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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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라칼라는 188년 태어나 217년 암살된 로마 황제이다.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였으며, 갈리아식 튜닉인 카라칼라를 즐겨 입어 '카라칼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8년부터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공동 황제로, 211년 아버지 사망 후 동생 게타와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게타를 살해하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알레만니족을 격퇴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세웠으나, 화폐 가치를 하락시키고 과도한 지출로 재정을 악화시켰다. 카라칼라는 고대 기록에서 폭군으로 묘사되며, 동생 게타 살해와 알렉산드리아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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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칼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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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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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카라칼라 |
출생일 | 188년 4월 4일 |
출생지 | 루그두눔 |
사망일 | 217년 4월 8일 (향년 29세) |
사망지 | 에데사와 카르하이 사이의 도로 |
배우자 | 풀비아 플라우틸라 |
아버지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어머니 | 율리아 돔나 |
왕조 | 세베루스 왕조 |
통치 | |
로마 황제 즉위 | 198년 1월 28일 |
선임 통치 시작 | 211년 2월 4일 |
로마 황제 퇴위 | 217년 4월 8일 |
선임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계승자 | 마크리누스 |
공동 통치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98–211) 게타 (209–211)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법 | Lucius Septimius Bassianus |
별칭 어원 | 카라칼라 망토에서 유래 |
2. 이름
카라칼라의 출생 이름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안누스였다. 그는 아버지가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가문과의 결합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일곱 살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개명되었다.[6][2] 4세기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저서 ''황제들의 약전''에 따르면, 그는 늘 입고 다니며 유행시킨 갈리아식 후드 달린 튜닉 때문에 "카라칼라"라는 외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에서의 원정 중에 이 옷을 입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42] 카라칼라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사''를 집필하고 있던 카시우스 디오[3]는 당시 유명했던 키가 작고 난폭한 검투사의 이름을 따서 그를 일반적으로 "타라우타스"라고 불렀지만, 여러 차례 "카라칼루스"라고 부르기도 했다.[4]
3. 생애
카라칼라는 로마 제국의 황제로, 198년부터 211년까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공동 통치했다. 황제에 오른 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동생 게타와의 경쟁이 심했는데, 211년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브리타니아 원정 중 잉글랜드 요크에서 사망하면서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212년 2월, 카라칼라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보는 앞에서 게타를 살해하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 이후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으나, 이는 훗날 로마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213년 카라칼라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했고, 215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으나 볼로가세스 5세가 요구를 들어주어 중단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소요 사태를 진압하며 주민들을 학살했다.
216년 볼로가세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살해되자 다시 파르티아를 공격했다. 카라칼라가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하자 원로원까지 반카라칼라 진영으로 돌아섰다. 예측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의심을 품은 병사들은 마크리누스에게 호소했고, 결국 217년 4월 카라칼라는 메소포타미아 카레 근처의 신전에서 암살당했다.[80]
