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예 뒤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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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예 뒤 시네마는 1951년 앙드레 바쟁,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조제프마리 로 뒤카에 의해 창간된 프랑스의 영화 잡지이다. 초기에는 리얼리즘을 옹호했으나, 젊은 비평가들이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등 미국 영화 감독을 옹호하면서 바쟁과 갈등을 겪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작가주의' 주장은 이 잡지의 핵심 주장이 되었으며, 오토르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후 누벨바그 영화 운동의 기반을 다졌으며, 정치적, 사회적 관점을 반영하며 다양한 영화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1990년대에는 일본판이 발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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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예 뒤 시네마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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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제목(프랑스어) | Cahiers du Cinéma |
로마자 표기 | Kaje du Sinema |
번역 | 영화 노트, 영화 리뷰 |
![]() | |
국가 | 프랑스 |
언어 | 프랑스어 |
종류 | 영화 잡지 |
발행 주기 | 월간 |
기반 | 파리 |
첫 발행일 | 1951년 4월 |
ISSN | 0008-011X |
웹사이트 | 카예 뒤 시네마 공식 웹사이트 |
역사 | |
창간 | 1951년 |
창간 배경 | Objective 49 라탱 구역 영화 클럽 |
추가 정보 | |
이전 이름 | Revue du Cinéma |
2. 역사
1951년 4월, 앙드레 바쟁,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조제프마리 로 뒤카 등이 ''시네마 리뷰''를 계승하여 ''카예 뒤 시네마''를 창간했다.[4] 이들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시네마 리뷰''에 참여하며 영화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고, ''카예 뒤 시네마''는 이 잡지의 후속작이었다.[5] 초기에는 앙드레 바쟁이 편집 위원회 책임자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7][8]
바쟁은 ''카예''가 ''리뷰''의 지적 비평 형식을 계승하여 영화의 리얼리즘을 옹호하길 원했다. 그러나 장 뤽 고다르가 1952년 9월호에서 바쟁의 편집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9][10] 젊은 비평가들은 점차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와 같은 미국 상업 영화 감독에 대한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6]
1954년 1월, 프랑수아 트뤼포는 '프랑스적 품질'( '품질의 전통'으로 번역됨)을 비판하는 기사를 통해 바쟁과 결별했다. 이 기사는 ''폴리틱 데 오퇴르'' 선언문이자 오토르 이론의 기반이 되었다.[11][8]
1950년대 말, ''카예'' 편집자들은 영화 비평에 불만을 느끼고 프랑스 누벨 바그 운동을 이끌었다. 1963년 자크 리베트가 편집장이 되면서 잡지는 좌파적 정치, 사회적 관심사로 방향을 전환하고, 할리우드 영화보다 다른 영화에 더 주목했다.
1970년대에는 마오이즘 편집 위원회가 운영되기도 했지만, 1970년대 중반 ''죠스'' 리뷰를 계기로 상업적 관점으로 복귀했다. 1998년 ''카예''는 르 몽드(르 몽드프랑스어)에 인수되었고,[21] 2009년 파이돈 프레스에 매각되었다.[1] 2020년 프랑스 기업가들이 인수했지만, 편집진은 전원 사임했다.[22][23][24]
1991년 일본어판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이 창간되어 2001년 휴간 전까지 독자적 비평 활동을 했다.[1]
2. 1. 창간과 초기 (1951-1950년대)
