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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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볼로냐의 참주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의 아들로, 1463년 산테 벤티볼리오 사후 볼로냐의 군주가 되었다. 그는 콘도티에로로 활동하며 이탈리아의 여러 가문과 관계를 맺었고, 딸의 결혼 문제와 체사레 보르자와의 갈등을 겪었다. 교황 율리오 2세와의 대립으로 볼로냐에서 추방당한 후 밀라노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그는 볼로냐를 발전시키고 예술을 후원했지만, 권위적인 통치로 빈곤한 시민들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볼로냐의 참주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와 돈니나 비스콘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1445년, 그의 아버지 안니발레 1세는 정치적 경쟁자였던 바티스타 칸네스키에게 암살당했는데, 당시 조반니 2세는 어린아이였다.[2]
조반니 2세는 이탈리아 내 다른 세력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콘도티에로로 활동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477년 파엔차 포위를 시작으로, 1482년 페라라 전쟁에서는 에르콜레 1세 데스테를 지원했다. 나폴리 왕국을 위해 소규모 전투에도 참전했지만, 그의 군사 활동은 항상 볼로냐 의회의 통제를 받았다.[1]
2. 배경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안니발레 1세의 암살 사건을 언급하며, 벤티볼리오 가문이 볼로냐 시민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안니발레 1세 사후, 볼로냐 시민들은 피렌체에 있던 벤티볼리오 가문 출신인 산테 1세를 데려와 도시를 통치하게 했다.[1]
산테 1세는 피렌체에서 양모 길드 견습생으로 일했으며, 1443년부터 볼로냐를 다스렸다. 1463년 산테 1세가 사망하면서 조반니 2세가 권력을 잡았고, 명목상으로는 교황 특사 관할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볼로냐의 군주였다.[1] 1464년 조반니 2세는 지네브라 스포르차와 결혼했고,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도시 원로원의 영구 수장 직위를 인정받았다.
2. 1. 가문의 기원과 초기 생애
조반니 2세는 볼로냐의 참주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와 돈니나 비스콘티의 아들로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1445년 6월, 그의 아버지 안니발레 1세는 정치적 숙적인 바티스타 칸네스키에게 살해당했는데, 당시 조반니 2세는 어린아이였다.[2]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9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안니발레는 그에게 음모를 꾸민 칸네스키에게 살해당했으며, 어린 조반니를 제외하고는 그의 가족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암살 직후, 볼로냐 사람들은 들고일어나 칸네스키 가문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이는 벤티볼리오 가문이 볼로냐에서 누리던 대중적 호의 덕분이었다. 안니발레가 죽은 후 볼로냐를 통치할 사람이 없었기에, 볼로냐 사람들은 당시 대장장이의 아들로 알려진 피렌체의 벤티볼리오 가문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데려와 도시 통치를 맡겼다. 그는 조반니가 통치할 나이가 될 때까지 통치했다."[1]
안니발레 1세의 뒤를 이어 볼로냐를 통치한 사람은 산테 1세였다. 산테 1세의 출생은 불분명했지만, 안니발레 1세의 사촌인 에르콜레 벤티볼리오의 아들로 추정된다. 원래 피렌체의 양모 길드 견습생이었던 산테는 1443년부터 볼로냐의 '군주'(signore)로 통치했다. 1463년 산테가 사망하자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코뮌의 영주가 되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교황 사절 아래 교회의 봉토였다.[1] 1464년 5월 2일 그는 산테의 미망인 지네브라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같은 해 그는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도시 원로원의 영구적인 수장으로 인정받는 특권을 얻었다.
2. 2. 산테 벤티볼리오의 집권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가 그의 정치적 숙적인 바티스타 칸네스키(Battista Canneschi)에게 살해당했을 때, 그의 아들 조반니 2세는 어린아이였다.[2]
마키아벨리는 안니발레에 대해 "그에게 음모를 꾸몄던 칸네스키에게 살해당했으며, 어린 시절의 조반니를 제외하고는 그의 가족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의 암살이 이뤄지자마자, 볼로냐 사람들은 들고일어나 모든 칸네스키 가문 출신들을 죽였다."라고 군주론 19장에서 서술하였다.
