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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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상순은 명나라 만력제의 아들로, 1586년에 태어났다. 황태자 책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601년 복왕에 봉해졌다. 그는 만력제의 총애를 받으며 사치를 누렸고, 이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 이자성의 난 때 낙양에서 처형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의 시신은 훼손되었으며, 이후 그의 아들 주유송이 남명에서 황위에 오르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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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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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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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주상순 (朱常洵) |
출생일 | 1586년 2월 22일 (만력 14년 1월 5일) |
출생 장소 | 자금성, 순천부 |
사망일 | 1641년 3월 2일 (숭정 14년 1월 21일) |
사망 장소 | 뤄양 |
매장지 | 난징 희릉(熙陵) |
작위 계승 | 복왕 |
재위 기간 | 1601년 – 1641년 3월 2일 (1614년 봉지 받음) |
재위 유형 | 재임 |
후임 | 주유숭 |
아버지 | 만력제 |
어머니 | 정귀비 |
배우자 | 해당사항 없음 |
자녀 | 홍광제 주유거, 영충왕 주유화, 덕회왕 |
시호 | 복충왕 (福忠王) (숭정제가 내림) |
초시호 | '정순숙철성경인의공황제(貞純肅哲聖敬仁毅恭皇帝)' (홍광제가 처음 올림) |
개시호 | '정순숙철성경인의효황제(貞純肅哲聖敬仁懿孝皇帝)' (홍광제가 바꿈) |
최종 시호 | '모천부도정순숙철수문현무성경인의효황제(慕天敷道貞純肅哲修文顯武聖敬仁毅孝皇帝)' (영력제가 바꿈) |
묘호 | 공종(恭宗) (영력제가 올림) |
가문 | 주씨 |
왕위 | |
전임 | 해당사항 없음 |
직책 | 명 복국 국왕 |
대수 | 1대 |
임기 | 1601년 ~ 1641년 |
2. 생애
주상순(朱常洵)은 명나라 만력제의 셋째 아들로, 정귀비 소생이다. 만력제는 주상순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만력제는 주상순에게 막대한 재산을 하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허락했다.[10] 그의 결혼식에는 30만 냥이라는 거액이 사용되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10]
1641년, 이자성이 낙양을 점령하고 주상순을 처형했다. 이자성은 주상순의 시신으로 '복록연(福祿宴)'이라는 잔치를 벌였다고 전해진다.[11]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나라가 멸망하자, 주상순의 아들 주유송이 남경에서 황제로 즉위하여(남명) 아버지에게 황제의 시호를 추증했다. 1647년에는 주상순의 조카 영력제가 주상순에게 恭宗(공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2. 1. 유년 시절과 황태자 책봉 문제
만력제와 정귀비 사이에서 1586년에 태어난 주상순은 만력제의 총애를 받아 황태자로 책봉될 뻔했다.[3] 그러나 장자 상속 원칙을 지지하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8]1586년, 만력제가 주상순의 어머니 정씨에게 귀비(Imperial Noble Consort) 칭호를 내리려 하자, 황제의 장남 주창락의 어머니 소경황태후는 귀인(Consort)으로만 불렸기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6] 황제의 신하들은 정씨가 귀비로 책봉되면 황제는 공씨를 귀비로 격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7] 이는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려는 전조로 여겨졌으며,[8] 이후 10년 동안 신하들은 장자상속의 전통을 어기는 것이 정씨를 궁궐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노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 것이라고 황제를 설득하려 했다.[8]
결국 1601년, 만력제는 장남 주창락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주상순을 복왕(福王)에 봉했다.[9] 그러나 주상순은 전통에 따라 궁궐을 떠나지 않았고, 1614년이 되어서야 봉지인 낙양으로 이주했다.[9]
2. 2. 복왕 시절
만력제 29년(1601년) 복왕(福王)에 봉해졌다. 만력 42년(1614년) 영지인 낙양으로 옮겼는데, 이때 200000m2의 밭과 막대한 소금밭을 하사받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10] 그의 결혼식에는 300000냥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사용되었는데,[10] 이는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으로 전가되었다. 이 때문에 주상순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이는 훗날 그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0]2. 3. 이자성의 난과 죽음
1641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낙양(洛陽)을 함락시켰다. 주상순은 장남 주유송과 함께 영은사(迎恩寺)로 도망쳤으나, 사로잡혀 이자성에게 처형되었다.[11] 이자성은 주상순의 시신을 사슴 고기와 함께 삶아 '복록연(福祿宴)'이라는 이름으로 잔치를 벌였다고 전해진다.[11]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사치를 일삼았던 주상순에 대한 이자성의 분노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된다.
