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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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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순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조조의 사촌이며 호표기라는 정예 기병대를 이끌었다. 그는 18세에 황문시랑이 되었으며, 이후 조조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남피 전투에서 원담을 죽이고, 백랑산 전투에서 선비족을 격파하는 등의 공을 세워 고릉정후에 봉해졌다. 210년에 사망했으며, 조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호표기 지휘관 후임을 뽑지 않았다.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위후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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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춘
한자 표기曹純
로마자 표기Cao Chun
자화(子和)
시호위후(威侯)
관직
소속후한
직책의랑(議郎) (조조 휘하)
참사공군사(參司空軍事) (조조 휘하)
작위고릉정후(高陵亭侯)
역할호표기(虎豹騎) 독장
생애
출생생년 미상
출신지예주패국 초현
사망210년
사인병사
가족 관계
아버지조치(曹熾)
형제조인 (형)
친척조조 (사촌)
자녀조연

2. 생애

조순은 그의 형인 조인사촌조조의 사촌지간이었다.[3] 그의 할아버지 조포(曹襃)와 아버지 조치(曹熾)는 후한정부에서 벼슬을 지냈다.[4] 조순이 14세 때[5], 아버지(조등)가 39세에 사망했다.[19] 조순과 조인은 다른 가족과 함께 살았고, 나이가 들면서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조순은 부유했으며 수백 명의 하인과 가신을 거느렸고, 엄격하고, 규칙을 준수하며, 공정한 지도자로 알려져 동향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5] 학식이 풍부하고 학자들을 존경했던 조순은 문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으며, 많은 문인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5]

광화 6년(183년)에 아버지 조등이 사망하자, 조순은 형 조인이 별거했기 때문에 집안을 이었다(『영웅기』). 조순은 재산을 잘 관리하고 수백 명의 하인과 식객을 잘 감독했기에 향리 사람들에게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다(『영웅기』). 또한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를 존경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조순의 밑으로 모여들었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영웅기』).[5]

중평 4년(187년)[19], 조순은 18세에 황문시랑이 되었고,[6] 2년 후, 그의 사촌조조를 따라 상읍 (襄邑; 현재의 허난성 수이현)으로 가서 병사들을 모집했다.[6] 그 이후로 그는 조조의 편에서 여러 차례 다른 군벌과의 전투에 참전했다.[6] 중평 6년(189년)[19], 20세에 조조를 섬겼다. 상읍에서 모병에 동행했고, 그 후에도 조조의 곁을 따랐다(『영웅기』).[6]

그는 196년과 205년 사이에 참사공군사(參司空軍事)가 되었다.[7] 의랑·사공 군사에 취임했다. 조조는 호표기라는 정예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심 끝에 그 지휘관을 조순에게 맡겼다. 조순은 호표기의 지휘관이 되자 부하들을 잘 아끼고 통솔했기에 부하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고 한다(『위서』).[13]

조순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를 존경하여 많은 문인들이 그의 가신이 되었다.[5] 18세에 황문시랑이 되었고, 20세에 조조를 섬기기 시작했다.[6] 조조 휘하에서 조순은 조조군의 최정예 기병대인 호표기를 이끌었다.[13]

205년, 남피 전투에서 호표기를 이끌고 원담을 죽였다.[7] 조조는 퇴각을 고려했으나, 조순은 "멀리 원정 왔으니 지금 물러나면 위엄을 잃을 것입니다. 적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고, 아군은 패배하여 신중해졌습니다. 신중함으로 도취된 자와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진언했다. 조조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원담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패주하게 했고, 조순은 직속 기병을 지휘하여 원담의 수급을 베었다.[7]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선비족을 상대로 호표기를 이끌었고, 답돈을 사로잡았다.[8] 이러한 공헌으로 헌제는 조순을 고릉정후(高陵亭侯)로 봉하고 300가구를 식읍으로 하사했다.[10]

