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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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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흔은 후한 말의 인물로, 회계군 출신이다. 젊은 시절 뤄양에서 진번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단양 태수를 지냈다. 동탁 토벌전에 조조를 지원했으며, 원술의 잔혹함을 피해 원소에게 의탁했다. 손책의 강동 정벌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랑의 부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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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흔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주흔
한자 표기周昕
대명(大明)
출생지양주 회계군
사망일196년
사망지사독
사망 원인전사
직업정치인, 장군
소속후한
관직단양태수
형제주유
주앙
생애
주요 활동단양 태수 역임
경쟁자원술, 손책

2. 생애

주흔은 현재 저장성 사오싱 일대인 회계군 출신으로, 주유와 주앙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

오경이 주흔에게 협력한 단양 주민을 처형하겠다고 하자, 주흔은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군대를 해산하고 단양을 떠나 고향인 회계로 돌아갔다.

손책이 회계를 침공하자, 왕랑과 함께 고릉에서 맞섰다. 그러나 손책이 숙부 손정의 계책에 따라 사독을 기습하면서 왕랑군은 혼란에 빠졌고, 주흔은 사독으로 급히 원군을 갔으나 손책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어릴 때 수도 낙양으로 가 태부(太傅) 진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많은 을 읽었으며 풍각이라는 점술에 능했다. 태위부(太尉府)의 부름을 받은 후 단양태수까지 올랐다.[4]

190년(초평 원년) 동탁의 횡포에 반동탁 연합군이 일어났다. 여기에 참가한 조조가 형양(滎陽)으로 진격했다가 서영에게 패하고 병사가 부족해졌다. 하후돈조홍[3]이 양주로 와서 모병하므로 자사 진온과 함께 4,000명을 지원해줬다.

이후 반동탁 연합군은 원소원술의 양 진영으로 분열하여 싸웠다.[5] 주흔은 원술의 지나친 잔혹함을 싫어하여 원소에게 붙었다. 동생 주앙, 주우와 함께 원술의 예주를 취하려 했지만[6] 그 자사 손견에게 패하였다.[7] 원술이 오경을 보내 단양을 공격하였다. 이를 막아내니 오경은 주흔을 따르던 백성들을 죽였다. 주흔은 “내가 부덕한 것이지 백성들에게 무슨 가 있겠는가.” 라며 군사를 해산시키고 고향 회계로 돌아갔다.[8]

196년(건안 원년)[9] 손책이 회계를 침공하기에 그 태수 왕랑과 함께 맞섰다. 손책이 사독(査瀆)을 통해 고천둔(高遷屯)으로 우회 기습하자 급하게 나섰다가 전사하였다.[10]

2. 2. 반동탁 연합군 참여와 원술과의 대립

190년(초평 원년), 동탁의 횡포에 반동탁 연합군이 일어났다. 조조는 형양(滎陽)에서 서영에게 패하고 병사가 부족해지자, 하후돈조홍[3]이 양주에서 모병하였다. 이때 주흔은 자사 진온과 함께 4,000명의 병력을 지원했다.[4]

이후 반동탁 연합군은 원소원술 진영으로 분열되어 싸웠다.[5] 주흔은 원술의 잔학함을 싫어하여 원소에게 붙었다. 동생 주앙, 주우와 함께 원술의 예주를 공격했으나,[6] 손견에게 패하였다.[7] 원술이 오경을 보내 단양을 공격하자, 주흔은 이를 막아냈다. 그러나 오경이 주흔을 따르던 백성들을 죽이자, 주흔은 “내가 부덕한 것이지 백성들에게 무슨 가 있겠는가.”라며 군사를 해산하고 고향 회계로 돌아갔다.[8]

2. 3. 손책과의 전투와 최후

196년(건안 원년)[9] 손책이 회계를 침공하자 그 태수 왕랑과 함께 맞섰다. 손책이 사독(査瀆)을 통해 고천둔(高遷屯)으로 우회 기습하여 전사하였다.[10]

《헌제춘추》에 따르면, 오경은 주흔에게 협력한 단양 주민의 처형을 예고했기 때문에, 주흔은 민중의 신변을 걱정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단양을 포기하고 고향인 회계로 귀환했다.

손책이 회계로 쳐들어오자, 항전의 길을 선택한 태수 왕랑과 함께 고릉에서 이를 막았다. 손책은 숙부 손정의 권유에 따라 사독을 급습하여 왕랑 군의 동요를 유발하는 작전을 취했다. 이에 넘어간 왕랑은 주흔을 사독의 원군으로 보냈지만, 손책에게 격파되어 주흔은 참수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계는 손책의 손에 떨어졌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등장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주흔은 왕랑이 손책에게 항전할 때만 등장한다. 태사자와 싸우는 왕랑을 도우러 나와 황개와 대결한다. 손책이 사독으로 기동하자 쫓다가 복병을 당해 에 찔려 죽는다.[1]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회계 태수 왕랑의 부하 무장으로 등장하며, 손책의 회계 침공에 왕랑, 엄백호와 함께 저항하지만, 손정의 진언에 따라 손책에게 급습당한 사독을 구원하러 가던 중 습격당해 죽는다.[2]

4. 가계

참조

[1] 서적 資治通鑑
[2] 문서 檄呉将校部曲文
[3] 서적 삼국지 9권 위서 제9 조홍
[4] 서적 삼국지 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5] 서적 후한서 75권 열전 제65 원술
[6] 서적 후한서 공손찬전·원술전은 주흔, 《삼국지》 공손찬전과 《전략》(배송지 주석, 《삼국지》 공손찬전에서 인용)은 주앙, 《오록》과 《회계전록》(배송지 주석, 《삼국지》 손견전에서 인용)은 주우라고만 하여 동시가 아니거나 인명의 오기일 수도 있다.
[7] 서적 후한서 75권 열전 제65 원술, 《자치통감》60권 한기 제52 헌제 초평 2년, 《회계전록》 ; 배송지 주석,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견에서 인용
[8] 서적 헌제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51권 오서 제6 손정에서 인용
[9] 서적 자치통감 62권 한기 제54 헌제 건안 원년
[10] 서적 삼국지 51권 오서 제6 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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