안니발레 1세의 친척인 산테 1세가 볼로냐를 계승하였다. 본래 피렌체의 양털 길드의 도제였던 산테는 1443년부터 볼로냐를 통치해왔다. 1463년에 산테가 사망하자,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명목상으로는 교황 특사 아래의 교회 영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볼로냐의 군주가 되었다.[2]
3. 볼로냐의 통치자
1488년 딸 프란체스카의 남편 독살 사건으로 파엔차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려다 포로로 잡히기도 했으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중재로 풀려났다. 같은 해 밀라노 군의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명예직이었고, 실질적인 지휘는 아들들에게 맡겼다. 내부적으로는 1488년 말베치 가문, 1501년 마레스코티 가문의 음모를 진압하는 등 권위적인 통치를 이어갔다.[1]
체사레 보르자의 팽창에는 저항했으나,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조반니 2세를 파문하고 교황령 금지령을 내렸다. 루이 12세의 지원군과 함께 교황군이 진격해 오자 조반니 2세와 가족들은 부세토로 도피해야 했다. 1507년 아들들의 볼로냐 탈환 시도는 실패했고, 분노한 시민들은 벤티볼리오 궁전을 파괴했다. 결국 조반니 2세는 밀라노에서 루이 12세의 포로로 지내다 1508년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1]
3. 1. 집권 과정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이탈리아의 다른 강력한 가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직접 콘도티에로로 활동하였다. 1467년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에 맞서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에서 복무했고, 1471년에는 다시 밀라노를 위해 일했다. 그의 첫 군사 활동은 1477년 스포르차 가문을 위해 파엔차를 포위한 것이다. 1482년 페라라 전쟁 중에는 교황 식스토 4세와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에르콜레 1세 데스테를 지원했다. 이후 나폴리 왕국을 위해 작은 분쟁에 참여했지만, 그의 참가는 항상 볼로냐 의회에 의해 통제되었다.[1]
1488년, 그의 딸 프란체스카가 남편이자 파엔차의 군주였던 갈레오토 만프레디를 독살했다. 파엔차 시민들은 이를 도시 정복을 위한 술책으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조반니가 반란 진압을 위해 파엔차에 도착했지만, 그는 붙잡혔고 로렌초 데 메디치의 중재로 풀려났다. 같은 해 밀라노 군의 카피타노 제네랄레(총사령관)가 되었지만, 이는 명예직에 가까웠기에 조반니는 아들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1488년 조반니는 말베치 가문이 일으킨 음모를 분쇄하고, 가문 구성원 대부분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 1501년에는 마레스코티 가문이 같은 운명을 맞았다.[1]
조반니는 체사레 보르자의 팽창주의에 저항했지만, 1506년 10월 7일 교황 율리오 2세는 조반니를 파문하고 볼로냐에 교황령 금지령을 내렸다. 루이 12세가 보낸 부대와 함께 교황군이 볼로냐로 진격하자 조반니 2세와 그의 가족은 도망쳤다. 율리오 2세는 1503년에 즉위하여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된 강하고 독립된 교황직을 이탈리아에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알렉산데르 6세 치하에서 교황령을 가문 영지로 만들었던 체사레 보르자를 제거했다. 체사레의 세력이 약해지자 볼로냐는 자치권을 강화하여 독립하고자 했으나, 교황령을 직할령으로 만들고자 했던 율리오 2세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1506년 율리오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볼로냐를 점령하고 11월 10일 볼로냐에 입성한 후 교황대사를 파견하여 통치했다.[1]
조반니는 팔라비치니 가문이 통치하던 부세토로 피신했다. 1507년 그의 아들 안니발레 2세와 에르메스 벤티볼리오의 볼로냐 탈환 시도는 실패했다. 이후 볼로냐 시민들은 도시에 남아있는 그의 재산에 폭동을 일으켜 궁전을 파괴했다.[1]
파문당한 조반니는 밀라노에서 루이 12세의 포로로 지내다 1508년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1]
1504년 조반니 벤티볼리오는 유명한 점성술사 루카 가우리코에게 자신과 아들들의 운명을 점치게 했다. 가우리코의 부정적인 예언에 화가 난 벤티볼리오는 그를 망쿠에르다 고문을 하고 볼로냐에서 추방했다.[1]
3. 2. 대내 정책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볼로냐의 미관을 개선하고 수로를 개발하는 등 도시 발전에 힘썼다.[2] 하지만 그의 화려한 통치와는 대조적으로 도시 빈곤 문제는 심각했다.
