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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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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창제는 명나라의 제14대 황제로, 만력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력제는 그의 이복 동생인 주상순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효정태후의 명으로 태창제가 황태자가 되었고, 정격안 사건을 통해 자리를 굳혔다. 1620년 만력제 사후 즉위했으나, 재위 29일 만에 홍환안으로 사망했다. 그는 즉위 후 만력제 때 폐지되었던 세금 부활, 동림당 등용 등 개혁 정치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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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창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족자]]에 그려진 궁중 초상화
궁궐 초상화, 타이베이, 타이완의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주상락 (朱常洛)
묘호광종 (光宗)
시호숭천계도영예공순헌문경무연인의효정황제 (崇天契道英睿恭純憲文景武淵仁懿孝貞皇帝)
재위 기간1620년 8월 28일 – 1620년 9월 26일
연호태창 (泰昌), 1620년 8월 28일 – 1621년 1월 21일
출생일1582년 8월 28일
사망일1620년 9월 26일
능묘경릉, 명십삼릉, 베이징
부황만력제
모후효정태후
배우자효원정황후 (1601년 결혼, 1613년 사망)
효화태후 (1619년 결혼, 사망)
효순태후 (1614년 결혼, 사망)
자녀천계제
숭정제
즉위일1620년 8월 28일
선대 황제만력제
후대 황제천계제
황태자 책봉1601년
중국어 정보
중국어 간체泰昌帝
중국어 병음Tàichāng Dì
중국어 위키Tʻai4-chʻang1 Ti4
중국어 발음 (국제음성기호)/tʰaɪ˥˩.tʂʰaŋ˥.ti˥˩/
황태자 정보
황태자 재위 기간1601년–1620년
선대 황태자만력제 주익균 (朱翊鈞)
후대 황태자헌민태자

2. 생애

만력제의 장자였으나, 만력제는 3남이자 이복동생인 복왕 주상순을 총애하여 황태자로 책봉하려 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조정은 동림당과 비동림당으로 나뉘어 정쟁을 벌였다. 조선 선조의 차남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 사신이 왔을 때에도, 동림당은 태창제의 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태창제는 20세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정격안을 계기로 황태자 자리를 굳혔다.

1620년 만력제가 사망하자 태창제가 즉위하였다. 신하들은 총명한 태창제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즉위 한 달 만에 사망했다.

2. 1. 출생과 황태자 책봉

태창제는 1582년 만력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효정황태후 왕씨는 만력제의 어머니 효정황태후 이씨의 시녀 출신이었다. 만력제는 정귀비를 총애하여 그녀의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다. 이로 인해 조정은 동림당과 비동림당으로 나뉘어 대립했다.[1] 당시 조선에서는 선조의 차남인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가 있었는데, 동림당은 태창제의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다.[1]

1601년, 태창제는 20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2] 그러나 정귀비 일파는 지속적으로 태창제를 위협했다. 1615년, 정격안이라 불리는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3] 이 사건은 정귀비 일파가 배후로 지목되었으나, 만력제는 이를 묵인했다.[4]

2. 2. 즉위와 개혁 정치

1620년 만력제가 사망하자 태창제가 황위에 올랐다. 태창제는 즉위 후, 만력제 때 폐지되었던 광세(鑛稅)와 상업세(商業稅)를 다시 폐지하고, 요동 지역 방어를 위해 은(銀)을 지원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다.[1] 또한, 만력제 때 억압받던 동림당 계열의 인물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바로잡으려 했다.[1]

태창제는 즉위 직후 요동 지역의 심각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궁궐 금고에서 (37.3톤)의 은을 지원했고, 며칠 뒤 또 다른 의 은을 보냈다.[1] 또한, 오랫동안 비어 있던 행정부의 공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림 운동과 관련된 좌원표(鄒元標, 1551~1624)와 풍종우(馮從吾, 1556~1627) 등 이전 정부의 비판자들을 대거 등용했다.[1]

태창제는 그의 연호를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태창(泰昌)으로 정했다.[1]

2. 3. 홍환안과 죽음

1620년 만력제가 죽자 태창제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해에 그의 안색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병을 앓았다. 즉위 3일 후, 태창제는 병이 들었고, 9월 5일 그의 상태는 악화되어 의원을 불렀다. 9월 8일과 9일의 조회에서 그는 병색이 완연했고, 곧 침상에 누웠다. 9월 13일, 그는 다시 의원과 여러 관리들의 방문을 받았다. 황제는 불면증과 식욕 부진을 호소했다.[1]

