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탕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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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탕가국은 1960년 벨기에령 콩고가 독립한 후, 모이즈 촘베가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카탕가 주의 분리 독립을 선언하며 수립되었다. 풍부한 광물 자원을 배경으로 벨기에의 지원과 국제사회의 복잡한 개입 속에서 카탕가국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다. 촘베는 대통령으로, CONAKAT 정당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으며, 헌법과 정부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UN의 개입, 용병 문제, 루뭄바 총리의 암살, 그리고 국제사회의 갈등 속에서 카탕가국은 1963년 콩고 민주 공화국에 재통합되었다. 카탕가국의 사례는 자원 문제, 국제적 개입,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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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탕가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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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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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Force, espoir et paix dans la prospérité" (힘, 희망, 그리고 번영 속의 평화) |
국가 | La Katangaise (카탕가인들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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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공식 명칭 | (프랑스어) (스와힐리어) |
별칭 | 카탕가 |
지위 | 미승인 국가 |
언어 | 프랑스어 스와힐리어 |
민족 | 카탕가인 |
정치 | |
정부 형태 | 대통령제 공화국 |
대통령 | 모이즈 촘베 (1960–1963) |
부통령 | 장-바티스트 키브웨 (1960–1963) |
입법부 | 국민 의회 |
역사 | |
시대 | 콩고 위기 |
시작 | 1960년 7월 11일 |
시작 사건 | 카탕가 분리 |
관련 사건 | 남카사이 분리 (1960년 8월 8일) |
종료 | 1963년 1월 21일 |
종료 사건 | 해산 |
경제 | |
통화 | 카탕가 프랑 |
지리 | |
면적 | 496,871 km² (191,843 sq mi) |
인구 통계 | |
추정 인구 | 1,700,000명 (1960년) |
시간대 | |
시간대 | CAT |
UTC 오프셋 | +2 |
현재 | |
현재 국가 | 콩고 민주 공화국 |
2. 배경
카탕가국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카탕가 분리 독립의 배경에는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풍부한 광물 자원과 오트카탕가 광산 연합(UMHK)의 역할, 중앙 아프리카 연방과의 관계, 그리고 콩고 독립 과정에서의 정치적 혼란 등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1906년 설립된 오트카탕가 광산 연합/Union Minière du Haut-Katanga프랑스어(UMHK)는 카탕가에서 구리 채굴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며 지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2] UMHK의 주요 주주는 카탕가 특별 위원회, 벨기에 일반 회사, 영국 탕가니카 양보 등으로, 벨기에 정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2] 카탕가는 구리뿐만 아니라 우라늄, 주석 등 다양한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광산업 중심지로 발전했다.[3] 이러한 광산업의 발전은 1950년대까지 약 32,000명의 벨기에 정착민을 유입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는 벨기에령 콩고 내에서 가장 많은 벨기에인 정착민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3]
카탕가의 구리 판매는 콩고 전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콩고 독립 운동 지도자들에게 UMHK의 소유권은 중요한 문제였다. 벨기에 정부는 UMHK의 지분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1967년에야 지분을 포기하게 된다.[1] 1959년 1월, 벨기에가 1960년 6월 콩고에 독립을 부여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1960년 3월부터 UMHK는 CONAKAT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당 지도자 모이즈 촘베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회사에 유리한 정책을 옹호하도록 했다.[1]
경제적으로 카탕가는 중앙 아프리카 연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7] 중앙 아프리카 연방은 게리맨더링을 통해 흑인 인구의 참정권을 제한하고 백인 지배를 강화했다.[7] 콩고 독립을 앞두고 카탕가의 백인 정착민 지도자들은 중앙 아프리카 연방과의 통합을 모색하기도 했다.[8] 1960년 3월, 벨기에 영사 에티엔 하포드는 연방 총리 로이 웰렌스키에게 벨기에 정부가 카탕가와 연방의 "정치적 연합"을 원한다고 전달했다.[9] 웰렌스키 또한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되어 연방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했다.[9]
벨기에령 콩고가 1960년 6월 30일 독립을 맞이했을 때, 이미 인종적 분파주의와 정치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CONAKAT과 벨기에 정착민들은 카탕가의 독립을 추진하려 했으나 벨기에 정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CONAKAT은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가 이끄는 콩고 정부가 카탕가 지방 정부에서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반대파를 임명할 것을 우려했다.[10]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60년 7월 11일, 모이즈 촘베는 카탕가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촘베는 중앙 정부가 공산주의 성향을 띠고 독재 정치를 펼치려 한다고 비난했다. UMHK는 촘베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고, 촘베는 벨기에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1] 카탕가 당국은 새로 임명된 엘리자베스빌 군사 주둔지 사령관을 구금하고 추방했으며, 루뭄바와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의 카탕가 방문을 막았다.[10] 촘베는 포르스 퓌블리크의 노르베르트 무케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카탕가 헌병대를 창설하고, 벨기에 장교들을 군사 고문으로 초빙했다.[2] 벨기에 정부는 카탕가에 사실상의 승인을 연장하고, 무기와 고문을 지원하기 위해 ''벨기에 기술 사절단''(Mistebel)을 파견했다.[1]
촘베와 CONAKAT은 분리 독립이 민족주의 정서의 발현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루바족을 비롯한 일부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카탕가에는 벨기에 백인 공동체가 많았고, 이들은 분리 독립을 지지했다. 촘베는 이들의 기술력이 카탕가 경제에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4]
벨기에 국왕 보두앵은 카탕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정부에 외교적 승인을 압박했다.[1] 그러나 외무 장관 피에르 위니는 미국의 반대를 우려하여 카탕가 승인에 반대했다.[1] 결국 벨기에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도 보두앵의 압력에 굴복하여 카탕가를 지원하게 된다.[1]
카탕가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 이후, 파트리스 루뭄바는 UN 사무총장에게 전보를 보내 벨기에의 군사적 공격과 카탕가 분리 독립 지원에 대한 조치를 촉구하며 "긴급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4] UN 회원국들의 반응은 엇갈렸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을 지켰고, 포르투갈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카탕가에 대한 간섭에 반대하며 무기와 용병 지원을 허용했다.[4] 로이 웰렌스키 또한 카탕가를 지원하며 용병 모집과 무기 밀수를 묵인했다.[14]
이러한 복잡한 배경 속에서 카탕가국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하며 콩고 내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2. 1. 벨기에 식민 통치
1906년, 오트카탕가 광산 연합(Union Minière du Haut-Katanga) (UMHK) 회사가 설립되어 카탕가에서 구리 채굴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받았다.[1] 오트카탕가 광산 연합의 주요 주주는 카탕가 특별 위원회(Comité Spécial du Katanga), 벨기에 일반 회사(Société Générale de Belgique) 및 영국 탕가니카 양보(Tanganyika Concessions)였다.[1] 다시 카탕가 특별 위원회의 최대 주주는 벨기에 정부였다.[1] 카탕가는 우라늄, 주석, 구리 등 광물이 채굴되는 광산의 중심지였다.[3] 광산업으로 인한 부는 1950년대까지 약 32,000명의 벨기에 정착민을 카탕가로 유입시켰고, 벨기에령 콩고의 주 중에서 벨기에 정착민이 가장 많은 곳으로 만들었다.[3] 콩고 수입의 33.7%가 카탕가에서 채굴된 구리 판매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콩고 독립 운동 지도자들에게는 회사의 소유권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고, 벨기에 정부는 UMHK의 지분을 포기하는 것을 매우 꺼렸으며, 결국 1967년이 되어서야 이를 포기했다.[1] 1959년 1월, 벨기에가 1960년 6월 콩고에 독립을 부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0년 3월부터 UMHK는 CONAKAT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당 지도자인 모이즈 촘베에게 뇌물을 주어 회사에 유리한 정책을 옹호하도록 했다.[1]
경제적으로 벨기에령 콩고의 카탕가 주는 영국 식민지인 북로데시아(현재 잠비아), 니아살랜드(현재 말라위), 남로데시아(현재 짐바브웨)를 통합한 자치 중앙 아프리카 연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게리맨더링을 통해 중앙 아프리카 연방의 흑인 인구의 대부분은 사실상 참정권을 박탈당했고, 연방은 백인 인구가 지배했다. 콩고 독립을 앞두고 카탕가의 백인 벨기에 정착민 지도자들은 중앙 아프리카 연방의 백인 정착민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독립이 부여된 후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되어 중앙 아프리카 연방에 합류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1960년 3월, 솔즈베리(현재 하라레)의 벨기에 영사 에티엔 하포드는 연방 총리인 로이 웰렌스키 경에게 벨기에 정부가 독립 후 카탕가와 연방의 "정치적 연합"을 원한다고 말했다. 같은 달, 신문 ''더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기자 르네 맥콜과의 인터뷰에서 웰렌스키는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되어 연방에 합류할 것이라고 전적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벨기에령 콩고가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얻었을 때, 이미 인종적 분파주의와 정치적 긴장으로 뒤덮여 있었다. CONAKAT 정치인과 벨기에 정착민의 연합은 그 직전에 카탕가에서 자체 독립 선언을 발표하려 했지만, 벨기에 정부는 그들의 계획에 반대했다. CONAKAT은 특히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 하의 콩고 정부가 카탕가 지방 정부에서 구성원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그의 지지자들을 임명할 것을 우려했다.
