 문제가 더 큰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3]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및 런던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해 함체 경량화가 요구되면서 강도에 여유가 없었던 점도 문제였다.[3]

구체적인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 당시 세계적으로 예상했던 악천후 시 파도는 파고/파장 비율이 1/20이었으나, 제4함대가 조우한 파도는 1/10에 달해 함체 설계 강도를 초과했다.[3]

# 군축 조약으로 인해 함정 수 제한을 받게 되자, 일본 해군은 배수량을 확보하면서도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최대한 많은 무장을 장비하였다. 이로 인해 선체 강도가 한계에 가깝게 낮아졌다.[3]

# 사건 발생 전인 같은 해 7월, 마키노 시게루 해군 소령이 특형 구축함의 함체 강도 문제를 보고했음에도 훈련이 강행되었다.[3]

조선 기술자의 회상에 따르면, 특형 구축함에서는 배의 전후 방향 중앙에 가해지는 힘을 크게 하는 기존 설계 대신 전체에 힘을 분산시키는 설계로 변경했다.[4] 그러나 2연장 대포가 실린 긴 선루 후단의 단면 계수 실효값이 작아지는 부분에 넓은 사관실과 중유 탱크를 배치한 구조상의 문제로 인해 함교 부근 선루 후단(포커슬 엔드)이 약해져 있었다.[4]

3. 2. 군사적, 정치적 배경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및 런던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해 일본 해군은 함정 보유 수에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규정된 배수량 내에서 각 함선의 전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무장을 탑재하려 했다. 그 결과, 선체 강도는 한계치에 가깝게 조정되어 매우 취약해졌다.[1]

당시 세계적으로 조선 시 상정했던 악천후 시 파도는 파고와 파장 비율이 1/20이었으나, 제4함대가 조우한 파도는 1/10에 달해 당시 선체 설계 강도로는 견딜 수 없었다.[1]

이 사건 전인 1935년 7월, 마키노 시게루 해군 소령은 특형 구축함의 선체 강도에 대한 문제점을 보고했으나,[4] 해군 수뇌부는 훈련을 강행했다.[1] 해군 수뇌부는 "대전에 있어서 태풍이라는 험악한 날씨에서의 개전도 있을 것이다"라며 태풍 극복이 함대의 숙련도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태풍 접근이 예보되었고, 9월 26일 아침 기상 정보에 의해 오후에는 함대와 태풍이 조우할 것이 명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함선 회두로 인한 접촉 및 충돌을 우려하여 훈련을 계속한 것은 비판받을 만하다.[1]

4. 결과

도모즈루 사건과 제4함대 사건으로 일본 해군은 군축 조약 하에 건조된 거의 모든 함정을 정비해야 했다. 주로 선체 강도를 높이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무장 일부를 제거하는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선체 구조, 강재, 진동 및 온도 변화에 따른 피로도, 초음파 검사 방법까지 연구해야 했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3]

이 사건 이후, 일본 해군은 용접 기술 대신 리벳 중심 건조로 돌아갔다. 경량화에 치중한 결과 해외 해군 선진국보다 조선 기술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기 용접 기술 연구는 계속되어, 강도가 덜 필요한 부분에 사용되었고, 이후 전시 표준선, 마쓰형 구축함, 해방함 건조 시 블록 공법과 함께 전면 채택되어 건조 기간 단축에 기여했다. 이는 전후 일본이 조선 강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4]

또한, 이 사건으로 다수의 함정이 광범위한 기상 관측을 실시하여 태풍 구조 파악에 중요한 데이터를 얻었다. 이 자료는 극비였으나 전후 공개되었다. 1969-70년에는 취역 5년 미만의 광석 운반선들이 비슷한 해양 현상으로 잇따라 침몰했는데, 이는 선체 강도와 구조 취약성 때문이었다.[1]

4. 1. 함정 정비 및 기술 개선

도모즈루 사건과 제4함대 사건을 계기로 일본 해군은 전 함정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및 보강 공사를 실시하였다.[3] 거의 모든 함정이 정비를 받았고, 주로 선체 강도 확보를 위한 보강 공사와 경량화를 위한 무장 일부 철거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 이후 일본 해군은 기술적으로 우려가 있던 용접 기술 대신 리벳 중심의 건조 방식으로 돌아갔다.[4] 그러나 전기 용접 기술 향상에 대한 연구는 계속 이어져 강도가 불필요한 부분에 사용되었고, 이후 전시 표준선, 마츠형 구축함, 해방함 건조 시 블록 공법과 함께 전면적으로 채용되었다. 이 기술은 건조 기간 단축에 기여하였고, 전후 일본이 조선 강국이 되는 바탕이 되었다.