208년, 형주 원정에 참전하여 장판 전투에서 유비를 추격하여 그의 두 딸과 군수 물자를 빼앗았다.[11] 적벽 대전에 참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10년에 사망했으며, 조조는 "조순에 견줄 자를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라며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호표기 지휘관 후임을 뽑지 않았다고 한다.[13]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조순에게 시호인 "위후"(威侯)를 내렸다.[12]

조순은 210년, 헌제 치세의 건안 연간 15년에 사망했다.[12] 향년 41세(또는 40세)였다. 220년 말, 조조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조비는 헌제에게 왕위를 찬탈하도록 강요하여 후한 왕조를 끝내고 조위를 건국했다. 황제가 된 후, 조비는 조순에게 시호인 "위후"(威侯)를 내렸다.[12]

조순이 이끌었던 "호표기" (虎豹騎) 부대는 조조 군대의 정예 기병 부대였다.[13] 그들의 모집 과정은 매우 선별적이었는데, 최소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병사만이 자격이 있었다.[13] 조조는 조순이 죽은 후, 조순만한 지휘관을 얻을 수 없다 하여 호표기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했고, 후임 지휘관이 선출되지 않았다고 한다.[13]

조순(曹純)의 아들 조연(曹演)은 삼국 시대 조위에서 군관으로 복무했으며, 영군장군(領軍將軍)의 직책을 맡았다. 254년에서 256년 사이에 평락향후(平樂鄉侯)에 봉해졌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량(曹亮)이 그의 후작위를 물려받았다.[14]

2. 1. 초기 생애와 명성

조순은 그의 형인 조인사촌조조의 사촌지간이었다.[3] 그의 할아버지 조포(曹襃)와 아버지 조치(曹熾)는 후한정부에서 벼슬을 지냈다.[4] 조순이 14세 때[5], 아버지(조등)가 39세에 사망했다.[19] 조순과 조인은 다른 가족과 함께 살았고, 나이가 들면서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조순은 부유했으며 수백 명의 하인과 가신을 거느렸고, 엄격하고, 규칙을 준수하며, 공정한 지도자로 알려져 동향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5] 학식이 풍부하고 학자들을 존경했던 조순은 문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으며, 많은 문인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5]

광화 6년(183년)에 아버지 조등이 사망하자, 조순은 형 조인이 별거했기 때문에 집안을 이었다(『영웅기』). 조순은 재산을 잘 관리하고 수백 명의 하인과 식객을 잘 감독했기에 향리 사람들에게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다(『영웅기』). 또한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를 존경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조순의 밑으로 모여들었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영웅기』).[5]

중평 4년(187년)[19], 조순은 18세에 황문시랑이 되었고,[6] 2년 후, 그의 사촌조조를 따라 상읍 (襄邑; 현재의 허난성 수이현)으로 가서 병사들을 모집했다.[6] 그 이후로 그는 조조의 편에서 여러 차례 다른 군벌과의 전투에 참전했다.[6] 중평 6년(189년)[19], 20세에 조조를 섬겼다. 상읍에서 모병에 동행했고, 그 후에도 조조의 곁을 따랐다(『영웅기』).[6]

그는 196년과 205년 사이에 참사공군사(參司空軍事)가 되었다.[7] 의랑·사공 군사에 취임했다. 조조는 호표기라는 정예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심 끝에 그 지휘관을 조순에게 맡겼다. 조순은 호표기의 지휘관이 되자 부하들을 잘 아끼고 통솔했기에 부하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고 한다(『위서』).[13]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조순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를 존경하여 많은 문인들이 그의 가신이 되었다.[5] 18세에 황문시랑이 되었고, 20세에 조조를 섬기기 시작했다.[6] 조조 휘하에서 조순은 조조군의 최정예 기병대인 호표기를 이끌었다.[13]

