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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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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더베크(Sonderweg) 이론은 독일의 근대화 과정이 유럽 다른 국가들과 다른 독특한 경로를 따랐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이론은 독일의 산업화 지연,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성, 나치 독일의 등장과 같은 특징을 제시한다. 존더베크 이론은 독일의 특수한 길을 강조하며, 비레펠트 학파의 한스-울리히 벨러는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근대화의 불일치를 지적하며,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사회가 자본주의적 사회와 충돌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19세기 후반 독일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독일 통치의 독특성을 강조했다. 존더베크 이론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독일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독일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사회, 정치적 변화의 '정상적인' 길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일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범유럽적 관점에서 개별 국가의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상정하는 개념을 거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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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베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존더베크
의미특별한 길, 고유한 길, 예외적인 길
로마자 표기Sonderweg
역사적 배경
개념 등장 시기19세기 말
주요 논쟁 대상독일 제국의 발전 과정
나치 독일의 등장 원인
핵심 내용
주장독일의 역사적 발전 과정이 다른 서구 국가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경로를 걸어왔다는 주장
주요 특징후발 산업 국가로서의 급격한 근대화
강력한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적 전통
정치적 자유주의의 미발달
군국주의적 성향
논쟁의 주요 쟁점
긍정적 해석독일 특유의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강조
부정적 해석독일의 민주주의 발전 실패 원인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나치즘의 등장 배경
주요 비판
비판론자한스 울리히 벨러
위르겐 코카
주요 비판 내용국가 간의 비교를 통한 일반화의 어려움
단선적인 역사 발전 모델의 한계
독일 역사의 특수성 과장
서구 중심적 시각
현대적 관점
현재의 인식독일의 '특별한 길'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지배적인 견해가 아님
각 국가의 고유한 발전 과정을 고려해야 함
대안적 관점다원적인 역사 발전 모델
서구 국가들과의 상호 영향 관계 고려
사회, 문화, 경제적 요인 복합적으로 분석

2. 존더베크 이론의 특징

존더베크 이론은 독일의 근대화 과정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특별한 길을 걸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제시한다.[33]


  • 산업화 지연: 독일은 보수적인 경제 정책으로 인해 산업 혁명영국보다 30~40년 늦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산업화 지연 참고)
  •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 독일 엘리트와 지도층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민주주의, 시민 운동에 적대적이었다. 1848년 혁명이 실패하고, 1871년 독일 제국은 권위주의 국가로 성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 참고)
  •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성: 1918년 11월 혁명은 불완전하여 구 엘리트 세력과 타협하면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성 참고)
  • 나치 독일의 등장: 나치 독일은 독일의 특수한 길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치 독일의 패망은 독일 분단과 강대국 지위 상실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나치 독일의 등장 참고)


존더베크 이론은 독일이 서구의 '정상적인 경로'를 따르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보수 정치를 따랐다고 본다. 한스 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해체까지를 "전통과 근대성의 특이한 긴장 관계(eigentümliches Spannungsverhältnis zwischen Tradition und Modernede)"라고 표현했다. 즉, 정치적 보수성과 경제적 근대성이 공존하는 독일의 특수한 근대화는 권위주의 정치 발전을 낳았고, 이는 나치즘의 토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2. 1. 산업화 지연

독일의 보수적인 경제 정책은 길드 편향적으로 이루어져 산업화를 막았으며, 독일어권에서 진정한 산업 혁명영국보다 30~40년 뒤에나 이루어질 수 있었다.[33]

2. 2.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

프랑스 혁명은 유럽 민주주의 확산의 시발점이었다. 독일에서도 1848년 3월 혁명을 통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 의회 체제 국가 설립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다.[33] 그 대신 설립된 1871년 독일 제국은 철저히 권위주의적인 국가였다. 프랑스와 달리 통일과 자유는 독일에서 동시에 추구될 수 없는 목표였다. 통일 독일 제국은 빈 회의의 근본적 목표였던 유럽의 세력 균형 유지를 무너뜨리며 유럽 최강대국으로 성장하였으나, 정치적 자유는 제한되어 1918년까지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정부의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역사가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Heinrich August Winkler)는 이것을 "비동시적 민주화"(ungleichzeitiger Demokratisierung)라고 표현했다).

