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저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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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챌린저 탐사는 1872년부터 1876년까지 진행된 최초의 대규모 해양 탐사로, 해양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챌린저호는 심해 탐사를 위해 개조되었으며, 다양한 장비와 과학자들이 탑승하여 전 세계 해양을 탐사했다. 탐사대는 68,890해리(127,580km)를 항해하며 492번의 수심 측정, 133번의 해저 준설, 151번의 개방 해역 트롤 어업, 263번의 연속 수온 관측을 수행했고, 약 4,700종의 새로운 해양 생물을 발견했다. 챌린저 탐사의 결과는 50권의 보고서로 발간되었으며, 챌린저 해연 발견과 해양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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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 탐사 | |
---|---|
탐험 정보 | |
탐험 명칭 | 챌린저 탐험 |
탐험 기간 | 1872년 12월 21일 ~ 1876년 5월 24일 |
탐험 목적 | 지구 심해 탐사 및 해양학 연구 |
탐험 범위 | 전 세계 해양 (주로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 남극해) |
탐험 선박 정보 | |
선박 이름 | HMS 챌린저 호 |
선박 종류 | 코르벳함 |
선박 개조 | 과학 연구용으로 개조 |
주요 인물 | |
탐험대장 | 조지 네어즈 (1872-1874), 프랭크 투르le (1874-1876) |
과학 책임자 | 찰스 와이빌 톰슨 |
탐험 참여 과학자 | 존 머레이 헨리 노티지 모즐리 루돌프 폰 빌레모에스-수홈 존 영 부캐넌 |
삽화가 | 존 제임스 와일드 |
탐험 경로 및 활동 | |
주요 항해 경로 | 영국 포츠머스 출발 대서양 남극해 인도양 태평양 희망봉 경유 영국 귀환 |
주요 활동 | 해저 지형 및 퇴적물 조사 해수 온도, 염분, 밀도 측정 해양 생물 채집 및 분류 해류 및 해류 순환 연구 |
탐험 결과 및 영향 | |
주요 발견 | 수천 종의 새로운 해양 생물 발견 심해저 퇴적물의 분포 및 구성 파악 해양 온도 및 밀도 변화에 대한 이해 증진 마리아나 해구의 존재 확인 |
영향 | 현대 해양학의 기초 확립 해양 생물학, 해양 지질학, 해양 화학 등 관련 분야 발전 기여 심해 생물에 대한 인식 제고 |
출판물 | "챌린저 보고서" (Report on the Scientific Results of the Voyage of H.M.S. Challenger) - 50권 분량의 학술 보고서 |
기타 정보 | |
관련 항목 | 해양 탐험 해양학 심해 생물 챌린저 해연 |
기념 | 챌린저 우주왕복선 챌린저 해저 분지 |
2. 준비 (Preparations)
챌린저호는 깊은 바다를 탐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대적인 준비 과정을 거쳤다. 기존의 군함 시설 일부를 제거하고 탐사에 필요한 실험실과 장비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으며, 다양한 과학 탐사 장비와 물품을 실었다.[9][6] 특히 해양 탐사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일부 장비는 이 탐사를 위해 특별히 발명되거나 개조되기도 했다.[7]
2. 1. 선박 개조