7월 11일 저녁, CONAKAT 지도자 모이즈 촘베는 중앙 정부가 공산주의 성향과 독재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를 돕기 위해 UMHK는 촘베에게 12억 5천만 벨기에 프랑 (1960년 당시 약 2,500만 미국 달러, 현재 2억 4천만 달러에 해당)을 선불로 지급했다. 촘베의 첫 번째 행동은 벨기에 총리 가스통 에이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1] 새로 임명된 엘리자베스빌 군사 주둔지 사령관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카탕가 당국은 즉시 그를 구금하고 추방했다. 그는 룰루부르로 날아가 루뭄바와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에게 분리 독립을 알렸다. 두 사람은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카탕가로 가기로 결정했다. 카탕가 내무 장관 고드프로이드 무농고는 그들에게 공항 착륙을 허가하지 않고 카사부부가 원한다면 카탕가를 방문할 수 있지만 루뭄바는 영토에 들어갈 수 없다는 무전을 보냈다. 격분한 대통령과 총리는 룰루부르로 돌아갔다. 촘베는 즉시 포르스 퓌블리크의 노르베르트 무케 대령을 자신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군대인 카탕가 헌병대를 창설했다.[2] 헌병대에는 군사 고문으로 촘베에게 파견된 벨기에 장교들이 배치되었다.[2] 1960년 7월 16일, 에이켄스는 카탕가에 사실상의 승인을 연장했고, 7월 22일에는 카탕가를 무기와 고문으로 지원하기 위해 ''벨기에 기술 사절단''(Mistebel)을 창설했다.[1]
촘베와 CONAKAT은 분리 독립이 토착 민족주의 정서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 북부 지역의 루바족 인구는 독립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심지어 남부 지역의 인구도 일반적으로 촘베에 더 동정적이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견을 묻지 않았다. 카탕가에는 벨기에계 백인 커뮤니티가 불균형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막대한 투자를 한 많은 벨기에 출신 이주민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카탕가의 백인 거주자들은 공개적으로 분리 독립을 지지했다. 루뭄바와 달리, 촘베는 그들이 절실히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의 탈출은 카탕가 경제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공개적으로 유혹했다.
벨기에 국왕 보두앵은 카탕가를 매우 지지했고, 궁정의 모든 권력을 사용하여 정부가 카탕가에 외교적 승인을 연장하도록 압력을 가했다.[1] 외무 장관 피에르 위니는 미국이 콩고 분열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카탕가 승인에 반대했다.[1] 위니는 1956년 수에즈 위기의 재발을 두려워했다. 당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미국이 콩고가 이집트 역할을 하고 벨기에가 이집트를 공격한 국가 역할을 하면서 이집트 공격에 반대했을 때 굴욕을 겪었다. 같은 이유로, 나토의 벨기에 대표인 앙드레 드 스타르케는 미국을 화나게 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에 반대했다.[1] 엘리자베스빌의 벨기에 영사 앙리 크레너는 카탕가를 열렬히 지지했다.[1] 에이켄스의 오른팔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고문인 해럴드 찰스 다스프레몽 리덴 역시 카탕가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벨기에가 콩고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을 유지할 기회라고 생각했다.[1] 카탕가를 승인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하는 외무 장관과 카탕가를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국왕 사이에서 에이켄스는 갈등과 혼란에 빠졌다.[1] 미국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으로 카탕가를 승인하려 하지 않았지만, 총리는 보두앵과 다스프레몽 리덴의 압력에 굴복하여 카탕가를 지원했다.[1]
카탕가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 후 일주일 이내에 루뭄바는 UN 사무총장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의 국가에서 "벨기에의 군사적 공격"과 카탕가 분리 독립에 대한 노골적인 지원에 대해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루뭄바는 그의 정부가 이 거대한 국가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긴급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UN 회원국들 사이에서 카탕가에 대한 감정은 일반적으로 혼합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을 유지했고, 프랑스는 콩고의 평화 유지를 꺼렸다. 영국은 처음에는 결국 파견된 UN 군대에 일반적인 지원을 제공했지만, 촘베의 반군 정권을 처리하기 위한 후속 노력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포르투갈과 남아프리카 연방은 이 작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카탕가 주에 대한 어떤 간섭에도 일관적으로 반대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의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카탕가로 무기와 용병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는 카탕가를 위해 남아프리카 내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것을 허용하고 무기와 유럽 용병이 카탕가로 가는 것을 허용했다. 웰렌스키는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카탕가를 중앙 아프리카 연방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연방은 흑인 민족주의 불안이 연방 전체에서 증가하는 시점에 3,270명으로 구성된 작은 군대만 가지고 있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웰렌스키는 카탕가가 연방 철도를 통해 구리 수출을 계속하도록 허용하고, 무기가 카탕가로 밀수되도록 허용하고, 주로 남로데시아에서 온 연방 내 백인 용병을 모집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연방 당국은 일반적으로 남아프리카,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 온 백인 용병의 카탕가 통행을 허용했다. 북로데시아의 도시인 은돌라는 카탕가로 들어간 용병의 주요 기지였다. 웰렌스키는 외무 장관 로드 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촘베 씨가 파괴되는 것을 방관하고 싶지 않다...만약 그가 유엔 작전으로 위장한 아프리카-아시아의 압력에 의해 파괴될 위험에 처한다면, 나는 그의 생존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라고 썼다.
쥘 제라르-리부아는 다음과 같이 썼다: '..8월 한 달 동안, 벨기에 군대의 철수가 예상되기 전에, 다소 효율적인 카탕가 헌병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시계와의 경쟁이 벌어졌다. 새로운 헌병대의 사령관인 크레브쾨르 소령은 7월 소란 이후 콩고를 떠났거나 카탕가에 있던 ''포르스 퓌블리크''의 전직 장교들을 불렀다.' 새로운 병력의 수는 원래 안전한' 민족 집단에서 모집된 16세에서 21세 사이의 1,500명의 자원병으로 정해졌다. 포르스 퓌블리크의 거의 모든 항공기가 카미나로 이전되었고, 그 후 카탕가에 징발되었다.