3. 1. 초기 생애
카라칼라는 188년 4월 4일, 갈리아(현재 프랑스 리옹)의 루그두눔에서 세베루스 황제(재위 193~211년)와 율리아 돔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쪽으로는 푸니계 혈통을, 어머니 쪽으로는 아랍계 혈통을 이어받았다.[5] 카라칼라에게는 게타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잠시 카라칼라와 함께 공동 황제로 통치하기도 했다.[6] 카라칼라는 193년 4월 9일,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황제 칭호)로 추대되었을 때 다섯 살이었다.[7]
본명은 '''루키우스 세프티미우스 바시아누스'''로, 갈리아 루그두눔(Lyon)에서 원로원 의원이자 군인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시리아 속주 출신의 사제 가문 딸인 율리아 돔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70][71][72] 그는 카르타고인과 아람계 시리아인의 혼혈이었으며, 외모에서도 그 혈통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한다.[73][74]
아버지가 콤모두스 사후 내전에서 승리하여 황제가 되자, 정치적 목적으로 이전 왕조였던 아우렐리우스 가문과 연관을 맺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카이사르'''(Marcus Aurelius Antoninus Caesar)로 개명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카라칼라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가 즐겨 입던 갈리아 지방 특유의 후드 달린 튜닉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209년, 아버지에 의해 동생 게타와 함께 공동 황제로 지명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3. 2. 공동 황제 (198년-211년)
198년 1월 28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9세였던 카라칼라를 공동 아우구스투스이자 황제로 임명했다.[9] 이 날은 세베루스가 파르티아 제국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한 날이었다. 세베루스는 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197년 10월경 크테시폰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10] 카라칼라는 호민관 권력과 ''임페라토르'' 칭호도 받았다.[7] 198년부터 카라칼라에게는 최고 사제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칭호가 부여되었다.[8][7] 그의 동생 게타는 같은 날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로 선포되었고, 세베루스는 ''파르티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받았다.[7]
199년, 카라칼라는 아르발 형제단에 입단했다.[8] 199년 말, 11세 때 ''파테르 파트리아에'' 칭호를 받았다.[8] 202년에는 전년에 ''콘술 지명자''로 임명된 후 집정관이 되었다.[8] 그의 동료 집정관은 세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한 아버지였다.[10]
202년, 카라칼라는 자신이 증오했던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딸 풀비아 플라우틸라와 결혼해야 했다.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혼식은 그가 14세가 된 직후인 4월 9일과 15일 사이에 열렸다.[8]
205년, 카라칼라는 두 번째로 집정관이 되었고, 게타는 첫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했다.[8] 같은 해, 16세가 된 카라칼라는 플라우티아누스를 반역죄로 처형했는데, 아마도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그는 아내를 추방했고, 나중에 아내가 살해되었는데 이는 카라칼라의 명령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6]
207년 1월 28일, 18세가 된 카라칼라는 통치 10주년을 기념하는 ''데켄날리아''를 기념했다.[8] 208년은 그의 세 번째 집정관직과 게타의 두 번째 집정관직이었다.[8] 게타는 209년 9월이나 10월에 ''아우구스투스'' 지위와 호민관 권력을 부여받았다.[8]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카라칼라의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는 "수비대의 어머니"와 같은 명예로운 칭호를 받으며 눈에 띄는 공적인 역할을 했지만, 배후에서 남편이 제국을 다스리는 것을 돕는 역할도 했다.[11] 야심차다고 묘사되는 율리아 돔나는 제국 전역의 사상가들과 작가들을 주변에 모았다. 카라칼라가 계획된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동안 율리아는 로마에 남아 제국을 다스렸다. 율리아의 국가적 사무에 대한 영향력 증대는 황제의 어머니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추세의 시작이었고, 이는 세베루스 왕조 전체에 걸쳐 계속되었다.[1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칼레도니아 원정 중 브리타니아 속주의 에보라쿰(현재 요크)에서 병사하였다. 아버지의 원정에 동행했던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와 함께 실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아버지가 시작한 전쟁을 일찍 끝내고 로마로 귀환했다.
