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부유한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로, 1389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고 교황청 재산 관리실 총감독을 맡아 가문의 부를 증대시켰다. 조반니는 피렌체의 시뇨리아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1429년 사망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두 아들에게 은행의 소유권을 넘겼으며, 아들 코시모는 그의 부를 바탕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세 은행가 - 로렌초 일 베키오
로렌초 일 베키오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아들이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동생으로, 메디치 은행 업무를 감독하고 피렌체 공화국의 여러 직위를 역임했으며, 교황과 베네치아 대사로 활동했고,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를 통해 토스카나 대공들의 조상이, 마리 드 메디시스를 통해 프랑스 군주들의 조상이 되었다. - 피렌체 공화국 출신 - 로렌초 일 베키오
로렌초 일 베키오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아들이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동생으로, 메디치 은행 업무를 감독하고 피렌체 공화국의 여러 직위를 역임했으며, 교황과 베네치아 대사로 활동했고,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를 통해 토스카나 대공들의 조상이, 마리 드 메디시스를 통해 프랑스 군주들의 조상이 되었다. - 이탈리아의 중세사 - 시칠리아 왕국
시칠리아 왕국은 1130년 로제르 2세가 건국한 노르만 왕국으로,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과 주변 지역을 통치했으며, 다양한 왕조를 거쳐 1816년 나폴리 왕국과 통합되어 두 시칠리아 왕국을 형성했다. - 이탈리아의 중세사 - 타란토 공국
타란토 공국은 1088년 보에몽 1세가 건국한 남부 이탈리아의 봉건 영지로, 풀리아 지역을 거의 차지했으며 타란토를 수도로 삼았고,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봉건 영지였다가 1463년 나폴리 왕국에 병합되어 소멸했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
출생 | 1360년 |
출생지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
사망 | 1429년 2월 20일 (69세) |
사망지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
매장지 |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 |
가문 | 메디치 가문 |
아버지 |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 |
어머니 | 자코파 스피니 |
배우자 | 피카르다 부에리 |
자녀 | 코시모 데 메디치 다미아노 로렌초 일 베키오 안토니오 |
직업 | 은행가 |
경력 | |
주요 활동 | 메디치 은행 설립 |
2. 생애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1360년 피렌체에서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와 자코파 스피니(Jacopa Spini)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부유한 환경은 아니었다.[2] 아버지 사후 적은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은행가였던 삼촌 비에리 데 메디치의 도움으로 은행업에 입문했다.[2] 그는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1397년 메디치 은행을 창설하고, 특히 교황청과의 관계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가문 부흥의 기틀을 마련했다.[2][17] 1386년에는 명문가 출신의 피카르다 부에리와 결혼하여 가문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정치에는 비교적 거리를 두었으나,[14] 피렌체 시민들의 신망을 얻어 시뇨리아의 프리오리, 곤팔로니에레 등 주요 공직을 역임했다.[14] 또한 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 피렌체 세례당 문 제작 심사에 참여하고 산 로렌초 성당 건설을 후원하는 등[4][15][2]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검소하고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시민들과의 관계를 중시했다.[7] 1420년 아들들에게 은행 경영을 넘겨주었고,[19] 1429년 피렌체 최고 부호 중 한 명으로 사망했다.[18] 그의 죽음은 메디치 가문의 높은 사회적 위상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산 로렌초 성당에 안장되었다.[20] 조반니가 이룩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은 아들 코시모 시대를 거치며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2. 1. 가문의 부흥
조반니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아버지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가 남긴 적은 재산은 미망인과 다섯 아들에게 분할되어 조반니에게 돌아간 몫은 적었다.[2] 하지만 그의 삼촌인 비에리 데 메디치는 당시 피렌체의 저명한 은행가였고, 조반니는 삼촌의 도움으로 은행업에 발을 들여 로마 지점의 주니어 파트너까지 오르게 되었다.[2]1393년 비에리가 은퇴하자 조반니는 은행을 인수했고,[2] 1397년에는 로마에 있던 은행을 피렌체로 옮겨 사실상 메디치 은행을 창설했다. 그는 로마,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그 너머까지 지점을 확장하며 초기 다국적 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반니는 교황 대립 시기에 추기경 발다사레 코사를 지원하여 그가 대립교황 요한 23세로 즉위하는 데 역할을 했고, 그 대가로 1410년 교황청 회계원의 재무 관리자가 되어 교황청의 금융 업무를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쌓기 시작했다. 요한 23세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된 후에도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1414년, 조반니는 오랜 분열 끝에 교황청이 로마로 영구히 돌아올 것이라 예측했고, 이는 1417년 마르티누스 5세가 단일 교황으로 선출되어 로마에 정착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조반니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마르티누스 5세는 메디치 은행에 교황청 재산 관리실의 총괄 관리권을 부여했다.[5][17] 이후 메디치 은행은 역대 교황들의 주거래 은행이 되었으며, 조반니는 교황청의 세금 징수권과 여러 명반 광산 운영권까지 확보하며 가문의 부를 더욱 늘렸다. 이는 메디치 가문이 유럽 최고 부호 중 하나로 발돋움하고, 훗날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386년, 오랜 명문가 출신으로 상당한 지참금을 가져온 피카르다 부에리와의 결혼 역시 가문의 성장에 기여했다.