깊은 심해를 탐사하기 위해, 챌린저호는 대대적인 개조를 거쳤다.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17문의 함포 중 15문을 제거하고 원재와 돛대를 줄여 선내 공간을 확보했다. 확보된 공간에는 실험실, 추가 선실, 그리고 특별한 준설 플랫폼이 설치되었다.[9]탐사 기간 동안 챌린저호는 주로 돛의 힘을 이용하여 항해했다. 증기 기관은 준설기를 끌거나, 수심 측정 중 위치를 유지하거나, 항구에 들어가고 나올 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9]
선박에는 다양한 탐사 장비가 실렸다. 여기에는 표본을 담을 용기와 보존용 알코올, 현미경, 화학 실험 장치, 트롤 어선과 준설기, 온도계, 기압계, 수심 측정병, 수심 측정용 납추, 해저 퇴적물 수집 장치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장비를 바닷속 깊이 내려보내기 위해 막대한 길이의 로프가 준비되었는데, 수심 측정용으로만 총 약 291.29km에 달하는 이탈리아산 삼 로프가 사용되었다.[6][29][7] 탐험의 특성상 일부 장비는 이번 탐사를 위해 새로 발명되거나 특별히 개조되기도 했다.[7]
2. 2. 장비 및 물품
깊은 바다를 탐사하기 위해 챌린저호는 대대적인 개조를 거쳤다. 17개의 주포 중 15개를 제거하고 원재를 없애 공간을 확보했으며, 이곳에 실험실, 추가 선실, 특별한 준설 플랫폼을 설치했다.[9] 탐사 기간 동안 주로 돛의 힘을 이용해 항해했으며, 증기 기관은 준설기를 끌거나 수심 측정 시 위치를 유지하고 항구를 드나들 때 보조적으로 사용되었다.[9]챌린저호에는 다양한 과학 장비와 물품이 실렸다. 여기에는 표본을 담을 병, 표본 보존용 알코올, 현미경, 화학 실험 도구, 트롤 어선과 준설선, 온도계, 기압계, 물 샘플 채취 병, 수심 측정용 납, 해저 퇴적물 채집 장치 등이 포함되었다.[6] 또한 장비를 바다 깊이 내리기 위해 엄청난 길이의 밧줄도 준비되었다.
탐사의 새로운 목적을 위해 일부 장비는 특별히 발명되거나 개조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수심 측정에는 약 291.29km(약 291km)에 달하는 이탈리아산 삼으로 만든 밧줄이 사용되었다.[7][29]
2. 3. 승무원 구성
(해당 섹션 제목에 대한 내용이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3. 탐사 (Expedition)
챌린저 탐사는 1872년 12월부터 1876년 5월까지 영국 해군 함선 HMS 챌린저호를 이용하여 전 세계 대양을 대상으로 수행된 대규모 해양학 탐사이다.[2] 이 탐사는 총 127580km (68,890 해리)에 달하는 지구 일주 항해를 통해 현대 해양학의 기초를 마련한 중요한 과학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2] 탐사 기간 동안 492회의 심해 수심 측정, 133회의 해저 준설, 151회의 개방 해역 트롤 어업, 263회의 연속 수온 관측 등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으며,[8][5] 이를 통해 해양 환경과 생물 다양성에 대한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었다. 특히, 약 4,700종에 달하는 새로운 해양 생물이 발견되는 등[8][5] 해양 과학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탐사에는 와일빌 톰슨, 존 머레이 등 저명한 과학자들과[3] 조지 네어스, 프랭크 투를 톰슨 등의 해군 인력이 참여했으며,[3] 이들의 활동과 탐사 결과는 이후 방대한 보고서로 출판되어 해양 연구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3. 1. 탐사 경로
챌린저호는 총 68,890해리 (127580km)를 항해하며 지구를 일주하는 탐사를 진행했다.[2] 이 기간 동안 492번의 심해 음향 측심, 133번의 해저 준설, 151번의 개방 해역 트롤 어업, 263번의 일련의 수온 관측이 이루어졌다.[8][5] 탐사 경로는 다음과 같다.
