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최호 (북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최호는 3세기 중엽 북위의 한족 출신 관리로, 유학, 역사학, 서도, 천문학 등 다방면에 능통했다. 그는 명원제와 태무제 치세 동안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며 북위 조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450년 국사 편찬 과정에서 선비족 조상들의 부정적인 면모를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이 문제가 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에는 황실 비방, 황태자와의 갈등, 선비족에 대한 모욕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북조 시대의 시인 - 진숙보
    진숙보는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사치와 폭정, 안일한 대처로 나라를 멸망시킨 무능한 군주였으나 문학적 재능은 뛰어났다.
  • 남북조 시대의 시인 - 사영운
    사영운은 동진 시대의 명문가 출신 시인으로, 중국 산수시를 창시하고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반야경주》를 저술했으나, 유송 건국 후 작위 강등과 유배를 겪었다.
  • 북위의 사도 - 소종 (양나라)
    소종은 양 무제의 아들로, 북위로 망명하여 소찬으로 이름을 바꾸고 북제의 종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조낙주의 반란으로 사망 후 양나라에서 장례되었다.
  • 북위의 사도 - 장손숭
    장손숭은 대나라 남부대인 장손인의 아들로, 북위 건국에 기여하여 기주자사, 사도 등을 역임하며 내치에 공헌하고 태무제 옹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최호 (북위)
기본 정보
최호의 초상화
최호의 초상화
이름최호 (崔浩)
백연(伯淵)
생몰년도381년 ~ 450년
시대북위
관직
주요 관직비서감
시중
태상경
국사
가문
출신청하 최씨
기타
죄목국사 사건
처형 방법거열형 (거열)

2. 생애

최호는 3세기 중엽 5호 16국 시대 화북 지방에 건국된 북위한족 출신 관리였다. 그의 가문 청하 최씨북위 효문제 시기 선비족 8에 대응하는 한족 4성 중 하나로, 화북의 한족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사족 가문이었다. 최호의 아버지 최굉은 북위 초기 제도 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도무제와 명원제를 섬겼다.

최호는 경사(經史)에 정통했으며, 천문과 음양에도 밝았다.[1] 409년 명원제 즉위 당시에는 박사제주(博士祭酒)에 임명되어 명원제에게 경학 등을 가르쳤다.[1] 또한 천인상관설(天人相関説)에 따라 미래를 예언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었으나,[1] 423년 명원제가 붕어하자 반대 세력의 반발로 실각했다.

이후 구겸지와 협력하여 태무제에게 접근, 431년에는 한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인 사도에 임명되었다.[2] 태무제의 화북(華北) 통일을 전략적으로 도왔고, 오경(五經)에 해석을 붙인 오인원력(五寅元暦)을 정하기도 했다.

최호는 도교를 진흥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440년에는 태무제를 설득하여 도군 황제로 만들고, 446년에는 삼무일종의 법난의 시작이 된 불교 탄압을 주도했다.

429년부터 북위 국사 편찬 작업의 총책임을 맡았으나, 450년 북위 선비족 조상들의 부정적인 부분을 여과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른바 '''국사의 옥'''(国史の獄)사건으로[4], 청하 최씨뿐만 아니라, 범양 노씨, 태원 곽씨, 하동 류씨등 화북 한족 귀족 128명이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최호는 3세기 중엽 5호 16국 시대 화북 지방에 건국된 북위한족 출신 관리였다. 그의 가문인 청하 최씨북위 효문제 시기 선비족 8에 대응하는 한족 4성 중 하나로, 화북의 한족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사족 가문이었다. 최호의 아버지 최굉은 북위 초기 제도 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도무제와 명원제를 섬겼다.

최호는 청하군(清河郡) 동무성현(東武城県)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수나라, 당나라에 걸쳐 명문 귀족으로 여겨진 청하 최씨(清河崔氏)에 속한다. 그는 경사(經史)에 정통했으며, 천문과 음양에도 밝았다.[1] 어린 나이에 직랑(直郞)으로 임명되었고, 409년 명원제 즉위 당시에는 박사제주(博士祭酒)에 임명되어 명원제에게 경학 등을 가르쳤다.[1] 또한 천인상관설(天人相関説)에 따라 미래를 예언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1]

2. 2. 도무제, 명원제 치세

최호는 한족 출신으로 도무제 치하의 고위 관료였던 최홍(崔宏)의 장남이었으며,[3] 백마후(白馬侯)라는 작위를 받았다. 최호는 젊은 시절에 광범위한 서적을 공부했지만, 문학적 재능과 점성술 예언으로 특히 명성이 높았다. 최호에 대한 첫 번째 역사적 기록은 409년으로, 당시 그는 도무제의 행정부에서 하급 관리였다. 당시 도무제는 연금술사들이 제공한 약물에 중독되어 종종 폭력적이고 자의적인 행동을 보였고, 조정 관료들은 그의 분노에 휩쓸릴까 두려워 종종 그를 피할 구실을 찾았다. 그러나 최홍과 최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도무제를 성실히 섬겼으며, 그로부터 처벌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관료 중 하나였다.