2. 2. 광물 자원
1906년, 오트카탕가 광산 연합/Union Minière du Haut-Katanga프랑스어 (UMHK) 회사가 설립되어 카탕가에서 구리 채굴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받았다.[2] ''오트카탕가 광산 연합''의 주요 주주는 카탕가 특별 위원회(Comité Spécial du Katanga), 벨기에 일반 회사(Société Générale de Belgique) 및 영국 탕가니카 양보(Tanganyika Concessions)였다.[2] 다시 ''카탕가 특별 위원회''의 최대 주주는 벨기에 정부였다.[2] 카탕가는 우라늄, 주석, 구리 등 광물이 채굴되는 광산의 중심지였다.[2] 광산업으로 인한 부는 1950년대까지 약 32,000명의 벨기에 정착민을 카탕가로 유입시켰고, 벨기에령 콩고의 주 중에서 벨기에 정착민이 가장 많은 곳으로 만들었다.[2] 콩고 수입의 33.7%가 카탕가에서 채굴된 구리 판매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콩고 독립 운동 지도자들에게는 회사의 소유권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고, 벨기에 정부는 UMHK의 지분을 포기하는 것을 매우 꺼렸으며, 결국 1967년이 되어서야 이를 포기했다.[2] 1959년 1월, 벨기에가 1960년 6월 콩고에 독립을 부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0년 3월부터 UMHK는 CONAKAT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당 지도자인 모이즈 촘베에게 뇌물을 주어 회사에 유리한 정책을 옹호하도록 했다.[2]
경제적으로 벨기에령 콩고의 카탕가 주는 영국 식민지인 북로데시아(현재 잠비아), 니아살랜드(현재 말라위), 남로데시아(현재 짐바브웨)를 통합한 자치 중앙 아프리카 연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2] 게리맨더링을 통해 중앙 아프리카 연방의 흑인 인구의 대부분은 사실상 참정권을 박탈당했고, 연방은 백인 인구가 지배했다.[2] 콩고 독립을 앞두고 카탕가의 백인 벨기에 정착민 지도자들은 중앙 아프리카 연방의 백인 정착민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독립이 부여된 후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되어 중앙 아프리카 연방에 합류하는 계획을 논의했다.[2] 1960년 3월, 샐즈베리(현재 하라레)의 벨기에 영사 에티엔 하포드는 연방 총리인 로이 웰렌스키 경에게 벨기에 정부가 독립 후 카탕가와 연방의 "정치적 연합"을 원한다고 말했다.[2] 같은 달, 신문 ''더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기자 르네 맥콜과의 인터뷰에서 웰렌스키는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되어 연방에 합류할 것이라고 전적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2]
벨기에령 콩고가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얻었을 때, 이미 인종적 분파주의와 정치적 긴장으로 뒤덮여 있었다. CONAKAT 정치인과 벨기에 정착민의 연합은 그 직전에 카탕가에서 자체 독립 선언을 발표하려 했지만, 벨기에 정부는 그들의 계획에 반대했다. CONAKAT은 특히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 하의 콩고 정부가 카탕가 지방 정부에서 구성원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그의 지지자들을 임명할 것을 우려했다.[2]
7월 11일 저녁, CONAKAT 지도자 모이즈 촘베는 중앙 정부가 공산주의 성향과 독재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를 돕기 위해 UMHK는 촘베에게 12억 5천만 벨기에 프랑(1960년 당시 약 2,500만 미국 달러, 현재 2억 5천만 달러에 해당)을 선불로 지급했다. 촘베의 첫 번째 행동은 벨기에 총리 가스통 에이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2] 새로 임명된 엘리자베스빌 군사 주둔지 사령관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카탕가 당국은 즉시 그를 구금하고 추방했다. 그는 카난가로 날아가 루뭄바와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에게 분리 독립을 알렸다. 두 사람은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카탕가로 가기로 결정했다.[2] 카탕가 내무 장관 고드프로이드 무농고는 그들에게 공항 착륙을 허가하지 않고 카사부부가 원한다면 카탕가를 방문할 수 있지만 루뭄바는 영토에 들어갈 수 없다는 무전을 보냈다. 격분한 대통령과 총리는 룰루부르로 돌아갔다.[2] 촘베는 즉시 포르스 퓌블리크의 노르베르트 무케 대령을 자신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군대인 카탕가 헌병대를 창설했다.[2] 헌병대에는 군사 고문으로 촘베에게 파견된 벨기에 장교들이 배치되었다.[2] 1960년 7월 16일, 에이켄스는 카탕가에 사실상의 승인을 연장했고, 7월 22일에는 카탕가를 무기와 고문으로 지원하기 위해 ''벨기에 기술 사절단''(Mistebel)을 창설했다.[2]
촘베와 CONAKAT은 분리 독립이 토착 민족주의 정서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 북부 지역의 루바족 인구는 독립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심지어 남부 지역의 인구도 일반적으로 촘베에 더 동정적이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견을 묻지 않았다. 카탕가에는 벨기에계 백인 커뮤니티가 불균형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막대한 투자를 한 많은 벨기에 출신 이주민들도 있었다.[2] 대부분의 경우, 카탕가의 백인 거주자들은 공개적으로 분리 독립을 지지했다. 루뭄바와 달리, 촘베는 그들이 절실히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의 탈출은 카탕가 경제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공개적으로 유혹했다.[2]
벨기에 정부 내에서 벨기에 국왕 보두앵은 카탕가를 매우 지지했고, 궁정의 모든 권력을 사용하여 정부가 카탕가에 외교적 승인을 연장하도록 압력을 가했다.[2] 외무 장관 피에르 위니는 미국이 콩고 분열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카탕가 승인에 반대했다.[2] 위니는 1956년 수에즈 위기의 재발을 두려워했다. 당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미국이 콩고 분열에 반대했을 때 굴욕을 겪었다. 같은 이유로, 나토의 벨기에 대표인 앙드레 드 스타르케는 미국을 화나게 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에 반대했다.[2] 엘리자베스빌의 벨기에 영사 앙리 크레너는 카탕가를 열렬히 지지했다.[2] 에이켄스의 오른팔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고문인 해럴드 찰스 다스프레몽 리덴 역시 카탕가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벨기에가 콩고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을 유지할 기회라고 생각했다.[2] 카탕가를 승인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하는 외무 장관과 카탕가를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국왕 사이에서 에이켄스는 갈등과 혼란에 빠졌다.[2] 미국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으로 카탕가를 승인하려 하지 않았지만, 총리는 보두앵과 다스프레몽 리덴의 압력에 굴복하여 카탕가를 지원했다.[2]
카탕가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 후 일주일 이내에, 콩고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파트리스 루뭄바는 UN 사무총장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의 국가에서 "벨기에의 군사적 공격"과 카탕가 분리 독립에 대한 노골적인 지원에 대해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2] 루뭄바는 그의 정부가 이 거대한 국가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긴급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2] UN 회원국들 사이에서 카탕가에 대한 감정은 일반적으로 혼합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을 유지했고, 프랑스는 콩고의 평화 유지를 꺼렸다. 영국은 처음에는 결국 파견된 UN 군대에 일반적인 지원을 제공했지만, 촘베의 반군 정권을 처리하기 위한 후속 노력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포르투갈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 작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카탕가 주에 대한 어떤 간섭에도 일관적으로 반대했다.[2] 포르투갈은 앙골라의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카탕가로 무기와 용병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2]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는 카탕가를 위해 남아프리카 내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것을 허용하고 무기와 유럽 용병이 카탕가로 가는 것을 허용했다.[2] 웰렌스키는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카탕가를 중앙 아프리카 연방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연방은 흑인 민족주의 불안이 연방 전체에서 증가하는 시점에 3,270명으로 구성된 작은 군대만 가지고 있어 그렇게 할 수 없었다.[2] 그러나 웰렌스키는 카탕가가 연방 철도를 통해 구리 수출을 계속하도록 허용하고, 무기가 카탕가로 밀수되도록 허용하고, 주로 남로데시아에서 온 연방 내 백인 용병을 모집하도록 허용했다.[2] 또한, 연방 당국은 일반적으로 남아프리카,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 온 백인 용병의 카탕가 통행을 허용했다.[2] 북로데시아의 도시인 은돌라는 카탕가로 들어간 용병의 주요 기지였다.[2] 웰렌스키는 외무 장관 로드 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촘베 씨가 파괴되는 것을 방관하고 싶지 않다...만약 그가 유엔 작전으로 위장한 아프리카-아시아의 압력에 의해 파괴될 위험에 처한다면, 나는 그의 생존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라고 썼다.[2]
쥘 제라르-리부아는 다음과 같이 썼다: '..8월 한 달 동안, 벨기에 군대의 철수가 예상되기 전에, 다소 효율적인 카탕가 헌병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시계와의 경쟁이 벌어졌다. 새로운 헌병대의 사령관인 크레브쾨르 소령은 7월 소란 이후 콩고를 떠났거나 카탕가에 있던 ''포르스 퓌블리크''의 전직 장교들을 불렀다.'[2] 새로운 병력의 수는 원래 안전한' 민족 집단에서 모집된 16세에서 21세 사이의 1,500명의 자원병으로 정해졌다. 포르스 퓌블리크의 거의 모든 항공기가 카미나로 이전되었고, 그 후 카탕가에 징발되었다.