1951년 4월, 앙드레 바쟁,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조제프마리 로 뒤카 등은 '시네마 리뷰'를 계승하여 '카예 뒤 시네마'를 창간했다.[4] 이들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시네마 리뷰'에 참여하며 영화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고, '카예 뒤 시네마'는 이 잡지의 후속작으로 만들어졌다.[5]초창기 '카예 뒤 시네마'는 30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로, 밝은 노란색 배경에 영화 스틸을 사용한 미니멀한 표지가 특징이었다. 각 호에는 4~5개의 기사가 실렸으며, 대부분 특정 영화 리뷰나 감독에 대한 찬사였고, 때때로 이론적 에세이가 추가되었다. 대부분의 호에 앙드레 바쟁의 글이 최소 한 편 이상 실렸다.[6][7] 바쟁은 창간 초기 편집 위원회의 사실상 책임자로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7][8]
바쟁은 '카예 뒤 시네마'가 '시네마 리뷰'의 지적 비평 형식을 계승하여 영화의 리얼리즘을 옹호하길 원했다. 그러나 장 뤽 고다르는 1952년 9월호에서 바쟁의 편집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9][10] 젊은 비평가들은 점차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와 같은 미국 상업 영화 감독에 대한 비평적 찬사를 쓰기 시작했다.[6]
1954년 1월, 프랑수아 트뤼포는 '프랑스적 품질'(일반적으로 '품질의 전통'으로 번역됨)을 비판하는 기사를 통해 바쟁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영화들을 상상력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단순하며, 문학 작품을 부도덕하게 각색했다고 비난했다.[11][8] 이 기사는 ''폴리틱 데 오퇴르''의 선언문이 되었고, 이는 영화 제작에서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카예 뒤 시네마' 젊은 비평가들의 레이블이 되었다. 이후 미국 영화와 히치콕, 혹스, 제리 루이스, 로버트 알드리치, 니콜라스 레이, 프리츠 랑과 같은 감독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2] 미국 비평가 앤드류 사리스는 이를 "오토르 이론"이라 명명했다.[12]
트뤼포의 기사 발표 후, 로 뒤카를 제외한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젊은 작가들을 지지했다. 로 뒤카는 1년 후 '카예 뒤 시네마'를 떠났고,[8] 바쟁은 건강 악화로 에릭 로메르에게 편집권을 넘기고 파리를 떠났지만, 계속 글을 기고했다.[6] 젊은 비평가들은 '카예 뒤 시네마'의 형식을 변경하여, "오토르"로 여겨지는 감독들과 인터뷰를 하고 10명의 핵심 비평가로 구성된 "평의회"에서 영화를 투표했다.[14] 또한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미조구치 겐지, 막스 오퓔스, 장 콕토 등 비미국 감독들을 옹호했는데, 이들 중 많은 감독들을 바쟁이 그들에게 소개했었다. ''미장센''(잡지에서 "연구의 지배적인 대상")[15]에 대한 글을 썼다.
1950년대 말, '카예 뒤 시네마'의 편집자들은 영화 비평 자체에 불만을 느끼고 영화 제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 도니올발크로즈는 영화 제작과 글쓰기를 병행했고, 이들의 영화는 프랑스 누벨 바그의 기반을 형성했다.[8][17]
2. 2. 누벨바그와 1960년대
1950년대 말, 카예 뒤 시네마의 편집자들은 영화 비평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직접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에릭 로메르를 비롯하여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등이 영화 제작과 비평을 병행했다. 이들은 영화 형식의 이론적, 예술적 측면을 실험적으로 탐구했고, 이는 프랑스 누벨 바그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8][17]에릭 로메르는 새로운 편집자를 고용하고, 자크 리베트는 더 많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비평가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선호하고 누벨 바그 영화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이며 로메르와 갈등을 빚었다. 자크 리베트를 중심으로 한 편집자 그룹은 로메르에게 새로운 영화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1963년 리베트가 편집장 자리를 이어받았다.[19]
자크 리베트[20]는 잡지의 방향을 좌파적 정치, 사회적 관심사로 전환하고, 할리우드 영화보다 다른 영화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잡지의 스타일은 1960년대 초 문학적 모더니즘에서 1970년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변화했다.