그는 산 자코모 아치길을 통해 오라토리오 디 산타 체칠리아에 성 세실리아의 생애를 담은 프레스코화 제작을 의뢰했는데, 프란체스코 프란치아, 로렌초 코스타, 아미코 아스페르티니 등이 참여했다. 산 자코모 마조레 바실리카 내 벤티볼리오 가문 예배당에 있는 로렌초 코스타의 벤티볼리오 가문 제단화는 말베치 가문의 암살 시도에서 벤티볼리오 가문이 무사히 벗어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조반니 2세는 건축가 G. 나디에게 벤티볼리오 궁전 건설을 의뢰했고, 아리스톨레 피오라반티가 세운 포데스타 궁전 재건 계획을 시행했다.
3. 2. 1. 권위주의적 통치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거의 반세기 동안 엄격한 통치를 펼치며[1] 화려한 궁정을 유지하고 볼로냐를 아름답게 가꾸었으며, 특히 수로를 개발했다.[2] 그러나 도시의 화려함과 축제와는 대조적으로 빈곤한 시민들의 비참함이 존재했다.
그가 의뢰한 프로젝트 중에는 산 자코모 아치웨이를 통해 오라토리오 디 산타 체칠리아에 성 체칠리아의 삶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이 프레스코화는 당시 도시에 살고 있던 프란체스코 프란시아, 로렌초 코스타 1세, 아미코 아스페르티니가 그렸다. 산 자코모 마조레 성당의 벤티볼리오 예배당에 보관되어 있는 로렌초 코스타의 ''벤티볼리오 제단화''는 벤티볼리오 가문이 말베치 가문의 학살 시도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한 감사의 헌정물로 조반니 벤티볼리오가 의뢰했다. 벤티볼리오는 또한 건축가 G. 나디에게 1498년부터 벤티볼리오 궁전 (시청) 건설을 명령했다. 볼로냐 출신의 건축가 아리스토틸레 피오라반티는 나중에 러시아에 정착했는데, 그는 포데스타 궁전 재건 계획을 세웠지만, 벤티볼리오는 1484년에서 1494년 사이에 재건을 실행했다.
3. 2. 2. 문화 예술 후원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거의 반세기 동안 볼로냐를 통치하며 화려한 궁정을 유지하고 도시 미관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특히 수로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 그러나 도시의 화려함 뒤에는 빈곤한 시민들의 삶이 있었다.
조반니 2세는 예술 후원에도 적극적이었다. 그가 의뢰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산자코모 아치길을 통해 오라토리오 디 산타 체칠리아에 있는 성 세실리아의 생애를 담은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 프레스코화는 프란체스코 프란치아, 로렌초 코스타, 아미코 아스페르티니 등 당대 볼로냐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제작되었다. 산 자코모 마조레 바실리카 내 벤티볼리오 가문 예배당에 있는 로렌초 코스타의 벤티볼리오 가문 제단화는 말베치 가문의 암살 시도에서 벤티볼리오 가문이 무사히 벗어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조반니 2세가 의뢰한 작품이다.[2]
또한, 조반니 2세는 건축가 G. 나디에게 벤티볼리오 궁전 건설을 의뢰하여 1498년에 착공하였다. 아리스톨레 피오라반티는 포데스타 궁전의 재건 계획을 세웠으나, 1484년에서 1494년 사이에 벤티볼리오에 의해 시행되었다.
