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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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규는 중국 민간 신앙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악귀를 물리치는 문신(門神)으로 숭배되는 인물이다. 당나라 현종의 꿈에 나타나 병을 낫게 하고, 이후 그림으로 제작되어 악귀를 쫓는 부적으로 사용되었다. 종규는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숭배되었으며, 그림, 조각, 연극, 문학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종규는 춤, 오페라, 민간 신앙, 그리고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중국 민간 신앙에서는 현무, 관우와 함께 악마를 제압하는 세 명의 주요 신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궁궐이나 일반 백성 집에서 정월에 나쁜 기운과 질병을 막기 위해 귀신을 쫓는 종규의 그림을 문에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 요즘에도 붉은 먹으로 귀신을 그린 부적이 방이나 변소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나라 현종 시기, 현종이 병에 걸렸을 때 꿈에 나타난 종규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가 송나라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현종은 궁정 화가 오도자에게 종규의 그림을 그리게 하여 관리들에게 보여주었는데, 이는 이후 종규 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8]
2. 기원 및 전설
2. 1. 중국 기원 설화
당나라 현종 때, 사람에게 근심을 안겨주고 기뻐하던 허모(虛耗)가 양귀비를 괴롭히며 궁중을 뛰어다니는 것을 종규가 붙잡아 눈알을 빼고 머리부터 먹어버렸다. 종규는 과거에 낙방하여 궁중 계단에 머리를 들이받고 자결한 종남현(終南縣) 출신의 진사(進士)였다. 현종은 종규를 후하게 장사지내 준 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천하의 귀신을 평정하기로 결심한 종규를 돕기위해, 유명한 화가 오도자에게 종규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제야의 밤에 집집마다 그 그림을 붙이도록 명하였다.[1]
전설에 따르면, 종규는 고향 친구 두평(杜平)과 함께 수도 장안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 종규는 뛰어난 성적으로 수석을 차지했지만, 흉측한 외모 때문에 당 고조 황제로부터 '장원' 칭호를 박탈당했다.[1]
크게 분노한 종규는 궁궐 문에 머리를 계속 부딪혀 자결했고, 두평은 그를 매장했다. 사후 심판에서 염라대왕은 종규의 총명함과 강한 원한을 보고 그에게 귀왕의 칭호를 내리고 모든 귀신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겼다.
설날 전날, 종규는 귀왕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두평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여동생을 그와 혼인시켰다.[2]
종규의 연기(縁起, 인연,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원래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다음 설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8]
:어느 날,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이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앓아 누웠다.
:현종은 고열 속에서 꿈을 꾸었다. 궁궐 안에서 작은 귀신들이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큰 귀신이 나타나 그들을 잡아먹었다. 현종이 큰 귀신에게 정체를 묻자, "저는 종남현 출신의 종규입니다. 무덕 연간(618년-626년)에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여 부끄러운 마음에 궁궐에서 자살했습니다. 하지만 고조 황제께서 저를 후하게 장례지내 주셨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꿈에서 깨어난 현종은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감동한 현종은 오도현에게 종규의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그 모습은 현종이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현종 시대부터 신하들은 섣달 그믐에 종규도를 하사받았고, 액막이로 새해에 종규도를 문에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9] 송나라 시대에는 연말의 대나(大儺, 나례)에도 붙였으며, 17세기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기에는 단오에 액막이로 종규도를 집에 장식하는 풍습이 생겨났다.[8]
종규도는 초기에는 오도현의 구도를 모방하는 것이 주류였으나, 명나라 시대에 『종규전』 등의 소설이 유행하면서 다양한 변형이 나타났고, 악귀를 쫓는 풍습과 함께 동아시아 일대에 퍼져나갔다.[9]
2. 2. 한국 전래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궁궐이나 일반 백성 집에서 정월에 나쁜 기운과 질병을 막기 위해 귀신을 쫓는 종규의 그림을 문에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에도 붉은 먹으로 귀신을 그린 부적이 방이나 변소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나라 현종 때, 사람들에게 걱정을 안겨주고 기뻐하던 허모(虛耗)가 양귀비를 괴롭히고 궁궐을 뛰어다니며 기뻐하는 것을 종규가 붙잡아 눈알을 빼고 머리부터 통째로 먹어버렸다.
종규는 과거 시험에 떨어진 후 궁궐 계단에 머리를 부딪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종남현(終南縣) 출신의 진사였다. 왕이 그를 불쌍히 여겨 장례를 잘 치러주자, 종규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세상의 모든 귀신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현종은 유명한 화가 오도자에게 종규의 모습을 그리게 했고,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섣달 그믐날 밤에 집집마다 그 그림을 붙이게 했다. 이러한 전설 속 인물이 바로 종규이다.