2. 3. 1970년대 이후의 변화
1970년대에 ''카예 뒤 시네마''는 마오이즘 편집 위원회가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미국 영화 ''죠스''에 대한 리뷰를 계기로 잡지는 상업적인 관점으로 복귀했다. 이와 함께 편집진도 바뀌었는데, 세르주 다네, 세르주 투비아나 등이 새롭게 편집진에 합류했다.[2] 이들은 일부 ''카예''의 옛 호감 인물들과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라울 루이스와 같은 새로운 영화 제작자들을 재조명했다.[2]1998년, ''카예''를 발행하던 에디시옹 드 레투알은 언론 그룹 르 몽드(르 몽드프랑스어)에 인수되었다.[21] 1999년에는 새로운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잡지 개편을 시도했지만, 이는 작가들 사이의 분열을 초래했다.[1][2] 2003년, 르 몽드는 장-미셸 프로동을 편집장으로 임명했다.[1]
2009년 2월, ''카예''는 파이돈 프레스의 소유주인 리처드 슐라그만에 의해 인수되었다.[1] 같은 해 7월, 스테판 델로름과 장-필리프 테세가 각각 편집장과 부편집장으로 승진했다.
2020년 2월, ''카예''는 자비에 니엘과 알랭 베일을 포함한 여러 프랑스 기업가에 의해 인수되었다. 그러나 전체 편집진은 편집 독립성에 대한 위협을 이유로 사임했다.[22][23][24]
2. 4. 일본판 카예 뒤 시네마
1991년 일본어판인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カイエ・デュ・シネマ・ジャポン)이 창간되었다. 1980년대 프랑스 본지에 기고했던 우메모토 요이치가 편집장을 맡아 프랑스 본지의 비평을 번역해 소개하는 것 외에도 독자적인 비평 활동을 펼쳤다. 프랑스 본지처럼 아오야마 신지, 시노자키 마코토 등 영화 작가를 배출하기도 했다.[1] 필름 아트사, 게이소 쇼보로 판본을 변경한 후 2001년에 휴간되었다.[1]3. 주요 특징
카예 뒤 시네마는 비평적 특징과 영화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4. 주요 인물
카예 뒤 시네마프랑스어는 1951년 4월 앙드레 바쟁, 자크 도니올 발크로즈, 조제프 마리 로 뒤카 등에 의해 창간되었다.[4][5] 이들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시네마 리뷰'' 출판에 참여하며 영화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다.[5]
초창기 ''카예''는 30페이지 분량의 소책자 형태였으며, 바쟁이 편집 위원회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7][8] 바쟁은 영화의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비평을 주도했으나, 장 뤽 고다르 등 젊은 비평가들은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와 같은 상업적인 미국 영화를 옹호하며 바쟁과 다른 견해를 보였다.[6]
1954년, 프랑수아 트뤼포는 "프랑스적 품질"( "품질의 전통"으로 번역됨)을 비판하는 기사를 통해 오토르 이론의 선언문을 제시했다.[11][8] 이는 감독을 영화의 "작가"로 간주하고 미국 영화와 히치콕, 혹스, 제리 루이스, 로버트 알드리치, 니콜라스 레이, 프리츠 랑 등의 감독들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2]
에릭 로메르가 편집장이 되면서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미조구치 겐지, 막스 오퓔스, 장 콕토 등 비미국 감독들을 옹호하고 미장센을 중요하게 다루었다.[14][15]
1950년대 말, 고다르,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등은 영화 비평뿐만 아니라 직접 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프랑스 누벨 바그 운동의 기반을 형성했다.[16][8][17]
4. 1. 편집장
André Bazin프랑스어, Éric Rohmer프랑스어, Jacques Rivette프랑스어, Jean-Michel Frodon프랑스어 등 역대 편집장들의 활동과 편집 방향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앙드레 바쟁''' (1951년 - 1958년): 카예 뒤 시네마의 창간 편집장으로, 잡지의 초기 방향을 설정했다. 장 조르주 오리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폐간된 『라 르뷔 뒤 시네마』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크 도니올 발크로즈 등과 함께 시네클럽 뒤 카르티에 라탱의 기관지였던 『라 가제트 뒤 시네마』의 필진을 모아 카예 뒤 시네마를 창간했다.[4][5] 바쟁은 영화의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비평을 주도했으며, 젊은 비평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7][8] 그러나 장 뤽 고다르를 필두로 한 젊은 비평가들이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등 상업적인 미국 영화를 옹호하면서 바쟁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6] 건강 악화로 파리를 떠났지만, 잡지에 계속 글을 기고했다.[6] 1958년 파리 교외에서 사망했다.