하지만 로마로 돌아온 형제는 각자 독자적으로 통치하기를 원하며 격렬하게 제국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극심한 다툼으로 내란이 일어날 지경이었고, 두 사람은 제국을 분할하여 통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국 영토 분열에 위기감을 느낀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반대에 부딪혀 궁궐 안에서 형제의 다툼은 계속되었다. 211년, 마침내 카라칼라는 게타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근위병을 매수하여, 어머니가 마련한 화해의 자리에서 동생을 살해했다. 게타는 달려온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카라칼라는 "동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고 주장했지만, 카라칼라 측이 먼저 공격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무나티오 메모리아에(명예형)를 원로원에 명령했다. 게타와 카라칼라를 함께 묘사한 화폐와 그림에서 게타의 모습은 모두 지워졌고, 흉상은 파괴되었다. 게다가 게타에게 호의적이었던 귀족과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숙청의 손길이 미쳤고, 고인이 된 아버지의 중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3. 3. 게타 살해 (211년-212년)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브리타니아 원정 중 요크에서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13] 두 형제는 칼레도니아와의 전쟁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왔으나,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15]
결국 카라칼라는 211년 12월 26일 어머니 율리아 도무나가 주선한 화해 자리에서 근위대를 시켜 게타를 살해했다.[13] 게타는 어머니의 품에서 죽었고, 카라칼라는 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았다.[13]
이후 카라칼라는 게타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원로원에 다므나티오 메모리아에(기록말살형)를 명하여 게타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16] 게타의 초상은 제거되고, 이름은 기록에서 삭제되었으며, 그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17] 이 과정에서 약 2만 명이 학살당했다.[16][17]
3. 4. 단독 황제 (212년-217년)
212년 2월, 카라칼라는 아버지가 죽은 지 1년 만에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 게타를 살해하고 단독 황제로 올랐다.[13] 게타는 어머니의 품에서 죽었는데, 두 사람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계승한 후 사이가 더욱 나빠졌기 때문에 카라칼라가 암살을 지시했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13]
이후 카라칼라는 게타의 지지자 대부분을 박해하고 처형했으며, 상원에 게타의 기억을 없애는 ''다므나티오 메모리아에''를 선포하도록 명령했다.[16] 게타의 초상은 모든 그림에서 제거되었고, 동전은 녹여졌으며, 동상은 파괴되었고, 그의 이름은 파피루스 기록에서 삭제되었으며, 게타의 이름을 말하거나 쓰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되었다.[17] ''다므나티오 메모리아에'' 이후 약 2만 명이 학살당했다.[16][17] 살해된 사람들은 게타의 측근 경호원과 고문, 친구들, 그리고 그의 고용하에 있는 다른 군사 직원들이었다.[16]
게타가 사망한 211년 이후, 카라칼라가 행정 업무를 지루하게 여겼기 때문에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책임이 증가했다.[11] 율리아 돔나는 청원을 접수하고 서신에 답하는 등 황제의 중요한 민정 업무 중 하나를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18] 그러나 이러한 역할의 범위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율리아 돔나는 아들을 대신하여 회의에 참석하고 질문에 답하는 역할을 했을 수 있지만, 법률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카라칼라에게 있었다.[18] 황제는 재판관, 입법자, 행정관으로서 법 체계의 모든 역할을 수행했다.[18]
213년 카라칼라는 북부 지역을 순찰하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했다. 215년에는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으나, 볼로가세스 5세가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줌으로써 명분을 잃고 중단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던 중 소요 사태를 진압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216년 볼로가세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살해되자 카라칼라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밀어붙였다. 이때 카라칼라가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원로원까지 반카라칼라 진영으로 돌변했다. 카라칼라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의심을 품은 병사들은 마크리누스에게 이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217년 4월, 카라칼라는 메소포타미아 카레 근처의 신전에서 자신을 경호하던 백인대장의 형을 죽인 것이 원인이 되어[80] 암살당했다.
