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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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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모는 형주 양양의 명문가 출신으로, 유표 휘하에서 군관으로 활동하며 형주 지배에 기여했다. 유표 사후 조카사위인 유종을 지지하며 유기를 제거하려 했고, 조조에게 항복하여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의 이간책에 의해 장윤과 함께 처형당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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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채모
원어 이름蔡瑁
로마자 표기Cai Mao
덕규 (德珪)
출생 및 사망
출생생년 미상
출생지형주 남군 양양현
사망생년 미상
사망지미상
가족 관계
아버지채풍
친척채부인 (누이)
황승언의 부인 (누이)
장온의 부인 (고모)
관직 정보
작위한양정후 (漢陽亭侯)
주요 경력장수교위 (長水校尉)
사마 (司馬)
종사중랑 (從事中郎)
진남장군 (鎭南將軍) (유표 휘하)
활동 시기
시대후한
활동 기간2세기/3세기
소속
주요 섬긴 군주유표
유종
조조
기타 정보
직업군사

2. 생애

채모는 형주의 유력한 호족으로, 말재주가 뛰어나 유표를 섬겨 괴월과 함께 군사로 활동했다.[2] 조조와는 젊은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다. 채모의 고모는 후한 태위 장온의 아내였고, 큰누나는 황승언에게, 작은누나는 유표의 후처로 각각 시집을 갔다. 또한 채모의 조카딸은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시집가면서 채씨 가문의 세력이 더욱 커져, 채모는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1]

유표 사후, 채모는 친족 장윤과 공모하여 유종의 배다른 형 유기와 그를 지지하는 유비를 쫓아내고 유종을 후계자로 옹립했다. 208년 조조가 침략해 오자 유종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고, 채모는 조조의 밑으로 들어갔다.[1]

조조 휘하에서 채모는 종사중랑, 사마, 장수교위를 역임하고 한양정후에 봉해졌다.[1] 조조와 오랜 친분이 있었기에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경멸했다.[1] 훗날 채모의 후손들은 채주(蔡洲)라는 섬에 모여 살았으나, 311년 도적 왕여(王如)의 침입으로 모두 목숨을 잃고 채모의 가문은 멸족되었다.[1]

2. 1. 가계와 배경

채모는 형주 (현재의 후베이성후난성을 포함) 남군 양양 (襄陽|양양중국어)의 명문가인 채씨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채풍(蔡諷|채풍중국어)이었다. 채모의 고모는 후한의 태위 장온에게, 큰누나는 황승언에게, 작은누나는 유표의 후처로 각각 시집을 갔다.[1] 또한 채모의 조카딸은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채씨 가문의 세력은 더욱 커졌으며, 채모는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2. 2. 유표와의 관계

채모는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동향인 괴월과 함께 군사로서 형주자사 유표를 섬겼다.[2] 채모의 고모는 후한의 태위 장온에게, 큰누나는 황승언에게, 작은누나는 유표의 후처로 각각 시집을 갔다. 또한 채모의 조카딸은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채씨 가문의 세력이 더욱 커졌으며,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에 인용된 《위진세어(魏晉世語)》에 따르면, 괴월과 함께 유비의 목숨을 노렸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유표 사후, 채모는 친족 장윤과 공모하여 유종의 배다른 형 유기와 그를 지지하는 유비를 쫓아내고 유종이 뒤를 잇게 하였다.

2. 3. 유종 옹립과 조조 투항

채모는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유표를 섬겨 괴월과 함께 군사로 활동했다.[2] 조조와는 오랜 친분이 있었다. 채모의 가문은 형주 지역의 명문가로, 고모는 후한의 태위 장온에게, 큰누나는 황승언에게, 작은누나는 유표의 후처로 각각 시집갔다. 또한 채모의 조카딸은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시집가면서 세력이 더욱 커져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1]

유표 사후, 채모는 친족 장윤과 공모하여 유종의 배다른 형 유기와 그를 지지하는 유비를 쫓아내고 유종을 후계자로 옹립했다. 208년 조조가 침략해 오자 유종은 항복했고, 채모는 조조의 밑으로 들어갔다.[1]

채모는 조조 휘하에서 종사중랑, 사마, 장수교위를 역임하고 한양정후에 봉해졌다.[1] 조조와 오랜 친분이 있었기에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경멸했다.[1]