3. 종규 신앙의 확산과 변천
현종 시대부터 신하들은 섣달 그믐에 종규 그림을 하사받아 새해에 문에 붙여 액막이로 사용했다.[9] 송나라 시대에는 연말의 나례(大儺)에도 종규 그림을 붙였으며, 17세기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기에는 단오에 액막이로 종규 그림을 집에 장식했다.[8]
초기 종규 그림은 오도현의 구도를 모방했으나, 명나라 시대에 『종규전』과 같은 소설이 유행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악귀 제거 풍습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9]
3. 1. 중국
전설에 따르면, 종규는 고향 친구인 두평(杜平)과 함께 수도 장안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과거 시험에 참여했다. 종규는 수석의 영예를 안으며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흉측한 외모 때문에 당시 당 고조 황제에 의해 '장원' 칭호가 박탈되었다.[1]
몹시 분노한 종규는 궁궐 문에 계속 머리를 부딪혀 자결했고, 두평은 그를 매장하여 안장했다. 자결로 인한 사후 신성한 심판에서, 염라대왕은 종규가 과거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지적이고 총명하지만, 강한 원한 때문에 유도로 가게 된 잠재력을 보았다고 판단했다. 염라대왕은 그에게 귀왕의 칭호를 내리고, 모든 귀신들을 사냥하고, 체포하며, 통솔하고,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겼다.
종규는 지옥에서 귀왕이 된 후 설날 전날 고향으로 돌아왔다. 두평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종규는 여동생을 두평과 결혼시켰다.[2]
종규에 대한 민간에서의 인기는 당나라 현종 (712~756) 통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나라 문헌에 따르면, 현종 황제가 위독했을 때 두 귀신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작은 귀신은 황제의 후궁 양귀비의 지갑과 황제의 피리를 훔쳤다. 벼슬아치의 모자를 쓴 큰 귀신은 작은 귀신을 붙잡아 눈을 뽑아 먹었다. 그는 자신을 종규라고 소개하며, 제국에서 악을 없애겠다고 맹세했다고 말했다. 황제가 깨어나자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래서 그는 궁정 화가 오도자에게 종규의 그림을 그려 관리들에게 보여주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이후 종규의 묘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종규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원래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다음 설화가 널리 퍼져 있다.[8]
어느 날, 당나라의 6대 황제 현종이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현종은 고열 속에서 꿈을 꾼다. 궁궐 안에서 작은 귀신들이 장난을 치고 다니는데, 어디선가 큰 귀신이 나타나 작은 귀신들을 손쉽게 잡아먹는다. 현종이 큰 귀신에게 정체를 묻자, "저는 종남현 출신의 종규입니다. 무덕 연간(618년-626년)에 관리가 되기 위해 과거를 봤지만 낙방했고,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궁궐에서 자살했습니다. 하지만 고조 황제께서는 저를 후하게 장례지내 주셨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꿈에서 깨어난 현종은 병이 나은 것을 깨닫는다. 감동한 현종은 유명한 화가 오도현에게 종규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 그림은 현종이 꿈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현종 시대부터 신하들은 종규도를 섣달 그믐에 하사받았고, 액막이로서 새해에 종규도를 문에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9]。송나라 시대에는 연말의 나례(大儺)에도 붙이게 되었고, 17세기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는 단오에 액막이로서 종규도를 집에 장식하는 풍습이 생겨났다.[8]。
종규도는 초기에는 오도현의 구도를 모방하는 것이 주였지만, 명나라 시대에 『종규전』 등의 소설이 유행하면서 기호도나 길상도 등 다양한 변형이 생겨났고, 악귀 제거 풍습과 함께 동아시아 일대에 전파되었다.[9]。
3. 2. 일본
일본에 쇼키(일본어]: 鍾馗, しょうき)가 유입된 경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4. 예술 작품 속 종규
종규와 그의 전설은 이후 중국 회화, 미술, 민간 전승에서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귀신을 쫓기 위해 종규의 그림을 집집마다 걸어두는 풍습이 생겼으며, 특히 춘절 그림에서 인기가 있었다.[4]
"Da Gui Jie Zhong Kui" (打鬼借钟馗|따구이지에종쿠이중국어)라는 구절은 "종규의 이름을 빌려 귀신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더 강력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위해 일하는 척하며 과제를 완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마오쩌둥이 이 구절을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5]
4. 1. 회화