3. 3. 대외 관계
조반니 2세는 주변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군사적 지원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정적을 제거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교황과의 갈등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488년, 조반니 2세는 말베치 가문의 음모를 분쇄하고 가문 구성원 대부분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1] 1501년에는 마레스코티 가문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1]
3. 3. 1. 주변국과의 관계
조반니 2세는 이탈리아의 다른 강력한 가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직접 콘도티에로로 활동했다. 1467년에는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에 맞서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왕국을 위해 싸웠고, 1471년에는 다시 밀라노에서 활동했다. 1477년에는 스포르차 가문을 위해 파엔차를 포위하기도 했다.[1] 1482년 페라라 전쟁 중에는 교황 식스토 4세와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에르콜레 1세 데스테를 지원했다.[1] 이후 나폴리 왕국을 위해 작은 분쟁에 참여했지만, 그의 참가는 항상 볼로냐 의회에 의해 통제받았다.[1]
1488년, 조반니 2세의 딸 프란체스카가 남편이자 파엔차의 군주였던 갈레오토 만프레디를 독살했다.[1] 파엔차 시민들은 이를 도시 정복을 위한 술책으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고, 조반니 2세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붙잡혔다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중재로 풀려났다.[1] 같은 해, 그는 밀라노 군의 카피타노 제네랄레(총사령관)가 되었지만, 이는 명예로운 직위였고 실제 지휘권은 그의 아들들에게 있었다.[1]
조반니 2세는 체사레 보르자의 팽창주의에 저항했지만,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는 그를 파문하고 볼로냐에서 추방했다.[1] 루이 12세가 보낸 프랑스 군대와 함께 교황군이 볼로냐로 진격해오자, 조반니 2세와 그의 가문은 도망쳐야 했다.[1] 1503년에 즉위한 교황 율리오 2세는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된 강하고 독립된 교황직을 이탈리아에 정립하고자 노력했다.[1] 우선 알렉산데르 6세 치하에 교황령을 가문의 영지로 만들었던 체사레 보르자를 제거하였다.[1] 체사레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볼로냐는 자치권을 강화하여 독립하고자 했다.[1] 법적으로는 교황령이었던 지역들을 직할령으로 만들고자 했던 교황 율리오 2세는 이를 허용치 않았다.[1] 1506년에는 그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볼로냐를 점령하였고 11월 10일 당당하게 볼로냐에 입성하였다. 그런 후 교황대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1]
조반니 2세는 팔라비치니 가문이 통치하던 부세토로 피신했고, 그의 아들들이 볼로냐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파문당한 조반니 2세는 밀라노에서 루이 12세의 포로로 지내다 1508년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1]
3. 3. 2. 교황과의 갈등
조반니 2세는 이탈리아의 다른 강력한 가문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직접 콘도티에로로 참전했다. 1467년에는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에 맞서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의 용병으로 활동했고, 1471년에는 다시 밀라노를 위해 싸웠다. 1482년 페라라 전쟁 중에는 교황 식스토 4세와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에르콜레 1세 데스테를 도왔다. 이후 나폴리 왕국을 위해 작은 전투에 참여했지만, 그의 개인적인 개입은 항상 볼로냐의 제도에 의해 제한되었다.
1488년, 그의 딸 프란체스카는 파엔차의 통치자였던 자신의 남편 갈레오토 만프레디를 독살했고, 파엔차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조반니가 진압을 위해 갔으나 붙잡혔고, 로렌초 데 메디치의 중재를 통해서만 풀려났다. 같은 해 조반니는 말베치 가문이 주도한 자신에 대한 음모를 분쇄했는데, 이 가문 구성원들은 거의 모두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 1501년에는 마레스코티 가문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체사레 보르자의 팽창주의적 계획에 저항하는 데 성공했지만, 1506년 10월 7일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벤티볼리오를 폐위시키고 파문하는 교서를 발표하고, 도시에 교황령 금지령을 내렸다.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보낸 병력과 함께 교황군이 볼로냐로 진격하자 벤티볼리오와 그의 가족은 도망쳤다. 율리우스 2세는 11월 10일 승리의 행진을 하며 도시에 입성했다.[1]
조반니는 먼저 팔라비치노 가문이 머물던 부세토로 이동했다. 그의 아들 안니발레 2세와 에르메스 벤티볼리오가 1507년에 볼로냐를 재정복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볼로냐 시민들은 그 후 그의 시내 재산에 대해 폭동을 일으켜 궁전을 파괴했다.