2. 3. 중앙 아프리카 연방과의 관계
1906년, 오트카탕가 광산 연합}}(UMHK) 회사가 설립되어 카탕가에서 구리 채굴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받았다.[1] ''오트카탕가 광산 연합''의 주요 주주는 ''카탕가 특별 위원회'', ''벨기에 일반 회사'' 및 영국 탕가니카 양보였다.[1] 다시 ''카탕가 특별 위원회''의 최대 주주는 벨기에 정부였다.[1] 카탕가는 우라늄, 주석, 구리 등 광물이 채굴되는 광산의 중심지였다.[3] 광산업으로 인한 부는 1950년대까지 약 32,000명의 벨기에 정착민을 카탕가로 유입시켰고, 벨기에령 콩고의 주 중에서 벨기에 정착민이 가장 많은 곳으로 만들었다.[3] 콩고 수입의 33.7%가 카탕가에서 채굴된 구리 판매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콩고 독립 운동 지도자들에게는 회사의 소유권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고, 벨기에 정부는 UMHK의 지분을 포기하는 것을 매우 꺼렸으며, 결국 1967년이 되어서야 이를 포기했다.[1] 1959년 1월, 벨기에가 1960년 6월 콩고에 독립을 부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0년 3월부터 UMHK는 CONAKAT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당 지도자인 모이즈 촘베에게 뇌물을 주어 회사에 유리한 정책을 옹호하도록 했다.[1]
경제적으로 벨기에령 콩고의 카탕가 주는 영국 식민지인 북로데시아(현재 잠비아), 니아살랜드(현재 말라위), 남로데시아(현재 짐바브웨)를 통합한 자치 중앙 아프리카 연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7] 게리맨더링을 통해 중앙 아프리카 연방의 흑인 인구의 대부분은 사실상 참정권을 박탈당했고, 연방은 백인 인구가 지배했다.[7] 콩고 독립을 앞두고 카탕가의 백인 벨기에 정착민 지도자들은 중앙 아프리카 연방의 백인 정착민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독립이 부여된 후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되어 중앙 아프리카 연방에 합류하는 계획을 논의했다.[8] 1960년 3월, 샐즈베리(현재 하라레)의 벨기에 영사 에티엔 하포드는 연방 총리인 로이 웰렌스키 경에게 벨기에 정부가 독립 후 카탕가와 연방의 "정치적 연합"을 원한다고 말했다.[9] 같은 달, 신문 ''더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기자 르네 맥콜과의 인터뷰에서 웰렌스키는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되어 연방에 합류할 것이라고 전적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9]
벨기에령 콩고가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얻었을 때, 이미 인종적 분파주의와 정치적 긴장으로 뒤덮여 있었다. CONAKAT 정치인과 벨기에 정착민의 연합은 그 직전에 카탕가에서 자체 독립 선언을 발표하려 했지만, 벨기에 정부는 그들의 계획에 반대했다. CONAKAT은 특히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 하의 콩고 정부가 카탕가 지방 정부에서 구성원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그의 지지자들을 임명할 것을 우려했다.[10]
7월 11일 저녁, CONAKAT 지도자 모이즈 촘베는 중앙 정부가 공산주의 성향과 독재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카탕가가 콩고에서 분리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를 돕기 위해 UMHK는 촘베에게 12억 5천만 벨기에 프랑(1960년 당시 약 2,500만 미국 달러, 현재 {{formatnum:239644258/Union Minière du Haut-Katanga프랑스어에 해당)을 선불로 지급했다. 촘베의 첫 번째 행동은 벨기에 총리 가스통 에이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1] 새로 임명된 엘리자베스빌 군사 주둔지 사령관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카탕가 당국은 즉시 그를 구금하고 추방했다. 그는 룰루부르로 날아가 루뭄바와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에게 분리 독립을 알렸다. 두 사람은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카탕가로 가기로 결정했다.[10] 카탕가 내무 장관 고드프로이드 무농고는 그들에게 공항 착륙을 허가하지 않고 카사부부가 원한다면 카탕가를 방문할 수 있지만 루뭄바는 영토에 들어갈 수 없다는 무전을 보냈다. 격분한 대통령과 총리는 룰루부르로 돌아갔다.[10] 촘베는 즉시 포르스 퓌블리크의 노르베르트 무케 대령을 자신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군대인 카탕가 헌병대를 창설했다.[2] 헌병대에는 군사 고문으로 촘베에게 파견된 벨기에 장교들이 배치되었다.[2] 1960년 7월 16일, 에이켄스는 카탕가에 사실상의 승인을 연장했고, 7월 22일에는 카탕가를 무기와 고문으로 지원하기 위해 ''벨기에 기술 사절단''(Mistebel)을 창설했다.[1]
촘베와 CONAKAT은 분리 독립이 토착 민족주의 정서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 북부 지역의 루바족 인구는 독립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심지어 남부 지역의 인구도 일반적으로 촘베에 더 동정적이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견을 묻지 않았다. 카탕가에는 벨기에계 백인 커뮤니티가 불균형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막대한 투자를 한 많은 벨기에 출신 이주민들도 있었다.[4] 대부분의 경우, 카탕가의 백인 거주자들은 공개적으로 분리 독립을 지지했다. 루뭄바와 달리, 촘베는 그들이 절실히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의 탈출은 카탕가 경제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공개적으로 유혹했다.[4]
벨기에 정부 내에서 벨기에 국왕 보두앵은 카탕가를 매우 지지했고, 궁정의 모든 권력을 사용하여 정부가 카탕가에 외교적 승인을 연장하도록 압력을 가했다.[1] 외무 장관 피에르 위니는 미국이 콩고 분열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카탕가 승인에 반대했다.[1] 위니는 1956년 수에즈 위기의 재발을 두려워했다. 당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미국이 콩고가 이집트 역할을 하고 벨기에가 이집트를 공격한 국가 역할을 하면서 이집트 공격에 반대했을 때 굴욕을 겪었다. 같은 이유로, 나토의 벨기에 대표인 앙드레 드 스타르케는 미국을 화나게 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에 반대했다.[1] 엘리자베스빌의 벨기에 영사 앙리 크레너는 카탕가를 열렬히 지지했다.[1] 에이켄스의 오른팔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고문인 해럴드 찰스 다스프레몽 리덴 역시 카탕가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벨기에가 콩고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을 유지할 기회라고 생각했다.[1] 카탕가를 승인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하는 외무 장관과 카탕가를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국왕 사이에서 에이켄스는 갈등과 혼란에 빠졌다.[1] 미국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으로 카탕가를 승인하려 하지 않았지만, 총리는 보두앵과 다스프레몽 리덴의 압력에 굴복하여 카탕가를 지원했다.[1]
카탕가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 후 일주일 이내에 루뭄바는 UN 사무총장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의 국가에서 "벨기에의 군사적 공격"과 카탕가 분리 독립에 대한 노골적인 지원에 대해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4] 루뭄바는 그의 정부가 이 거대한 국가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긴급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4] UN 회원국들 사이에서 카탕가에 대한 감정은 일반적으로 혼합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을 유지했고, 프랑스는 콩고의 평화 유지를 꺼렸다. 영국은 처음에는 결국 파견된 UN 군대에 일반적인 지원을 제공했지만, 촘베의 반군 정권을 처리하기 위한 후속 노력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포르투갈과 남아프리카 연방은 이 작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카탕가 주에 대한 어떤 간섭에도 일관적으로 반대했다.[4] 포르투갈은 앙골라의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카탕가로 무기와 용병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11]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는 카탕가를 위해 남아프리카 내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것을 허용하고 무기와 유럽 용병이 카탕가로 가는 것을 허용했다.[12] 웰렌스키는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카탕가를 중앙 아프리카 연방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연방은 흑인 민족주의 불안이 연방 전체에서 증가하는 시점에 3,270명으로 구성된 작은 군대만 가지고 있어 그렇게 할 수 없었다.[13] 그러나 웰렌스키는 카탕가가 연방 철도를 통해 구리 수출을 계속하도록 허용하고, 무기가 카탕가로 밀수되도록 허용하고, 주로 남로데시아에서 온 연방 내 백인 용병을 모집하도록 허용했다.[14] 또한, 연방 당국은 일반적으로 남아프리카,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 온 백인 용병의 카탕가 통행을 허용했다.[15] 북로데시아의 도시인 은돌라는 카탕가로 들어간 용병의 주요 기지였다.[16] 웰렌스키는 외무 장관 로드 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촘베 씨가 파괴되는 것을 방관하고 싶지 않다...만약 그가 유엔 작전으로 위장한 아프리카-아시아의 압력에 의해 파괴될 위험에 처한다면, 나는 그의 생존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라고 썼다.[17]
쥘 제라르-리부아는 다음과 같이 썼다: '..8월 한 달 동안, 벨기에 군대의 철수가 예상되기 전에, 다소 효율적인 카탕가 헌병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시계와의 경쟁이 벌어졌다. 새로운 헌병대의 사령관인 크레브쾨르 소령은 7월 소란 이후 콩고를 떠났거나 카탕가에 있던 ''포르스 퓌블리크''의 전직 장교들을 불렀다.'[5] 새로운 병력의 수는 원래 안전한' 민족 집단에서 모집된 16세에서 21세 사이의 1,500명의 자원병으로 정해졌다. 포르스 퓌블리크의 거의 모든 항공기가 카미나로 이전되었고, 그 후 카탕가에 징발되었다.