4. 2. 기상학적 의의

제4함대 사건 당시, 주력 부대는 태풍의 중심에서 최저 기압 960mbar(mbar영어(밀리바 = 1hPa(헥토파스칼))와 최대 풍속 34.5m/s를 관측했고, 뇌격전대는 36m/s를 기록했으며, 파고 20m에 달하는 큰 파도(삼각파)가 발생했다.[1] 특히 뇌격전대는 태풍 오른쪽의 위험 반원에 들어가 최대 순간 풍속이 45m/s~50m/s에 달했다. 광범위하게 다수의 함정이 기상 관측을 실시한 결과는 태풍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데이터를 제공했다.[4] 이 자료는 극비 취급되었지만, 전후 공개되었다.

5. 제4함대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요시무라 아키라의 소설 "함수 절단"은 신초 문고(2003년)에 수록된 『공백의 전기』에 포함되어 있다. ISBN 4-10-111709-8.[1]

6. 관련 사건 및 함선 (참고 자료)

=== 관련 함선 ===

제4함대 사건과 관련된 함선은 다음과 같다.

함급함명피해 내용
후부키급 구축함하츠유키, 유기리함수 절단[1]
후부키급 구축함아케보노, 오보로, 우시오, 시라유키, 무라쿠모, 우스구모, 시라구모, 아마기리상부 구조물 손상
무쓰키급 구축함무츠키, 키쿠즈키함교 대파
무쓰키급 구축함미카즈키함교 및 마스트 대파
카미카제급 구축함아사카제함교 대파
호쇼호쇼전면, 후면 및 측면 비행 갑판 손상
류조류조함교 압괴
묘코급 중순양함묘코선체 중앙부 리벳 이완
모가미급 중순양함모가미함수부 외판 균열
다이게이다이게이선체 중앙 수선부 및 함교 전방 상부 외판에 대형 휨 발생



이 외에도 다수의 구축함에서 상부 구조물 손상이 발생했다.

=== 관련 사건 ===

이 사건 이전에, 같은 해 7월에 마키노 시게루 해군 소령이 특형 구축함의 함체 강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였으나, 훈련이 강행되었다.[3] 조선 기술자의 회상에 따르면, 특형 구축함은 이전까지 배의 전후 방향 중앙에 가해지는 힘을 크게 하는 설계에서 전체에 힘을 분산시키는 설계로 변경되었다.[4] 또한, 2연장 대포가 실린 긴 선루 후단의 단면 계수 실효값이 작아지는 부분에 넓은 사관실과 중유 탱크를 배치한 구조상의 문제로 인해, 함교 부근에 위치하는 선루 후단(포커슬 엔드)이 약해져 있었다.[4]

6. 1. 관련 사건

이 사건 이전에, 같은 해 7월에 마키노 시게루 해군 소령이 특형 구축함의 함체 강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였으나, 훈련이 강행되었다.[3] 조선 기술자의 회상에 따르면, 특형 구축함은 이전까지 배의 전후 방향 중앙에 가해지는 힘을 크게 하는 설계에서 전체에 힘을 분산시키는 설계로 변경되었다.[4] 또한, 2연장 대포가 실린 긴 선루 후단의 단면 계수 실효값이 작아지는 부분에 넓은 사관실과 중유 탱크를 배치한 구조상의 문제로 인해, 함교 부근에 위치하는 선루 후단(포커슬 엔드)이 약해져 있었다.[4]

6. 2. 관련 함선

다음은 제4함대 사건과 관련된 함선 목록이다.

함급함명피해 내용
후부키급 구축함하츠유키, 유기리함수 절단[1]
후부키급 구축함아케보노, 오보로, 우시오, 시라유키, 무라쿠모, 우스구모, 시라구모, 아마기리상부 구조물 손상
무쓰키급 구축함무츠키, 키쿠즈키함교 대파
무쓰키급 구축함미카즈키함교 및 마스트 대파
카미카제급 구축함아사카제함교 대파
호쇼호쇼전면, 후면 및 측면 비행 갑판 손상
류조류조함교 압괴
묘코급 중순양함묘코선체 중앙부 리벳 이완
모가미급 중순양함모가미함수부 외판 균열
다이게이다이게이선체 중앙 수선부 및 함교 전방 상부 외판에 대형 휨 발생



이 외에도 다수의 구축함에서 상부 구조물 손상이 발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気象学と気象予報の発達史: 台風による第4艦隊事件 (2), The Fourth Fleet incident (2) https://korechi1.blo[...] 2020-07-17
[2] 서적 歴史群像8月号 (株)ワン・パブリッシング 2023-07-06
[3] 뉴스 野村大将を委員長に査問会を組織 東京朝日新聞 1935-10-02
[4] 간행물 造船工作法の今昔:大供(おおども)会座談会の記録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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