2. 3.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성

11월 혁명은 불완전한 혁명으로 평가받는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지도부는 좌파 독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구 엘리트 세력과 타협했고, 이로 인해 공무원과 군 조직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33] 이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프리츠 튀센(Fritz Thyssen) 같은 대기업가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 같은 영향력 있는 중소기업가들이 나치즘에 협력하는 배경이 되었다.

2. 4. 나치 독일의 등장

나치 독일 시기는 독일의 특수한 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다.[33] 나치 독일의 패망은 독일 분단과 독일의 강대국 지위 상실로 이어졌다. 독일에서의 민주주의는 독일 고유의 발전 과정이 아니라 연합국의 간섭이라는 외부적 요인을 통하여 자리 잡았다. 빙클러와 같은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이후 독일연방공화국의 발전은 독일의 특수한 길이 아니라 자유민주적 "서구"에 따른 것이며, 독일의 특수한 길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점차 잊혀지다가 서구의 민주적 방식에 의한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지자 완전히 이론적 패배를 맞게 된다.

3. 존더베크 이론에 대한 비판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은 존더베크 테제에 대해, 사회 및 정치적 변화에 있어 "정상적인" 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19세기 프랑스영국의 경험이 유럽의 표준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독일의 자유주의적 중산 계층이 정치적으로는 좌절했지만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19세기 독일을 지배했다고 주장했다.[34]

블랙번과 일리는 "존더베크"라는 개념 자체를 "19세기와 1930년대를 과장하여 단선적 연속선 상에" 올려놓는다고 비판하며 거부했다.[35] 이들은 1890년 이후 독일 사회에서 시민 사회가 성장하고 민주화 경향이 커졌다고 주장했다.[35]

오토 플란체는 벨러가 사용하는 용어들이 역사 소설 수준이라고 비판했고,[36] 토마스 니퍼다이는 벨러가 독일 엘리트 층을 지나치게 단결된 것으로 묘사하고, 19세기 독일 사회에서 위로부터의 힘은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아래로부터의 힘은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6]

위르겐 코카는 "존더베크" 테제가 나치즘의 등장 이유는 설명하지 못할 수 있지만,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는 설명한다고 주장했다.[34] 데트레프 포이케르트는 독일의 경험이 근대화 과정에서 모든 국가가 겪는 사회정치적 위기 현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3. 1. '정상적인' 발전 경로의 부재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은 사회, 정치적 변화에 '정상적인' 경로란 존재하지 않으며, 19세기 프랑스영국의 경험을 유럽의 표준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34] 이들은 독일의 자유주의적 중산 계층이 정치적으로는 좌절했지만,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19세기 독일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34]

블랙번과 일리는 "존더베크"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며, 이것이 "19세기와 1930년대를 과장하여 단선적 연속선 상에" 올려놓는다고 비판한다.[35] 그들은 독일은 독일이고 영국은 영국이라는 이유로, 독일이 영국처럼 되지 못한 이유를 찾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35] 또한, 1890년 이후 독일 사회에서 시민 사회가 성장하고 민주화 경향이 커졌다고 주장했다.[35]

3. 2. 독일 사회의 부르주아화 간과

제프 일리(Geoff Eley)와 데이비드 블랙번(David Blackbourn)은 존더베크 이론에서 상정하는 바와 달리 사회, 정치적 변화에 "정상적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19세기 프랑스영국의 경험이 유럽의 표준이 아니며, 독일의 자유주의적 중산 계층이 정치적으로는 좌절을 겪었을지라도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19세기 독일을 지배하는 세력이었다고 주장했다.[34] 일리와 블랙번은 독일 사회의 부르주아화가 프랑스나 영국보다 심했으며, 독일 정치보다 독일 사회가 더욱 귀족주의적 특성이 강했다고 보았다.[34]