- '''에릭 로메르''' (1958년 - 1963년): 바쟁의 뒤를 이어 편집장이 되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프랑스적 품질" 비판을 지지하며, 오토르 이론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2]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미조구치 겐지 등 비미국 감독들을 옹호했다.[14] 미장센을 중요하게 다루었다.[15] 그러나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에 대한 편집 방향 차이로 인해 자크 리베트를 중심으로 한 다른 편집자들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편집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9]
- '''자크 리베트''' (1963년 - 1965년): 로메르의 후임으로 편집장이 되어 잡지의 방향을 좌파적 정치, 사회적 관심사로 전환하고, 할리우드 영화보다 다른 영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20]
- '''장 루이 코몰리''' (1966년 - 1971년): 1962년부터 편집부에 참여했으며, 리베트의 뒤를 이어 편집장이 되었다.
- '''세르주 다네''' 등 (1970년대 이후): 1968년 이후 좌경화, 이론화되었던 잡지의 독자층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 '''장미셸 프로동''' (2003년 - 2009년): 르 몽드가 잡지의 편집권을 인수한 후 편집장이 되었다.
- '''스테판 델로름''' (2009년 7월 - ): 파이돈 프레스가 잡지를 인수한 후 편집장이 되었다.
- '''엠마뉘엘 뷔르도''' (현재): 장미셸 프로동과 함께 현재 편집진을 구성하고 있다.
'''특별 편집장''': 창간 300호부터 100호마다 영화감독을 특별 편집장으로 맞이하여 기념호를 발행했다.
4. 2. 주요 기고자 (비평가,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장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등은 '카예 뒤 시네마'에서 비평가로 활동하다가 পরবর্তীতে 프랑스 누벨 바그를 이끈 영화감독이 되었다.[8][17] 이들은 영화 비평을 통해 영화 형식의 이론적, 예술적, 이념적 측면을 탐구했으며, 이는 누벨 바그 영화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8][17]- '''프랑수아 트뤼포'''는 1954년 '카예 뒤 시네마'에 기고한 "프랑스적 품질"(일반적으로 "품질의 전통"으로 번역됨)이라는 기사를 통해 당시 프랑스 영화들을 비판하고, 오토르 이론의 선언문을 제시했다.[11][8]
- '''장뤽 고다르'''는 1952년 '카예 뒤 시네마'에 바쟁의 편집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기사를 썼으며,[9][10] 1956년 파리로 돌아와 단편 영화를 제작하는 등 영화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13]
- '''클로드 샤브롤'''은 '카예 뒤 시네마'의 젊은 비평가 그룹 중 한 명으로, 고다르, 트뤼포와 함께 영화 제작과 영화 비평을 병행했다.[16]
'카예 뒤 시네마' 출신 영화감독들은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레오스 카락스,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이 있다.
'카예 뒤 시네마'에 기여한 평론가들은 로테 아이스너, 장 두셰, 야마다 코이치, 세르주 다네 등이 있다.
'카예 뒤 시네마'와 관련된 한국인은 현재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5. 영향 및 평가
1951년 앙드레 바쟁,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조제프마리 로 뒤카가 창간한 ''카예 뒤 시네마''는 영화 비평과 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잡지는 영화를 예술 형식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데 앞장섰다.
