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너새니얼 커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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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너새니얼 커즌은 1859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1925년 사망한 영국의 정치가이다.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정계에 입문하여, 솔즈베리 후작의 비서관, 하원 의원, 외무 차관을 역임했다.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인도 총독 겸 부왕으로 재임하며 벵골 분할령을 단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시 내각에서 활동했고,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외무 장관을 지냈다. 1923년 총리직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만년에는 추밀원 의장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인도의 문화 유산 보호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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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너새니얼 커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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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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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초대 커즌 오브 케들스턴 후작 |
출생명 | 조지 너새니얼 커즌 |
출생일 | 1859년 1월 11일 |
출생지 | 케들스턴, 더비셔, 잉글랜드 |
사망일 | 1925년 3월 20일 |
사망지 | 런던, 잉글랜드 |
배우자 | 메리 레이터(1895년 결혼, 1906년 사망) 그레이스 더건(1917년 결혼) |
자녀 | 아이린 커즌, 제2대 레이븐스데일 여남작 레이디 신시아 모즐리 레이디 알렉산드라 메트칼프 |
부모 | 알프레드 커즌, 제4대 스카스데일 남작 |
모교 | 베일리얼 칼리지, 옥스포드 |
소속 정당 | 보수당 |
경력 | |
제11대 인도 총독 겸 부왕 | 재임 시작: 1899년 1월 6일 재임 종료: 1905년 11월 18일 |
군주 |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
전임 | 엘긴 백작 |
후임 | 민토 백작 |
부관 | 로드 앰프힐 |
상원 원내대표 | 재임 시작: 1924년 11월 3일 재임 종료: 1925년 3월 20일 |
군주 | 조지 5세 |
총리 | 스탠리 볼드윈 |
전임 | 홀데인 자작 |
후임 | 솔즈베리 후작 |
상원 원내대표 | 재임 시작: 1916년 12월 10일 재임 종료: 1924년 1월 22일 |
군주 | 조지 5세 |
총리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보나 로 스탠리 볼드윈 |
전임 | 크루 후작 |
후임 | 홀데인 자작 |
외무장관 | 재임 시작: 1919년 10월 23일 재임 종료: 1924년 1월 22일 |
군주 | 조지 5세 |
총리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보나 로 스탠리 볼드윈 |
전임 | 아서 밸푸어 |
후임 | 램지 맥도널드 |
추밀원 의장 | 재임 시작: 1924년 11월 3일 재임 종료: 1925년 3월 20일 |
군주 | 조지 5세 |
총리 | 스탠리 볼드윈 |
전임 | 파모어 남작 |
후임 | 밸푸어 백작 |
추밀원 의장 | 재임 시작: 1916년 12월 10일 재임 종료: 1919년 10월 23일 |
군주 | 조지 5세 |
총리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전임 | 크루 후작 |
후임 | 아서 밸푸어 |
항공 위원회 의장 | 재임 시작: 1916년 5월 15일 재임 종료: 1917년 1월 3일 |
군주 | 조지 5세 |
총리 | H. H. 애스퀴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전임 | 더비 백작 |
후임 | 카우드레이 자작 |
외무부 정무 차관 | 재임 시작: 1895년 6월 20일 재임 종료: 1898년 10월 15일 |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총리 | 솔즈베리 후작 |
전임 | 에드워드 그레이 경 |
후임 | 세인트 존 브로드릭 |
인도 담당 정무 차관 | 재임 시작: 1891년 11월 9일 재임 종료: 1892년 8월 11일 |
군주 | 빅토리아 |
총리 | 솔즈베리 후작 |
전임 | 존 엘던 고스트 경 |
후임 | 조지 W. E. 러셀 |
상원 의원 | (아일랜드 대표 귀족으로서) 재임 시작: 1908년 1월 21일 재임 종료: 1925년 3월 20일 |