관리들은 걱정했고, 내시원(內視院)을 총괄하는 내시 최문승(崔文升)이 황제에게 완하제(설사약)를 주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무능하다고 비난했다. 관리들은 황제에게는 보익제(補益劑)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황제는 그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약을 복용하는 것도 중단했다.[1]

태창제는 며칠 동안 침상에서 국정을 처리했지만, 9월 17일 그는 압도당한 듯 다가올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다.[2] 9월 25일, 대학사 방종철이 이끄는 걱정하는 관리들의 방문 중에 황제는 붉은 알약을 요청했는데, 그는 그 알약이 예부(禮部)의 부주사(副主事)인 이가작이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가작은 나중에 자신의 알약이 황제의 병든 몸을 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고 증언했다. 같은 날, 내금위(內金衛)와 내시들은 이가작을 황제에게 데려왔고, 황제는 그에게 알약을 만들라고 명령했다.[1]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가작은 납, 가을 광물, 모유, 주사를 사용하여 알약을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 중국 의학에서 보약으로 여겨지는 약재였으며, 황제의 내시들이 제공했다. 그는 그런 다음 황제에게 알약 하나를 주었고, 황제는 안도감을 느끼고 허기를 느껴 또 다른 알약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가작은 한 알이면 충분하고 두 알은 너무 많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황제는 자정이 지나서 이가작과 관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새벽, 내시들은 황제가 죽었다고 발표했다.[3]

이 사건을 홍환안(紅丸案, 태창제 사망 사건)이라고 한다. 즉, 신하가 이전에 복용한 약을 체내에서 배출시키기 위해 설사약을 복용시켰고, 또 다른 신하가 만든 선단 2알을 연거푸 복용하였다가 갑자기 재위 29일 만에 승하한 사건이다.

동림당(東林黨)의 일부 구성원은 이가작과 대학사 방종철을 황제를 독살했다고 비난했지만, 현장에 있던 13명의 관리들 중 일부는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며 자신의 과실을 면하려 했다.[3] 붉은 알약을 둘러싼 논란, 즉 그것이 황제의 죽음을 고의로든 아니든 초래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향후 몇 년 동안 격렬한 논쟁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2][3]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설사를 한 태창제에게, 홍로사승을 지냈던 이가작이 홍환(환약)을 권했고, 태창제가 한 알을 복용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한 알을 더 복용하자, 다음 날 갑자기 죽었다. 이를 음모로 보고, 배후 관계를 추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 먼저 환약을 권한 이가작이 탄핵되었고, 다음으로 홍환을 권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학사 방종철도 탄핵되었다.

3. 가족 관계

태창제는 여러 명의 황후와 후궁을 두었으며, 슬하에 7남 11녀를 두었다.

'''황자'''


  • 주유교 (천계제, 첫째, 효화황태후 왕씨 소생)
  • 주유학 (간회왕, 둘째, 효화황태후 왕씨 소생)
  • 주유즙 (기사왕, 셋째, 선시 왕씨 소생)
  • 주유모 (회회왕, 넷째, 강비 이씨 소생)
  • 주유검 (숭정제, 다섯째, 효순황태후 유씨 소생)
  • 주유서 (향회왕, 여섯째, 의비 정씨 소생)
  • 주유척 (회조왕, 일곱째, 경비 풍씨 소생)


'''황녀'''

  • 도의공주 (첫째)
  • 주휘연 (회숙공주, 둘째, 효원정황후 곽씨 소생)
  • 주휘항 (셋째)
  • 주휘선 (도순공주, 넷째)
  • 주휘맹 (다섯째)
  • 주휘연 (영덕공주, 여섯째, 의비 부씨 소생)
  • 주휘정 (수평공주, 일곱째, 의비 부씨 소생)
  • 주휘완 (여덟째)
  • 주휘제 (낙안공주, 아홉째, 강비 이씨 소생)
  • 주휘조 (열째, 강비 이씨 소생)
  • 주휘정 (도온공주, 열한째, 신빈 소씨 소생)

3. 1. 조부모와 부모

3. 2. 황후와 후궁

봉호시호이름(성씨)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비고
황태자비
(皇太子妃)
효원정황후
(孝元貞皇后)
곽씨(郭氏)(추존)1580년 ~ 1613년박평후(博平侯)
곽유성(郭維城)
박평후부인(博平侯夫人)
[3] [4]
재인(才人)효화황태후
(孝和皇太后)
왕씨(王氏)(추존)1582년 ~ 1619년[5]
숙녀(淑女)효순황태후
(孝純皇太后)
유씨(劉氏)(추존)1593년 ~ 1615년영국공(瀛國公)
유응원(劉應元)
영국태부인(瀛國太夫人)
서씨(徐氏)
[6] [7]
강비(康妃)이씨(李氏)1584년 ~ 1674년황귀비(皇貴妃) [8]
장비(莊妃)공의장비(恭懿莊妃)이씨(李氏)1588년 ~ 1624년이해(李海)
유씨(劉氏)
의비(懿妃)부씨(傅氏)1588년 ~ 1644년[9]
경비(敬妃)풍씨(馮氏)
신빈(愼嬪)소씨(邵氏)
양빈(襄嬪)장씨(張氏)
각빈(恪嬪)이씨(李氏)
정빈(定嬪)곽씨(郭氏)
선시(選侍)왕씨(王氏)
선시(選侍)조씨(趙氏)? ~ 1620년


