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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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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천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29일까지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이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춘천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사전에 파악하고 대비한 국군은 춘천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했다. 전투 과정에서 국군은 화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활용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냈고, 5일간의 전투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속전속결 전략을 무산시켰다. 이 전투는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지연시키고, 대한민국과 미국이 시간을 벌어 적화통일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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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6월 25일 ~ 6월 30일
장소강원도 춘천, 홍천 일대
결과북한군 승리, 강원도 함락
교전 세력
교전국 1대한민국
교전국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지휘관 1김종오
지휘관 2김광협
병력 규모
병력 1대한민국 6 보병사단
16 포병대대
병력 2조선인민군 2군단
북한군 참여 부대
한국군 참여 부대
기타 정보
관련 항목작전명 포크풍 (Pokpung)

2. 배경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 전쟁 초기, 춘천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한군은 화천을 거쳐 춘천을 점령하고 한국의 수도 서울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맞서 국군은 춘천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남침에 대비했다.[1]

제6사단은 김종오 대령의 지휘 아래 원주에 지휘소를 두고 춘천 일대를 방어했다. 제6사단은 좌측으로 유재흥 준장의 제7사단, 우측으로는 이성가 대령의 제8사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춘천 방어의 핵심은 임부택 중령이 이끄는 제7연대였다.[1]

제7연대는 1949년 2월 20일 제6사단에 예속되어 춘천 지역 방어를 맡았다. 이들은 13개월간 방어 임무를 수행하며 지형을 숙지하고, 군, 관, 민의 유기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대대 전투 훈련과 장교 보수 교육을 통해 전투력을 강화했다.[1]

춘천 시내는 전선에서 불과 12km 거리에 위치했기 때문에, 제7연대는 진지 강화에 힘썼다. 육군 본부의 예산 지원이 어려워지자, 자체 인력과 춘천 시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유개 콘크리트호, 통나무 유개호, 연락호, 지붕형 철조망, 대인 지뢰 등을 설치하여 방어선을 강화했다.[1]

6월 19일,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귀순한 북한군 전차병으로부터 북한군이 화천 지역에 병력과 장비를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연대장은 수색대를 파견하여 정찰을 실시했고,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 이동과 남침 준비 상황을 확인했다. 6월 23일, 연대장은 직접 관측소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보고하며, 북한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렸다.[1]

2. 1. 작전 직전 국군 6사단의 배치

제6사단은 김종오 대령 지휘 아래 원주에 지휘소를 두고, 우측으로는 789고지를 경계로 이성가 대령의 제8사단과, 좌측으로는 주목리를 사이에 두고 유재흥 준장의 제7사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단의 우일선인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는 공천에 지휘소를 두고, 예하 제3대대가 연대 우측 789고지-우준리 간을, 제1대대가 좌측 873고지-오산동 간을 방어했다. 제2대대는 연대 예비로 당포리에 배치되었다.

임부택 중령이 이끄는 제7연대는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제2대대가 제2연대 1대대와 연계하여 양통리까지, 제3대대가 주목리까지 진지를 점령했다. 제11 및 12 양 중대는 연대 예비인 제1대대와 함께 춘천에 있었다.

제7연대는 1949년 2월 20일 사단에 예속되어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 2개월간 교육 후 5월 3일 춘천 진지를 인수받았다. 8월 6일에는 신남에 침입한 북한군 1개 대대 규모를 섬멸하기도 했다. 13개월간의 방어로 지형을 숙지하고 군관민 통제가 공고했으며, 대대 전투 훈련을 마치고 대부분의 장교들이 보수 과정 교육을 받았다.

춘천 정면은 시내가 전선에서 불과 12km 거리였기에 제7연대는 진지 공사를 서둘렀다. 육군 본부의 예산 지원 불가 통보에도 자체 인력과 사단 지원 공병 1개 중대, 춘천 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9개소(장재동 1개소, 인람리-춘천 간 6개소, 서상리 1개소, 지암리 1개소)에 유개 콘크리트호와 통나무 유개호를 만들고, 호 간 연락호, 지붕형 철조망, 대인 지뢰를 설치했다.[1]