전임 | 킬메인 남작 |
후임 | 레이븐스데일 여남작(남작 작위) 스카스데일 자작(자작 작위) 후임 없음 (아일랜드 대표 귀족으로서) |
하원 의원 | 선거구: 사우스포트 재임 시작: 1886년 7월 27일 재임 종료: 1898년 8월 24일 |
전임 | 조지 오거스터스 필킹턴 |
후임 | 허버트 네일러-레일랜드 |
서훈 | |
칭호 및 훈장 | 가터 훈장 나이트 (KG) 인도의 별 훈장 나이트 그랜드 커맨더 (GCSI) 인도 제국 훈장 나이트 그랜드 커맨더 (GCIE) 추밀원 고문관 (PC) 왕립학회 회원 (FRS) 왕립지리학회 회원 (FRGS) 영국 학술원 회원 (FBA) |
2. 출생과 성장
조지 너새니얼 커즌은 1859년 1월 11일 잉글랜드 더비셔주 케들스턴 홀에서 태어났다.[81][82] 아버지는 케들스턴의 잉글랜드 국교회 교구 목사이자 제4대 스카즈데일 남작인 아서 커즌(1831–1916)이며, 어머니는 블랑슈 센하우스(1837–1875)였다.[81][82] 커즌 가문은 12세기부터 케들스턴에 거주해왔다.[1]
조지 너새니얼 커즌은 1885년 솔즈베리 후작의 비서관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11] 1886년 영국 의회에 랭커셔 남서부의 사우스포트 의원으로 입성했다.[12] 그의 의회 첫 연설은 주로 아일랜드 자치 운동과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공격하는 내용이었으며, 이후 영국 하원에서의 연설은 종종 아일랜드 문제나 그가 지지했던 귀족원 개혁에 관한 것이었다.[12]
1895년부터 1898년까지 솔즈베리 후작 내각에서 외무 정무 차관/Under-Secretary of State for Foreign Affairs영어을 역임했다.[81][82] 당시 외무 대신은 총리인 솔즈베리 후작이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외무 대신 대행과 같은 입장이었다. 외무 차관 취임과 함께 추밀 고문관에 임명되었다.[81]
1898년 커즌은 인도 총독 겸 부왕으로 임명되었고,[81][82][92] 아일랜드 귀족 작위인 케들스턴 남작 작위를 받았다.[27] 이 작위는 아일랜드 귀족 작위였기 때문에, 그가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 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7] 1899년 1월부터 인도 통치를 시작했다.[81][82]
1906년, 커즌은 첫 번째 부인 메리 빅토리아 라이터[97]가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메리의 죽음은 커즌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커즌은 1915년 5월 애스퀴스가 애스퀴스 연립 내각을 구성했을 때 추밀원 의장으로 내각에 합류했다.[44] 오스틴 체임벌린, 아서 발푸어와 같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영국의 노력을 지지했는데, 영국의 위상이 높아지면 독일이 사주한 인도 내 무슬림 반란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44] 다르다넬스 위원회 위원이었던 커즌은 1915년 10월 회의에서 살로니카 원정은 "돈키호테적인 기사도"라고 말했다.[45]
파리 평화 회의에서 발푸어의 뒤를 이어, 커즌은 1919년 10월 로이드 조지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58] 그러나 커즌은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경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여러 국제 회의는 대부분 로이드 조지 자신이 참석했고, 외무장관 커즌에게는 종속적인 지위가 강요되었다.[52] 총리는 커즌이 지나치게 거만하고 자만심이 강하다고 생각했으며, 커즌을 마치 롤스로이스로 소포를 역까지 배달하는 것처럼 사용했다고 한다.[52]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즌은 이전 외무장관들에 비해 총리에게 종속적인 입장이었지만, 여러 외교 문제에서 활약했다.
1923년 5월 보너 로가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커즌은 후임 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스탠리 볼드윈에게 밀려났다.[66] 이는 전 총리 아서 밸푸어를 비롯한 당내 주요 인사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밸푸어는 조지 5세에게 민주 시대에 총리가 귀족원 의원인 것은 부적절하며, 특히 노동당(영국)이 귀족원 의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하원에서 주요 야당이 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조언했다.[66] 밸푸어는 사적으로 커즌의 성격이 일부에게 불쾌감을 주어 그를 꺼려했다고 인정했으며, 조지 5세 역시 이러한 편견을 공유했다.[66]
커즌은 1924년 1월 볼드윈 내각이 총사퇴할 때까지 외무 장관을 역임했다. 볼드윈이 1924년 11월에 정권을 되찾자, 커즌은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이는 사실상 좌천이었다.