3. 카탕가국의 성립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령 콩고가 해체되고 콩고 민주 공화국이 독립했으나[44], 신생국은 곧바로 난관에 부딪혔다. 7월 11일, 모이즈 촘베는 국가 수입의 약 50%를 차지하는 부유한 지역인 카탕가 주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45][46]. 촘베와 당시 관계자들은 국가 혼란과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를 공산주의의 앞잡이로 여긴 것이 독립 선언의 이유였다고 밝혔다. 카탕가 정부는 즉시 벨기에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고, 소비에트 연방과 대립하며 콩고 정세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한다고 판단, 미국에도 지원을 요청했다[47].
벨기에 정부와 보두앵 국왕은 카탕가의 분리 독립을 지원했는데, 이는 벨기에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콩고 통일 정부가 벨기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벨기에 정부는 카탕가 정부에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카탕가 정부는 벨기에 기업들에게 광물 자원 개발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부여했다. 벨기에의 지원은 카탕가 분리주의 운동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벨기에 정부는 카탕가 정부에 무기와 훈련을 제공했으며, 벨기에 군대는 카탕가에서 콩고 중앙 정부군과 싸웠다.
그러나 이러한 벨기에의 지원은 콩고 내전을 심화시키고 콩고의 통일을 방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콩고 내 반벨기에 감정을 고조시키고 벨기에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카탕가의 독립 선언 직후, 루뭄바 총리는 국제 연합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에게 "긴급 군사 원조"를 요청하며 독립 후 위기가 벨기에의 음모 때문이라고 비난했다[47].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 연합의 유엔 콩고 주둔군(ONUC) 파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포르투갈과 남아프리카 연방은 공개적으로 유엔군의 구상에 반대하며 카탕가국에 대한 간섭을 반대했다[47].
1960년 10월 3일, 카탕가는 미국으로부터 승인과 유엔 가입을 위한 로비를 위해 뉴욕에 미승인 외교 사절단을 개설했다.[9] 사절단의 수장은 벨기에령 콩고의 관광 진흥을 담당했던 벨기에인 미셸 스트루엘렌스(Michel Struelens)였다.[10] 미국이 카탕가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루엘렌스는 벨기에 여권을 가지고 브뤼셀에서 뉴욕으로 여행했다.[10] 스트루엘렌스는 한 언론인에게 자신의 임무는 "카탕가가 콩고에서 공산주의 영향력에 대한 유일한 장벽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서반구에 카탕가의 이야기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12]
미국은 카탕가를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스트루엘렌스는 미국의 우익 상당수를 설득하여 카탕가를 지지하게 만들 수 있었다.[13] 스트루엘렌스의 동맹 중 하나는 극우 단체인 리버티 로비(Liberty Lobby)였다.[13] 유럽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을 경험한 제3세계의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반서방적인 경향을 보였고, 이로 인해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서방의 우익에게 의심을 샀다. 벨기에인들이 지배하는 카탕가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14] 미국의 보수 지식인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이 "백인의 권력과 특권을 파괴하고, 그들의 재산을 대부분 빼앗고, 백인들이 하인과 시녀로만 남도록 허용하는 것"을 원한다고 주장했다.[13] 반면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카탕가를 일본의 식민지였던 만주국과 비교하며, 카탕가의 지도자는 촘베였지만 실제 권력은 벨기에 관리들이 행사했다는 점을 지적했다.[12], [9]
1960년 12월 도미니크 디유르(Dominique Diur)에 의해 파리에 또 다른 사절단이 개설되었다. 이는 외국 용병 모집 사무소로 기능했지만, 그러한 활동은 프랑스에서 불법이었다. 로제 폴크(Roger Faulques), 로제 트린키에(Roger Trinquier), 에드가르 투페-톰(Edgard Tupët-Thomé)을 포함한 프랑스 용병들이 카탕가에서 싸우기 위해 모집되었다. 브뤼셀에서는 자크 마상구(Jacques Masangu)가 사절단을 이끌며 카탕가 대의를 위해 싸울 용병을 모집했다.
루뭄바 총리의 요청에 응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7월 14일, 벨기에군이 콩고, 특히 카탕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3호를 채택했다.[48][49] 루뭄바는 벨기에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유엔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ONUC를 편성했다. 최초의 ONUC는 다음 날 도착했지만, 그 임무에 대해 루뭄바와 유엔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콩고군의 질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루뭄바는 ONUC의 힘을 이용, 무력으로 카탕가를 정복하려 했다. 하마르셸드는 분리주의 활동을 국내 정치 문제로 간주하고 유엔 헌장 제2장에서는 무력 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보았다.