탐험의 첫 번째 구간은 1872년 12월 포츠머스에서 시작하여 1873년 1월 리스본을 거쳐 지브롤터로 향했다. 다음 기항지는 마데이라와 카나리아 제도(모두 1873년 2월)였다. 1873년 2월부터 7월까지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버진 아일랜드로 대서양을 횡단한 후 북쪽으로 버뮤다로 향했으며, 아조레스를 거쳐 마데이라로 돌아온 후 남쪽의 카보베르데로 이동했다. 이 기간 중, 1873년 4월과 5월에는 버뮤다 북쪽에서 핼리팩스까지 왕복 항해하며 걸프 스트림을 두 번 건넜다.[10]
1873년 8월 카보베르데를 떠난 후, 탐험대는 처음에는 남동쪽으로 항해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세인트폴스 암초에 도달했다. 1873년 9월에는 적도를 지나 남쪽으로 페르난두 지 노로냐까지 갔으며, 같은 달에 브라질 바이아(현재의 사우바도르)에 도착했다. 1873년 9월부터 10월까지는 바이아에서 희망봉까지 대서양을 횡단하며 트리스탄다쿠냐에 기항했다.[10]

1873년 12월부터 1874년 2월까지는 희망봉에서 남위 60도선까지 남동쪽으로 항해했다. 이 시기에 방문한 섬들은 프린스에드워드 제도, 크로제 제도, 케르겔렌 제도, 허드 섬이었다. 1874년 2월에는 남극권 부근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이동하며 빙산, 유빙, 고래를 관찰했다. 그 후 1874년 3월에는 북동쪽으로 항로를 변경하여 빙하 지대를 벗어났고, 탐험대는 그 달 말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다. 멜버른에서 시드니까지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는 여정은 1874년 4월에 이루어졌으며, 윌슨곶과 케이프하우를 지났다.[10]

1874년 6월 항해가 재개되었을 때, 항로는 시드니에서 뉴질랜드의 웰링턴까지 동쪽으로 갔고, 이어서 통가, 피지를 거쳐 태평양으로 크게 북쪽으로 돌아 8월 말까지 호주 케이프요크로 되돌아갔다. 배는 6월 말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7월 초에 떠났다. 웰링턴에 도착하기 전 뒤르빌 섬의 하디 항과 퀸 샬럿 사운드에 잠시 들렀으며, 쿡 해협을 지나 웰링턴에 도착했다.

웰링턴에서 통가로 가는 노선은 뉴질랜드 북섬의 동쪽 해안을 따라 북동쪽 태평양으로 나아가 케르마데크 제도를 통과하여 통가 열도의 주요 섬인 통가타푸 섬(당시 친선 제도)으로 향했다. 통가 북서쪽의 피지 제도 주변 해역은 1874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조사되었다. 이후 배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8월 말 그레이트배리어리프 외곽의 레인 섬에 도달한 후, 호주 케이프요크에 도착했다.[10]
이후 1874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 간 탐험대는 케이프요크에서 중국과 홍콩(당시 영국령 홍콩)으로 항해하며 여러 섬들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아라푸라해를 북서쪽으로 지나갔으며, 북동쪽으로는 뉴기니, 남서쪽으로는 호주 본토가 있었다. 아루 제도와 카이 제도를 방문한 후, 반다해를 건너 반다 제도에 기항하고 1874년 10월 암보이나(암본 섬)에 도착한 후 테르나테 섬으로 계속 갔다. 당시 이 섬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였으며, 현재는 인도네시아에 속한다. 테르나테에서 필리핀을 향해 북서쪽으로 가서 셀레베스(현재 술라웨시) 동쪽을 지나 술라웨시해로 향했다. 탐험대는 민다나오섬의 삼보앙가와 파나이섬의 일로일로를 거쳐 루손섬의 마닐라만과 항구로 가는 군도 내부를 항해했다. 1874년 11월에는 마닐라에서 홍콩까지 북서쪽으로 횡단하였다.[10]
홍콩에서 몇 주 후인 1875년 1월 초, 뉴기니로 향하는 남동쪽 항로를 따라 다시 출발했다. 첫 기항지는 마닐라였으며, 이번에는 세부 섬을 경유하는 다른 경로로 필리핀 내부를 통과하여 삼보앙가로 향했다. 삼보앙가에서 배는 1875년 2월 초 민다나오 남쪽을 지나 내륙 항로를 벗어났다.
챌린저호는 동쪽으로 항해하다가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뉴기니 북쪽 해안의 훔볼트 만(현재 요스 수다르소 만)에 상륙했다. 1875년 3월, 탐험대는 뉴기니 북동쪽의 애드미럴티 제도에 도착했다. 이어서 항해는 북쪽의 넓은 바다를 건너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 서쪽을 지나 1875년 4월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도달하는 긴 여정이었다.[10]

챌린저호는 1875년 6월 중순 일본을 출발해 태평양을 건너 동쪽으로 샌드위치 제도(하와이) 북쪽 지점까지 간 뒤 남쪽으로 방향을 틀며 7월 말 하와이 오아후섬의 호놀룰루에 상륙했다. 몇 주 후인 8월 중순, 배는 남동쪽으로 출발하여 하와이 섬의 힐로 만에 정박하고, 남쪽으로 계속 나아가 9월 중순에 타히티에 도착했다.
