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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츠바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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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츠바흐 전투는 1813년 8월 26일, 실레지아에서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과 맥도날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 이전 나폴레옹은 보헤미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켰고, 맥도날에게 블뤼허를 카츠바흐 동쪽으로 몰아내고 방어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맥도날은 공격을 감행했고, 갑작스러운 홍수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프랑스군은 3만 명 이상의 병력과 103문의 대포를 잃었고, 연합군은 22,000명가량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의 승리는 드레스덴 전투에서의 나폴레옹의 승리를 퇴색시켰고, 연합군 지도부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블뤼허는 발슈타트 공작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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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츠바흐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나폴레옹 전쟁 중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일부
전투명카츠바흐 전투
날짜1813년 8월 26일
장소프로이센 왕국 레그니차 근처
결과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21px]] 프로이센 왕국
[[파일:Russian Empire 1914 17.svg|25px]] 러시아 제국
교전국 2프랑스 제국
지휘관
지휘관 1블뤼허
루트비히 요르크
오스텐-자켄
지휘관 2마크도날
자크 로리스통
프랑수아 바스티앙 세바스티아니
부대 정보
부대 1슐레지엔 방면군
부대 2보버 방면군
병력 규모
병력 180,000명–95,000명
병력 260,000명–75,000명
피해 규모
피해 1 (전투)1,000명 사망 및 부상
피해 1 (전역)22,000명
피해 2 (전투)알 수 없음
피해 2 (전역)30,000명
포 103문
기타 정보
카츠바흐 전투 (에두아르트 캠프너 그림)
카츠바흐 전투 (에두아르트 캠프너 그림)

2. 전투 이전 상황

1813년, 나폴레옹은 유럽 제패를 위한 야망을 이어갔지만,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그의 세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유럽 각국은 반(反) 나폴레옹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2. 1. 플레세비츠 휴전과 그 이후

블뤼허는 플레세비츠 휴전이 8월 17일에 종료되기 전인 8월 13일에 실레지아 군에게 진격을 명령했다. 연합군은 일련의 도망전에서 혼란에 빠진 프랑스군을 격퇴했는데, 프랑스군은 연합군이 이처럼 대담하게 휴전을 깨뜨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소한 승리들은 경험이 부족한 독일 징집병들의 사기를 높였다. 첫날, 블뤼허와 그의 참모장 아우구스트 나이드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는 서로 떨어져 있었고, 늦게서야 병력 이동 명령을 내려 연합군의 진격을 늦추었다. 프랑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연합군의 야간 행군은 끊임없는 전투와 지연으로 인해 여러 번 반복되었으며, 날씨는 악화되었다. 8월 20일, 블뤼허의 부대는 나폴레옹의 주력 부대와 보버 강에서 마주했고, 프랑스 군대가 프랑스 황제의 도착을 알리는 환호성을 지르자 급하게 퇴각했다.

이후 5일 동안 실레지아 군은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추격하는 프랑스 군대에 맞서 격렬하고 대가가 큰 후위 부대 작전을 벌였다. 블뤼허는 8월 21일, 22일, 23일 전투에서 6,000~8,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8월 17일 이후 프랑스군의 손실도 거의 그와 같았다. 블뤼허의 군대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루드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의 군단은 5,000명이 탈영했다. ''국토방위군'' 민병대는 대대 전체가 집단 탈영했고, 연합군 군단 지휘관들은 참모의 무능함 때문에 군대가 파멸에 이르고 있다고 불평했다. 블뤼허는 그나이제나우를 해고하는 것을 고려했다.