파문당한 조반니는 밀라노에서 루이 12세의 포로로 생을 마감했고, 1508년 그 도시의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사망했다.[1]
조반니 벤티볼리오는 1504년에 루카 가우리코에게 자신과 아들들의 운명에 대해 자문을 구했고, 가우리코의 부정적인 예언에 불만을 품은 벤티볼리오는 그에게 망쿠에르다 고문을 가하고 볼로냐에서 추방했다.[1]
4. 몰락과 죽음
1488년, 조반니 2세의 딸 프란체스카가 남편이자 파엔차의 군주였던 갈레오토 만프레디를 독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파엔차 시민들은 이를 벤티볼리오 가문의 도시 정복 시도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고, 조반니 2세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중재로 풀려났다.[1] 같은 해, 조반니 2세는 밀라노 군의 카피타노 제네랄레(총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아들들에게 넘겨주었다. 1488년과 1501년에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음모를 꾸민 말베치 가문과 마레스코티 가문 인사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1]
조반니 2세는 체사레 보르자의 팽창 정책에 저항하였으나,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조반니 2세를 파문하고 볼로냐를 공격했다. 조반니 2세는 부세토로 피신하였고, 이후 밀라노에서 루이 12세의 포로로 지내다 1508년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1504년, 조반니 2세는 점성술사 루카 가우리코에게 자신과 아들들의 운명을 물었으나, 부정적인 예언에 분노하여 그를 망쿠에르다 고문하고 볼로냐에서 추방하기도 했다.[1]
4. 1. 교황 율리오 2세와의 전쟁
체사레 보르자의 팽창주의에 저항했지만, 1506년 10월 7일 교황 율리오 2세는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파문을 공포하였으며, 볼로냐에도 파문을 내렸다. 루이 12세가 보낸 프랑스 부대와 함께 교황군이 볼로냐로 진격해오자 조반니 2세와 그의 가문은 도망쳐야 했다. 1503년에 즉위한 교황 율리오 2세는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된 강하고 독립된 교황직을 이탈리아에 정립하고자 노력했고, 체사레 보르자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볼로냐를 점령하고 1506년 11월 10일 볼로냐에 입성하여 교황대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조반니 2세는 팔라비치니 가문이 통치하던 부세토로 피신했다. 1507년 그의 아들 안니발레 2세와 에르메스가 볼로냐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볼로냐 시민들은 도시 내 벤티볼리오 가문의 재산에 폭동을 일으켜 궁전을 파괴했다.