탐험대는 10월 초 타히티를 떠나 투부아이 제도의 서쪽과 남쪽으로 항해한 다음 남동쪽으로 향하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남아메리카 해안으로 향했다. 1875년 11월 중순 칠레 앞바다의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에 기항했으며, 며칠 후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에 도착했다. 다음 여정은 다음 달에 시작되어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를 지나 다시 태평양으로 남서쪽으로 향한 다음 남동쪽으로 돌아서 남아메리카로 돌아가 1875년 12월 31일 페나스만의 오트웨이 항구에 도착했다.[10]
1876년 1월의 대부분은 남아메리카 남단을 항해하며 파타고니아 군도, 마젤란 해협, 티에라델푸에고의 많은 만과 섬을 측량하고 조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 방문한 장소로는 웰링턴섬 인근의 헤일 코브, 그레이 하버, 포트 그래플러, 톰 베이, 하노버섬 근처의 푸에르타 부에노, 퀸 애들레이드 군도 근처의 이스무스 베이, 산타 이네스섬 근처의 포트 추루카 등이 있다.
대서양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 기항지는 포트 파민, 샌디 포인트, 엘리자베스 섬이었다. 챌린저호는 1월 말에 포클랜드 제도에 도착하여 포트 스탠리에 기항한 다음 북쪽으로 계속해서 가다 1876년 2월 중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도착했다. 배는 2월 말 몬테비데오를 떠나 동쪽과 북쪽으로 항해하여 1876년 3월 말 어센션섬에 도착했다.
4월 초순에서 중순까지는 어센션 섬에서 카보베르데까지 항해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1876년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에 취해진 항로는 북쪽으로 서쪽으로 순환하여 대서양 중부를 지나, 결국 동쪽으로 방향을 틀고 5월 말 스페인 비고에 닿았다. 마지막 항해 단계는 비고에서 북동쪽으로 배를 이동시켜 비스케이만을 둘러 5월 말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것이었다.[10] 챌린저호는 1876년 5월 24일 햄프셔주 스핏헤드로 귀환하여 해상에서의 1,250여 일 중 713일을 보냈다.[2]

3. 2. 주요 사건 및 인물
챌린저 탐사는 해양학 역사상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대규모 과학 탐사였다. 이 탐사에는 여러 과학자와 해군 장교, 선원들이 참여했으며, 긴 항해 동안 다양한 사건을 겪었다.
주요 참여 인물
- 과학 연구진: 탐사의 과학적 임무는 와일빌 톰슨, 존 머레이, 존 영 부캐넌, 헨리 노티지 모즐리, 루돌프 폰 빌레모스-숨이 주도했다. 이들은 해양 생물학, 화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수행했다.[3] 루돌프 폰 빌레모스-숨은 탐사 도중인 1875년 타히티로 항해하던 중 사망하여 바다에 묻혔다.[3]
- 기타 전문가: 프랭크 에버스 베드는 검시관 역할을 수행했으며, 존 제임스 와일드는 탐사의 공식 예술가로 활동하며 탐사 과정과 발견물들을 기록했다.[3]
- 해군 장교: 초기 탐사대는 조지 네어스 선장이 이끌었다. 그는 1874년 12월 홍콩에서 영국 북극 탐험에 참여하기 위해 펠햄 올드리치와 함께 하선했다.[3] 후임 선장으로는 프랭크 투를 톰슨이 임명되었다.[3] 탐사 기간 전체에 걸쳐 가장 선임 장교이자 부사령관은 존 매클리어 사령관이었다.[3] 토마스 헨리 티자드는 민간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수로 관측을 수행했고, 훗날 탐사 보고서 작성에 기여하여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3] 스코틀랜드 식물학자 존 허튼 발푸어의 아들인 앤드루 프란시스 발푸어와 조지 그랜빌 캠벨 경도 장교로 참여했으나, 승진 후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하선했다.[3]
- 승무원: 탐사 시작 시 승무원은 21명의 장교와 약 216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9] 그러나 3년 반에 걸친 긴 항해 동안 사망, 탈영, 질병으로 인한 하선, 계획된 인원 교체 등으로 인해 탐사가 끝날 무렵에는 144명으로 인원이 줄었다.[9]
주요 사건 및 활동챌린저호는 1872년 12월 포츠머스를 출발하여 1876년 5월 24일 햄프셔의 스핏헤드로 돌아오기까지 총 127580km (68,890 해리)에 달하는 거리를 항해했다.[2] 총 1,250일의 탐사 기간 중 713일을 해상에서 보냈다.[2]
탐사대는 항해 중 방대한 양의 과학 데이터를 수집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492회의 심해 수심 측정, 133회의 해저 준설(바닥 긁기), 151회의 개방 해역 트롤 어업(그물질), 263회의 연속 수온 관측 등이 이루어졌다.[8][5] 이러한 활동을 통해 약 4,700종에 달하는 새로운 해양 생물이 발견되어 해양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8][5]
탐사 경로는 전 세계의 대양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여정이었다. 주요 경로는 다음과 같다.