나폴레옹은 8월 23일 근위대, 제1군단, 제6군단, 제1기병군단을 이끌고 슈바르첸베르크의 보헤미아군에 맞서기 위해 작센으로 돌아갔다. 같은 날, 그는 10만 명 규모의 보버 군을 자크 맥도날 원수 휘하에 편성하고, 블뤼허를 카츠바흐 동쪽으로 몰아낸 다음 보버 서쪽 강둑으로 후퇴하여 작센과 베를린 인근의 프랑스 군대의 측면을 보호하는 방어 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맥도날은 또한 블뤼허가 공세를 취할 경우 공격할 수 있는 권한도 받았다. 맥도날은 미셸 네 원수가 나폴레옹이 네를 괴를리츠로 소환한 것을 그의 3개 사단 규모의 제3군단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48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8월 24일 늦게 네는 조제프 수함에게 지휘권을 넘겼고, 수함은 8월 25일 자신의 군단을 맥도날의 전열로 이동시켰다. 제3군단 외에도 맥도날은 제5군단, 제11군단, 제2기병군단을 지휘했다.

8월 24일 블뤼허는 나폴레옹이 더 이상 추격 부대를 직접 지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날 오후 7시에 자신의 군대에 방향을 돌려 8월 25일에 기병 정찰을 사용하여 적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8월 25일 오후 11시, 맥도날은 다음 날 자신의 군대를 야우어 마을로 이동하여 블뤼허를 격파하거나 더 깊숙이 실레지아로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도날의 연락병은 수함에게 4시간 30분 늦게 도착했다. 수함은 오전 11시 30분에 자신의 군단을 크로이치로 이동했는데, 이는 군단의 한 개 사단만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2. 2. 나폴레옹의 전략 변화

나폴레옹은 1813년 8월 23일 근위대, 제1군단, 제6군단, 제1기병군단을 이끌고 슈바르첸베르크의 보헤미아군에 맞서기 위해 작센으로 돌아갔다. 같은 날, 자크 맥도날 원수 휘하에 10만 명 규모의 보버 군을 편성하고, 블뤼허를 카츠바흐 동쪽으로 몰아낸 다음 보버 서쪽 강둑으로 후퇴하여 작센과 베를린 인근의 프랑스 군대의 측면을 보호하는 방어 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맥도날은 블뤼허가 공세를 취할 경우 공격할 수 있는 권한도 받았다.

3. 카츠바흐 전투 (1813년 8월 26일)

클라인의 카츠바흐 전투.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군을 강으로 몰아넣고 있다.


1813년 8월 26일, 맥도날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이 불어난 카츠바흐 강에서 격돌했다.

전투는 폭우와 갑작스러운 홍수로 인해 다수의 다리가 유실되고 여울이 파괴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맥도날은 공격을 결심하고 약 6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연합군 우익을 공격하려 했으나, 프랑스 부대들은 서로 지원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블뤼허는 우익 부대에 전진 명령을 내렸고, 머스킷 소총은 젖어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백병전으로 전개되었다.

3. 1. 양측의 초기 배치와 계획

맥도날은 야우어로 군대를 이동시켜 블뤼허의 군대를 격파하거나 실레지아 깊숙이 몰아넣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블뤼허는 나폴레옹이 더 이상 프랑스군을 직접 지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공세로 전환하여, 8월 25일 오후 7시에 휘하 부대에 방향을 돌려 기병 정찰로 적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3. 2. 전투 경과

1813년 8월 26일, 불어난 카츠바흐 강에서 맥도날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이 오전 9시에 서로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홍수로 다수가 유실되고 여울이 파괴되어 양측 모두 혼란에 빠졌다.

맥도날은 공격을 결심하고 약 6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연합군 우익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부대들은 서로 지원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블뤼허는 우익 부대에 전진 명령을 내렸고, 머스킷 소총은 젖어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백병전으로 전개되었다.

3. 2. 1. 프로이센 기병대의 활약



맥도날이 이끄는 프랑스군 3만 명은 프로이센 기병대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다. 지원군이나 증원 없이, 프랑스 제2 기병 군단, 브레이어(Brayer)의 제8 사단, 뫼니에(Meunier)의 제2 여단은 오후 6시 30분에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전 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3. 2. 2. 프랑스군의 패배와 퇴각



맥도날이 불어난 카츠바흐 강을 건넌 후 오전 9시에 양측 군대는 서로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홍수로 많은 다리가 유실되고 여울이 파괴되었다. 혼란과 폭우 속에서 맥도날은 먼저 정신을 차린 듯했다. 나폴레옹의 주력 부대의 측면을 블뤼허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원래 명령이었지만, 맥도날은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약 6만 명을 파견하여 러시아-프로이센 우익을 측면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부대가 서로 지원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혼란이 다시 발생했다.