205년, 남피 전투에서 호표기를 이끌고 원담을 죽였다.[7] 조조는 퇴각을 고려했으나, 조순은 "멀리 원정 왔으니 지금 물러나면 위엄을 잃을 것입니다. 적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고, 아군은 패배하여 신중해졌습니다. 신중함으로 도취된 자와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진언했다. 조조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원담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패주하게 했고, 조순은 직속 기병을 지휘하여 원담의 수급을 베었다.[7]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선비족을 상대로 호표기를 이끌었고, 답돈을 사로잡았다.[8] 이러한 공헌으로 헌제는 조순을 고릉정후(高陵亭侯)로 봉하고 300가구를 식읍으로 하사했다.[10]

208년, 형주 원정에 참전하여 장판 전투에서 유비를 추격하여 그의 두 딸과 군수 물자를 빼앗았다.[11] 적벽 대전에 참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10년에 사망했으며, 조조는 "조순에 견줄 자를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라며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호표기 지휘관 후임을 뽑지 않았다고 한다.[13]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조순에게 시호인 "위후"(威侯)를 내렸다.[12]

2. 3. 죽음과 후계

조순은 210년, 헌제 치세의 건안 연간 15년에 사망했다.[12] 향년 41세(또는 40세)였다. 220년 말, 조조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조비는 헌제에게 왕위를 찬탈하도록 강요하여 후한 왕조를 끝내고 조위를 건국했다. 황제가 된 후, 조비는 조순에게 시호인 "위후"(威侯)를 내렸다.[12]

조순이 이끌었던 "호표기" (虎豹騎) 부대는 조조 군대의 정예 기병 부대였다.[13] 그들의 모집 과정은 매우 선별적이었는데, 최소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병사만이 자격이 있었다.[13] 조조는 조순이 죽은 후, 조순만한 지휘관을 얻을 수 없다 하여 호표기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했고, 후임 지휘관이 선출되지 않았다고 한다.[13]

조순(曹純)의 아들 조연(曹演)은 삼국 시대 조위에서 군관으로 복무했으며, 영군장군(領軍將軍)의 직책을 맡았다. 254년에서 256년 사이에 평락향후(平樂鄉侯)에 봉해졌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량(曹亮)이 그의 후작위를 물려받았다.[14]

3. 평가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조순은 호표기 지휘관으로서의 사적은 묘사되지 않았다. 남군 공방전에서 조인의 부장으로 등장하여 손권군의 주유와 싸워 크게 패했다. 또한, 동관에서 마초와의 싸움에도 조조를 따라 종군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적벽대전 이후, 조순은 그의 형 조인과 함께 남군을 지켰으나, 주유의 가짜 장례식에 속아 유인되어 격파되었고, 유비의 장수 조운에게 남군을 빼앗겼다.

5. 가족 관계

조순(曹純)의 아들 조연(曹演)은 삼국 시대 조위에서 군관으로 복무했으며, 영군장군(領軍將軍)의 직책을 맡았다. 254년에서 256년 사이에 평락향후(平樂鄉侯)에 봉해졌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량(曹亮)이 그의 후작위를 물려받았다.[14] 조부는 조조의 양조부 조등의 형으로, 조조와 동족이다.

1974년부터 1977년에 걸쳐 안후이성 보저우시(亳州市) 차오청구(譙城区, 한대의 패국 초현)의 성 남쪽 일대에서 고분군('''조씨공원'''으로 명명)이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이 고분군은 조씨 일족의 묘로 판명되었다. 이에 따르면, "대장추 조등, 회계군 조군(조윤), 고 영천태수 조포, 장수교위 조치, 오군 태수 조정…"과 같이 조씨 일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6. 출처

참조

[1] 정보
[2] 인용
[3] 인용
[4] 인용
[5] 인용
[6] 인용
[7] 인용
[8] 인용
[9] 인용
[10] 인용
[11] 인용
[12] 인용
[13] 인용
[14] 인용
[15] 서적 英雄記
[16] 서적 魏書
[17] 간행물 長水校尉曹熾字元盛 安徽省亳県博物館「亳県曹操宗族墓葬」『文物』8期 1978
[18] 서적 水経注
[19] 서적 武帝紀
[20]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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