- 대서양 횡단 및 탐사 (1873): 리스본, 지브롤터, 마데이라,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대서양을 서쪽으로 건너 버진 아일랜드, 버뮤다에 도달했다. 이후 핼리팩스까지 북상했다가 다시 남하하여 아조레스, 카보베르데를 방문했다. 남대서양으로 이동하여 상파울루 바위, 페르난두 데 노로냐, 브라질 바이아, 트리스탄다쿠냐를 거쳐 희망봉에 도착했다.[10]
- 남극해 및 인도양 횡단 (1873-1874): 희망봉을 떠나 남동쪽으로 항해하며 프린스 에드워드 제도, 크로제 제도, 케르겔렌 제도, 허드 섬을 방문하고 남극권 부근까지 남하했다. 빙산과 유빙을 관찰한 후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1874년 3월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다. 이후 시드니로 이동했다.[10]
- 태평양 탐사 (1874-1875): 시드니를 출발하여 뉴질랜드 웰링턴, 통가, 피지를 거쳐 다시 호주 케이프요크로 돌아왔다.[10] 이후 아라푸라 해를 건너 아루 제도, 카이 제도, 반다 제도, 암보이나, 테르나테 섬 등 동남아시아 해양의 여러 섬을 방문했다. 필리핀 군도 내부를 항해하며 삼보앙가, 일로일로, 마닐라를 거쳐 1874년 11월 홍콩에 도착했다.[10] 홍콩에서 선장 교체가 이루어진 후, 1875년 다시 남동쪽으로 항로를 잡아 필리핀(세부, 삼보앙가)을 거쳐 뉴기니 북부 해안(훔볼트 만), 아드미럴티 제도를 방문했다. 이후 북쪽으로 항해하여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 서쪽을 지나 1875년 4월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10]
4. 과학적 목표 (Scientific objectives)
왕립 학회는 챌린저 탐사의 과학적 목표를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11][5]
- '''대양 분지의 심해 물리적 상태 조사''': 남극 대륙 부근까지 포함하여 심해의 깊이, 온도, 순환, 비중, 빛의 투과 등 물리적 특성을 파악한다.
- '''해수 화학 성분 분석''': 표면에서 바닥까지 다양한 깊이의 해수에 포함된 화학적 조성, 용해된 유기물질, 부유 입자 등을 분석한다.
- '''심해 퇴적물 연구''': 심해저 퇴적물의 물리적, 화학적 특성을 파악하고 그 기원을 밝힌다.
- '''심해 생물 분포 조사''': 다양한 수심과 심해저에 서식하는 유기 생물의 종류와 분포를 조사한다.