조지 너새니얼 커즌은 공적 및 사생활 모두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은 정치가였다.[75] 그의 경력은 성공과 실망이 뒤섞인 것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총독 중 한 명이었지만, 임기는 사임으로 끝났고, 인정도 보상도 받지 못했다.[75] 그는 로이드 조지 총리 임기 말에 가서야 외무 장관으로서의 입지를 확립할 수 있었다. 로잔에서 명성을 회복한 후, 그의 마지막 야망은 조지 5세에 의해 좌절되었다.[75]
[1]
서적
Empire : the rise and demise of the British world order and the lessons for global power
https://archive.org/[...]
New York : Basic Books
2004
커즌은 어린 시절 엄격한 가정교사 엘렌 메리 파라만으로부터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이로 인해 커즌은 공격적인 성향과 강박 관념을 갖게 되었다.[1] 1875년, 커즌이 16세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83]
커즌은 윅스엔포드 학교,[2] 이튼 칼리지,[3] 옥스퍼드 대학교의 배일리얼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1] 이튼 칼리지에서는 역사가 오스카 브라우닝과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를 맺어 브라우닝이 해임되기도 했다.[4][5]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과 옥스퍼드 캐닝 클럽(조지 캐닝의 이름을 딴 토리 정치 클럽)의 비서를 역임했다.[1] 인문학 과정에서 1등급을 받지는 못했지만, 토마스 모어에 관한 평론으로 로디언 상과 아놀드 상을 수상했다.[1] 1883년, 올 소울스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 자격을 얻었다.[7] 세실 스프링 라이스와 에드워드 그레이, 제1대 폴로든 자작과는 동문이자 가까운 친구였다.[7]
10대 시절 승마 중 척추 부상을 입어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6]
1895년, 커즌은 미국 시카고의 부호 레비 레이터의 딸 메리 빅토리아 레이터/Mary Victoria Leiter영어와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81][82]
3. 정계 입문과 세계 여행
1885년에 총리 제3대 솔즈베리 후작로버트 가스코인-세실의 사설 비서 대리가 되었고, 이듬해인 1886년에는 랭커셔 남서부에서 선출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81][82]
커즌은 1887년부터 1895년까지 여러 차례 세계 여행을 했다. 1887년부터 1888년까지 영국 자치령인 캐나다에서 미국, 일본[85], 청나라, 영국령 홍콩, , 실론섬, 영국령 인도 제국 등을 여행했다. 1888년부터 1889년까지 러시아와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를 순회했다. 1889년부터 1890년까지 페르시아를 방문했다. 세 번째 여행을 마친 후 1891년부터 1892년까지 을 역임했다.[81][82] 1892년에는 미국, 일본[85], 청나라, 조선, 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등을 순회했고, 1894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다.
그는 중앙 및 동아시아와 관련된 외교 정책 문제를 설명하는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특히 1889년의 『중앙아시아에서의 러시아』, 1892년의 『페르시아와 페르시아 문제』, 1894년의 『극동의 제 문제』 세 권이 유명하다.[86] 아무다리야강 (옥수스강)의 수원 탐험으로 왕립 지리학회의 패트론 메달을 받았다.[13] 1895년에는 왕립 지리학회의 금메달(패트런스 메달)을 수상했다.[81]
커즌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가 대영 제국령 인도에 가장 유력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14] 1879년 러시아는 실크로드를 따라 트란스카스피아 철도 건설을 시작했는데, 커즌은 그의 저서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에서 이 철도가 영국의 인도 통제에 대한 위협을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5] 그는 또한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 간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심화되는 것이 영국의 이익에 해로울 것이라고 믿었다.[17]
《페르시아와 페르시아 문제》는 커즌의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지며,[18] 페르시아의 역사와 정부 구조는 물론, 그래픽, 지도, 그림을 다루었다. 커즌은 알버트 후툼-신들러 장군과 왕립 지리학회(RGS)의 도움을 받아 자료에 접근했다.[19] 그는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인도를 방어하는 가치 있는 완충지로서 페르시아에 대한 영국 정부의 무관심에 경악했다.[20]
4. 외무 차관 (1895년-1898년)
1895년의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한 이후, 열강 제국에 의한 중국 분할이 가속화되면서 아편 전쟁 이후 영국 단독의 반식민지 상태가 붕괴되었다. 커즌은 특히 러시아의 뤼순 군사적 지배에 대해 "러시아가 수로를 통해서도 청나라로 침입하게 될 것이다. 영국은 종래 청나라에서 군사적·경제적 우위를 점해 왔지만, 이러한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통해 솔즈베리 후작에게 중국 정세에 대한 위기감을 알렸다.