4. 정책
카라칼라는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정책을 계승하여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군단병의 연봉을 675 데나리우스까지 인상하고, 병사들과 함께 식사하고 진지 건설에 참여하는 등 군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76] 그러나 이는 제국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77]
212년에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하여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세수 확대를 위한 조치로 여겨지지만, 속주민들에게 로마 제국에 대한 일체감을 심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 개주를 단행하여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량을 낮추고, 안토니니아누스라는 새 은화를 발행했다.[75] 그러나 안토니니아누스 은화의 은 함량도 데나리우스 은화의 1.5배에 불과하여, 결과적으로 화폐 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75]
213년, 알레만니족의 침입에 맞서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야만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28] 그럼에도 원로원은 카라칼라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Germanicus Maximus)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종교 정책으로는 이집트-그리스 신인 세라피스 신앙을 장려했다. 퀴리날 언덕에 세라피스 신전을 세우고,[31] 세라피스의 이미지가 새겨진 주화를 발행했다.[31]
4. 1. 안토니누스 칙령 (212년)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 안토니누스 헌법 또는 카라칼라 칙령이라고도 함)은 212년 카라칼라가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19] 다만, 전쟁에서 항복하여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사람들인 데디티키이(dediticii)와 해방 노예는 제외되었다.[20][21][22][23]212년 이전에는 로마 시민 대부분이 이탈리아의 주민이었으며, 기원후 14년 아우구스투스 사망 당시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약 4~7%만이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 이외 지역에서는 시민권이 로마 식민지(Roman colonia) 주민과 속주에 거주하는 로마인이나 그 후손, 제국 전역의 여러 도시 주민, 그리고 속국 왕과 같은 소수의 지역 귀족들에게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반면 속주민들은 일반적으로 비시민이었지만, 일부 관리와 그 가족 및 친척들은 라틴 시민권(Latin Right)을 소지하기도 했다.[27]
디오(Dio)는 카라칼라가 이 칙령을 발표한 목적 중 하나가 국가 수입 증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로마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군대에 대한 새로운 급여 인상 및 복리후생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이 칙령은 공공 봉사 의무를 확대했고, 로마 시민만 납부해야 했던 상속세와 해방세를 통해 수입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 중 부유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로마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칙령의 유일한 목적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속주민들 또한 이 칙령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는데, 이제 그들은 제국 내에서 로마인들과 동등한 파트너로서 자신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칙령 발표의 또 다른 목적은, 일부 칙령이 기록된 파피루스에 설명된 대로, 카라칼라를 음모로부터 구해준 신들에게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의 음모는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하고 그 추종자들을 학살한 데 대한 반응이었는데, 그의 형제가 폭군이었다면 형제 살해는 용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게타에 대한 ''다므나티오 메모리애(damnatio memoriae)''와 카라칼라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지불한 거액의 돈은 그 자신을 가능한 후유증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성공한 후, 카라칼라 자신은 로마의 신들에게 보답할 필요성을 느꼈고, 비슷한 웅대한 제스처를 통해 로마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이것은 시민권 부여를 통해 이루어졌다.
칙령 발표의 또 다른 목적은 제국의 변방이 이제 제국의 존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시민권 부여는 로마의 지속적인 시민권 확장의 논리적 결과였을 수도 있다.
4. 2. 군사 정책

213년, 게타가 죽은 지 약 1년 후, 카라칼라는 로마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28] 그는 북쪽 게르만 국경으로 가서 로마 제국의 국경인 리메스를 돌파한 게르만 부족 연합인 알레만니족을 상대했다.[28] 213년에서 214년 사이의 전투에서 카라칼라는 외교를 통해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일부 게르만 부족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지만, 정확히 누구와 조약을 맺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28] 그곳에서 카라칼라는 라에티아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국경 요새, 즉 아그리 데쿠마테스를 강화하여 이후 20년 동안 더 이상의 야만족 침입을 견딜 수 있게 했다.