4. 1. 심해의 물리적 상태 조사
왕립 학회는 챌린저 탐사의 주요 과학 목표 중 하나로 대양 분지의 심해 물리적 상태 조사를 명시했다. 이는 남극 대륙 부근까지 포함하여 심해의 깊이, 온도, 순환, 비중, 빛의 투과 등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1][5] 이러한 물리적 측정은 칼펜터가 제기한 온도 분포와 전 지구적 해양 순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가설을 검증하고, 주요 해양 혼합 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는 HMS 라이트닝 (1823)과 HMS 포큐파인 (1844)에서 수행된 예비 탐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5] 당시 칼펜터의 설명은 미국의 저명한 해양학자 매튜 폰테인 모리의 주장과 차이가 있어, 이 연구 결과는 칼펜터에게 매우 중요했다.[15] 또한, 1860년대와 1870년대에 활발히 설치되던 해저 전신 케이블의 효율적인 설치와 운영을 위해 해저의 물리적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였다.[5]
탐사대는 총 360개의 정거장에서 해저 깊이와 다양한 깊이에서의 온도를 측정하고, 기상 및 해수면 상태를 관찰했다.[5] 깊이를 측정하기 위해 선원들은 무게추를 단 줄을 해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줄에는 25파스톰(46m) 간격으로 깃발이 표시되어 있어, 측정치의 정확도는 이 간격에 근접하는 수준이었다. 때때로 무게추에 작은 용기를 부착하여 해저 퇴적물 샘플을 채취하기도 했다.[5]
온도 측정에는 주로 밀러-카셀라 온도계가 사용되었다. 이 온도계는 곡선형 수은관 안에 두 개의 표시자가 있어 통과한 지점의 최고 및 최저 온도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15] 여러 개의 온도계를 각기 다른 깊이로 내려보내 기록했지만, 이 방식은 해수면 근처의 물이 항상 아래쪽 물보다 따뜻하다는 가정에 기반한 한계가 있었다. 항해 도중, 탐사대는 특정 깊이의 온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역전 온도계를 시험했으며, 이 온도계는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널리 사용되었다.[11] 챌린저 호 귀환 후, 찰스 와이빌 톰슨은 저명한 물리학자 피터 테이트에게 심해의 높은 압력이 온도계 측정값에 미치는 오차 평가를 요청했다. 테이트는 이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액체의 압축성에 대한 더 근본적인 연구로 이어져 유명한 테이트 방정식을 정립하게 되었다.[16]
탐험 중 수집된 모든 물리적 측정 결과는 탐험대의 비서 겸 예술가였던 존 제임스 와일드가 취리히 대학교에서 작성한 박사 학위 논문에 종합되었다.[12]
4. 2. 해수 화학 성분 분석
왕립 학회는 챌린저 탐사의 주요 과학 목표 중 하나로, 표면에서 바닥까지 다양한 깊이의 해수에 대한 화학적 조성 분석을 설정했다. 이는 해수에 녹아 있는 유기물질과 떠다니는 입자(부유 입자)의 종류와 양을 파악하는 것을 포함했다.[11][5] 탐사 이후 글래스고 대학교의 화학자 윌리엄 디트마(William Dittmar)는 수집된 해수 샘플을 분석하여 해수의 주요 화학적 조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또한, 탐사대의 화학자였던 존 영 뷰캐넌(John Young Buchanan)은 알코올로 생물 표본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발견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저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심해저에서 발견된 젤리 같은 물질을 원시 생명체, 즉 생명과 무생물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일 수 있는 바티비우스 헤켈리라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뷰캐넌은 이것이 생명체가 아니라 해수 샘플에 알코올을 첨가했을 때 발생하는 황산 칼슘의 화학적 침전물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여, 헉슬리의 주장을 반박했다.[21] 이는 당시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4. 3. 심해 퇴적물 연구
왕립 학회가 밝힌 챌린저 탐사의 과학적 목표 중 하나는 심해 퇴적물의 물리적 및 화학적 특성을 파악하고, 이러한 퇴적물의 근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11][5] 탐사대는 해저 깊이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무게추(싱커)에 작은 용기를 부착하여 해저 바닥의 퇴적물 샘플을 수집했다.[5] 탐사 후 수집된 방대한 자료와 샘플을 바탕으로, 존 머레이와 알퐁스 프랑수아 르나르는 해양 퇴적물 연구를 진행하여 그 분포를 나타내는 지도를 제작했다.4. 4. 심해 생물 분포 조사