2. 3. 1. 유비와의 관계 (별도 하위 항목)

채모는 유표가 형주에 부임할 때 괴월 등과 함께 모의에 참여했고, 조카가 유종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1] 유표가 형주에 기반을 잡은 것은 채모의 공이 컸다고 한다.[1]

촉서 「선주전(先主傳)」 주석에 인용된 『위진세어』에는 괴월과 함께 유비를 암살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동진손성이 비판했듯이 진위는 불분명하다.[1]

채모는 유표의 차남 유종과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장남 유기를 멀리하고 유종의 작은 선행은 보고하고 큰 악행은 숨겼다.[1] 채씨, 채모, 장윤의 공작으로 유기는 강하태수로 쫓겨났다.[1] 유표 사후, 채모는 장윤과 공모하여 유종을 후계자로 만들고 유기와 유비를 몰아냈다.[1]

2. 4. 조조 휘하에서의 활동

채모는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일찍이 동향인 괴월과 함께 군사로서 형주자사 유표를 섬겼다.[2] 또한 조조(曹操)와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채모의 고모는 후한의 태위 장온에게, 큰누나는 황승언에게, 작은누나는 유표의 후처로 각각 시집을 갔다. 또한 채모의 조카딸은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세력이 더욱 커졌으며,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에 인용된 《위진세어(魏晉世語)》에 따르면, 괴월과 함께 유비의 목숨을 노렸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유표 사후, 친족 장윤과 공모하여 유종의 배다른 형 유기와 그를 지지하는 유비를 쫓아내어 유종이 뒤를 잇게 하였다. 조조가 침략하자 유종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고, 채모는 조조의 밑으로 갔다.

조조의 밑에서 채모는 종사중랑(從事中郞), 사마(司馬), 장수교위(長水校尉)를 역임하였으며, 한양정후(漢陽亭侯)에 봉해지는 등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채모를 경멸하였고, 오직 조조만 그를 벗으로서 대하였다.[1]

2. 5. 최후

채모의 후손들은 크게 번창하여 채주(蔡洲)라는 섬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311년에 도적 왕여(王如)의 침입을 받아 모두 목숨을 잃었고, 이로써 채모의 가문은 멸족당하였다.[1]

3. 삼국지연의에서의 채모

삼국지연의에서 채모는 유표의 외조카 장윤과 함께 조연 악당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형주 해군의 지휘관으로 해상전에 능숙하며, 유총을 옹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1]

유표 사후, 채모는 채부인, 장윤과 함께 유언을 거스르고 유총을 형주목으로 옹립한다. 이후 조조의 침략에 유총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조조는 이를 수용하여 채모와 장윤에게 해군 지휘를 맡긴다.[1]

적벽 대전 초기에 채모와 장윤은 조조의 해군을 이끌지만, 주유의 계략에 빠져 조조에게 처형당한다.[1]

3. 1. 다른 작품에서의 묘사

사실(史實)과 마찬가지로 유비유기채부인과 같이 음해하며 유표가 죽은 후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나온다. 건안(建安) 13년(208년) 조조가 손권(孫權)을 정벌할 때 수군 도독으로서 지휘를 맡게 되었을 때 주유(周瑜)의 이간책에 넘어간 장간(蔣幹)의 보고로 장윤과 함께 처형당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1]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채모는 유표의 외조카 장윤()과 함께 일종의 조연 악당으로 등장한다. 둘 다 형주 해군의 지휘관으로 복무하여 해상전에 매우 능숙하고 경험이 풍부하다고 한다. 소설에서 채모는 또한 유표의 차남 유총의 외삼촌이기도 한데, 이는 유총의 어머니가 채부인 (채모의 여동생)이기 때문이다. 208년, 유표가 사망한 후 채모, 채부인, 장윤은 그의 유언에 반하여 유총을 형주의 새로운 주(州) 목(牧)으로 옹립하려 한다. 그해 말, 채모는 유총에게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형주를 침략한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한다. 조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채모와 장윤이 해군을 계속 지휘하도록 허락한다.