214년 봄, 카라칼라는 다뉴브 지방과 아시아 및 비티니아 속주를 거쳐 동부 속주로 향했다.[8] 그는 214년에서 215년 사이의 겨울을 니코메디아에서 보냈다. 215년 4월 4일까지 니코메디아를 떠났고, 여름에는 오론테스 강에 있는 안티오크에 있었다.[8] 215년 12월에는 나일 삼각주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216년 3월이나 4월까지 머물렀다.[8]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카라칼라가 자신의 형제 게타를 자기 방어를 위해 죽였다는 주장을 듣고, 이를 비웃는 풍자를 만들었다.[29][30] 카라칼라는 215년 12월 그의 도착을 맞이하기 위해 도시 앞에 모인 주요 시민들의 사절단을 학살하고, 그의 군대를 알렉산드리아에 보내 여러 날 동안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31]
216년 봄, 그는 안티오크로 돌아왔고 5월 27일 이전에 로마 군대를 이끌고 파르티아로 향했다.[8] 215년에서 216년 사이의 겨울에는 에데사에 있었다.[8] 카라칼라는 그 후 동쪽으로 아르메니아로 이동했다. 216년까지 그는 아르메니아를 지나 파르티아 남쪽으로 진격했다.[32]
카라칼라는 황제 재위 기간 동안 군인들의 복지를 우선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군대에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28] 그는 군의 신뢰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후한 봉급 인상과 인기 있는 행보를 보였다.[37] 그는 병사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들의 복장을 따라 하고 그들의 태도를 받아들일 정도였다.[38]
216년, 카라칼라는 파르티아의 왕 아르타바누스 4세에게 자신과 왕의 딸 사이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아르타바누스는 이를 거절했다.[42] 이에 카라칼라는 파르티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 카라칼라는 카라칼라의 파르티아 전쟁에서 티그리스 강 동쪽의 시골 지역을 공격했다. 이듬해 겨울, 카라칼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사(오늘날 튀르키예의 샨르우르파)로 철수하여 봄에 군사 작전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카라칼라의 통치를 "인류 공통의 적"이라고 비난했다.[76] 그의 횡포는 213년 동방 속주로 이주한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동방 속주의 여러 도시와 지역은 약탈과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카라칼라가 근위병을 거느리고 불만을 억누르고, 원로원 의원들은 숙청을 두려워했으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도시 곳곳에 별장과 극장을 짓고, 자금이 부족해지자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에게 중과세를 부과했다고 비판했다.[76]
동방 속주 최대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카라칼라가 동생을 살해한 것을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것을 비꼬는 시가 유행했다. 카라칼라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민중을 학살하고, 수일간 도시를 파괴하며 2만 명 이상의 주민을 살해했다.
카라칼라는 군사력을 중시한 아버지 세베루스의 정책을 계승하여 군사비 증가와 병사 봉급 인상을 추진했다.[77] 군단병의 연봉은 675 데나리우스까지 높아졌다. 그는 병사들과 식사를 하거나 진지 건설에 자재를 운반하는 등의 행동으로 병사들의 신뢰를 얻었다.[76] 그러나 군사비의 급격한 증가는 제국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4. 3. 화폐 정책
카라칼라는 병사들에게 거액의 상여금을 지급하면서 발생한 막대한 지출 때문에 즉위 직후 화폐를 평가절하했다.[34] 세베루스 황제의 말년과 카라칼라 황제 초기에는 로마의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이 약 55%였지만, 카라칼라 황제의 통치 말기에는 약 51%로 감소했다.[34]215년, 카라칼라는 ''안토니니아누스''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데나리우스의 두 배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의도된 주화였다.[36] 그러나 이 새로운 화폐는 215년부터 217년까지 은 함량이 약 52%였고, 실제 크기 비율은 1 안토니니아누스 대 1.5 데나리우스였다. 따라서 ''안토니니아누스''는 약 1.5 ''데나리우스''와 동일했다.[36][35] 주화의 은 함량 감소로 인해 사람들은 은 함량이 더 높은 구화폐를 비축하게 되어, 이전의 데나리우스 평가절하로 인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36]