블뤼허는 그의 우익에게 전진 명령을 내렸다. 머스킷은 발사하기에는 너무 젖었고 전투는 냉병기로 결정되었다. 연합군을 붙잡아 두기로 되어 있던 맥도날의 나머지 3만 명은 프로이센 기병대의 강력한 반격을 받았다. 지원이나 증원 없이, 프랑스 제2 기병 군단, 브레이어의 제8 사단, 뫼니에의 제2 여단은 오후 6시 30분에 블뤼허의 전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 맥도날 군대의 잔여 병력은 후퇴했고, 수백 명이 카츠바흐 강과 범람한 레이징 나이세 강에서 익사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카츠바흐 전투는 연합군에게 중요한 승리였다. 드레스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에서 이탈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블뤼허의 승리 소식은 연합군 지도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승리는 드레스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의 의미를 퇴색시켰으며, 이후 쿨름 전투데네비츠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승리로 블뤼허는 1814년 6월 3일 "발슈타트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전투로 인해 "Der geht ran wie Blücher an der Katzbach!" ("그는 블뤼허가 카츠바흐에서처럼 진격한다!")라는 독일 속담이 생겨났는데, 이는 활기차고 강력한 행동을 묘사하는 말로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4. 1. 인명 피해

프랑스군은 3만 명 이상의 병력과 103문의 대포를 잃었고, 연합군은 약 2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8월 26일 맥도날 장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9월 1일까지 전사 및 부상자 12,000명, 포로 18,000명으로 집계되었다. 블뤼허 장군은 전투에서 전사 및 부상자 1,000명, 작전 전체에서 22,000명의 손실을 보았다.

4. 2. 전략적 영향

드레스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에서 이탈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블뤼허의 승리 소식은 연합군 지도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카츠바흐 전투의 승리는 드레스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의 의미를 퇴색시켰으며, 이후 쿨름 전투데네비츠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승리로 블뤼허는 1814년 6월 3일 "발슈타트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전투로 인해 독일 속담이 생겨났는데,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Der geht ran wie Blücher an der Katzbach!" ("그는 블뤼허가 카츠바흐에서처럼 진격한다!")는 말은 블뤼허를 지칭하며 활기차고 강력한 행동을 묘사하는 말이다.

4. 3. 블뤼허의 명성

블뤼허는 이 전투의 승리로 1814년 6월 3일 "발슈타트 공작" 칭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Der geht ran wie Blücher an der Katzbach!" ("그는 블뤼허가 카츠바흐에서처럼 진격한다!")라는 독일 속담이 생겨났는데, 이는 활기차고 강력한 행동을 묘사하는 말로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5. 전투에 대한 평가 및 분석

카츠바흐 전투는 기상 조건과 지형이 전투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6. 기타

카츠바흐 전투로 인해 "Der geht ran wie Blücher an der Katzbach!" (블뤼허가 카츠바흐에서처럼 진격한다!)라는 독일 속담이 생겼으나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이 속담은 활기차고 강력한 행동을 묘사하는 말이다. 두니노 마을에는 전투 박물관이 있으며, 기념비에는 전투 당시 프랑스군의 피해 상황이 독일어로 적혀 있다.

두니노 마을에 위치한 카츠바흐 전투 박물관


기념비. "이곳에서 프랑스군은 격렬한 나이세 강을 건너려다 격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범람한 강물에 빠져 죽었다"라는 문구가 독일어로 적혀 있다.

6. 1. 독일 속담

이 전투로 인해 현재는 쓰이지 않는 독일 속담이 생겨났다. "Der geht ran wie Blücher an der Katzbach!" ("그는 블뤼허가 카츠바흐에서처럼 진격한다!")는 속담은 활기차고 강력한 행동을 묘사하는 말이다.

6. 2. 기념물 및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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