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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산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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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칠곡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으로,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은 인조 18년(1640)에, 중성은 영조 17년(1741)에, 외성은 숙종 26년(1700)에 각각 축조되었다. 가산바위는 산성 내에 위치하며,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도선국사 설화와 역사적 기록이 전해진다. 현재 대부분의 성벽과 암문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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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산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진남문
진남문
이름칠곡 가산산성 (漆谷 架山山城)
영문 이름Gasansanseong Fortress
유형사적
지정 번호216
지정일1971년 3월 26일
주소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
소유자국유
면적194,742m²
시대조선 시대
문화재청 ID13,02160000,37

2. 역사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 인조 때부터 숙종, 영조 때까지 칠곡 가산산성이 세워졌다. 가산산성은 내성·중성·외성을 각각 다른 시기에 쌓았고, 성 안에는 별장을 두어 항상 수호하게 하였다.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며 칠곡도호부도 이 산성 내에 있었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 때 절터가 많이 남아있다. 1960년의 집중 호우로 문 윗쪽의 무지개처럼 굽은 홍예문이 파손되고 성벽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그 밖에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1]

가산산성은 험한 자연지세를 이용한 조선 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산성이다.

2. 1. 내성 축조 (1640년, 인조 18년)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 칠곡 가산산성이 세워졌다. 가산산성은 내성·중성·외성을 각각 다른 시기에 쌓았고, 성 안에는 별장을 두어 항상 수호하게 하였다.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며 칠곡도호부도 이 산성 내에 있었다.

조선 인조 18년(1640년)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가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축성을 조정에 건의하여 내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칠곡도호부가 이 안에 있었다. 내성은 그 길이가 1,710보(약 4km)이며, 동서북의 분지 및 8개의 암문이 있다.[1]

2. 2. 중성 축조 (1741년, 영조 17년)

영조 17년(1741년)에 경상도 관찰사 정익하가 왕명을 받아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중성을 쌓았다. 중요 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4개 고을(하양, 신령, 의흥, 의성)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해서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1] 중성은 602보(약 460m)이며, 성문루, 위려각이 설치되었다.[1]

2. 3. 외성 축조 (1700년, 숙종 26년)

숙종 26년(1700년)에 왕명으로 외성을 쌓았다. 외성은 3,754보(약 3km)이며, 남문 및 3곳의 암문이 설치되었다.[1] 성의 주 출입구는 외성의 남문이다.[1]

3. 구조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 세워진 성이다. 가산산성은 험한 자연지세를 이용한 조선 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산성이다.

가산산성은 내성·중성·외성을 각각 다른 시기에 쌓았고, 성 안에는 별장을 두어 항상 수호케 하였다.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며 칠곡도호부도 이 산성내에 있었다.

이 산성은 가산 해발 901m에서 600m에 이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쌓은 방어 성곽이다. 성내의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고 건물 터만 남아 있으나 대부분의 성벽 및 암문은 원형을 남기고 있다.[1]

3. 1. 내성

조선 인조 18년(1640년)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칠곡 가산산성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칠곡도호부가 이 안에 있었다. 내성은 그 길이가 1,710보(약 4km)이며, 동서북의 분지 및 8개의 암문이 있다.[1]

3. 2. 중성

영조 17년(1741년)에 관찰사 정익하가 왕명을 받아 쌓았으며,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이 컸다. 중요 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4개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해서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1] 중성은 602보(약 460m)이며, 성문루, 위려각이 설치되었다.[1]

3. 3. 외성

숙종 26년(1700)에 왕명으로 외성을 쌓았다.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며, 성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 때 절터가 많이 남아있다. 1960년 집중호우로 문 윗쪽의 무지개처럼 굽은 홍예문이 파손되고 성벽 일부가 없어졌으나, 그 밖에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1] 외성은 3,754보(약 3km)이며, 남문 및 암문 3곳이 설치되었다.[1]

4. 가산바위

가산바위는 칠곡 가산산성에 있는 바위로, 17세기에 산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연결하여 축성했기 때문에 현재 가장 높은 망루 중 하나가 되었다. 바위 위에 오르면 멀리 대구광역시영남대로의 산세를 볼 수 있으며, 주변 숲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2]

가산바위 정상부는 진흙이 쌓여 만들어진 셰일이 두꺼운 반석 형태로 돌출되어 있다. 이는 넓고 평탄한 층리(層理)로 발달하여, 국내 일반적인 화강암 바위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2]