2. 2. 북한군의 남침 징후와 국군의 대응

1949년 2월 20일 제6사단에 예속된 제7연대는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하여 2개월간 교육을 마친 후, 5월 3일 춘천으로 진입하여 서종철 중령이 이끄는 제8연대로부터 임무를 인수받았다. 제7연대는 3개월 뒤인 8월 6일 신남으로 침입한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포착해 섬멸하는 경험을 쌓았다.[1]

13개월간 방어를 통해 제7연대는 해당 지역 지형을 숙지하게 되었고, 군관민 통제가 어느 곳보다 공고하였다. 또한 대대 전투 훈련을 마치고 대부분의 장교들이 보수 과정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1]

진지 공사에 있어서, 춘천 정면은 전선에서 시내가 불과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제7연대가 진입하자마자 공사를 서둘렀다. 육군본부의 예산 지원이 어렵게 되자, 자체 인력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사단으로부터 공병 1개 중대를 지원받아 춘천 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9개소(장재동 1개소, 인람리-춘천 간 6개소, 서상리 1개소, 지암리 1개소)에 유개 콘크리트호와 중대마다 2~3개소의 통나무 유개호를 만들었다. 호 사이는 연락호로 연결하고, 진지 앞에는 지붕형 철조망을 쌍선으로 치고 대인 지뢰를 매설했다.[1]

6월 19일,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귀순한 북한군 전차병의 진술을 보고했다. 이 전차병은 북한군이 6월 23일부터 38선 접경에서 야외 연습을 위해 일주일간 야간 행군으로 전차 40대와 함께 화천에 도착했으며, 이곳에 많은 병력과 포가 집결하고 있다고 진술했다.[1]

사단장은 정보의 정확성을 위해 연대장에게 재확인을 지시했고, 이에 연대장은 윤수용 소위를 장으로 한 수색대 30명을 화천 및 양구 쪽으로 잠입시켰다. 수색대는 화천에 차량 400대, 양구에 300대가 춘천으로 남하할 태세를 갖추고 줄지어 있으며, 양쪽에 대병력이 숙영하고 있음을 보고했다.[1]

6월 23일 08:00, 연대장은 직접 적정을 살피기 위해 S-2 김동명 대위, S-3 이남호 소령과 함께 제3대대 제9중대 관측소로 올라갔다. 그는 모진교 북쪽에서 대병력이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와 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보고하며 조만간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 같다고 덧붙였다.[1]

3. 전투 과정

北韓軍중국어은 6월 25일 04:00부터 인람리 및 지암리에 포격을 가했고, 1시간 후 추전리-청평리-고탄리-인람리-지암리의 각 도로를 따라 공격을 시작하였다.[1]

6월 26일, 전날 반격으로 피해를 입은 북한군은 옥산포 일대에 집결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임부택 중령은 제19연대 2대대의 지원에 힘입어 김용배 소령에게 옥산포 공격을 명령했다.[1]

6월 28일, 북한군은 세 방향에서 공격해왔다. 주공은 5번도로(춘천-홍천간)에 집중되었고, 전차와 포병으로 연대 정면을 공격했다. 다른 두 무리는 897고지와 북한강을 따라 남하하며 금병산으로 진입했다. 303고지에서 철수하던 김근호 대위는 46번 도로에서 가평으로 향하는 북한군 제2사단의 차량행렬을 목격했다.[1] 김종수 소령의 제2대대는 이금열 중위의 제2포대 지원에도 불구하고 3시간의 사격전 끝에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1]

임부택 중령은 불리한 지형, 화력 열세, 보급로 차단 위협을 고려하여 원창고개 방어를 결심하고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압박이 거세지자, 김종오 대령의 승인 하에 더 후퇴하기로 결정했다.[1] 제2대대 엄호 하에 연대 주력과 제2포대를 사현으로 집결시키고, 김종수 소령에게 원창고개 사수를 명령했다.[1] 원창고개는 600m 높이의 요충지로, 춘천에서 고개까지 굴곡이 많아 방어에 유리했다.[1] 대대장은 병사들을 격려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1]

6월 29일, 소양강에서 철수한 제2대대는 원창고개에서 북한군과 대치했다. 06:00, 2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접근하자 200m 이내까지 사격을 금지했다. 북한군이 최후 저지선에 들어오자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고, 큰 피해를 입은 북한군은 사격전으로 대치했다.