권력을 확립한 카라칼라 황제는 자금 확보를 위해 화폐 개주를 실시하여 화폐 가치를 낮췄다. 데나리우스 은화에 포함된 은의 양을 56.5%에서 51.5%로 줄이고, 대신 다른 금속을 섞어 가치를 떨어뜨렸다. 동시에 새로운 통화로 안토니니아누스 은화를 채택하여 2 데나리우스에 해당하는 가치로 설정했지만, 은 함량은 데나리우스 은화의 1.5배 정도였다.[75] 이러한 조치로 제국 내에서는 화폐 가치의 전반적인 하락이 발생하여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4. 4. 종교 정책
카라칼라는 즉위 초기에 이집트-그리스 신인 치유의 신 세라피스에 대한 제국의 지지를 선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이세움(Iseum)과 세라페움(Serapeum)은 카라칼라가 그의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공동 통치하던 시기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신전 근처에서 발견된 두 개의 비문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31] 세베루스 시대(Severan period)로 거슬러 올라가는 두 개의 파피루스(Papyrus)와 신전과 관련된 두 개의 조각상(약 200년경)이 추가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제공한다. 212년 카라칼라가 단독 통치자가 된 후, 제국 조폐소는 세라피스의 이미지가 새겨진 주화를 주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카라칼라 통치 기간 동안 신의 중심적인 역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게타가 죽은 후, 그를 죽인 무기는 카라칼라에 의해 세라피스에게 바쳐졌는데, 이는 세라피스를 배신으로부터 카라칼라를 보호하는 역할로 묘사하기 위한 행위였을 가능성이 크다.카라칼라는 또한 212년 퀴리날 언덕에 세라피스에게 봉헌된 신전을 세웠다.[31] 로마의 산타가타 데이 고티(Sant' Agata dei Goti) 교회에서 발견된 파편화된 비문은 세라피스 신에게 봉헌된 신전의 건설 또는 복원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는 카라칼라 또는 엘라가발루스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세라피스와의 강한 연관성으로 미루어 볼 때 카라칼라일 가능성이 더 높다. 세라피스에게 봉헌된 다른 두 개의 비문과 이세움 엣 세라페움(Iseum et Serapeum)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화강암 악어상도 퀴리날 언덕 주변에서 발견되었다.[31]
5. 건축 사업
로마의 카라칼라 목욕탕 건설은 카라칼라의 통치가 시작된 211년에 시작되었다. 이 테르메는 카라칼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216년에 목욕탕의 부분적인 개장이 있었지만, 목욕탕의 외곽 경계는 세베루스 알렉산더의 통치 기간까지 완성되지 않았다.[33]
이 거대한 목욕탕은 인구 밀도가 높은 대도시에서 사회 및 국가 활동을 위한 복합 단지를 건설하는 로마의 관행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33] 이 목욕탕은 약 50acre의 부지를 차지했으며, 한 번에 약 1,600명의 목욕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33] 고대 로마에서 건설된 두 번째로 큰 공중 목욕탕이었으며, 수영장, 운동장, 스타디온, 증기실, 도서관, 회의실, 분수대 및 기타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이 모든 시설은 정형화된 정원 안에 있었다.[33] 내부 공간은 다채로운 대리석 바닥, 기둥, 모자이크 및 거대한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33]
6. 유산과 평가