208년 겨울, 적벽 대전 초기에 채모와 장윤은 주유가 이끄는 손권의 해군에 맞서 조조의 해군을 이끈다. 초기 교전에서 패배한 후 채모와 장윤은 조조에게 모든 전함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안정성을 높이고 강에서 항해할 때 배의 흔들림으로 인해 군인들이 멀미할 가능성을 줄일 것을 제안한다. 주유는 이 소식을 듣고 장간을 속여 채모와 장윤이 조조를 배신하고 손권 측으로 투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계략을 사용한다. 장간은 채모와 장윤의 "반역" 증거로 위조된 서신을 가지고 조조에게 돌아간다. 조조는 속임수에 넘어가 채모와 장윤에게 사형을 명령한다. 조조는 나중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같은 유표(劉表)의 부하로 등장한다. 유비를 방해하는 악역으로 묘사되어, 누이동생과 함께 공모하여 유총(劉琮)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유기(劉琦)를 암살하려 획책하거나, 나라를 빼앗으려는 유비의 암살을 꾀하여 실행하지만, 이지의 도움과 유비가 손에 넣은 적로에 의해 미수에 그친다. 또한, 작중에서는 가공의 아우인 채훈, 같은 가공의 종제인 채화·채중이 등장한다.

유표가 죽기 직전에 유기를 후계자로 지명하지만, 유총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유언을 위조하여 유총이 후계자가 된다. 그와 거의 동시기에, 조조(曹操)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 오자, 항복의 사자를 보낸다. 그 후, 유비가 민중을 이끌고 상양성(襄陽城)에 구원을 요청하며 나타났지만, 이미 조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유비의 군세를 습격했다. 이 때는, 이에 반발한 위연이 상양성 내에서 모반을 일으켜 성내를 혼란시켰기 때문에, 유비를 추격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조조가 오의 손권을 공격할 때, 수군 지휘에 능숙하다는 이유로 수군 도독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채모를 두려워한 주유의 이간책에 빠진 장간의 보고로, 주유에게 내통하고 있다는 억울한 의혹을 받게 되어, 조조에 의해 장윤과 함께 처형당한다. 순유로부터 "충의의 마음은 조금도 없고, 자신에게 이로운 자에게 아첨할 뿐"이라고 후대에 의문을 받았으며, 조조로부터도 쓸모없게 되면 처단하겠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만화 『삼국지』나 『인형극 삼국지』에서는, 유종의 후계를 실현하기 위해 끈질기게 유비의 제거를 꾀하고 있다. 또한 흉마 적로의 에피소드 등이 이와 관련되어 등장한다. 특히 요코야마판에서는 한 권 전체를 사용하여 이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으며, 서서의 등장 등과 얽혀 전반부의 고비 중 하나가 되고 있다.

4. 평가

채모는 형주 지역의 유력한 호족 출신으로 젊은 시절 조조와 친분이 있었다.[1] 유표가 형주에 부임할 때 괴월 등과 함께 모의에 참여했고, 유표가 형주에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공을 세웠다.[2] 호탕한 성격을 지녔으며, 많은 재산과 첩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2] 조조가 형주를 점령한 후에는 조조를 섬기며 고위 관직을 역임했고, 한양정후에 봉해지기도 했다.

한편, 『위진세어』에서는 괴월과 함께 유비를 암살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손성이 비판했듯이 진위는 불분명하다.

4. 1. 부정적 평가

채모는 유표의 차남 유종과의 인척 관계를 이용하여 유종의 작은 선행은 보고하고 큰 악행은 은폐하며 장남 유기를 멀리했다. 안에서는 채씨(蔡氏), 밖에서는 채모와 유표의 조카인 장윤이 이러한 공작을 계속했기 때문에 유기는 점차 소외되어 강하태수(江夏太守)로 쫓겨났다. 유표가 죽은 후에는 장윤과 공모하여 유종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유기와 그의 지지자인 유비를 몰아내고 유종의 후계를 실현시켰다.

조비는 채모를 오광, 장장, 심배, 곽도, 장윤 등과 함께 아첨하는 신하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그의 소행을 개탄했다.

5. 친족 관계

채모의 고모는 후한 태위 장온에게 시집갔고, 큰누나는 황승언에게, 작은누나는 유표의 후처로 각각 시집을 갔다.[1] 또한 채모의 조카딸은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채씨 가문의 세력은 더욱 커졌으며, 채모는 유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참조

[1] 서적 양양기구기(襄陽耆舊記)
[2] 서적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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