파문당한 조반니 2세는 밀라노에서 루이 12세의 포로로 지내다 1508년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4. 2. 망명과 최후
1488년, 조반니 2세의 딸 프란체스카는 파엔차의 통치자였던 남편 갈레오토 만프레디를 독살했다. 만프레디의 시민들은 이를 도시 정복을 위한 은밀한 움직임으로 간주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반니 2세가 반란 진압을 위해 도착했을 때 그는 포로로 잡혔으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중재로 풀려났다. 같은 해, 밀라노 군대의 카피타노 제네랄레(참모총장)가 되었지만, 지휘 책임은 아들에게 넘겨주면서 명예직에 가까웠다. 1488년 조반니 2세는 말베치 가문이 주도한 자신에 대한 음모를 분쇄하고, 가문 구성원 대부분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 1501년에는 마레스코티 가문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1]체사레 보르자의 팽창주의적 계획에 저항했지만, 1506년 10월 7일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조반니 2세를 폐위시키고 파문하는 교서를 발표하며, 도시에 교황령 금지령을 내렸다.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보낸 병력과 함께 교황군이 볼로냐로 진격하자 조반니 2세와 그의 가족은 도망쳤다. 율리우스 2세는 11월 10일 승리의 행진을 하며 도시에 입성했다.[1]
조반니 2세는 먼저 팔라비치노 가문이 머물던 부세토로 이동했다. 아들 안니발레 2세와 에르메스 벤티볼리오가 1507년에 볼로냐 재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볼로냐 시민들은 그의 시내 재산에 대해 폭동을 일으켜 궁전을 파괴했다.[1]
파문당한 조반니 2세는 밀라노에서 루이 12세의 포로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1508년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사망했다.[1]
1504년, 조반니 2세는 점성가 루카 가우리코에게 자신과 아들들의 운명에 대해 자문했다. 가우리코의 부정적인 예언에 불만을 품은 조반니 2세는 그에게 망쿠에르다 고문을 가하고 볼로냐에서 추방했다.[1]
5. 가족 관계
Giovanni II Bentivoglioit는 1464년 5월 2일에 지네브라 스포르차와 혼인하였다.[3][4] 지네브라는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의 사생아 출신의 딸이며, 조반니의 친척이자 전임자인 산테 벤티볼리오의 미망인이었다. 지네브라와의 사이에서 16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그중 다섯은 유아기에 사망하였다.
자녀 중 안니발레 2세 벤티볼리오는 에르콜레 1세 데스테의 딸 루크레치아와 혼인하였으며, 알레산드로 벤티볼리오는 이폴리타 스포르차와 혼인하였다. 프란체스카는 갈레오토 만프레디와 혼인하였고, 라우라는 조반니 곤차가와, 비올란테는 판돌포 4세 말라테스타와 혼인하였다. 카밀라와 이소타는 수녀가 되었고, 안톤갈레아초 벤티볼리오는 성직자가 되었다.
조반니는 또한 카밀라 벤티볼리오라는 딸을 두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루크레치아 데스테'라고 전해진다. 카밀라는 피로 곤차가와 결혼했다. 이사벨 곤차가, 카를로스 곤차가, 루크레치아 곤차가는 카밀라 벤티볼리오의 알려진 자녀들이다. 이사벨과 카를로스를 통해 카밀라와 조반니 2세는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와 벨기에 국왕 필리프의 조상이 되었다.
6. 평가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거의 반세기 동안 볼로냐를 통치하며 훌륭한 궁전을 유지하고 특히 수로를 개발하는 등 도시 미관을 개선했다.[2] 하지만 도시의 화려함과 축제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빈곤이 존재했다.[2]
그는 프란체스코 프란치아, 로렌초 코스타, 아미코 아스페르티니 같은 예술가들에게 성 세실리아의 생애를 담은 프레스코화를 의뢰했다. 이 프레스코화는 산 자코모(San Giacomo) 아치길을 통해 오라토리오 디 산타 체칠리아(Oratorio di Santa Cecilia)에서 볼 수 있다.[https://web.archive.org/web/20081104203805/http://www.footprintguides.com/Bologna/Northeast-the-university-quarter.php] 산 자코모 마조레 바실리카의 벤티볼리오 가문 예배당에 있는 로렌초 코스타의 벤티볼리오 가문 제단화는 말베치 가문의 암살 시도에서 가문이 무사히 벗어난 것에 대한 감사 헌정물이다.[https://web.archive.org/web/20081104203805/http://www.footprintguides.com/Bologna/Northeast-the-university-quarter.php] 벤티볼리오는 건축가 G. 나디에게 벤티볼리오 궁전 건설을 의뢰하여 1498년에 착공했다. 볼로냐 출신 건축가 아리스톨레 피오라반티는 포데스타 궁전 재건 계획을 세웠지만, 1484년에서 1494년까지 벤티볼리오에 의해 시행되었다.
참조
[1]
간행물
Bentivoglio, Giovanni
[2]
간행물
Bentivoglio, Giovanni
[3]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royalbloo[...]
2016-04-30
[4]
웹사이트
http://www.genealogi[...]
[5]
웹사이트
http://fabpedigre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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