3. 사후
1644년, 이자성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가 자살하자, 주상순의 장남인 홍광제(주유숭)는 남경에서 마사영과 노구덕의 지지하에 황위에 올랐다(남명(南明)의 안종(安宗)).[10] 안종은 연호를 홍광으로 개원하고, 아버지 주상순에게 황위를 추증했다. 시호는 모천부도정순숙철수문현무성경인의효황제(慕天敷道貞純肅哲修文顯武聖敬仁毅孝皇帝)이다.[11]
1647년, 주상순의 조카인 영력제(주유랑)이 즉위하면서 주상순에게는 공종(恭宗)의 묘호가 추증되었다.
4. 가족 관계
주상순은 만력제의 셋째 아들로 정귀비(鄭貴妃)에게서 태어났다.[3] 그는 정비 요씨(姚氏)와 주씨(鄒氏)를 두었다. 요씨는 주유송의 생모이며, 주유송과 주유랑에 의해 황태후로 추존되었다.[1][2] 주씨 역시 주유송에 의해 황태후로 추존되었다.[2]
4. 1. 처첩
주상순의 처첩은 다음과 같다.구분 | 이름 |
---|---|
정비 | 요씨(姚氏) 또는 전씨(田氏) |
정비 | 주씨(鄒氏) |
기타 첩 | 선시 맹씨(孟氏), 선시 소씨(蕭氏), 선시 장씨(張氏), 선시 왕씨(王氏) |
- 요씨(姚氏) 또는 전씨(田氏): 주유송의 생모이다. 주유송에 의해 "효성단혜자순정목황태후(孝誠端惠慈順貞穆皇太后)"로 추존되었으나, 주유랑이 "효성단혜자순정목부천독성공황후(孝誠端惠慈順貞穆符天篤聖恭皇后)"로 추존호를 변경하였다.[1]
- 주씨(鄒氏): 주유송에 의해 "각정인수황태후(恪貞仁壽皇太后)"로 추존되었다.[2]
4. 2. 자녀
이름 | 설명 |
---|---|
주유송 | 복왕(福王) 작위를 계승하였고, 후에 남명의 홍광제로 즉위하였다. (생모는 요씨)[3] |
주유구(朱由榘) | 1609년 7월 26일에 태어나 1618년에 사망. 영상군왕(潁上郡王) 작위를 받았다. 후에 주유송에 의해 "영충왕(潁沖王)"으로 추봉되었다.[3] |
주유화(朱由樺) | 덕창군왕(德昌郡王) 작위를 받았다. 후에 주유송에 의해 "덕회왕(德懷王)"으로 추봉되었다.[3] |
주씨 | 1608년 음력 9월 2일에 태어나 1609년 음력 6월 22일에 사망. |
주씨 | 장이성에게 시집감. |
5. 평가
주상순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명 말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호화로운 삶과 비참한 죽음은 황실의 부패와 무능, 백성들의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주상순의 결혼식에는 30만위안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사용되었는데,[10] 이는 혹독한 세금과 빈곤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결국 그의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졌다. 이자성이 낙양을 점령하고 연 "복록연(福祿宴)"[11]에서 주상순은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훼손되어 반란군의 식량으로 사용되었다.
진보 진영에서는 주상순의 사례를 통해 부패한 명 황실과 지배층의 타락이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으며, 이는 결국 봉건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과정이었음을 강조한다.
6. 대중문화
- 白发魔女传|백발마녀전중국어 (1999년) 주연: 고량
- 대명빈비(大明嬪妃) (2010년, 일본 미공개) 주연: 주일룡(朱一龍)
참조
[1]
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2]
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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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4]
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5]
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6]
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7]
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8]
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9]
간행물
History Office (1620s)
[10]
문서
만력제의 유소시 정치를 집행했던 중신 장거정이 십수년에 걸쳐 국고에 쌓아올린 금액이 400만량이다.
[11]
문서
복록연: 복은 복왕을, 록은 녹을 가리킨다 (중국어로 록과 녹은 동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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