11:00,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김상흥 대위가 "적이 백기를 들고 온다"고 보고했고, 대대장은 투항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북한군은 백기를 내던지고 기습 공격을 감행, 백병전이 벌어졌다. 대대장도 위기에 처했으나 연락병의 도움으로 벗어났다.

격투 끝에 적을 격퇴했지만, 제2대대는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승리했다. 김종수 소령은 이 경험을 육군본부에 보고하여 전군에 경각심을 일깨웠다.

원창고개 전투 후 제2대대는 13:00에 사현에서 연대 주력과 합류했다. 임부택 중령은 전 병력 집결 후 화양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제2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추격하는 적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대대는 371고지, 근무대대는 418고지, 제2대대는 삼마치에 새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연대 관측소는 371고지에 위치했다. 13:30, 연대는 차량과 도보로 사현을 출발하여 24:00에 새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방어에 들어갔다.[1]

3. 1. 6월 25일

北韓軍중국어은 04:00부터 인람리 및 지암리에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고 1시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이 끝난 후 사정을 연신하는 듯 하더니 운집한 대군이 가랑비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을 뚫고 추전리-청평리-고탄리-인람리-지암리의 각 도로를 따라 노도와 같이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3. 2. 6월 26일

전날 저녁 19:00에 실시한 대대의 반격으로 북한군은 많은 손실을 본 듯하여 옥산포 일대에 집결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1]

임부택 중령은 제19연대 2대대가 우두산으로 오자 이에 힘을 얻고 옥산포를 점령한 북한군을 격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제 1대대장 김용배 소령에게 08:00를 기하여 공세를 취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너무 돌진하여 측방이 노출되지 않도록 약진 한계선을 삼거리로 통제하였다.[1]

3. 3. 6월 28일

북한군은 8시에 보병, 전차, 포병 협동으로 세 방향으로 침공하였는데, 연대를 원창고개 부근에서 포위하려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들은 주공을 5번도로(춘천-홍천간)에 집중하여 전차와 포병으로 연대 정면을 공격하고, 다른 두 무리는 동서로 분산하여 하나는 897고지를 점령 후 남하하고, 다른 하나는 북한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금병산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303고지로 철수하던 근무대대장 김근호 대위는 서쪽 3km의 도로(46번 도로)에서 가평으로 향하는 긴 차량행렬의 적군을 목격했는데, 이는 서울 동부를 목표로 서남진하는 북한군 제2사단이었다.[1]

김종수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는 이금열 중위의 제2포대 지원 하에 3시간 동안 치열한 사격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1]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불리한 지형조건, 화력 열세, 주보급로 차단 위협을 고려하여 사단장이 강조한 원창고개 방어를 결심하고, 각 대대에 제2, 1근무대대 순으로 선정된 진지 점령을 명령하였다.[1]

그러나 북한군의 압력이 가속화되자 연대장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의 승인 하에 원창선에서 더 물러나기로 하였다.[1]

이에 따라 제2대대 엄호 하에 연대 주력과 제2포대를 사현으로 집결시켰고, 연대장은 엄호대대장 김종수 소령에게 "현 위치(원창고개)를 별명이 있을 때까지 고수하여 북한군을 최대한 저지하라"고 명령하였다.[1]

원창고개는 표고 600m의 요충지로, 북쪽 산기슭은 급경사였으나 수목이 없는 적토지대였다. 춘천에서 고개 정상까지는 굴곡이 많아 방어에 유리하였다.[1]

대대장은 언제까지 고개를 고수해야 할지 예측할 수 없어, 포위 위험과 극한 상황을 고려하여 피로에 지친 병사들을 격려하며 전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1]

3. 4. 6월 29일

소양강 공방전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수만 거듭했던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는 철수 엄호를 마치고 적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북한군의 포격이 거세지던 중 06:00에 2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접근해오자, 대대장은 200m 이내로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금지했다.

북한군이 북한기를 앞세우고 접근하여 최후 저지선에 들어오자, 대대장의 명령과 함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고, 북한군은 파상공격을 시도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사격전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11:00,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다시 공격해왔고, 대대는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제5중대장 김상흥 대위가 "적이 백기를 들고 온다"고 보고했고, 대대장은 북한군이 투항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사격을 중지시켰다. 병사들은 호 밖으로 나와 환호하며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20m 앞까지 접근하더니 갑자기 백기를 내던지고 숨겨둔 총을 난사하며 백병전을 벌였다. 피아가 뒤엉킨 혼전 속에서 대대장도 적병과 맞붙어 뒹굴었으나, 연락병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격투 끝에 적을 격퇴했지만, 북한군은 분산된 병력과 떨어진 사기로 인해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반면, 제2대대는 호를 방패 삼아 효과적으로 대응했고, 대대장의 지휘 아래 더욱 용감하게 싸웠다.