409년 11월, 도무제는 그의 아들인 청하왕(淸河王) 탁발소에게 암살당했고, 탁발소는 정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형인 탁발사 황태자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고, 탁발사는 명원제로 즉위했다. 탁발소의 쿠데타 당시 그는 많은 것을 하사하여 관리들을 따르게 하려 했지만 최홍은 모든 제안을 거절했고, 이로 인해 명원제에게 칭찬을 받아 백마공(白馬公)에 봉해졌다. 414년에 최호는 명원제에게 신비로운 경전인 ''주역''과 ''홍범''(洪範)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최호의 예언이 정확했기 때문에 명원제는 그를 매우 신뢰하게 되었다. 415년,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을 때, 명원제는 수도를 평성(平城, 오늘날 산시성대동시)에서 업성으로 옮기는 계획을 중단했는데, 이는 최호와 주담의 조언 때문이었다. 최호와 주담은 수도를 옮기면 선비족의 열세한 병력이 한족에게 드러나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그해 말, 한 국가의 멸망을 예고하는 특이한 천문 현상이 나타나자, 최호는 이것이 후진의 멸망을 예고한다고 예언했고, 417년에 후진이 멸망하자 황제를 비롯한 다른 관리들마저 최호의 능력에 감탄했다.

명원제가 최호의 말을 듣지 않은 한 가지 경우는 그의 아내 요씨가 후진 황제 요홍의 누이였기 때문에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었다. 416년, 유유가 그의 주력 함대를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시키려 하자, 명원제는 최호가 그렇게 하면 북위가 유유의 공격을 직접 받게 될 것이라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대에 유유의 함대를 괴롭히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북위의 괴롭힘 작전이 약간의 성공을 거둔 후, 유유는 그의 장군 정오에게 북쪽 강둑에 상륙하여 북위에게 큰 패배를 안겨준 후 진격을 재개했다. 이것으로 명원제의 후진을 구하려는 시도는 끝났고,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최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 무렵 최호는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킨 후 건강으로 돌아가 황위를 찬탈하고, 후진 영토를 지키기 위해 남겨둔 군대가 갇히게 될 것이라는 통찰력 있는 관찰을 했다. 그는 또한 북위가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언젠가 그 영토가 북위의 것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최호의 분석에 만족한 명원제는 그에게 술과 소금을 하사하며, "그대의 말은 술과 소금과 같으니, 이들을 그대와 나누고 싶다"라고 말했다. 418년, 또 다른 천문 현상이 나타나 한 국가의 종말을 보여주자, 최호는 이것이 유송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고, 유유가 419년에 진나라의 황위를 찬탈하고 유송을 건국하자 최호의 예언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419년에[4] 최호의 아버지 최홍이 사망했다. 최호는 아버지의 작위인 백마공을 물려받았다.

422년, 명원제는 연금술사들이 생명 연장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제공한 약물로 인해 심각한 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 죽음 이후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최호에게 조언을 구했다. 최호는 그가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의 맏아들인 14세의 탁발도 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권한의 일부를 황태자에게 이양하여 자신의 짐을 덜라고 조언했다. 고위 관리 발발숭도 이에 동의했고, 명원제는 탁발도를 황태자로 책봉했으며, 나아가 황태자가 황위에 올라 부황으로서 보좌하도록 했다. 그는 핵심 고문인 발발, 최호, 대석진, 안치동, 구목릉관, 구돈퇴를 황태자의 고문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국내 문제를 포함한 대부분의 문제는 황태자 도가 처리했고, 명원제는 중요한 문제만 직접 결정했다. 이 무렵 명원제는 황태자를 보좌하도록 임명한 각 관료들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했고, 최호에 대해 "최호는 매우 박식하고 하늘과 백성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422년 후반, 유유가 사망한 후, 명원제는 유송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최호는 유송을 정복할 수 없다고 믿고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는 최호가 부분적으로만 옳았던 경우로, 명원제의 군대는 황하 바로 남쪽에 위치한 유송의 북부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유송을 멸망시키겠다는 명원제의 원래 원대한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2. 3. 태무제 치세와 정치 활동