3. 3. 방법론적 문제점

제프 일리(Geoff Eley)와 데이비드 블랙번(David Blackbourn)은 사회, 정치적 변화에 "정상적인" 길은 존재하지 않으며, 19세기 프랑스영국의 경험이 유럽의 표준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독일의 자유주의적 중산 계층이 정치적으로는 좌절했지만,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19세기 독일을 지배했으며, 독일 사회가 프랑스나 영국보다 더 귀족주의적 특성이 강했다고 보았다.[34] 블랙번과 일리는 "존더베크" 개념을 "이데올로기적 분석과 천박한 물질주의의 신기한 혼합"으로 이루어진 모순된 결과물로 보며 거부했다.[35] 그들은 독일은 독일이고 영국은 영국이라는 이유로, 독일이 영국처럼 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35] 또한 1890년 이후 독일 사회에서 민주화 경향과 시민 사회가 성장했다고 주장했다.[35]

오토 플란체(Otto Pflanze)는 벨러가 사용하는 "보나파르트주의(Bonapartism)", "사회적 제국주의(social imperialism)", "부정적 통합(negative integration)", "집합정치(Sammlungspolitik)" 등의 용어가 역사 소설 수준이라고 비판했다.[36] 토마스 니퍼다이(Thomas Nipperdey)는 벨러가 독일 엘리트 층을 지나치게 단일하게 묘사하고, 19세기 독일 사회에서 위로부터의 힘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아래로부터의 힘을 과소평가한다고 주장했다.[36] 니퍼다이는 벨러의 저작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독일 제국 시대의 역사 서술은 유럽과 대서양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36]

4. 존더베크 논쟁의 전개 (20세기)

20세기 존더베크 논쟁은 나치 독일의 등장과 그로 인한 비극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에 거주하던 독일 이민자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저서 《독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나치 독일의 탄생이 아돌프 히틀러의 특이한 성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5] 영국 외교관 로버트 밴시타트는 《검은 기록: 과거와 현재의 독일인》을 통해 나치즘이 독일인의 고유한 공격성과 잔혹성의 발현이라고 주장했다.[5]

전후 초기, '독일의 재앙'이라 불리는 나치 독일의 흥망성쇠와 그 기원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3] 학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독일 민주주의가 실패한 원인과 나치즘 부상의 요인을 연구했다.[3]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1946년 저서 《독일의 재앙》에서 나치즘을 불행한 "업무상 재해"(Betriebsunfall)로 묘사했다.[17]

1960년대 이후, 프리츠 피셔와 한스-울리히 벨러 같은 역사가들은 독일이 산업화 이후에도 정치 및 사회 영역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은 "부분적인 근대화"만을 경험했다고 주장했다.[21]

1990년대에는 미국의 학자 다니엘 골드하겐이 저서 《히틀러의 자발적 처형자들》을 통해 독일 특수성(존더베크)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는 1945년까지 독일 사회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예후다 바우어와 같은 비평가들은 골드하겐이 최근 연구를 무시했다고 비판했지만,[25] 그는 독일에서 홀로코스트의 유산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4. 1. 제2차 세계 대전 중

1939년 3월 나치 독일(Nazi Germany)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이 침공으로 프랑스영국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리게 됨)은 나치 독일 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촉발시켰다. 1940년, 영국에 거주하는 독일 이민자 제바스티안 하프너(Sebastian Haffner)는 《독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Germany: Jekyll and Hyde)》를 출판하여 나치 독일의 탄생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특이한 성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41년, 영국 외교관 로버트 밴시타트(Robert Vansittart, 1st Baron Vansittart)는 《검은 기록: 과거와 현재의 독일인(The Black Record: Germans Past And Present)》을 출판하여 나치즘은 밴시타트가 주장하는 독일인의 고유한 공격성과 잔혹성의 최신 표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밴시타트와 유사한 논지를 가진 다른 책으로는 로한 버틀러(Rohan Butler)의 《국가 사회주의의 뿌리(The Roots of National Socialism)》(1941)와 윌리엄 몽고메리 맥거번(William Montgomery McGovern)의 《루터에서 히틀러까지: 나치-파시스트 철학의 역사(From Luther to Hitler: The History of Nazi-Fascist Philosophy)》(1946)가 있다.[5]