김종수 소령은 "전투 경험이 없어 백기만 보면 투항하는 줄 알았다"며, 이 사실을 육군본부에 보고하여 전군에 경각심을 일깨웠다고 회고했다.

원창고개 전투 이후 제2대대는 13:00에 사현에서 연대 주력과 합류했다.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전 병력이 집결하여 철수 준비를 완료하자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 연대는 화양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제2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며, 추격하는 적을 격퇴한다.
  • 제1대대는 371고지(원주가도 우측), 근무대대는 418고지(동가도 좌측), 제2대대는 삼마치에 새 방어진지를 점령한다.
  • 연대 관측소는 371고지에 위치한다.


이에 따라 13:30에 연대는 차량과 도보로 사현을 출발하여 24:00에 각각 새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급편 방어에 들어갔다.[1]

4. 결과 및 영향

국군 제6보병사단은 5일간의 춘천 및 홍천 동북지구 전투와 4일간의 지연전에서 북한군 제2군단에 큰 타격을 주어 북한군의 속전속결 전략을 좌절시켰다. 특히, 대전차화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육박전으로 북한군 전차를 파괴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1][2][3]

국군 제6보병사단이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 38도선 충돌과 후방지역 공비 토벌 작전을 통해 축적된 전투 경험
  • 병력 및 장비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천선 방어와 산악 지형을 활용한 방어 주도권 장악


반면, 북한군은 고지대 우회 공격 대신 정면 돌파를 시도하여 국군 포병의 좋은 표적이 되는 등 전술적 실수를 범했다. 북한군은 제2사단이 와해되고 제7사단을 투입해야 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제17연대의 해주 점령, 제7사단의 의정부 탈환 및 북진 보도는 국군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비록 전세는 불리했지만, 소양강 북안 일대에는 북한군의 시체가 쌓여 전차 기동이 어려울 정도였고, 북한군의 손실이 막심했음을 알 수 있다.

작전 기간 중 국군 제6보병사단은 육군본부와의 통신 두절로 작전 지휘에 어려움을 겪었다. 예하 부대에서도 통신 장비 부족으로 홍천에서는 체신부 전신선을 할당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북한군 제2군단은 서울 점령에 집착하여 제7사단을 홍천 동북쪽으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홍천 침공이 지연되고 군단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했다. 또한, 국군 제6보병사단의 기습적인 공세에 밀려 전차의 충격력을 잃고 측방 타격이나 우회 추격에도 실패하여 전투력 회복이 늦어졌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6보병사단은 질서 있는 지연전을 통해 북한군이 충주를 점령하여 아군을 동서로 양단하려는 기도를 좌절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북한군은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김무정 중장을 임명했다. 7월 초에는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최현 소장으로, 제7사단장 전우 소장을 최충국 소장으로 교체했다. 7월 3일에는 제7사단을 제12사단으로 개칭하여 패전의 오명을 씻으려 했다.

북한군은 국군 제6사단, 특히 제7연대의 선전에 굴복하여 '춘천바위'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북한군이 3일간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1][2][3] 결국 이 결정적인 춘천 전투로 인해 6월 28일까지 북한군이 남침을 잠시 중단했으며, 이는 대한민국미국이 시간을 벌어 적화통일을 막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5. 평가

폴란드 무관 파우엘 모나트 대좌는 북한군 제2군단 참모장 최린 소장의 진술을 토대로, 소련군 총참모부가 작전을 수립할 때 한국군의 능력을 너무 경시하고 북한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였다고 주장하였다.[4] 현재 대한민국에선 춘천 전투를 춘천대첩으로 재명명하여 2000년 6월 26일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을 설립하였다.

참조

[1] 서적 변질되어가는 한국현대상의 실상 上 종소리 1989
[2] 논문 한국전쟁 연구의 향후 과제와 전망
[3] 서적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백산서당 2000
[4] 간행물 Russians in Korea Life 196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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