이후 솔즈베리 후작은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항하여 중국 내 영국의 세력권을 굳히는 데 힘썼다. 1898년 4월, 커즌은 솔즈베리 후작에게 "양쯔강 유역에 영국의 철도 건설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5년에는 미국의 부호의 딸 메리 빅토리아 레이터와 결혼했다.
5. 인도 총독 겸 부왕 (1899년-1905년)
커즌은 1897년부터 1898년까지 이어진 변방 지역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북서부 국경의 독립 부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노스웨스트 프론티어 지방이라는 새로운 지방을 개설하고, 강압적인 통제와 유화 정책을 혼합하여 추진했다.[28]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 국경에서 발생한 유일한 주요 무장 봉기는 1901년 마수드-와지리 원정이었다.
커즌은 타지마할 복원을 포함하여 인도의 유적 보호와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33]
1899년부터 1900년까지 인도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100만에서 45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37] 커즌은 기근 구제를 위해 노력했지만, 소극적인 구호 정책으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39] 그는 "무분별한 박애주의를 위해 인도의 재정 상황을 위태롭게 하는 정부는 심각한 비판을 받을 것이며, 무차별적인 구호를 통해 국민의 근성을 약화시키고 자립심을 저해하는 정부는 공공의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39]
1903년 1월, 에드워드 7세의 인도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34]
커즌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경계하여 페르시아만을 순방하고 1899년 영국-쿠웨이트 협정을 통해 쿠웨이트를 보호국으로 삼았다.[29] 1903년의 랜스다운 선언[29]은 영국이 걸프 지역에 군사적 주둔을 하려는 다른 유럽 열강의 시도에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30]
1903년부터 1904년까지 프랜시스 영허스밴드를 지휘관으로 티베트 원정을 감행하여 라싸 조약을 체결했다.[32]
1905년, 벵골 분할령을 단행하여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반발을 샀다.[34] 커즌은 벵골 분할의 이유로 벵골 지역이 너무 넓어서 영국이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벵골인들을 종교적, 영토적으로 분열시켜 벵골에서 커져가는 민족주의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커즌은 군의 독립적 지위를 요구하는 키치너 인도 주둔군 최고사령관과의 갈등으로 1905년 11월, 인도 총독직을 사임했다. 커즌은 군사 행정과 지휘권의 통일은 군사 독재로 이어지고, 문관 통제가 무너진다고 반대했다.
6. 의회에 귀족원 의원으로 복귀
1908년, 커즌은 아일랜드 귀족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어 귀족원 의원으로 복귀했다.[40]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자유당 정부의 귀족원 개혁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1911년, 커즌은 레이븐스데일 남작, 스카스데일 자작, 케들스턴 백작 작위(영국 귀족)를 받았다.[41] 이 중 레이븐스데일 남작위에는 딸들과 그 직계 남계 남자에게, 스카스데일 자작위에는 커즌의 아버지와 그 직계 남계 남자에게의 계승을 인정하는 특별 규정이 있었다.[81][82]
7.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1918년)
1916년 초, 커즌은 프랑스에 있는 사령부에서 더글러스 헤이그 경을 방문했다. 헤이그는 커즌의 지성과 결단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가 총독 시절 이후 누그러졌고 "예전의 거만한 태도"를 버렸다고 생각했다.[46] 5월에는 에 취임했다[81]。
1916년 12월, 로이드 조지 내각이 성립되자 귀족원 원내총무 겸 추밀원 의장으로 입각하여 5명으로 구성된 전시 내각의 일원이 되었다.[47] 독일 제국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커즌은 전쟁 내각을 위해 영국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점령할 것을 촉구하는 문서를 작성했다(1917년 5월 12일).[47] 전쟁 내각의 다른 구성원들처럼 커즌은 러시아의 전쟁 참여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이 별도의 강화를 맺는 것을 막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에서의 추가 공세를 지지했다.