이 바위에는 신라 고승 도선이 쇠로 만든 소와 말 형상을 바위 구멍에 묻어 지기(地氣)를 눌렀는데, 조선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면서 이를 없앴다는 전설이 전해진다.[2]

여지도서(1757∼1765)에는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훌륭하다는 기록이 있으며, 1899년 발간된 에는 '칠곡의 3대 형승(形勝)으로 바위가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고 사방의 경관과 봉우리, 별들이 펼쳐져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가산바위는 오랫동안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지로 자리매김했다.[2]

4. 1. 지형적 특징

가산바위는 칠곡 가산산성에 자리하며, 17세기에 산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이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도 가장 높은 망루 중 하나이다. 바위 위에 오르면 멀리 대구광역시영남대로의 산세를 바라볼 수 있으며 주변의 수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2]

가산바위의 정상부는 진흙이 쌓여 만들어진 셰일이 두텁게 반석(磐石) 형태로 돌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넓고 평탄한 층리(層理)로 발달하여 국내의 일반적인 화강암 바위와는 달리 보기 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다.[2]

이 바위에 내려오는 전설로는 ‘바위 가운데의 큰 구멍에 신라 고승 도선이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어 지기(地氣, 토양 속 공기)를 눌러두었는데, 조선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며 이를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2]

관련 문헌으로는 『여지도서』(1757∼1765)에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우수한 전망에 대한 기록이 있고, 특히 1899년 발간된 <칠곡부읍지>에는 ‘칠곡의 3대 형승(形勝)으로 바위의 크기가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어 사방의 경관과 봉우리와 별들이 펼쳐져 있다’라고 묘사되는 등 오래도록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이 된 역사성이 있다.[2]

4. 2. 전망

가산바위는 칠곡 가산산성에 자리하며, 17세기에 산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이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도 가장 높은 망루 중 하나이다. 바위 위에 오르면 멀리 대구광역시영남대로의 산세를 바라볼 수 있으며 주변의 수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2]

가산바위의 정상부는 진흙이 쌓여 만들어진 셰일이 두텁게 반석(磐石) 형태로 돌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넓고 평탄한 층리(層理)로 발달하여 국내의 일반적인 화강암 바위와는 달리 보기 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다.[2]

이 바위에 내려오는 전설로는 ‘바위 가운데의 큰 구멍에 신라 고승 도선이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어 지기(地氣, 토양 속 공기)를 눌러두었는데, 조선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며 이를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2]

관련 문헌으로는 『여지도서』(1757∼1765)에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우수한 전망에 대한 기록이 있고, 특히 1899년 발간된 <칠곡부읍지>에는 ‘칠곡의 3대 형승(形勝)으로 바위의 크기가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어 사방의 경관과 봉우리와 별들이 펼쳐져 있다’라고 묘사되는 등 오래도록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이 된 역사성이 있다.[2]

4. 3. 도선국사 설화

가산바위에는 '바위 가운데 큰 구멍에 신라 고승 도선이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어 지기(地氣, 토양 속 공기)를 눌러두었는데, 조선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며 이를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2]

4. 4. 역사적 기록

가산바위는 칠곡 가산산성에 자리하며, 17세기에 산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이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도 가장 높은 망루 중 하나이다. 바위 위에 오르면 멀리 대구광역시영남대로의 산세를 바라볼 수 있으며 주변의 수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2]

가산바위의 정상부는 진흙이 쌓여 만들어진 셰일이 두텁게 반석(磐石) 형태로 돌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넓고 평탄한 층리(層理)로 발달하여 국내의 일반적인 화강암 바위와는 달리 보기 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다.[2]

이 바위에 내려오는 전설로는 ‘바위 가운데의 큰 구멍에 신라 고승 도선이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어 지기(地氣, 토양 속 공기)를 눌러두었는데, 조선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며 이를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2]

관련 문헌으로는 『여지도서』(1757∼1765)에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우수한 전망에 대한 기록이 있고, 특히 1899년 발간된 에는 ‘칠곡의 3대 형승(形勝)으로 바위의 크기가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어 사방의 경관과 봉우리와 별들이 펼쳐져 있다’라고 묘사되는 등 오래도록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이 된 역사성이 있다.[2]

참조

[1]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2] 웹인용 칠곡의 자연유산 ‘가산바위’, 명승 지정 예고 https://www.cha.go.k[...] 문화재청 20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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