카라칼라는 암살 이후에도 완전한 악명 기억 말살(damnatio memoriae)을 당하지는 않았다. 비록 상원은 그를 싫어했지만, 군대 내에서의 인기 때문에 막리누스와 상원은 그를 공개적으로 적으로 선포하지 못했다.[50] 막리누스는 상원을 달래기 위해 카라칼라의 동상을 비밀리에 공공장소에서 치웠다. 대중은 그를 단죄받은 다른 황제들과 비교하며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경마를 폐지하고 그에게 헌정된 금은 동상을 녹일 것을 요구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제한적이었다.[50] 비문에 그의 이름을 지운 대부분의 경우는 우연적이거나 재사용의 결과였다. 막리누스는 카라칼라를 신격화하고 '디우스 안토니누스'(Divus Antoninus)로 기념하는 동전을 발행했으며, 단독 황제 재위 시기에 만들어진 어떤 이미지에서도 카라칼라의 고의적인 훼손은 없었다.[50]
카라칼라의 공식적인 초상화는 이전 철학자 황제들의 초연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짧게 깎은 머리와 공격적인 눈살로 강인한 군인 황제의 모습을 보여준다.[45] 이러한 이미지는 막시미누스 트랙스와 같이 군대의 지원에 의존했던 후대 황제들에게 계승되었다.[45] 그는 북유럽 의복을 선호했으며, "카라칼라"라는 이름은 그가 유행시킨 짧은 갈리아 망토에서 유래했다. 그는 종종 금발 가발을 착용하기도 했다.[46]
소년 시절 카라칼라는 화가 나거나 잔혹한 표정을 짓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47] 그의 이미지는 동생 게타와 구분되지 않다가, 197년 아우구스투스가 된 후 월계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49] 209년부터 아버지의 죽음까지 두 형제는 성숙한 청년으로 묘사되었고, 아버지 사후 카라칼라는 짧고 가득한 수염을 가진 채 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반면, 게타는 아버지와 같은 긴 수염을 길렀다.[49] 이는 게타가 아버지의 진정한 후계자로 여겨지려는 노력이었으나, 암살로 무산되었다.[49] 212년부터 217년까지 카라칼라의 단독 통치 기간 동안 제작된 대부분의 주화는 신성과의 연관성이나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50]
카라칼라가 남긴 유산으로는 212년에 발표된 카라칼라 칙령이 있으나, 고전 기록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42] 카라칼라 욕장은 철근 콘크리트 없이는 건설이 불가능했을 정도로 전례 없는 규모로 제시된다.[51]
제프리 가우먼의 허구 역사서인 『브리타니아 왕들의 역사』는 카라칼라를 브리타니아의 왕으로 묘사하며, 실제 이름인 바시안누스를 사용한다. 이야기 속에서 그는 브리타니아인 어머니를 둔 덕분에 왕위를 계승하고 카라우시우스에게 폐위될 때까지 통치했다. 그러나 카라우시우스의 반란은 실제로 카라칼라 사후 약 70년 후에 일어났다.[58]
카라칼라는 아들이 없었고, 다른 남계 후손 중에도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세베루스 왕조는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이후 근위대 사령관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즉위했으나,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군의 반발을 샀다. 율리아 마에사는 자신의 손자 엘라가발루스가 카라칼라의 적자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마크리누스는 살해되었다.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차례로 황제가 되었으나, 둘 다 암살당하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6. 1. 고대 기록
카라칼라는 카시우스 디오, 헤로디아누스, 그리고 《로마 황제전》(Historia Augusta) 등 고대 자료에서 잔혹한 폭군이자 야만적인 통치자로 묘사된다.[42] 이러한 묘사는 그의 친동생 게타를 살해하고 이어 게타의 지지자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건으로 더욱 뒷받침된다.[42] 당대 자료들은 카라칼라를 상원의원들보다 군인들을 더 선호했던 "군인 황제"로 제시하는데, 이는 상원 귀족 출신의 전기 작가들에게 그를 더욱 인기 없는 인물로 만들었다.[42] 디오는 카라칼라를 군인들과 함께 행군하고 군인처럼 행동하는 황제로 명시했으며, 그의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이로 인한 재정적 문제를 자주 언급했다.[42] 이러한 특징들이 기존의 고전 문헌에서 카라칼라의 이미지를 지배한다.[51]