당나라 현종 시기부터 민간에서 종규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다. 송나라 문헌에 따르면, 현종이 병에 걸렸을 때 꿈에 두 귀신이 나타났다고 한다. 작은 귀신은 양귀비의 지갑과 황제의 피리를 훔쳤고, 큰 귀신은 벼슬아치의 모자를 쓰고 작은 귀신을 잡아 눈을 뽑아 먹었다. 큰 귀신은 자신을 종규라 소개하며, 제국에서 악을 없애겠다고 맹세했다. 현종은 꿈에서 깨어나 병이 나았고, 궁정 화가 오도자에게 종규의 그림을 그리게 하여 관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이야기는 종규의 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6]20세기 화가 콴 시앤광(1932년 출생)은 종규를 튼튼한 검을 벗은 오른팔에 든 우락부락하고 털이 많은 남자로 그렸다.[6]


4. 2. 조각
20세기 화가 콴 시앤광(1932년 출생)은 종규를 튼튼한 검을 벗은 오른팔에 든 우락부락하고 털이 많은 남자로 그렸다.[6]
4. 3. 연극 및 문학
당나라 현종 (712~756) 통치 시기부터 전해지는 송나라 문헌에 따르면, 현종이 병에 걸렸을 때 꿈에서 두 귀신을 보았다. 작은 귀신은 양귀비의 지갑과 황제의 피리를 훔쳤고, 큰 귀신은 작은 귀신을 잡아 눈을 뽑아 먹었다. 큰 귀신은 자신을 종규라 소개하며 악을 없애겠다고 맹세했다. 황제가 깨어나 병이 낫자, 궁정 화가 오도자에게 종규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 이야기는 종규의 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4]종규와 그의 전설은 이후 중국 회화, 미술, 민간 전승에서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귀신을 쫓기 위해 종규의 그림을 집집마다 걸어두는 풍습이 생겼으며, 특히 춘절 그림에서 인기가 있었다.[4]
"Da Gui Jie Zhong Kui" (打鬼借钟馗|따구이지에종쿠이중국어)라는 구절은 "종규의 이름을 빌려 귀신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더 강력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척하며 과제를 완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마오쩌둥이 이 구절을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5]
종규의 춤(跳鐘馗|탸오종쿠이중국어)은 송나라 때 발전하여 명나라 때 오페라로 각색되었다. 주술과 정화 의식의 한 형태인 이 전통은 산시성 후이 현, 안후이성 서 현, 타이완 등 중국 전역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7]
5. 종규 숭배 관련 장소
지역 | 사당 |
---|---|
후난 성 류양 관차오 | 钟馗庙중국어 |
장화 중저우 | 水尾震威宮중국어 |
자이 주치 | 光祿廟중국어 |
타이베이 완화 | 五福宮중국어 |
조호르 바투 파핫 | 終南古廟중국어 |
교토 히가시야마 구 | 鍾馗神社중국어 |
일본에 쇼키(鍾馗)가 유입된 경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장 오래된 쇼키 그림은 헤이안 시대 말기 작품인 벽사회(辟邪絵)에서 확인할 수 있다.[9] 무로마치 시대 이후에는 한화(漢画)의 화제(画題)로 많은 화가들이 선호했다.
민간에서는 에도 시대 말(19세기)부터 간토 지방에서 쇼키를 5월 인형으로 사용하거나, 긴키 지방에서 액막이로 쇼키상을 지붕에 놓는 풍습이 나타났다.[8]
교토 시내의 민가(교토 마치야) 등 긴키 - 주부 지방에서는, 현재에도 큰 지붕이나 작은 지붕의 처마 끝에 10 - 20cm 크기의 기와로 만든 쇼키 인형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옛날 교토 산조의 약방 주인이 훌륭한 귀면와를 얹었을 때, 맞은편 집 주민이 갑자기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렸고, 이를 약방의 귀면와에 튕겨져 나쁜 것이 맞은편 집에 들어간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귀신보다 강한 쇼키를 만들어 액막이로 설치했더니 주민의 병이 완치되었다는 데서 유래한다.[10]
2013년 12월, 교토시히가시야마구에 있는 와카미야 하치만구 신사 경내에 일본 최초로 쇼키를 모신 쇼키 신사가 창건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刘锡诚]钟馗传说和信仰的滥觞 · 中国民俗学网-中国民俗学会 · 主办 ·"
https://www.chinafol[...]
2023-02-11
[2]
서적
International encyclopaedia of Buddhism: India [11]
https://books.google[...]
Anmol Publications
2013-06-07
[3]
서적
The Sinister Way: The Divine and the Demonic in Chinese Religious Cultur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06-07
[4]
서적
China: A Cultural and Historical Dictionary
https://archive.org/[...]
Curzon Press
[5]
웹사이트
毛泽东对"个人崇拜"的态度演变【3】--党史频道-人民网
http://dangshi.peopl[...]
2023-02-11
[6]
문서
Shelagh Vainker and Xin Chen, editors, A Life in Chinese Art: Essays in Honor of Michael Sullivan, p. 83.
[7]
서적
Zhong Kui yan jiu
Xiu wei zi xun ke ji gu fen you xian gong si
2004
[8]
웹사이트
今週の本棚:井波律子・評 『鍾馗さんを探せ!!』=小沢正樹・著 毎日新聞 東京朝刊
http://mainichi.jp/f[...]
毎日新聞
2012-04-22
[9]
문서
長田真紀、[[島尾新]]、[[彬子女王]]、亀田和子(編)「騎虎鍾馗の図像の伝承と変容」『写しの力:創造と継承のマトリクス』 [[思文閣出版]] 2013 ISBN 9784784217113 pp.141-159.
[10]
웹사이트
鍾馗とは 京瓦.com
http://www.kyogawara[...]
浅田製瓦工場
[11]
웹사이트
国宝 辟邪絵 鍾馗
http://www.narahaku.[...]
奈良国立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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