3. 3. 황자

태창제는 7명의 황자를 두었는데, 이 중 장남 주유교천계제로, 5남 주유검숭정제로 즉위했다. 나머지 황자들은 모두 요절했다.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비고
장남황장손주유교1605년 ~ 1627년효화황태후 왕씨3남 3녀제15대 황제.[10]
차남간왕주유학1607년 ~ 1610년효화황태후 왕씨요절.
3남제왕주유즙1609년 ~ 1616년선시 왕씨요절.
4남회왕주유모1610년 ~ 1615년강비 이씨요절.
5남신왕주유검1611년 ~ 1644년효순황태후 유씨7남 3녀제16대 황제.
6남상왕주유허의비 정씨요절.
7남혜왕주유전경비 풍씨요절.


3. 4. 황녀

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장녀도의공주(悼懿公主)요절함.
차녀회숙공주(懷淑公主)주휘연(朱徽娟)1604년 ~ 1610년효원정황후 곽씨도숙공주(悼淑公主)
도의공주(悼懿公主)
요절함.
3녀공주(公主)주휘항(朱徽姮)? ~ 1623년요절함.
4녀도순공주(悼順公主)주휘선(朱徽嫙)1606년 ~ 1607년요절함.
5녀공주(公主)주휘영(朱徽㜲)1608년 ~ 1609년요절함.
6녀영덕공주(寧德公主)주휘연(朱徽姸)1609년 ~ ?의비 부씨유유복(劉有福)장공주(長公主)[11]
7녀수평공주(遂平公主)주휘정(朱徽婧)1611년 ~ 1633년의비 부씨제찬원(齊贊元)장공주(長公主)
8녀공주(公主)주휘완(朱徽婉)1611년 ~ ?요절함.
9녀낙안공주(樂安公主)주휘착(朱徽娖)1611년 ~ 1643년강비 이씨공영고(鞏永固)장공주(長公主)
10녀공주(公主)주휘초(朱徽妱)1616년 ~ 1617년강비 이씨요절함.
11녀도온공주(悼溫公主)주휘정(朱徽姃)1621년신빈 소씨[12]


4. 평가 및 영향

태창제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개혁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났다. 만력제 사후 즉위한 태창제는 즉위 초부터 광산세와 상업세 폐지, 환관 세무 감독관 소환 등 만력제의 실정을 바로잡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만력제 때 억압받던 동림당 계열 인물들을 등용하여 정국 쇄신을 꾀했다.

그러나 태창제는 즉위 직후 병에 걸렸고, 결국 재위 29일 만에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홍환안(紅丸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는 태창제가 복용한 붉은 환약(홍환)이 독약이었는지, 아니면 의료 과실이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이 사건은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동림당은 이계소와 방종척을 독살 혐의로 비난했다.

태창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명나라는 환관과 외척 세력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이는 명나라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 특히, 태창제의 총애를 받던 이씨 부인이 아들 천계제의 즉위를 둘러싸고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하면서 정국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역사학자들은 태창제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그의 개혁 정치의 좌절을 명나라 멸망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평가한다. 특히, 조선과의 관계에서 광해군 즉위 초반, 명나라 내부의 권력 투쟁은 조선의 외교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력제 시기, 조선에서 선조의 차남인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동림당은 장자인 태창제의 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여 반대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春明夢餘録
[2] 서적 太常続考
[3] 문서 공정황태자비
[4] 문서 태창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
[5] 문서 천계제 즉위 후 황태후로 추존
[6] 문서 현비
[7] 문서 숭정제 즉위 후 황태후로 추존
[8] 문서 위충헌에 의해서 강비로 강등됨. 명나라 멸망하고 청나라 귀순 후에 사망
[9] 문서 명나라 멸망 전에 병으로 사망
[10] 문서 태자나 친왕 봉작에 오르지 않고 제위에 오름
[11] 문서 명나라 멸망 후에 행방불명됨
[12] 문서 요절함. 태창제의 유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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