최호는 유교, 사학, 서도, 천문, 술수 등에 능하여 어린 나이에 직랑(直郞)으로 임명되었으며, 태무제 치세인 431년에 한족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관직사도에 임명되었다.[2] 최호는 태무제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20년 동안 북위 조정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429년, 최호는 북위 국사 편찬 작업의 총책임을 맡았으나, 북위 선비족 조상들의 부정적인 부분을 여과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태무제와 선비족에게 숙청되었다. 이때 청하 최씨와 내외손 관계에 있었던 범양 노씨, 태원 곽씨, 하동 류씨 출신의 화북 한족 귀족 128명이 함께 숙청되었다.[3]

423년 12월, 명원제가 죽고 태자 도(燾)가 태무제로 즉위했다. 곧이어 많은 다른 관리들이 최호를 시기하여 그를 비난했다. 태무제는 다수의 관리들과 대립하고 싶지 않아 최호의 관직을 박탈하고 백마공(白馬公)으로 봉하여 그의 저택으로 은퇴시켰다. 그러나 태무제는 최호가 총명하고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전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자주 최호와 상의했다.

이 무렵 최호는 도교 신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최호가 도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인 ''도덕경''과 ''장자''를 싫어한다고 알려졌지만, 그는 특히 불교를 야만족의 종교라고 믿으며 혐오했다. 그는 도교 승려 구겸지를 만났는데, 구겸지는 도교 사상을 재정비했지만 추종자가 거의 없었다. 최호는 구겸지의 추종자가 되었고, 구겸지의 저술을 옹호하는 많은 상소를 태무제에게 올렸다. 태무제는 감명을 받아 도교 신자가 되었고 구겸지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구겸지 추종자들이 제국 전역에서 도교를 전파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구겸지의 종교 의식에 많은 지원금을 지급했다.

태무제 아래에서 구겸지와 최호는 함께 반불교 계획을 꾸몄다.[7] 북방 천사도들은 태무제에게 불교 박해를 촉구하며, 불교와 부처를 악하고 불안정하며 비가족적인 존재로 비난했다.[8] 반불교는 구겸지의 입장이었다.[9]

426년, 최호는 다시 태무제의 행정부에서 관리가 되었고, 이 시기에 태무제는 군대 공격 대상을 고려하고 있었다. 최호는 하를 공격할 것을 제안한 관리 중 한 명이었는데, 하의 가혹한 법이 명백한 공격 대상이라고 믿었고, 태무제는 이에 동의했다.

429년, 태무제는 최호에게 북위 역사를 계속 저술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도무제 시대에 등연(鄧淵)이라는 관리가 담당하던 프로젝트였다. 최호는 등연의 아들 등영(鄧穎)을 보조로 고용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결국 최호와 등씨 부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같은 해, 최호의 조언과 다른 모든 관리들 및 그의 유모 두 태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무제는 유연을 공격했다. 최호는 이 작전에 태무제와 동행하지 않았지만, 유연의 주력 부대를 찾아 섬멸해야 한다고 구겸지에게 알렸다.

이 무렵, 최호의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태무제는 그에게 여러 높은 칭호를 수여했다. 최호는 밤에 자주 별을 관찰했고, 식초에 구리를 담갔다. 그는 이상한 것을 볼 때마다 구리를 붓 삼아 종이에 자신의 발견을 기록했다. 이를 알게 된 태무제는 종종 밤에 최호의 집을 방문하여 그와 상의했고, 최호가 고급 음식을 대접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태무제는 최호가 제공하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고 궁으로 돌아가곤 했다. 새로운 제후인 고차 추장이 평성에 도착했을 때, 태무제는 최호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이 사람을 보면 야위고 약해 보여 활을 당길 수도, 창을 들 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있는 힘은 백만 군인보다 큽니다. 종종, 나는 정복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결단력이 부족하여, 이 군자의 가르침 덕분에 내가 이룬 것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439년, 태무제는 북량을 정복하기로 결심했고, 최호는 다른 핵심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크게 고무했다. 태무제는 최호의 제안을 따랐고, 북량을 신속하게 정복하여 저거목건의 항복을 받았다.