4. 2. 전후 초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존더베크(Sonderweg)라는 용어는 이전의 긍정적인 의미를 잃고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3] 이른바 "독일의 재앙"이라 불리는 나치 독일의 흥망성쇠와 그 기원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3] 학자들은 지적,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발전을 조사하여, 독일의 민주주의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왜 실패했고, 어떤 요인들이 나치즘의 부상으로 이어졌는지 연구했다.[3]

1960년대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19세기에 독일이 견고한 민주적 제도를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20세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3]

독일 역사가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1946년 저서 "독일의 재앙"(Die Deutsche Katastrophe)에서 나치즘을 특히 불행한 "업무상 재해"(Betriebsunfall)로 묘사했다.[17]

4. 3. 1960년대 이후

1960년대부터 프리츠 피셔와 한스-울리히 벨러 같은 역사가들은 프랑스와 영국과 달리 독일은 산업화 이후 정치 및 사회 영역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은 "부분적인 근대화"만을 경험했다고 주장했다. 피셔와 벨러의 견해에 따르면, 독일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귀족 엘리트가 지배하고 있었다.[21] 이들은 1848년 혁명을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보았다.

4. 4. 홀로코스트 논쟁

독일 특수성(존더베크)에 대한 논쟁은 1996년 미국의 학자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의 저서 《히틀러의 자발적 처형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에 의해 다시 불붙었다. 골드하겐은 1945년까지 독일의 사회, 정치, 삶은 유대인 학살을 최고의 국가적 가치로 여기는 극단적인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독특한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같은 비평가들은 골드하겐이 최근 연구와 독일 및 해외의 다른 발전들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25] 루트 베티나 비른(Ruth Bettina Birn)은 골드하겐이 "자신의 논제가 증거 제시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다"고 주장한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드하겐은 독일의 "집단적 책임(collective guilt)"에 대한 질문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독일에서 많은 독일인들을 홀로코스트의 유산에 대한 현대적인 대결과 활기차고 유익한 논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현대적 의의 및 평가

존더베크 이론은 독일 근현대사 연구에서 여전히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특히 민주주의권위주의, 근대화 과정의 다양성, 역사적 특수성과 보편성 등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유용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33]

독일은 길드 편향적인 보수 경제 정책으로 산업 혁명이 영국보다 30~40년 늦게 이루어졌다. 독일 엘리트 및 지도층은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민주주의와 시민 운동에 적대적이었다. 1848년 3월 혁명이 좌절된 후 설립된 독일 제국은 권위주의적 국가였다. 정치적 자유가 제한되어 1918년까지 정부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1월 혁명은 구 엘리트 세력과의 협력으로 공무원과 군 조직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고, 이는 경제 위기 속에서 대기업가들이 나치즘에 협조하는 이유가 되었다. 나치 독일 시기는 독일의 특수한 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며, 독일 분단과 강대국 지위 상실로 이어졌다.

한스 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해체까지의 시기를 "전통과 근대성의 특이한 긴장 관계(eigentümliches Spannungsverhältnis zwischen Tradition und Modernede)"라 표현하며, 정치적 보수성과 경제적 근대성이 공존하는 독일만의 특수한 근대화가 권위주의 정치 발전과 나치즘의 씨앗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5. 1. 비판적 시각

제프 일리(Geoff Eley)와 데이비드 블랙번(David Blackbourn)은 1980년 독일에서 출간된 책 《독일 역사 서술의 신화: 좌절된 1848년 시민 혁명(Mythen deutscher Geschichtsschreibung: Die gescheiterte bürgerliche Revolution von 1848)》(한국어 번역본 제목: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 푸른역사. 2007)에서 존더베크 이론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이들은 사회, 정치적 변화에 "정상적인" 길은 없으며, 19세기 프랑스영국의 경험이 유럽의 표준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의 자유주의적 중산 계층이 정치적으로는 좌절했지만,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19세기 독일을 지배했으며, 독일 사회의 부르주아화는 프랑스나 영국보다 더 심했다고 보았다.[34] 일리와 블랙번은 "존더베크" 개념을 "이데올로기적 분석과 천박한 물질주의의 신기한 혼합"으로 이루어진 모순된 결과물로 보며, "19세기와 1930년대를 과장하여 단선적 연속선 상에" 올려놓는다고 비판했다.[35]