전시 정책 위원회(1917년 10월 3일)에서 커즌은 시리아로 진격하여 오스만 제국을 전쟁에서 완전히 몰아낼 목적으로 두 개 사단을 팔레스타인으로 재배치하려는 계획에 헛되이 반대했다. 제3차 이프르 전투의 손실이 커지면서 커즌의 헌신은 다소 흔들렸다.[48] 1917년 여름, 제국 참모총장 윌리엄 로버트슨 장군은 헤이그에게 전쟁 내각 위원들에 대한 신랄한 묘사를 보냈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로이드 조지를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그는 커즌을 "허풍선이"라고 묘사했다. 1918년 2월의 위기 동안 커즌은 로버트슨을 지지하는 정부 내 소수의 구성원 중 한 명이었으며, 그가 해임될 경우 헛되이 사임을 위협했다.[49] 여성 참정권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여성 참정권 반대 국민 연맹의 공동 회장이었다) 상원은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오랫동안 낭만 소설가 엘리너 글린과 불륜 관계를 맺었던 커즌은 1917년 1월에 전 그레이스 엘비나 하인즈와 결혼했다. 그녀는 부유한 앨라배마 주 출신 미망인으로, 1905년 런던 주재 아르헨티나 공사관에 임명된 최초 세대 아일랜드계 아르헨티나인인 알프레도 우베르토 더건(1915년 사망)의 아내였다. 엘리너 글린은 약혼 당시 커즌과 함께 머물렀고, 아침 신문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8. 외무장관 (1919년-1924년)
1919년 12월, 영국 정부가 제안한 소련과 폴란드 간의 국경선은 그의 이름을 따서 커즌 선이라고 명명되었다.[59] 이후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폴란드가 동부 영토를 정복했지만,[5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의 국경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 폴란드와 동쪽 인접국 간의 국경선은 커즌 선과 거의 일치한다.[59]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을 때, 커즌은 페르시아를 러시아의 진격을 막는 완충 지대로 만들려는 자신의 계획을 인도 정부에 재고하도록 설득하려 했다.[60] 1919년 8월 영국-페르시아 협정은 비준되지 않았고, 영국 정부는 러시아가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방어적 이점이 높은 경제적 비용을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이 계획을 거부했다.[61]
1921년 3월, 로이드 조지 수상의 주도로 영국과 소련 간의 국교가 수립되었지만, 커즌은 처칠과 함께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같은 해 6월, '''케들스턴의 커즌 후작'''(연합 왕국 귀족) 작위를 받았다.[82]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개최된 워싱턴 회의에서 영일 동맹이 4개국 조약으로 대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22년 커즌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고 터키의 국경을 정의한 로잔 조약에 대한 연합국의 수석 협상자였다. 1922년 8월부터 10월에 걸친 차나크 위기에 관해서는 대 터키 강경파인 로이드 조지와 처칠을 억누르고 평화적 해결을 했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 동안, 1920년 12월 계엄령이 시행되기 전에 커즌은 경찰과 군대에 대한 공격에 대해 마을을 봉쇄하고 집단 벌금을 부과하는 "인도"식 해결책을 제시했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커즌은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을 통해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지불을 강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해야 했다. 그는 프랑스 총리(이자 전 대통령) 레이몽 푸앵카레를 "끔찍한 작은 남자"라고 묘사했다. 커즌은 독일과 프랑스 간의 중재를 하여 양국의 긴장 완화에 힘썼다.[86]
칼턴 클럽 회의에서의 투표 결과, 1922년 10월 보수당이 연립을 해소하고 로이드 조지는 사임했다. 보너 로의 보수당 정권이 발족했지만, 커즌은 외무장관으로 유임되었다.