왕립 학회가 밝힌 탐사의 주요 과학적 목표 중 하나는 다양한 깊이와 심해저에 서식하는 유기 생물의 분포를 조사하는 것이었다.[11][5] 탐사 결과, 약 4,700종에 달하는 새로운 해양 생물이 발견되는 성과를 거두었다.[8][5]심해 생물 표본을 채집하기 위해 다양한 장비가 동원되었다. 대표적으로 준설기(dredge)와 트롤(trawl)이 활용되었다.[13]
- 준설기: 나무 판자에 금속 그물을 부착한 형태로, 해저 바닥을 끌면서 이동하도록 설계되었다. 판자에 달린 걸레 모양의 솔이 해저면을 훑으면서 작은 생물들을 그물 안으로 유도하는 방식이었다.[13]
- 트롤: 배 뒤편에서 끌면서 다양한 수심에 사는 생물들을 포획하는 데 사용된 커다란 금속 그물이다.[13]
준설기나 트롤을 이용해 표본을 수거한 후, 선원들은 채집된 생물들을 분류하고 세척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후 연구를 위해 표본들을 소금물이나 알코올 용액에 넣어 보존하였다.[14]
탐사를 주도한 와일빌 톰슨을 포함하여 당시 진화론을 지지하던 많은 과학자들은 심해가 멸종된 줄 알았던 고대 생물, 즉 '살아있는 화석'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일 것으로 기대했다.[21] 그들은 지속적으로 낮은 온도와 어둠, 그리고 외부 충격이 거의 없는 심해의 안정적인 환경이 생물의 진화 속도를 늦추거나 심지어 멈추게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 역시 심해에서 고대 생물군의 유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21] 하지만 탐사 결과, 이전에 멸종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일부 생물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살아있는 화석'이나 진화 과정의 '미싱 링크'라고 할 만한 획기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표본을 알코올로 보존하는 과정에서, 헉슬리가 무생물과 생물의 연결고리라고 주장했던 바티비우스 헤켈리가 실제로는 생명체가 아닌 화학적 침전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21] 이는 당시 진화론 지지자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5. 챌린저 해연 (Challenger Deep)
챌린저 호 탐사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저 지점인 챌린저 해연(eng)이다. 1875년 3월 23일, 탐사대는 괌과 팔라우 사이 남서 태평양의 마리아나 해구 남쪽 끝에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깊이인 8184m (4,475 패덤)를 측정했다.[5][17] 이후 현대 기술로 측정한 결과, 이 지역의 최대 깊이는 약 10994m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8] 이 심해 지형은 해양의 깊이에 대한 인류의 지식을 크게 확장시킨 중요한 발견이었으며, 탐사선 챌린저 호와 그 후계선인 HMS ''챌린저'' II의 업적을 기려 '챌린저 해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9]
5. 1. 챌린저 해연 발견
1875년 3월 23일, 챌린저 호는 괌과 팔라우 사이 남서태평양의 표본 채취 지점 225번에서 4,475 패덤 (8184m) 깊이의 수심을 기록했다.[5] 이 측정값은 두 번째 측심을 통해 확인되었다.[17] 현대 장비를 이용한 후속 탐사를 통해 이 지역이 마리아나 해구의 남쪽 끝이며, 해저에서 가장 깊은 곳 중 하나임이 밝혀졌다.챌린저 호의 이러한 발견은 해양의 깊이에 대한 지식을 크게 넓힌 중요한 성과였다. 이후 챌린저 호의 최초 측심 지점 근처에서 10994m (6,012 패덤)의 더 깊은 수심이 측정되었다.[18] 이 깊은 해저는 탐사선 챌린저 호와, 1951년 인근에서 5,944 패덤의 깊이를 측정한 후계선 HMS 챌린저 II를 기념하여 챌린저 해연으로 명명되었다.[19]
5. 2. 챌린저 해연의 의의
1875년 3월 23일, 챌린저호는 괌과 팔라우 사이 남서태평양의 표본 채취 지점 225번에서 8184m(4475 패덤)[5] 깊은 수심을 측정했고, 이는 추가 측정을 통해 확인되었다.[17] 현대 장비를 이용한 후속 탐사 결과, 이 지역은 마리아나 해구의 남쪽 끝이며, 알려진 해저 중 가장 깊은 곳 중 하나임이 밝혀졌다.이후 챌린저호의 최초 측정 지점 근처에서 10994m(6012 패덤)[18]의 더 깊은 수심이 측정되었다. 챌린저호의 이 심해 발견은 해양학 지식을 크게 확장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이 해저는 탐사선 챌린저호의 이름을 따 챌린저 해연으로 명명되었다.
