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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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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극장은 일제강점기 경성부 인사동에 위치했던 극장으로, 1922년 11월 6일 준공 및 개관하였다. 이동백의 독창, 연극, 영화 상영을 시작으로, 극단 토월회의 활동 거점이 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상업용 극영화로 평가받는 《춘향전》이 상영되기도 했다. 1929년과 1930년에 경영자가 변경되었고, 1934년에는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가 상영되었다. 1936년 6월 11일 화재로 전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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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장
기본 정보
회사명조선극장
영어 회사명Chosen Theatre
종류사업장
본사 소재지조선경성부인사동 130번지 (현재의 대한민국서울특별시종로구 인사동 130번지)
설립일1922년 11월 6일
업종서비스업
사업 내용영화의 흥행
대표자관주 서촌 복송
관련 인물하야카와 마스타로
시미즈 만지로
특기 사항약력
1922년 11월 6일 낙성 및 개관
1936년 6월 11일 화재로 전소 및 폐관
조선극장
참고 자료
참고 문헌笹川慶子, 京城における帝国キネマ演芸の興亡 : 朝鮮映画産業と帝国日本の映画興行, 大阪都市遺産研究 3, 関西大学大阪都市遺産研究センター, 2013, 19-31.
참고 웹사이트2013년 11월 5일 보관됨

2. 연혁

조선극장은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인사동 130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에 1922년 11월 6일 신축 개관하여,[1][8][10] 1936년 6월 11일 화재로 전소되어 폐관되었다.[9][10]

2. 1. 설립과 초기 운영 (1922-1929)

1922년 11월 6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인사동 130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에 조선극장이 신축 개관하였다.[1][8][10] 개관 다음 날인 11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광고에 따르면, 이 극장에서는 이동백의 독창, 당시 현대극 극단인 ‘만파회’의 연극, 유럽 영화와 미국 영화를 상영하였다.[8][10]

1922년 11월 6일자 조선어 신문에 실린 극장 개관 기사.


1923년, 극단 ‘토월회’에 참여한 홍사용은 이 극장을 거점으로 극단 공연을 펼쳤으나, 1925년 자금난으로 극단을 해산하였다.

당시 경영자는 황금관(후의 국도극장)의 지배인이었고, 과거 유락관이라 불렸던 당시의 기락관을 경영했던 하야카와 마스타로(하야카와 코슈)이다.[1] 하야카와는 동아문화협회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도 하였고, 1923년 말에는 “조선 최초의 상업용 극영화”로 여겨지는 『춘향전』을 제작·감독하여 이 극장에서 개봉하였다.[11] 1923년 12월 25일자 『조선일보』에는 이 작품의 등장으로 조선 고유 문예의 빛이 새롭게 더해졌다고 평가되었다.[11]

신극 배우 현철(1891년~1965년)[12]은 1927년 6월, 이 극장 경영에 참여하였다.[13]

2. 2. 경영 변화와 화재 (1929-1936)

1929년에 경영자가 시미즈 만지로로 변경되었고, 관객 정원은 800명이었다.[1] 1930년에는 경영자가 니시무라 후쿠마쓰로 변경되었다.[1] 1934년에는 조선연극문화협회 상무이사였던 김관수(기시모토 히로시)가 자신의 작품을 조선극장에서 상영하였다.[1] 같은 해 6월 1일에는 찰리 채플린 감독·주연의 《시티 라이트》가 조선극장에서 개봉되었으며, 인기 가수 신카나리아가 특별 출연하였다.[1]

1936년 6월 11일, 낮 공연 중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극장이 전소되었다.[9][10] 당시 약 300명의 관객은 무사히 대피했으며, 인근으로의 확산은 적었다.[1]

2. 3. 폐관 이후

1936년 6월 11일 화재로 전소되어 폐관되었다.[9][10]

3. 구조 및 데이터



조선 경성부 인사동 130번지[3][4][5] (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에 위치했다. 목조 벽돌조 3층 건물로, 1929년[4]과 1930년[5] 기준 관객 정원 수는 800명이었다.

경영자는 다음과 같다.


  • 하야카와 마스타로 (早川増太郎|하야카와 마스타로일본어)[1] (지배인·김조성[3])
  • 시미즈 만지로 (清水万次郎|시미즈 만지로일본어)
  • 니시무라 후쿠마쓰 (西村福松|니시무라 후쿠마쓰일본어)

4. 상영 및 공연 목록

5. 평가

조선극장은 개관 초기부터 조선인을 위한 양화(수입 영화)를 중심으로 상영했지만, 남촌을 중심으로 거주·경제 생활을 했던 일본인들도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고, 일본어 잡지 『조선공론』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명화를 아까울 정도로 계속해서 상영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1]

6. 갤러리

참조

[1] 논문 京城における帝国キネマ演芸の興亡 : 朝鮮映画産業と帝国日本の映画興行 https://hdl.handle.n[...] 関西大学大阪都市遺産研究センター
[2] 서적 年鑑
[3] 서적 総覧
[4] 서적 総覧
[5] 서적 総覧
[6] 웹사이트 昭和7年の映画館 朝鮮 41館 http://homepage1.nif[...] 2013-11-14
[7] 서적 年鑑
[8] 뉴스 朝鮮劇場開館広告 毎日申報 1922-11-07
[9] 뉴스 朝鮮劇場全焼騒動 毎日申報 1936-06-13
[10] 서적 한국
[11] 웹사이트 1930年代日本帝国内における文化「交流」:映画『春香伝』の受容を中心に https://www.ritsumei[...] 2013-11-14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영화 City Lights 2013-11-11
[16] 영화 街の灯 2013-11-14
[17] 뉴스 朝鮮劇場『街の灯』公開広告 東亜日報 1934-06-01
[18] 영화 42nd Street 201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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