442년, 구겸지의 권고에 따라, 태무제는 단상에 올라 구겸지로부터 공식적으로 도교 부적을 받고, 자신의 도교 신념을 보여주고 도교를 국교로 공식 승인하기 위해 깃발 색깔을 파란색으로 바꾸었다. 그 시점부터, 북위 황제는 즉위할 때 도교 부적을 받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또한 구겸지와 최호의 권고에 따라, 그는 정륜궁(靜輪宮)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매우 높고 신들과 가까워서 조용하게 만들 의도였다.

444년, 태무제는 자신의 권한 대부분을 태자 황에게 이양했다. 또한 그는 여러 핵심 관리를 태자 황의 고문으로 임명했고, 최호는 그 관리에 포함되었다.

446년, 노수호 반란군 개오(蓋吳)가 관중 지역에서 봉기했고, 태무제가 직접 개오를 공격했을 때, 불교 사원에서 무기를 발견하고 불교도들이 자신을 음모한다고 믿었다. 불교를 혐오했던 최호는 불을 지폈고, 태무제는 먼저 장안의 불교 승려들을 학살했다. 최호는 구겸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무제에게 제국 내 모든 승려들을 학살할 것을 제안했다. 태무제는 장안의 승려들을 학살하고 불상을 파괴하고 경전을 불태웠다. 그는 이후 제국 전역에 불교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태자 황은 칙령 공포를 늦추어 불교도들이 도망치거나 숨을 수 있게 했지만, 북위에는 불교 사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의 삼재의 시작이었다.

최호는 태무제의 화북(華北) 통일을 전략적으로 도왔으며, 동군공(東郡公), 태상경(太常卿), 무군대장군(撫軍大将軍)을 제수받아 가장 신뢰받는 참모가 되었고, 마침내 사도(司徒)가 되었다. 오경(五經)에 해석을 붙인 오인원력(五寅元暦)을 정했다. 그의 정치 신조는 오작(五爵)을 중심으로 유가(儒家)적인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구겸지를 황제의 국사로 삼고, 3대에 걸쳐 원로로 섬겼으며 440년에는 태무제를 도군 황제로 만들었다. 446년의 불교 탄압(삼무일종의 법난의 시작)도 최호, 구겸지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2. 4. 도교 진흥과 불교 탄압

이 무렵 최호는 도교 신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최호가 도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인 ''도덕경''과 ''장자''를 싫어한다고 알려졌지만, 그는 특히 불교를 야만족의 종교라고 믿으며 혐오했다. 그는 도교 승려 구겸지를 만났는데, 구겸지는 도교의 종교적 사상을 재정비했지만 추종자가 거의 없었다. 최호는 구겸지의 추종자가 되었고, 구겸지의 저술을 옹호하는 많은 상소를 태무제에게 올렸다. 태무제는 감명을 받아 도교 신자가 되었고 구겸지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구겸지의 추종자들이 제국 전역에서 도교를 전파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구겸지의 종교 의식에 많은 지원금을 지급했다.[5]

태무제 아래에서 구겸지와 최호가 함께 반불교 계획을 꾸몄다.[7] 북방의 천사도들은 태무제에게 불교를 박해할 것을 촉구하며, 불교와 부처를 악하고 불안정하며 비가족적인 존재로 비난했다.[8] 반불교는 구겸지의 입장이었다.[9] 최호와 구겸지의 반불교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도에 대한 금지는 없었다.[10]

446년, 노수호 반란군 개오(蓋吳)가 관중 지역에서 봉기했고, 태무제가 직접 개오를 공격했을 때, 그는 불교 사원에서 무기를 발견하고 불교도들이 자신을 음모한다고 믿었다. 불교를 혐오했던 최호는 불을 지폈고, 태무제는 먼저 장안의 불교 승려들을 학살했다. 최호는 구겸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무제에게 제국 내 모든 승려들을 학살할 것을 제안했다. 태무제는 장안의 승려들을 학살하고 불상을 파괴하고 경전을 불태웠다. 그는 이후 제국 전역에 불교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태자 황은 칙령을 공포하는 데 지연 전술을 사용하여 불교도들이 도망치거나 숨을 수 있게 했지만, 북위에는 불교 사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의 삼재의 시작이었다.

442년, 구겸지의 권고에 따라, 태무제는 단상에 올라 구겸지로부터 공식적으로 도교의 부적을 받고, 자신의 도교 신념을 보여주고 도교를 국교로 공식적으로 승인하기 위해 자신의 깃발 색깔을 파란색으로 바꾸었다. 그 시점부터, 북위 황제는 즉위할 때 도교 부적을 받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또한 구겸지와 최호의 권고에 따라, 그는 정륜궁(靜輪宮)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매우 높고 신들과 가까워서 조용하게 만들 의도였다.