유엔은 7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5호를 채택하여 콩고가 "단일 국가"여야 함을 단언하고, 벨기에군이 콩고에서 철수할 것을 더욱 강력하게 촉구했다.[50] 8월 9일에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6호에서 카탕가의 존재에 대해 처음 언급하며, 내부 분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재확인하는 한편, ONUC의 카탕가 주둔을 인정했다.[51]
9월 14일 조제프-데지레 모부투가 일으킨 무혈 쿠데타로 루뭄바는 실각했다.[52] 체포된 루뭄바는 모부투에 의해 카탕가 국가가 수도를 둔 엘리자베트빌로 보내져, 1961년 1월 17일 촘베 등 카탕가 정부 각료 3명의 눈앞에서 카탕가 헌병대에 의해 처형되었다.[53], [54]
루뭄바 사망 한 달 후인 1961년 2월 21일에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1호는 악화되는 인권 상황에 대처하고 본격적인 내전의 발발을 방지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무력 행사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었다.[55] 같은 해 11월 24일 미국과 소련의 동의로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9호에서는 카탕가가 독립 국가라는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고, "법과 질서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콩고 중앙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인정했다.[56]
3. 1. 독립 선언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령 콩고가 해체되고, 콩고 민주 공화국이 독립했다.[44] 그러나 신생 콩고는 독립 직후부터 혼란에 빠졌다. 같은 해 7월 11일 모이즈 촘베는 국가 수입의 약 50%를 차지하는 부유한 지역인 카탕가 주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45][46] 촘베와 당시 관계자들은 국가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를 공산주의의 앞잡이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카탕가 정부는 일방적인 독립 선언을 지지하도록 벨기에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촘베는 소비에트 연방과 대립하며 콩고 정세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한다고 판단, 미국에도 지원을 요청했다.[47]
카탕가의 독립 선언 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루뭄바는 국제 연합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에게 "긴급 군사 원조"를 요청하며 독립 후 위기는 벨기에의 음모 때문이라고 비난했다.[47]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 연합의 유엔 콩고 주둔군(ONUC) 파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포르투갈과 남아프리카 연방은 유엔군 구상 자체에 적대적이었으며 카탕가에 대한 간섭에 반대했다.[47]
3. 2. 벨기에의 지원
벨기에 정부와 보두앵 국왕은 카탕가의 분리 독립을 지원했다. 이러한 지원은 벨기에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콩고의 통일 정부가 벨기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벨기에 정부는 카탕가 정부에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카탕가 정부는 벨기에 기업들에게 광물 자원 개발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부여했다.벨기에의 지원은 카탕가 분리주의 운동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벨기에 정부는 카탕가 정부에 무기와 훈련을 제공했으며, 벨기에 군대는 카탕가에서 콩고 중앙 정부군과 싸웠다. 벨기에의 지원은 또한 카탕가 정부가 국제적인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벨기에의 지원은 또한 콩고 내전을 심화시키고 콩고의 통일을 방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벨기에의 지원은 또한 콩고에서 반벨기에 감정을 고조시키고 벨기에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3. 3. 국제 사회의 반응
1960년 10월 3일, 카탕가는 미국으로부터 승인과 유엔 가입을 위한 로비를 위해 뉴욕에 미승인 외교 사절단을 개설했다.[9] 사절단의 수장은 벨기에령 콩고의 관광 진흥을 담당했던 벨기에인 미셸 스트루엘렌스(Michel Struelens)이었다.[10] 미국이 카탕가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루엘렌스는 벨기에 여권을 가지고 브뤼셀에서 뉴욕으로 여행했다.[10] 카탕가가 벨기에 출신의 백인에 의해 대표된다는 사실은 카탕가를 비판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11] 스트루엘렌스는 한 언론인에게 자신의 임무는 "카탕가가 콩고에서 공산주의 영향력에 대한 유일한 장벽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서반구에 카탕가의 이야기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12]미국은 카탕가를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스트루엘렌스는 미국의 우익 상당수를 설득하여 카탕가를 지지하게 만들 수 있었다.[13] 스트루엘렌스의 동맹 중 하나는 극우 단체인 리버티 로비(Liberty Lobby)였다.[13] 유럽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을 경험한 제3세계의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반서방적인 경향을 보였고, 이로 인해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서방의 우익에게 의심을 샀다. 벨기에인들이 지배하는 카탕가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14] 미국의 보수 지식인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이 "백인의 권력과 특권을 파괴하고, 그들의 재산을 대부분 빼앗고, 백인들이 하인과 시녀로만 남도록 허용하는 것"을 원한다고 주장했다.[13] 반면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카탕가를 일본의 식민지였던 만주국과 비교하며, 카탕가의 지도자는 촘베였지만 실제 권력은 벨기에 관리들이 행사했다는 점을 지적했다.[12], [9]
1960년 12월 도미니크 디유르(Dominique Diur)에 의해 파리에 또 다른 사절단이 개설되었다. 이는 외국 용병 모집 사무소로 기능했지만, 그러한 활동은 프랑스에서 불법이었다. 로제 폴크(Roger Faulques), 로제 트린키에(Roger Trinquier), 에드가르 투페-톰(Edgard Tupët-Thomé)을 포함한 프랑스 용병들이 카탕가에서 싸우기 위해 모집되었다. 브뤼셀에서는 자크 마상구(Jacques Masangu)가 사절단을 이끌며 카탕가 대의를 위해 싸울 용병을 모집했다.
루뭄바 총리의 요청에 응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7월 14일, 벨기에군이 콩고, 특히 카탕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3호를 채택했다.[48][49] 루뭄바는 벨기에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유엔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ONUC를 편성했다. 최초의 ONUC는 다음 날 도착했지만, 그 임무에 대해 루뭄바와 유엔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콩고군의 질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루뭄바는 ONUC의 힘을 이용, 무력으로 카탕가를 정복하려 했다. 하마르셸드는 분리주의 활동을 국내 정치 문제로 간주하고 유엔 헌장 제2장에서는 무력 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보았다.
유엔은 7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5호를 채택하여 콩고가 "단일 국가"여야 함을 단언하고, 벨기에군이 콩고에서 철수할 것을 더욱 강력하게 촉구했다.[50] 8월 9일에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6호에서 카탕가의 존재에 대해 처음 언급하며, 내부 분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재확인하는 한편, ONUC의 카탕가 주둔을 인정했다.[51]
9월 14일 조제프-데지레 모부투가 일으킨 무혈 쿠데타로 루뭄바는 실각했다.[52] 체포된 루뭄바는 모부투에 의해 카탕가 국가가 수도를 둔 엘리자베트빌로 보내져, 1961년 1월 17일 촘베 등 카탕가 정부 각료 3명의 눈앞에서 카탕가 헌병대에 의해 처형되었다.[53], [54]
루뭄바 사망 한 달 후인 1961년 2월 21일에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1호는 악화되는 인권 상황에 대처하고 본격적인 내전의 발발을 방지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무력 행사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었다.[55] 같은 해 11월 24일 미국과 소련의 동의로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9호에서는 카탕가가 독립 국가라는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고, "법과 질서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콩고 중앙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인정했다.[56]
4. 유엔의 개입
1960년 7월 14일,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의 요청에 따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43호를 채택했다.[48][49] 이 결의안은 벨기에에 콩고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유엔이 콩고군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여 임무를 완수하도록 했다. 루뭄바는 벨기에에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며, 이틀 안에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의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압박했다. 이에 유엔은 신속하게 유엔 콩고 주둔군(ONUC)을 설립했다.