9. 수상직 실패 (1923년)
J. C. C. 데이비슨과 찰스 워터하우스 경(Charles Waterhouse (British politician))은 스탬퍼드햄에게 로가 조지 5세에게 커즌이 아닌 스탠리 볼드윈을 후임으로 임명하라고 권고했다고 거짓으로 주장했고,[66] 커즌은 자신이 속았다고 느꼈다.[66] 해리 베넷은 커즌의 오만함과 인기가 없었던 점이 그의 뛰어난 재능, 엄청난 업무 능력, 그리고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총리가 되는 것을 막았을 것이라고 말한다.[67]
결국 국왕은 볼드윈에게 조각의 대권을 내리는 결정을 내렸다. 국왕의 뜻을 받은 스탬퍼드햄 경은 커즌에게 전보를 보내 런던의 커즌 저택에서 면회를 요청했다. 커즌은 총리 취임을 확신하고 런던으로 상경했지만, "총리는 계속 하원에 있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볼드윈에게 대권을 넘기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커즌은 "자신과 공적인 생애에 대한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타격이자 모욕"이라고 말하며, '귀족원 의원은 총리가 될 수 없다'는 원칙에 반대하며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며칠 후, 커즌은 볼드윈 내각에서 계속 외무 장관을 맡는 것을 수락했다. 조지 5세는 커즌의 관대함을 인정하고 5월 29일 버킹엄 궁전으로 그를 불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커즌의 거부는 국가 정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부터 관례상 귀족원 의원은 주요 정당의 지도자가 되거나 총리가 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총리가 선출되지 않고 실질적으로 무력한 의회에 기반을 두는 것이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었다.[70]
10. 만년과 사망
1925년 3월, 커즌은 방광에서 심한 출혈을 겪었다. 수술은 실패했고, 1925년 3월 20일 런던에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1] 그의 관은 케들스턴에 있는, 그의 첫 번째 부인 메리의 관을 만들었던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더비셔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집으로 옮겨져 3월 26일 올 세인트 교회의 가족 묘지에 메리와 함께 안치되었다.[71] 7월 22일에 증명된 그의 유언에 따라, 커즌은 그의 재산을 그의 아내와 그의 형제 프란시스에게 유증했다. 그의 유산은 상속 심사를 위해 343,279파운드 10실링 4펜스로 평가되었다.[71]
그의 사망과 함께 케들스턴의 커즌 남작위, 백작위, 후작위, 케들스턴 백작위는 소멸되었고,[74] 반면 스카스데일 자작위와 스카스데일 남작위는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레이븐스데일 남작위는 그의 장녀 메리에게 상속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그의 차녀 신시아의 증손자인 다니엘 모즐리가 소유하고 있다.
커즌이 살면서 사망한 런던의 집, 웨스트민스터의 1 칼턴 하우스 테라스에는 블루 플라크가 있다.[72]
11. 인물 및 평가
비평가들은 커즌이 젊은 시절의 재능이 도달할 것으로 보였던 정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데 동의한다. 윈스턴 처칠은 그의 저서 ''위대한 동시대인''(1937)에서 "아침은 황금빛이었고, 정오는 청동이었으며, 저녁은 납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방식대로 빛날 때까지 연마되었다."라고 평가했다.[76][78] 처칠은 또한 커존에게는 정보, 적용, 말솜씨, 매력적인 태도와 외모가 아닌 무언가가 부족했다고 썼다.[76]
커즌의 내각 동료였던 데이비드 린지(27대 크로퍼드 백작)는 그를 "동료들에게 이보다 덜 사랑받고, 부하들에게 이보다 더 미움받는 사람", "양심, 자비, 감사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권력, 근면함, 야망이 비열한 인격과 결합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다"고 덧붙였다.
커즌은 열렬한 제국주의자로서 "대영 제국은 신의 섭리에 따라 세계가 목격한 가장 위대한 선을 행하는 도구"라고 자부했다. 그는 인도의 지배를 중시하여 "만약 인도를 잃는다면 영국은 즉시 삼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인도 총독으로서의 사명은 "영국의 지배를 더욱 견고하게 인도에 뿌리내리게 하고, 인도인이 고대하는 해방의 날을 조금이라도 늦춘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이 지배하는 영령 인도 제국은 아시아 주변 국가의 종주국이며, 그 질서를 아시아에 넓혀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커즌은 젊은 시절부터 인도 총독과 수상을 꿈꿨고, 많은 정치 경험을 쌓았지만, 1923년 조지 5세의 결정으로 수상의 기회를 놓쳤다. 그의 사후에는 그 일에 대한 동정적인 논평이 많았다.
한편, 독립 인도의 초대 지도자인 자와할랄 네루는 커존이 총독으로서 인도 문화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었고, 타지마할을 포함한 여러 역사적 기념물의 복원 프로젝트를 지시했다고 언급했다.[77] 네루는 "다른 모든 총독들이 잊혀진 후에도, 커존은 인도에서 아름다운 모든 것을 복원했기 때문에 기억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78]
방글라데시의 다카 대학교 이학부가 위치한 커즌 홀은 1904년에 인도 총독으로서 정초식을 거행한 커즌 경의 이름에서 유래했다.[91]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커즌은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이익을 대변하며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고 지원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외교 정책은 한국의 독립을 저해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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