2. 5. 국사의 옥과 죽음

429년 최호는 북위국사 편찬 작업의 총책임을 맡았으나, 북위 선비족 조상들의 부정적인 부분을 여과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태무제와 선비족에게 숙청되었다. 이때 청하 최씨와 내외손 관계에 있었던 범양 노씨, 태원 곽씨, 하동 류씨 출신의 화북 한족 귀족 128명이 함께 숙청되었다.[4]

450년 최호는 존경받고 신뢰받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한 일족의 방계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공식 발표는 최호가 황실을 비방했다는 것이었다.[5]

최호는 참모 민단(閔湛)과 척표(郗標)의 건의에 따라 자신이 주도하여 편집한 역사서의 내용을 석비에 새겨 평성(平城) 밖 천단 옆에 세웠다. 이 비석은 태무제의 조상들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냈다고 하며, 선비족은 매우 분노하여 최호가 조상의 과오를 드러내 국격을 훼손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태무제는 격노하여 최호를 체포했다.[7]

태자 황(皇)은 고(高)를 살리기 위해 궁으로 데려와 고에게 모든 글의 책임을 최호에게 돌리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고는 오히려 각 부분의 역사서 저작자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8]

  • 도무제의 전기는 등원(鄧淵)이 썼다.
  • 명원제와 태무제의 전기는 최호와 고가 공동으로 썼지만, 고는 자신이 실제로 3분의 2를 썼다고 말했다.


태무제는 처음에는 고도 죽이려 했으나, 고의 자백에 감명받았다고 하며 태자 황의 간청에 따라 그를 살려주었다. 그 후 최호를 소환했는데, 최호는 너무 두려워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태무제는 고에게 최호와 최호의 참모 128명, 그리고 각 5개의 가계를 처형하라는 조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고는 거절하며 심지어 최호조차 처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태무제는 분노하여 고도 죽이려 했으나, 태자 황이 다시 고를 간청했고, 고는 다시 목숨을 건졌으며, 실제로 태무제는 처형될 사람의 수를 줄였다. 그러나 태무제는 여전히 최호와 관련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명령했다.[8]

  • 최호의 고향인 청하군 (대략 현대의 싱타이, 허베이)에서 최씨 성을 가진 모든 남녀,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고 최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8]
  • 최씨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들의 몇몇 분가들:[8] 범양군의 노씨(盧氏), 태원군의 곽씨(郭氏), 하동군의 유씨(柳氏)


최호의 참모들은 처형되었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처형되지 않았다.[8]

처형 전에 최호는 궤차에 갇혀 평성 밖으로 끌려나가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를 지켰으며, 교대로 최호의 얼굴과 몸에 오줌을 쌌다. 최호는 슬픔에 겨워 "아오 아오" 소리를 질렀다. 최호가 죽은 후, 태무제는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비통하게 슬퍼했다.[9]

최호가 국사 편찬에서 한화가 진행되기 전 시기의 선비(鮮卑)족 탁발씨(拓跋氏)(북위 제실의 출신 부족)의 풍속과 신조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그 내용을 석비에 새겨 공개한 것은 이미 한화가 진행된 태무제와 선비계 귀족들에게 북족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어 그들의 격분을 샀다. 이 때문에 최호를 비롯한 일족, 노씨, 곽씨 등 연관된 한족계 유력 귀족들이 주살되었으며('''국사의 옥'''(国史の獄)), 선비를 모욕했다고 여겨진 서적들은 모두 파기되었다고 한다. 배경에는 최호가 남조(南朝 (中国))적인 귀족제로의 이행을 서두른 것에 대한 황제의 반발도 있었다고 한다.

2. 6. 최호의 죽음에 대한 여러 해석

450년, 최호는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한 일족의 방계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450년 직전과 450년에 일어난 일들이 강력한 정황을 제시한다. 공식 발표는 최호가 황실을 비방했다는 것이었다.