그러나 ONUC의 임무를 놓고 루뭄바와 유엔 사이에 의견 불일치가 발생했다. 콩고군의 혼란을 틈타 루뭄바는 ONUC를 이용해 카탕가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은 카탕가의 분리가 콩고의 내부 문제이며, 유엔 헌장 제2조에 따라 개입이 금지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루뭄바는 하마르셸드에게 서한을 보내 유엔군이 카탕가의 반군 정부를 진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이후에도 유엔군의 임무와 관련하여 이견이 계속되었다. 7월 22일,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45호는 콩고가 단일 국가임을 확인하고 벨기에에 군대 철수를 더욱 강력히 요구했다.[50] 8월 9일에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46호가 채택되어 ONUC의 카탕가 진입을 허용했지만, 내부 분쟁에 개입하거나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금지했다.[51]
벨기에의 카탕가 개입 또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브뤼셀은 촘베의 분리 계획을 직접적으로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카탕가의 안정을 위해 기술적,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벨기에인들은 ONUC에 불필요한 개입을 하지 말라고 조언하며 "혼란을 증가시킬 위험"을 경고했다.[4]
이러한 상황은 콩고 정부의 불만을 야기했고, 8월 27일 콩고 민족군이 소련 군용 차량을 이용하여 카탕가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이 사건은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이후 2년간 산발적인 충돌이 이어졌다.[4] 또한 11월 8일에는 니엠바에서 다리를 수리하던 아일랜드군 소대원들이 매복 공격을 받아 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8]
한편, 모부투 세세 세코는 9월 14일 쿠데타를 일으켜 루뭄바를 실각시켰다.[52] 이후 루뭄바는 카탕가로 이송되어 1961년1월 17일 촘베를 비롯한 카탕가 정부 각료들 앞에서 카탕가 헌병대에 의해 처형당했다.[53] 이 사건은 국제적인 분노를 샀으며, 루뭄바는 민족 해방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루뭄바의 사망 이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961년 2월 21일 결의안 161호를 채택하여 ONUC에 무력 사용을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할 권한을 부여했다.[55] 이어 11월 24일에는 결의안 169호를 통해 카탕가의 독립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고 콩고 중앙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ONUC의 모든 조치를 인정했다.[56]
이러한 유엔의 개입은 콩고 내전과 카탕가 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나, ONUC의 소극적인 태도와 벨기에의 이중적인 행태는 사태 해결에 어려움을 더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특히, 루뭄바의 암살은 유엔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이후 콩고 민주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1. 유엔 콩고 주둔군 (ONUC)
1960년 7월 14일, 루뭄바 총리의 요청에 따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43호를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벨기에에 콩고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유엔이 콩고군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여 '임무를 완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루뭄바는 벨기에에 즉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이틀 안에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의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위협했다. 유엔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유엔 콩고 주둔군 (ONUC)을 설립했다. 다음 날 첫 유엔 병력이 도착했지만, 새로운 부대의 임무를 놓고 루뭄바와 유엔 사이에 즉각적인 의견 불일치가 발생했다. 콩고군이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루뭄바는 유엔 평화 유지군을 이용하여 카탕가를 무력으로 진압하길 원했다.[6] 루뭄바는 이 결의안을 언급하며,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귀하의 개인적인 해석과는 달리 유엔군은 카탕가의 반군 정부를 진압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 ONUC는 거부했다. 함마르셸드에게 카탕가의 분리는 콩고의 내부 문제였으며, 유엔은 유엔 헌장 제2조에 따라 개입이 금지되었다.유엔군의 임무와 관련하여, 두 차례의 추가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통과에도 불구하고 의견 불일치는 지속되었다. 7월 22일에 통과된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45호는 콩고가 단일 국가가 되어야 함을 확인하고 벨기에에 군대 철수를 더욱 강력히 요구했다.[50] 8월 9일,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46호는 카탕가를 처음 언급하며 유엔군이 카탕가에 진입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허용했지만, '내부 분쟁에 개입하거나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금지했다.[7]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벨기에의 카탕가 개입였다. 브뤼셀은 모이즈 촘베의 카탕가 분리 계획을 영감을 주거나 조작하지는 않았지만, 공공 질서와 국내 안보 측면에서 카탕가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적,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벨기에인들은 ONUC군에 국가에 대한 불필요한 개입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는데, 이는 "혼란을 증가시킬 위험"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4] 동시에 피에르 위니 외무 장관은 미국, 프랑스, 영국에 자국 정부가 촘베의 음모에 반대하며 장기적인 분리가 콩고의 경제적 활력을 저해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고 알렸다.[4]
유엔군이 콩고에 도착하자, 그들은 ONUC가 카탕가에서 자유로운 이동을 하는 것을 반대했고 평화 유지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고집했다.[4] 이러한 관점은 촘베 대통령 자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유엔이 군사적 우위를 사용하여 그의 정권을 강제로 제거하라는 레오폴드빌의 점점 더 큰 요구와 함께 일반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안전 보장 이사회는 ONUC가 어떤 내부 분쟁에도 관여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카탕가에 진입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첫 번째 병력은 주로 스웨덴군으로 구성되었으며, 1960년 8월 12일 카탕가 수도인 엘리자베스빌에 진입했다.
이 모든 것은 콩고 정부를 좌절시켰고, 8월 27일, 콩고 민족군 군인들이 다양한 소련 군용 차량에 탑승하여 이 지역에 투입되면서 카탕가에 대한 조직적이지 못한, 불운한 침공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두 정부 간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고, 이후 2년 동안 산발적인 충돌이 계속되었다.[4] 11월 8일, 니엠바의 다리를 수리하기 위해 파견된 아일랜드군 소대원들이 매복을 당해 발루바 부족민들에 의해 9명이 사망했다.[8]
총리 루뭄바의 요청에 응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7월 14일, 벨기에군이 콩고, 주로 카탕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3호를 채택했다.[48][49] 루뭄바는 만약 2일 이내에 벨기에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말하며 압력을 가했다. 유엔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ONUC가 편성되었다. 최초의 ONUC는 다음 날 15일에 도착했지만, 그 임무에 대해 루뭄바와 유엔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콩고군의 질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루뭄바는 무력으로 카탕가를 정복하기 위해 ONUC의 힘을 이용하고 싶어했다. 결의 제143호의 문장을 참조한 루뭄바는 하마르셸드에게 "당신의 개인적인 해석에 반하여, 이 문장들로부터 카탕가의 반란 정부를 정복하기 위해 유엔군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하다"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마르셸드는 분리주의 활동을 국내 정치 문제로 여기고 있었고, 유엔 헌장 제2장에서는 무력 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유엔은 7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5호를 채택하여 콩고가 "단일 국가"여야 함을 단언하고, 벨기에군이 콩고에서 철수할 것을 더욱 강력하게 촉구했다.[50] 8월 9일에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6호에서 카탕가의 존재에 대해 처음 언급하며, 내부 분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재확인하는 한편, ONUC의 카탕가 주둔을 인정했다.[51]
9월 14일에 조제프-데지레 모부투가 일으킨 무혈 쿠데타로 파트리스 루뭄바는 실각했다.[52] 그 후 체포된 루뭄바는 모부투에 의해 카탕가 국가가 수도를 둔 엘리자베트빌로 보내져[53], 1961년1월 17일 촘베 등 카탕가 정부 각료 3명의 눈앞에서 카탕가 헌병대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54] 루뭄바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벨기에의 식민주의에 저항한 영웅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루뭄바의 사망 한 달 후인 1961년 2월 21일에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1호는 악화되는 인권 상황에 대처하고 본격적인 내전의 발발을 방지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무력 행사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었다.[55] 같은 해 11월 24일 미국과 소련의 일치로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9호에서는 카탕가가 독립 국가라는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고, "법과 질서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콩고 중앙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인정했다.[56]
4. 2.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960년 7월 14일, 루뭄바 총리의 요청에 따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43호를 채택했다.[48][49] 이 결의안은 벨기에에 콩고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유엔이 콩고군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여 '임무를 완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루뭄바는 벨기에에 즉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이틀 안에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의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위협했다. 유엔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유엔 콩고 주둔군(ONUC)을 설립했다. 다음 날 첫 유엔 병력이 도착했지만, 새로운 부대의 임무를 놓고 루뭄바와 유엔 사이에 즉각적인 의견 불일치가 발생했다. 콩고군이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루뭄바는 유엔 평화 유지군을 이용하여 카탕가를 무력으로 진압하길 원했다.[6] 루뭄바는 이 결의안을 언급하며,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귀하의 개인적인 해석과는 달리 유엔군은 카탕가의 반군 정부를 진압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 ONUC는 거부했다. 함마르셸드에게 카탕가의 분리는 콩고의 내부 문제였으며, 유엔은 유엔 헌장 제2조에 따라 개입이 금지되었다.유엔군의 임무와 관련하여, 두 차례의 추가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통과에도 불구하고 의견 불일치는 지속되었다. 7월 22일에 통과된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45호는 콩고가 단일 국가가 되어야 함을 확인하고 벨기에에 군대 철수를 더욱 강력히 요구했다.[50] 8월 9일,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46호는 카탕가를 처음 언급하며 유엔군이 카탕가에 진입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허용했지만, '내부 분쟁에 개입하거나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금지했다.[51]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벨기에의 카탕가 개입였다. 브뤼셀은 모이즈 촘베의 카탕가 분리 계획을 영감을 주거나 조작하지는 않았지만, 공공 질서와 국내 안보 측면에서 카탕가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적,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벨기에인들은 ONUC군에 국가에 대한 불필요한 개입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는데, 이는 "혼란을 증가시킬 위험"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피에르 위니 외무 장관은 미국, 프랑스, 영국에 자국 정부가 촘베의 음모에 반대하며 장기적인 분리가 콩고의 경제적 활력을 저해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고 알렸다.[4] 카탕가 정부에는 1,133명의 벨기에 기술자가 민간 행정을 담당하고, 114명의 벨기에 육군 장교와 117명의 벨기에 육군 부사관이 ''공공군''을 지휘하고, 58명의 벨기에 공무원이 각 부처를 담당했다. 1960년 8월 4일부터 8일까지 벨기에 정부를 대표하여 벨기에 국립은행의 피에르 코우흐가 카탕가에 방문하여 카탕가 중앙은행 설립을 목표로 했다. 브뤼셀로 돌아온 코우흐는 카탕가가 혼란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모든 것이 카탕가와의 관계를 담당한 아스프레몽 린든의 "경계"에 달려 있다고 보고했다. 1960년 9월에 대부분의 벨기에 군대가 카탕가에서 철수했지만, 200명 이상이 남아 국가 헌병대에서 돈을 받고 복무하는 용병으로 수평적인 경력 전환을 했다. 1963년에도 몇몇 용병들이 군복을 벗고 민간 복장을 한 채로 도망다녔다. 정치 고문과 일부 외교 장관을 포함한 다른 주목할 만한 벨기에 국민들도 남아 있었다. 유엔군이 콩고에 도착하자, 그들은 ONUC가 카탕가에서 자유로운 이동을 하는 것을 반대했고 평화 유지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고집했다.[4] 이러한 관점은 촘베 대통령 자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유엔이 군사적 우위를 사용하여 그의 정권을 강제로 제거하라는 레오폴드빌의 점점 더 큰 요구와 함께 일반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안전 보장 이사회는 ONUC가 어떤 내부 분쟁에도 관여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카탕가에 진입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첫 번째 병력은 주로 스웨덴군으로 구성되었으며, 1960년 8월 12일 카탕가 수도인 엘리자베스빌에 진입했다.
