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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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니콜라이 민도프스키 하우스를 사용하며, 이 건물은 1906년 니키타 라자레프가 설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다. 섬유 재벌 민도프스키 가문이 소유했던 이 건물은 1927년 오스트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38년 안슐루스 이후에는 외국 고위 인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고, 1955년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관련 회담 장소로 활용되었다. 또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에 등장하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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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 - [정부기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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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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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 |
현지어 명칭 | |
위치 | 러시아 모스크바 스타로코니우셰니 레인 1 |
외교 관계 | |
대사 | 마틴 부코비치 |
웹사이트 | 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 웹사이트 |
2. 건물의 역사
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 건물은 1906년 건축가 니키타 라자레프가 설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니콜라이 민도프스키 하우스'''이다. 이 저택은 원래 민도프스키 가문의 소유였으나, 1927년부터 오스트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안슐루스 이후, 건물은 별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939년 8월)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944년 10월)과 같은 외국 고위 인사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일각에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5년 4월에는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체결을 위한 오스트리아와 소련 간의 중요한 회담이 이 건물에서 열렸다. 이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주권을 회복했으며, 건물은 다시 독립 오스트리아의 대사관으로 사용되게 되었다.[3]
또한 이 건물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유명 소설 ''닥터 지바고''(1957)에서 작중 사건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4] 건물의 자세한 건축 과정과 민도프스키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2. 1. 민도프스키 가문과 저택
민도프스키 가문은 키네시마 지역 출신으로, 농노였던 이반 이바노비치 민도프스키(1781–1853)가 섬유 공장을 설립하며 가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후손들은 모스크바에 여러 저택을 건설했는데, 손자 이반 알렉산드로비치는 건축가 레프 케쿠셰프에게 의뢰하여 포바르스카야 거리 44번지에 첫 번째 민도프스키 저택(현재 주 모스크바 뉴질랜드 대사관)을 지었다. 친족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는 건축가 니키타 라자레프에게 의뢰하여 두 번째 민도프스키 저택을 지었는데, 이것이 현재 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 건물이다. 이 외에도 민도프스키 가문 소유의 저택과 아파트가 도시에 남아 있어, 2008년 기준으로 총 6개의 민도프스키 저택이 확인된다.현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는 니콜라이 민도프스키 하우스는 1906년 니키타 라자레프가 설계하고 건축한 신고전주의 부흥 양식 건물이다. 이 저택은 프레치스텐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중요한 모퉁이 부지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8세기에 가가린 가문의 넓은 영지가 있었으나 1812년 모스크바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목조 무하노프 영지가 들어섰다. 1899년, 낡은 무하노프 영지는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매각되어 세 필지로 나뉘었다. 앞선 두 필지에는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윌리엄 월콧의 설계로 건물이 들어섰고, 세 번째 필지를 니콜라이 민도프스키가 매입하여 저택을 지었다.[2]
라자레프가 설계한 민도프스키 하우스는 당시 유행하던 "퇴폐 미술" 경향에 대한 신고전주의적 반작용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건물은 L자형 구조로, 크기는 대략 32m × 44m이다. 두 주요 부분이 90도로 교차하지만, 실제 부지 경계선은 더 예각으로 만나기 때문에 모퉁이의 로툰다 홀 앞에 작은 정원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반면 주 출입구가 있는 서쪽 정면은 거리 경계선에 맞춰 폭이 좁아지는 형태를 띤다. 처음에는 건물 전체가 단층이었으나, 1913년에 소유주가 동쪽 생활 공간 부분을 2층으로 증축했다. 2007년까지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동쪽 건물은 이후 여러 차례 개조되었지만, 프레치스텐스키 골목을 향한 서쪽 건물의 단층 공식 홀들은 1906년 건축 당시의 실내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2]
2. 2. 건축 배경
현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이 자리한 곳은 프레치스텐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중요한 모퉁이 부지이다. 18세기에는 이곳에 넓은 가가린 가문의 영지가 있었으나, 1812년 모스크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목조로 된 무하노프 가문의 영지가 들어섰다. 1899년, 낡은 무하노프 영지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매각되었고, 부지는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처음 두 구역에는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윌리엄 월콧의 설계로 건물이 지어졌으며, 세 번째 부지를 민도프스키가 매입하였다.[2] 이 부지에 오늘날 대사관으로 사용되는 민도프스키 하우스가 건설되었다.2. 3. 니콜라이 민도프스키 하우스
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1906년 니키타 라자레프가 설계하고 건축한 '''니콜라이 민도프스키 하우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등재된 신고전주의 부흥 양식의 건축물이다.[2] 민도프스키 가문은 키네시마 출신으로, 농노였던 이반 이바노비치 민도프스키(1781–1853)가 섬유 공장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친족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가 니키타 라자레프에게 이 저택의 건축을 의뢰했다.니콜라이 민도프스키 하우스는 프레치스텐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부지는 18세기에는 넓은 가가린 가문의 영지였으나 1812년 모스크바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나무로 지은 무하노프 영지가 들어섰다. 1899년, 낡은 무하노프 영지는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팔려 세 개의 부지로 나뉘었으며, 민도프스키가 그중 하나를 매입했다.[2]
라자레프가 설계한 이 저택은 당시 유행하던 "퇴폐 미술"에 대한 신고전주의적 반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건물은 L자형 구조로, 크기는 32m × 44m이다. 두 주요 부분이 90도로 교차하지만 실제 부지 경계는 더 예각이어서, 모퉁이의 로툰다 홀 앞에 작은 정원을 만들 공간이 생겼다. 주 출입구가 있는 서쪽 정면은 거리 경계에 맞춰 좁게 설계되었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건물 전체가 단층이었으나, 1913년 소유주가 동쪽 생활관 부분을 2층으로 증축했다. 2007년까지 영사관으로 사용된 동쪽 건물은 이후 여러 차례 개조되었지만, 프레치스텐스키 골목을 향한 서쪽 건물의 단층 공식 홀은 1906년 건축 당시의 실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2]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1927년에 이 민도프스키 하우스로 이전했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안슐루스 이후에는 별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나치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당시)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944년 10월) 등 외국 고위 인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는 소문은 도시 전설일 가능성이 높다. 1955년 4월, 이 건물은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체결을 위한 오스트리아와 소련 간 회담 장소로 사용되었고, 이후 독립한 오스트리아의 대사관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3]
민도프스키 하우스, 특히 모퉁이 홀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1957년 소설 ''닥터 지바고''에서 허구적인 총격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로 등장하기도 했다.[4]
3. 오스트리아 대사관
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니키타 라자레프가 1906년에 설계하고 건축한 '''니콜라이 민도프스키 하우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등재된 신고전주의 부흥 양식의 건축물이다. 건물 소유주였던 민도프스키 가문은 키네시마 출신으로, 농노였던 이반 이바노비치 민도프스키(1781–1853)가 섬유 공장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손자 이반 알렉산드로비치는 레프 케쿠셰프에게 첫 번째 민도프스키 하우스(현재의 주 모스크바 뉴질랜드 대사관) 건축을 의뢰했으며, 친척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가 니키타 라자레프에게 이 두 번째 민도프스키 하우스 건축을 의뢰했다. 민도프스키 가문은 모스크바 시내에 여러 저택과 아파트를 소유했으며, 2008년 기준으로 6개의 민도프스키 하우스가 남아 있다.