조반니는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비교적 꺼렸지만, 피렌체 공직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14]
1422년에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제안한 '몬테 베르데 백작' 작위를 사양하며 '일반 시민'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피렌체에서 두 개의 양모 작업장을 소유했으며, 아르테 델라 라나와 아르테 델 캄비오 길드의 회원이기도 했다.[3][16]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조반니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402년에는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 문 제작을 위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로렌초 기베르티의 디자인을 선정하는 데 역할을 했다.[4][15] 1418년에는 산 로렌초 성당의 구 성물안치소 건설 자금을 지원하며 건축가로 브루넬레스키, 조각가로 도나텔로를 고용했다.[2][20] 또한, 1418년에는 니콜로 다 우차노와 협력하여 독일에 투옥되어 있던 폐위된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석방을 위해 38,000 두카트라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했고, 이듬해 그가 피렌체에서 사망하자 세례당에 웅장한 묘를 마련해주었다.[6]
막대한 부를 축적했음에도 조반니는 자신과 아들들이 평범한 시민처럼 보이도록 노력하며 가문이 피렌체 사회에서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법을 존중하고 시민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며 가문의 명성을 쌓고자 했다.[7] 1420년, 그는 두 아들 코시모와 로렌초에게 은행의 소유권을 넘겨주었다.[19] 1429년 사망 당시 조반니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18] 그의 장례식에는 메디치 가문 일족뿐 아니라 교황 대리, 각국 대사, 피렌체 유력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높아진 가문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내 피카르다와 함께 산 로렌초 성당의 구 성물안치소에 묻혔다.[20] 조반니가 쌓아 올린 경제적, 사회적 기반은 장남 코시모 시대에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부상하는 토대가 되었다.
2. 2. 정치 활동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그의 가문과 은행 사업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정치에 비교적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피렌체 정부의 공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릴 때도 있었지만, 그는 종종 벌금을 내고 직책을 맡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렌체에서 상당한 명성과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여러 고위직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아들 코시모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정부 청사를 네 작업장으로 만들지 말고, 부름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그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라."라고 조언했다.[7]그는 피렌체 공화국에서 다음과 같은 주요 공직을 역임했다.
직책 | 연도 | 비고 |
---|---|---|
시뇨리아의 프리오리 | 1402년, 1408년, 1411년 | 피렌체 행정 위원 |
산 조반니 세례당 정문 황동판 심사 위원 | 1402년 |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 선정 참여[15] |
피스토이아(Pistoia) 시 총독 | 1407년 | [2] |
곤팔로니에레 | 1421년 | 법에 따라 2개월간 역임[8] |
정치 영역에서 조반니는 피렌체 시민들의 편에 서서 귀족 세력에 맞서는 메디치 가문의 전통을 따랐다. 1426년, 그는 시뇨리아 내에서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피렌체의 불공평하고 억압적인 인두세를 폐지하고, 재산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카타스토(Catasto) 제도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제도는 조반니가 고안한 것으로, 세금 부담을 피렌체의 부유층에게 더 많이 지우고 기존에 세금 회피가 용이했던 귀족들에게 공정한 과세를 가능하게 했다.[9] 이듬해인 1427년에는 귀족들이 권력 강화를 위해 제안한 과두정치 개혁안의 통과를 막았다. 이 개혁안은 귀족들의 시뇨리아 참여 제한을 없애고, 일부 소규모 길드의 정치 참여 권한을 박탈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9]
또한 조반니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교황 대분열 시기, 그는 추기경 발다사레 코사를 지원하여 대립교황 요하네스 23세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 대가로 1410년경 교황청 재산 관리실 총책임자 자리를 얻어 교황청의 재정을 관리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17] 요하네스 23세는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되었지만, 메디치 은행은 계속해서 교황청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금융 업무를 담당했다.