초창기 ''카예''는 30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로, 밝은 노란색 배경에 영화 스틸을 사용한 미니멀한 표지가 특징이었다. 각 호에는 4~5개의 기사가 실렸으며, 대부분 특정 영화 리뷰나 감독 찬사였고, 때때로 더 긴 이론적 에세이가 추가되었다.[7]
바쟁은 ''카예''가 ''리뷰''의 지적 비평 형식을 계승하길 원했고, 리얼리즘을 옹호했다. 그러나 젊은 비평가들은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등 상업적인 미국 영화 제작자를 옹호하며 바쟁과 다른 의견을 보였다.[6]
1954년 프랑수아 트뤼포는 "프랑스적 품질"(the French quality|일반적으로 "품질의 전통"으로 번역됨프랑스어)을 비판하며, 당시 프랑스 영화들을 상상력이 부족하고 단순하며, 문학 작품을 부도덕하게 각색했다고 주장했다.[11][8] 이는 ''폴리틱 데 오퇴르''(the policy of the authors|lk=no프랑스어) 선언문이 되었고, 미국 영화와 히치콕, 혹스, 제리 루이스, 로버트 알드리치, 니콜라스 레이, 프리츠 랑 등의 감독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었다.[2] 앤드류 사리스는 "오퇴르"에 "이론"을 결합하여 "오토르 이론"을 만들었다.[12]
젊은 비평가들은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미조구치 겐지, 막스 오퓔스, 장 콕토 등 비미국 감독들을 옹호하고, 미장센(잡지에서 "연구의 지배적인 대상")[15]에 대해 썼다.
이후 편집진 교체와 함께 정치, 사회적 관심을 좌파로 옮겼고,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영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20] 잡지 스타일은 1960년대 초 문학적 모더니즘을 거쳐 1970년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이동했고, 마오이스트 편집 위원회가 운영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죠스'' 리뷰는 상업적 관점으로 복귀했음을 알렸고, 편집진이 바뀌었다.[1]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라울 루이스, 허우 샤오시엔, 유세프 샤힌, 모리스 피알라 등 새로운 영화 제작자들이 재조명되었다.
1998년 르 몽드프랑스어에 인수되었고, 2009년 파이돈 프레스에 매각되었다.[1][21] 2020년 프랑스 기업가들에게 인수되었으며, 편집진은 편집 독립성 위협을 이유로 사임했다.[22][23][24]
5. 1. 영화 비평과 이론에 대한 영향
카예 뒤 시네마프랑스어는 영화 비평과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1년 창간 이후, 이 잡지는 영화를 예술 형식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데 앞장섰으며, 특히 젊은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작가주의 (la politique des auteurs프랑스어)를 주창하며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 이들은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등 할리우드 감독들을 재평가하고, 앤드류 사리스가 이를 "오토르 이론"으로 정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12]1950년대 후반,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등 카예 뒤 시네마프랑스어의 비평가들은 직접 영화 제작에 뛰어들면서 프랑스 누벨 바그 운동을 이끌었다.[17] 이들은 영화 형식의 다양한 이론적, 예술적, 이념적 측면을 실험적으로 탐구하며, 영화 제작 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8]
카예 뒤 시네마프랑스어는 미장센을 중요하게 다루며,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미조구치 겐지 등 비미국 감독들을 옹호했다.[15] 1960년대 이후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좌파로 옮기며, 1970년대에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마오이스트 편집 위원회 운영을 거치기도 했다.[20]
1998년 르 몽드프랑스어에 인수된 후, 2009년 파이돈 프레스에 매각되었다.[1][21] 2020년에는 프랑스 기업가들에게 인수되었으며, 편집진은 편집 독립성 위협을 이유로 사임했다.[22][23][24]
카예 뒤 시네마프랑스어는 창간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매년 10대 영화 목록을 발표해 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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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hiers Du Cinéma Will Continue to Pub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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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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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Notes on the Auteur Theory in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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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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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on Cahiers
https://www.newyo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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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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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Jacques Rivette and Cahiers du cinéma · Senses of Cinema
http://sensesofcinem[...]
2005-02-08
[21]
뉴스
Le Monde sells influential cinema magazine Cahiers du Cinéma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09-02-10
[22]
웹사이트
Rachat des Cahiers du Cinéma : entre inquiétude et optimisme
https://www.lesinroc[...]
Les Inrockupti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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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Clap de fin pour la rédaction des " Cahiers du cinéma "
https://www.lesechos[...]
Les Echos
2020-03-01
[24]
웹사이트
La rédaction quitte les Cahiers du cinéma (communiqué)
https://www.acrimed.[...]
acrimed.org
2020-03-01
[25]
뉴스
映画狂のバイブル、仏カイエ・デュ・シネマ誌が英アート出版社に売却
https://eiga.com/new[...]
eiga.com
200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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