450년 이전 어느 시점에 최호는 자신의 지위와 황제의 총애에 너무 깊이 의존하여, 재능 있는 많은 사람들을 비교적 높은 관직인 군 태수로 추천했다. 황태자 황(皇)은 이에 반대하며, 현재 낮은 직급의 관리들을 먼저 승진시키고 최호가 추천한 사람들에게는 낮은 직급을 부여한 후 점진적으로 승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호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군 태수직을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운(高雲)은 "최호가 재앙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더 강력한 자들에게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라고 평했다.[1]

450년, 그의 참모 민단(閔湛)과 척표(郗標)의 건의에 따라 최호는 그가 주도하여 편집한 역사서의 내용을 석비에 새겨 평성(平城) 밖 천단 옆에 세웠다. 이 비석은 태무제의 조상들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냈다고 하며, 선비족은 매우 분노하여 최호가 조상의 과오를 드러내 국격을 훼손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태무제는 격노하여 최호를 체포했다.[2]

한편, 태자 황(皇)은 고(高)를 살리기 위해 그를 궁으로 데려와 고에게 모든 글의 책임을 최호에게 돌리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고는 오히려 각 부분의 역사서 저작자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3]

  • 도무제의 전기는 등원(鄧淵)이 썼다.
  • 명원제와 태무제의 전기는 최호와 고가 공동으로 썼지만, 고는 자신이 실제로 3분의 2를 썼다고 말했다.


태무제는 처음에는 고도 죽이려 했으나, 고의 자백에 감명받았다고 하며 태자 황의 간청에 따라 그를 살려주었다. 그 후 최호를 소환했는데, 최호는 너무 두려워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태무제는 고에게 최호와 최호의 참모 128명, 그리고 각 5개의 가계를 처형하라는 조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고는 거절하며 심지어 최호조차 처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태무제는 분노하여 고도 죽이려 했으나, 태자 황이 다시 고를 간청했고, 고는 다시 목숨을 건졌으며, 실제로 태무제는 처형될 사람의 수를 줄였다. 그러나 태무제는 여전히 최호와 관련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명령했다.[4]

  • 최호의 고향인 청하군 (대략 현대의 싱타이, 허베이)에서 최씨 성을 가진 모든 남녀,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고 최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
  • 최씨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들의 몇몇 분가들
  • * 범양군의 노씨(盧氏)
  • * 태원군의 곽씨(郭氏)
  • * 하동군의 유씨(柳氏)


최호의 참모들은 처형되었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처형되지 않았다.[5]

처형 전에 최호는 궤차에 갇혀 평성 밖으로 끌려나가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를 지켰으며, 교대로 최호의 얼굴과 몸에 오줌을 쌌다. 최호는 슬픔에 겨워 "아오 아오" 소리를 질렀다. 최호가 죽은 후, 태무제는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비통하게 슬퍼했다.[6]

최호의 직계 분가에 대한 학살에도 불구하고, 그의 더 큰 가문인 청하 최씨는 여러 분가를 거느리며 당나라까지 살아남았으며, 범양 노씨와 같이 다른 가문들도 송나라까지 살아남았다. 태원 곽씨(太原郭氏)와 하동 유씨(河東柳氏) 모두 당나라까지 살아남았다.[7]

최호가 어떤 내용을 폭로했기에 그에게 그토록 큰 재앙을 가져왔는지는 불분명하다. 결국, 고가 대부분의 역사를 썼다고 인정했지만 처벌을 면했고 최호는 심한 처벌을 받았다. 게다가 최호가 폭로한 내용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는 최호가 한족 반란을 일으키려 했거나, 불교 음모의 희생자였다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은 추측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8]

현대 역사가인 보양은 최호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유력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9]

1. 그는 최호가 황실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사실, 즉 도무제가 반역자였으며 그의 아버지인 탁발십익건전진에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폭로했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후대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탁발십익건은 도무제의 할아버지이지 아버지가 아니었다.)

2. 그는 최호가 황태자 황과 갈등을 겪었고, 그로 인해 고가 역사 저술자를 밝히도록 지시받았다고 믿었다. 문제의 핵심 구절이 도무제가 아닌 탁발십익건의 전기에서 나왔고, 고는 탁발십익건의 전기를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기 때문이다.

보양의 분석 역시 추측에 불과하지만, 최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보양은 또한 최호가 독살되었다고 믿었는데, 이는 그가 태무제의 심문에 전혀 응답하지 못하고 나중에 "아오 아오"라고 울부짖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을 설명해 준다.[10]

참조

[1] 서적 Wei Shu
[2] 서적 Book of Wei
[3] 서적 Wei Shu
[4] 서적 Wei Shu 419-05-10
[5]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6]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7]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8]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9]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10]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11] 서적 Chinese Medicine and Healing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