1951년, 후계 탐사선인 HMS ''챌린저'' II호는 인근 해역에서 5944 패덤의 깊이를 측정하며 챌린저 해연의 존재를 재확인하고 그 명칭을 공고히 했다.[19] HMS ''챌린저'' II호의 수석 과학자였던 토마스 개스켈은 당시 측정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19세기 ''챌린저''호가 가장 깊은 수심을 찾았던 지점에서 50마일 이내였고 [...] ''챌린저''라는 이름을 가진 배가 그 위대한 선구적인 해양학 탐사의 성과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20]
6. 유산 (Legacy)
챌린저 탐사 이전의 해양학은 주로 추측에 의존했으나,[21] 이 탐사는 최초의 진정한 해양 탐사로서 학문 분야 전체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9] 탐사를 통해 얻어진 방대한 연구 결과와 표본들은 후속 연구의 토대가 되었으며,[21][22][24] 이 과정에서 수많은 새로운 해양 생물이 발견되고 기록되었다.[25] 챌린저 탐사의 중요성은 이후 해양 과학 챌린저 학회, 해양 지질 조사선 글로마 챌린저호, 그리고 챌린저 우주왕복선 등 다양한 대상에 "챌린저"라는 이름이 사용됨으로써 기려지고 있다.[26] 보고서와 표본들은 런던 자연사 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23]
6. 1. 과학적 유산
챌린저 탐사의 연구 결과는 탐사가 끝난 후 19년이 지난 1895년까지 에든버러에 설립된 챌린저 사무소에서 계속 발표되었다. 보고서는 총 5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29,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21] 챌린저 호가 가져온 샘플들은 분석을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에게 보내졌으며, 이로 인해 보고서 완성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22] 보고서와 샘플들은 영국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23] 보고서는 온라인으로도 제공된다. 샘플 중 다수는 최초로 발견된 것들이며, 오늘날까지도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24]고생물학자 가브리엘 와튼 리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탐사 자료 분류 작업에 참여했다. 자연사 박물관의 파충류학자인 조지 앨버트 불렌저는 도마뱀의 한 종에 챌린저호의 이름을 따 Saproscincus challengeri라고 명명했다.[25]
챌린저 탐사 이전의 해양학은 주로 추측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21] 최초의 본격적인 해양 탐사선으로서, 챌린저 탐사는 해양학이라는 학문 분야 전체의 기초를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9] "챌린저"라는 이름은 이후 해양 과학 챌린저 학회, 해양 지질 조사선 Glomar Challenger, 그리고 우주왕복선 챌린저 등 다양한 대상에 사용되며 그 중요성을 기리고 있다.[26]
6. 2. 사회적, 역사적 영향
챌린저 탐사 이전의 해양학은 주로 추측에 의존했다.[21] 챌린저 탐사는 최초의 진정한 해양 탐사선으로서 항해하며, 해양학이라는 학문 및 연구 분야 전체의 기반을 마련했다.[9]탐사의 연구 결과는 탐사가 끝난 지 19년 후인 1895년까지 계속 발표되었으며, 에든버러에 설립된 챌린저 사무소에서 출판 작업을 진행했다. 이 보고서는 총 50권, 29,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21] 챌린저호가 가져온 표본들은 분석을 위해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배포되었는데, 이로 인해 보고서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크게 늘어났다.[22] 보고서와 표본들은 현재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고서는 온라인으로도 제공된다. 일부 표본들은 2023년 1월부터 7월까지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23] 챌린저 탐사를 통해 수집된 표본 중 다수는 과학계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들이며, 오늘날까지도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24]
고생물학자 가브리엘 와튼 리(Gabriel Warton Lee)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탐사에서 가져온 방대한 자료를 분류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파충류학자였던 조지 앨버트 불렌저(George Albert Boulenger)는 도마뱀의 한 종에 챌린저호의 이름을 기려 ''Saproscincus challengeri''라는 학명을 붙였다.[25]
"챌린저"라는 이름은 이후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며 탐사의 중요성을 기리고 있다. 대표적으로 해양 과학 챌린저 학회(Challenger Society for Marine Science), 해양 지질 조사선 글로마 챌린저, 그리고 챌린저 우주왕복선 등이 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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