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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 (19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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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승일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활동한 문예운동가로,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이다. 그는 극예술협회, 북풍회, 염군사 등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최초의 PD'로 불리며 연극, 라디오 드라마 분야에서 선구적인 활동을 했다. 소설가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동생 최승희의 무용가 데뷔에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 영화를 제작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으며, 해방 후 월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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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 (190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이름최승일
출생1901년
사망미상
직업작가, 방송인, 영화인
배우자마현경, 석금성
자녀최로사, 최호섭

2. 생애

최승일은 마현경, 석금성과 결혼했으며, 딸 최로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동아영화사 대표로서 안석영 감독의 친일 영화 《지원병》을 제작했다. 광복 후 최승희, 안막 부부와 함께 월북하여 4남매와 북한에서 거주했다. 한국 전쟁 중 딸 최로사는 전시 가요 〈샘물터에서〉 작사가로, 막내아들 최호섭은 북한 무용계에서 활동했다.[2]

2. 1. 초기 활동 (1920년대 ~ 1930년대)

최승희의 큰오빠로,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할 때부터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과는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문예운동가였다.

경성부에서 자라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니혼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0년 일본에서 결성된 극예술협회를 시작으로 좌익 유학생들이 조직한 북풍회에 참가하고, 박영희, 나도향 등과 함께 신청년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2년 사회주의 연극 단체인 염군사에 참여했으며, 염군사가 박영희의 파스큘라와 통합하여 결성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도 참가했다.

신흥극장을 중심으로 연극 운동을 하고,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면서 라디오 드라마를 연구하는 라디오 극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선구적인 문예 활동을 벌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PD”로 불린다.[1] 마현경은 경성방송국의 제1호 공채 아나운서였으며, 두 번째 부인 석금성은 신흥극장의 연출자와 배우로서 만나 결혼했다.

1924년 〈안해〉로 등단하여 서대문형무소를 배경으로 한 〈봉희(鳳姬)〉(1926) 등 소설 작품도 꾸준히 발표했다. 숙명고등여학교에 다니던 막내동생 최승희에게 무용을 권해 유명한 무용가가 되자 자서전을 대필해 출판하기도 했다.

2. 2.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부친최학송
첫째 부인마현경아나운서
둘째 부인석금성영화 배우
최로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인
여동생최승희무용가
제부안막사회주의 계열 문예운동가, 최승희의 남편
아들최호섭무용가[2]


2. 3. 친일 논란

최승희의 큰오빠로,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할 때부터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과는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문예운동가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동아영화사 대표로 있으면서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는 전쟁 영화 《지원병》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최승일의 카프 동료인 안석영이 감독을 맡아 찍은 친일 영화이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연극/영화 부문에 선정되었다.

2. 4. 월북 이후

최승희의 큰오빠로,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할 때부터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과는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문예운동가였다.[2]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최승희, 안막 부부와 마찬가지로 월북했다. 부인 석금성은 대한민국에 두고 4남매와 함께 북한으로 갔는데, 자녀들 중 맏딸 최로사는 한국 전쟁을 거치며 전시 가요인 〈샘물터에서〉 작사가로 유명해졌으나, 최승일의 이후 활동은 잘 알려진 바 없다. 막내아들 최호섭도 북한 무용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2]

참조

[1] 뉴스 미디어/국내 최초 PD는 최승일…부인은 첫 공채아나운서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997-03-28
[2] 저널 조선의 민족무용을 고수한 위대한 스승이자 무용가 - 인터뷰 https://web.archive.[...] 200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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