현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는 민도프스키 하우스는 프레치스텐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18세기에는 이 자리에 가가린 가문의 넓은 영지가 있었으나 1812년 모스크바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나무로 지어진 무하노프 영지가 들어섰다. 1899년, 낡은 무하노프 영지는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매각되어 세 개의 부지로 나뉘었다. 앞선 두 부지에는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윌리엄 월콧의 설계로 건물이 들어섰고, 세 번째 부지를 민도프스키가 매입하여 이 저택을 지었다.[2]
라자레프가 설계한 민도프스키 하우스는 당시 유행하던 "퇴폐 미술"에 대한 신고전주의적 반작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건물은 32m×44m 크기의 L자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주요 부분이 90도로 교차하지만, 실제 부지 경계는 더 예각으로 만나기 때문에 모퉁이의 로툰다 홀 앞에 작은 정원을 둘 공간이 생겼다. 반면 주 출입구가 있는 서쪽 정면은 거리 경계선에 맞춰 폭이 좁아지는 형태가 되었다. 원래 건물 전체가 단층이었으나, 1913년 소유주가 동쪽의 생활 공간 부분을 2층으로 증축했다. 2007년까지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이 동쪽 건물은 이후 여러 차례 개조되었지만, 프레치스텐스키 골목을 향한 서쪽 건물의 단층 공식 홀은 1906년 건축 당시의 실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2]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1927년부터 이 민도프스키 하우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3]
3. 1. 대사관 이전과 사용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1927년 민도프스키 하우스로 이전했다. 1938년 안슐루스 이후에는 나치 독일의 별장으로 사용되어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참조)와 윈스턴 처칠 (1944년 10월)과 같은 외국 고위 인사를 수용했다. 그러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민도프스키 하우스에서 체결되었다는 소문은 도시 전설일 가능성이 높다. 1955년 4월, 이 건물은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관한 오스트리아-소련 회담 장소였으며, 이후 독립 오스트리아 대사관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3]민도프스키 하우스, 특히 모퉁이 홀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1957년 소설 ''닥터 지바고''에서 허구적인 총격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4]
3. 2.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관련 논란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1927년 민도프스키 하우스로 이전했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안슐루스 이후에는 별장으로 사용되어,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당시 방문)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944년 10월)과 같은 외국 고위 인사를 수용하기도 했다.이 때문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민도프스키 하우스에서 체결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도시 전설로 여겨진다.[3]
한편, 1955년 4월에는 이 건물에서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관한 오스트리아-소련 회담이 열렸으며, 이후 독립한 오스트리아의 대사관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3]
3. 3.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체결
1955년 4월, 이 건물은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관한 오스트리아-소련 회담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이 회담 이후 독립 오스트리아의 대사관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3]4. 문화적 영향
주러시아 오스트리아 대사관 건물인 '''니콜라이 민도프스키 하우스'''는 니키타 라자레프가 설계한 신고전주의 부흥 양식의 건축물로, "퇴폐 미술"에 대한 신고전주의적 반발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2] 이 건물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1938년 안슐루스 이후에는 별장으로 사용되어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939년 8월)나 윈스턴 처칠(1944년 10월)과 같은 외국 고위 인사들이 머물렀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이는 도시 전설일 가능성이 높다. 1955년 4월에는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관한 오스트리아-소련 회담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3]
4. 1. 닥터 지바고
민도프스키 하우스, 특히 모퉁이 홀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1957년 소설 ''닥터 지바고''에서 허구적인 총격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4]참조
[1]
웹사이트
http://www.mid.ru/ns[...]
Ministry of Foreign Affairs (Russia)
2008-07-03
[2]
서적
Memorial buildings of Moscow. Earthen City.
Искусство
1989
[3]
웹사이트
Außenministerium Österreich -> посольство -> Москва -> История здания Посольства Австрии
http://www.bmeia.gv.[...]
2011-02-25
[4]
웹사이트
Außenministerium Österreich -> посольство -> Москва -> История здания Посольства Австрии
http://www.bmeia.gv.[...]
201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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