블랙번과 일리는 "존더베크"는 실재하지 않으며, 독일이 영국처럼 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1890년 이후 독일 사회에서 민주화 경향과 시민 사회가 성장했다고 덧붙였다.[35]

오토 플란체(Otto Pflanze)는 벨러가 사용하는 "보나파르트주의(Bonapartism)", "사회적 제국주의(social imperialism)", "부정적 통합(negative integration)", "집합정치(Sammlungspolitik)" 등의 용어가 역사 소설 수준이라고 비판했다.[36] 독일의 보수적 역사가인 토마스 니퍼다이(Thomas Nipperdey)는 벨러가 독일 엘리트 층을 지나치게 단결된 것으로 묘사하고, 19세기 독일 사회에서 위로부터의 힘은 과장하고 아래로부터의 힘은 경시했으며, 독일 제국의 상대적 안정성에 대한 설명 없이 질서와 안정을 향한 힘과 민주주의를 향한 힘을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묘사했다고 주장했다.[36] 니퍼다이는 벨러의 저작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독일 제국 시대의 적절한 역사 서술은 유럽 및 대서양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다.[36]

위르겐 코카(Jürgen Kocka)와 볼프강 몸젠(Wolfgang Mommsen) 등은 일리와 블랙번의 결론에 반론을 제기했다. 코카는 "존더베크" 테제가 나치즘의 등장 이유는 설명하지 못해도,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는 설명한다고 주장했다.[34]

데트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1987년 저작 《바이마르 공화국: 고전적 근대성의 위기 시기(Die Weimarer Republik : Krisenjahre der Klassischen Moderne)》에서 독일의 경험이 근대화 과정에서 모든 국가가 겪는 사회정치적 위기 현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5. 2. 범유럽적 관점의 등장

최근 수십 년 동안 독일 역사학계는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범유럽적 관점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독일의 "특수 발전 경로(Sonderwegde)"나 프랑스의 "프랑스 특수성(singularité française프랑스어)"과 같이 개별 국가의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강조하는 과거의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27]

참조

[1] 서적 Germany: The Long Road West
[2] 서적 Sonderweg Garland Publishing
[3] 서적 Sonderweg Garland Publishing
[4] 서적 Von der "Deutschen Doppelrevolution" bis zum Beginn des Ersten Weltkrieges 1849–1914
[5] 서적
[6] 서적 The Course of German History Hamish Hamilton
[7] 서적 The Course of German History Hamish Hamilton
[8] 서적 The Course of German History Hamish Hamilton
[9] 간행물 Guilt, Redemption and Writing German History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간행물 Guilt, Redemption and Writing German History
[16] 서적 The Holocaust in History Key Porter
[17] 서적
[18] 서적 The Hitler of History Alfred A. Knopf
[19] 서적 Eternally in the Shadow of Hitler Humanities Press
[20] 서적 Eternally in the Shadow of Hitler Humanities Press
[21] 서적 Fitzroy Dearborn Publishings
[22] 간행물 Guilt, Redemption and Writing German History
[23] 서적 German Identity and Historical Comparison: After the Historikerstreit Beacon Press
[24] 서적 Hitler Should Not Be Repressed by Stalin and Pol Pot Humanities Press
[25] 서적 Rethinking the Holocaust
[26] 서적 Holocaust
[27] 간행물 So far, and yet so near: comparison, transfer and memory in recent German books on the age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28] 간행물 Guilt, Redemption and Writing German History
[29] 간행물 Guilt, Redemption and Writing German History
[30] 서적 Königsabsetzungen im Mittelalter
[31] 서적
[32] 서적 Der lange Weg nach Westen (서구를 향한 오랜 길) C.H. Beck
[33] 서적 독일 近代形成史 연구 경성대학교 출판부
[34] 서적 Sonderweg Garland Publishing
[35] 간행물 Guilt, Redemption and Writing German History
[3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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