1422년, 로마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조반니에게 '몬테 베르데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그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고 '일반 시민'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이는 그의 신중한 정치적 감각과 시민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일화로 평가된다.
1429년 조반니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메디치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황 대리, 여러 국가의 대사, 피렌체의 유력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당시 메디치 가문의 높은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2. 3. 예술 후원
1402년에 그는 로렌초 기베리트가 산 조반니 세례당의 정문에 제작한 황동판에 대한 심사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15]2. 4. 결혼과 자녀
조반니는 1386년 오랜 명망을 지닌 가문 출신의 피카르다 부에리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지참금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져와 메디치 가문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조반니와 피카르다 부에리 사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 1389–1464 | 피렌체의 아버지(Pater Patriae), 피렌체 영주, 위대한 로렌초의 할아버지. |
다미아노 디 조반니 데 메디치 | 1390년 사망 | 코시모의 쌍둥이 형제로 추정, 유아기에 사망. |
로렌초 디 조반니 데 메디치 | 1395–1440 | 메디치 가문 포폴라노(Popolano) 분파의 시조, 후대 토스카나 대공국 가계가 그로부터 이어짐. |
안토니오 디 조반니 데 메디치 | 1398년경 출생 | 유아기에 사망. |
조반니는 산 로렌초 성당의 구 성물안치소에 묻혔으며, 그의 아내 피카르다 역시 사망 후 4년 뒤 남편 곁에 함께 묻혔다.[20]
2. 5. 죽음과 유산
1429년 사망 당시 조반니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 이는 그의 1429년 세금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18][10]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당시 피렌체에서 두 번째로 부유했으며, 막대한 재산을 아들 코시모에게 남겼다.[2] 조반니가 축적한 부와 메디치 은행을 포함한 금융 시스템은 코시모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2]조반니는 이미 1420년에 은행 경영권의 대부분을 두 아들 코시모와 로렌초에게 넘겨주었다.[19][11]
사망 당시 그는 피렌체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으며, 정치적 경쟁자였던 니콜로 다 우차노조차도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니콜로는 조반니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반니가 메디치 가문을 시민들에게 사랑받게 만들었고, 가문의 큰 성공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언급했다.[7]
1429년 그의 장례식에는 메디치 가문 일족뿐만 아니라 교황 대리, 여러 나라의 대사, 피렌체의 유력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메디치 가문의 높아진 사회적 위상과 가문의 통합을 보여주었다. 그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 내 옛 성구실에 안장되었고,[20] 4년 후 사망한 그의 아내 피카르다 부에리도 같은 곳에 묻혔다.
조반니의 유산은 그의 사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실질적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남 코시모는 아버지의 기반 위에서 가문의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훗날 차남 로렌초의 후손들은 토스카나 대공국을 세우게 된다.

3. 대중 매체에서
조반니 데 메디치는 2016년 텔레비전 드라마 《메디치: 피렌체의 명가》(Medici: Masters of Florence|eng)에서 더스틴 호프먼이 연기했다.[21][12]
참조
[1]
서적
Medici, House of
[2]
서적
Florence and the Medici
https://archive.org/[...]
Thames and Hudson Inc.
[3]
서적
[4]
서적
[5]
서적
Medici, Cosimo de'
[6]
서적
The Medici
Modern Library
[7]
서적
Lorenzo De' Medici, The Magnificent
Smith, Elder & Co.
[8]
서적
[9]
서적
The Medici
Random House
[10]
서적
Medici, Cosimo de'
[11]
서적
Medici, Cosimo de'
[12]
웹사이트
Medici: Masters of Florence
https://www.imdb.com[...]
2016-12-09
[13]
서적
Medici, House of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Medici, Cosimo de'
[18]
서적
Medici, Cosimo de'
[19]
서적
Medici, Cosimo de'
[20]
논문
[21]
웹인용
Medici: Masters of Florence
https://www.imdb.com[...]
2016-12-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