《로마 황제전》은 사건, 역사 서술, 전기에 대한 기록에서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고대 문헌으로 역사가들에게 간주되며, 날조된 자료와 출처로 가득 차 있다.[52][53][54][55][56] 반면 안티오키아의 헤로디아누스의 저작은 《로마 황제전》에서 제시된 이야기보다 "훨씬 덜 허황된" 것이다.[52] 앤드류 G. 스콧은 디오의 저작이 이 시대에 대한 최고의 자료로 자주 간주된다고 제안한다.[57] 그러나 클레어 로완은 카라칼라에 대한 디오의 저작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므로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한다고 지적한다.[50] 디오는 카라칼라가 갈리아인의 변덕스러움, 아프리카인의 잔혹함, 시리아인의 교활함 등 세 가지 민족의 모든 결점을 한 사람에게 결합시켰다고 언급했다.[50] 로완은 디오가 제시한 사건의 개요는 일반적으로 정확하지만, 그 동기는 의심스럽다고 말한다.[50]
6. 2. 현대의 평가
카라칼라는 로마 황제 중 최악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이러한 인식은 현대 작품에도 이어지고 있다.[60] 미술 및 언어학 역사가 존 애그뉴와 작가 월터 비드웰은 카라칼라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저지른 파괴 행위를 언급하며 그에게 악령이 들렸다고 묘사한다.[61] 로마 역사가 데이비드 매기는 저서 "소아시아의 로마 지배"에서 카라칼라를 잔혹하고 폭정적인 인물로 묘사하며 그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정신병질을 지적한다.[62][63] 역사가 클리포드 안도는 이러한 묘사를 뒷받침하며, 카라칼라가 유일한 황제로서 통치했던 기간은 도둑질, 학살, 관리 부실이라는 범죄로 거의 "독점적으로" 주목받는다고 제안한다.[64]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흥망사"에서 게타 살해와 그 지지자들의 학살로 얻은 카라칼라의 악명을 그의 주 순방에 적용하여 "모든 주는 차례로 그의 약탈과 잔혹 행위의 현장이 되었다"고 주장한다.[60] 기번은 카라칼라를 하드리아누스와 같이 주를 원정하며 경력을 쌓은 황제들과 비교하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와 같은 로마에 머물며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에만 영향을 미친 폭군들과 비교했다. 기번은 로마인과 속주민 모두가 그의 "약탈과 잔혹 행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카라칼라가 "인류의 공공의 적"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묘사는 역사가 섀머스 실라에 의해 의문을 제기되는데, 그는 서부 주에서의 도로 건설과 요새화 강화 등을 기번이 묘사한 잔혹 행위와 파괴에 대한 묘사와 모순된다고 주장한다.[65] 역사 교수인 몰레피 아산테와 샤자 이스마일은 카라칼라가 그의 통치의 불명예스러운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권력의 말을 거의 지칠 때까지 탔다"고 말하며 그의 통치는 짧았지만 그의 삶, 성격, 행위는 그를 로마 제국에서 주목할 만한, 비록 유익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만들었다고 언급한다.[66]
18세기 후반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에서 카라칼라의 이미지가 다시 등장했다. 그의 폭정은 장-바티스트 그뢰즈, Julien de Parme|쥘리앵 드 파르므프랑스어, 자크-루이 다비드, 장 본부아쟁, Jacques-Augustin-Catherine Pajou|자크-오귀스탱-카트린 파주프랑스어, 기욤 기용-르티에르 등 여러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그들이 카라칼라에 매료된 것은 프랑스 국민들의 왕정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카라칼라는 고대 작품 번역과 당시의 현대 작품을 포함한 여러 프랑스어 문헌 자료 덕분에 주목받았다. 그의 초상화의 독특한 스타일과 다른 황제들과 구분되는 그의 특이한 군인 스타일의 복장 덕분에 화가들은 카라칼라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절대 군주제가 폭정의 공포가 될 수 있으며, 체제 개혁에 실패하면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될 수 있다. 미술사학자 수전 우드는 이 개혁이 혁명의 본래 목표대로 입헌 군주제가 되는 것을 의미했지, 결국 공화정이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우드는 또한 카라칼라와 그의 범죄로 이어진 암살, 그리고 루이 16세 국왕에 대한 최종적인 봉기와 그의 죽음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두 통치자 모두 명백한 폭정으로 인해 죽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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