이 모든 것은 콩고 정부를 좌절시켰고, 8월 27일, 콩고 민족군 군인들이 다양한 소련 군용 차량에 탑승하여 이 지역에 투입되면서 카탕가에 대한 조직적이지 못한, 불운한 침공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두 정부 간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고, 이후 2년 동안 산발적인 충돌이 계속되었다.[4] 11월 8일, 니엠바의 다리를 수리하기 위해 파견된 아일랜드군 소대원들이 매복을 당해 발루바 부족민들에 의해 9명이 사망했다.[8]
9월 14일에 조제프-데지레 모부투가 일으킨 무혈 쿠데타로 파트리스 루뭄바는 실각했다.[52] 그 후 체포된 루뭄바는 모부투에 의해 카탕가 국가가 수도를 둔 엘리자베트빌로 보내져[53], 1961년1월 17일 촘베 등 카탕가 정부 각료 3명의 눈앞에서 카탕가 헌병대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54]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961년 2월 21일, 결의안 161호를 채택하여 악화되는 인권 상황에 대처하고 본격적인 내전의 발발을 방지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무력 행사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55] 같은 해 11월 24일 미국과 소련의 일치로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9호에서는 카탕가가 독립 국가라는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고, "법과 질서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콩고 중앙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인정했다.[56]
4. 3. 루뭄바 총리 암살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는 쿠데타로 조제프 모부투에 의해 축출되었다. 1961년 1월 17일, 모부투는 루뭄바를 엘리자베스빌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도착 직후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다.[15] 1월 18일, 카탕가 정보부 장관 루카스 사말렝게는 엘리자베스빌의 여러 술집을 돌아다니며 루뭄바가 살해되었다고 말했고, 경찰은 사말렝게를 연행했다.[16]
루뭄바의 요청에 응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7월 14일, 벨기에군이 콩고, 주로 카탕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3호를 채택했다.[48][49] 루뭄바는 만약 2일 이내에 벨기에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말하며 압력을 가했다. 유엔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ONUC가 편성되었다. 최초의 ONUC는 다음 날 15일에 도착했지만, 그 임무에 대해 루뭄바와 유엔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콩고군의 질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루뭄바는 무력으로 카탕가를 정복하기 위해 ONUC의 힘을 이용하고 싶어했다. 결의 제143호의 문장을 참조한 루뭄바는 하마르셸드에게 "당신의 개인적인 해석에 반하여, 이 문장들로부터 카탕가의 반란 정부를 정복하기 위해 유엔군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하다"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마르셸드는 분리주의 활동을 국내 정치 문제로 여기고 있었고, 유엔 헌장 제2장에서는 무력 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유엔은 7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5호를 채택하여 콩고가 "단일 국가"여야 함을 단언하고, 벨기에군이 콩고에서 철수할 것을 더욱 강력하게 촉구했다.[50] 8월 9일에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46호에서 카탕가의 존재에 대해 처음 언급하며, 내부 분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재확인하는 한편, ONUC의 카탕가 주둔을 인정했다.[51]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루뭄바의 죽음 이후 반식민주의 감정과 수사가 격렬하게 일어나는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열었다. 1961년 2월 21일, 이사회는 콩고에서 내전의 발발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 사용'을 포함한 '모든 적절한 조치'를 승인하는 결의안 161호를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모든 벨기에 군대와 외국 용병을 콩고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지만, 유엔이 공격적인 작전을 수행하도록 명시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지역 유엔군에 의해 카탕가의 분리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결의안에도 불구하고, 다음 6개월 동안 유엔은 여러 차례의 정치 협상을 촉진하는 데 집중하면서 주요 군사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지의 많은 소식통들은 유엔 요원들이 높은 수준의 폭력을 시작하고 유지했으며 수백, 심지어 수천 명의 민간인 사망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960년 말부터, 카탕가는 쭘베파 친위대와 레오폴드빌과 명목상 동맹을 맺고 카탕가 분리에 반대하는 발루바 부족 간의 일련의 충돌로 특징지어졌다. 다른 지역에서 공격해 온 콩고군(ANC) 부대와도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4] 희소하게 배치되고, 많은 경우 양측에 의해 무력에서 밀린 유엔군은 노골적인 내전을 막으려는 거의 희망 없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카탕가 주에서의 지속적인 ONUC 주둔의 필요성을 예상하여,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엘리자베스빌에서의 병력 증강을 승인했다. 그러나 1961년 중반까지, 대통령 경호대는 거의 7,000명의 발루바족을 살해했다. 파벌 간의 갈등 또한 고군분투하는 정권을 휩쓸기 시작했다. 증가하는 수의 평화 유지군은 발루바족을 격분시켰고, 그들은 유엔을 원치 않는 침입자로 간주하고 카탕가와 유엔 군인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9월 14일에 조제프-데지레 모부투가 일으킨 무혈 쿠데타로 파트리스 루뭄바는 실각했다.[52] 그 후 체포된 루뭄바는 모부투에 의해 카탕가 국가가 수도를 둔 엘리자베트빌로 보내져[53], 1961년1월 17일 촘베 등 카탕가 정부 각료 3명의 눈앞에서 카탕가 헌병대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54]
루뭄바의 사망 한 달 후인 1961년 2월 21일에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1호는 악화되는 인권 상황에 대처하고 본격적인 내전의 발발을 방지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무력 행사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었다.[55] 같은 해 11월 24일 미국과 소련의 일치로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69호에서는 카탕가가 독립 국가라는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고, "법과 질서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콩고 중앙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ONUC 부대에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인정했다.[56]
5. 용병 전쟁
카탕가국은 독립을 선포한 후, 쭘베파 친위대와 레오폴드빌과 동맹을 맺은 발루바족 간의 충돌이 잦았다. 또한 콩고군과의 소규모 전투도 발생했다.[4] 유엔군은 이러한 내전을 막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양측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황에 놓였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엘리자베스빌에 병력을 증강하기로 결정했지만, 대통령 경호대는 약 7,000명의 발루바족을 살해하는 등 유혈 사태가 이어졌다.
1961년 2월, 모이즈 촘베는 카탕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주변 국가로부터 외국인 용병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용병 문제"로 불렸으며, ONUC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전에는 벨기에에서 파견된 117명의 백인 지원병이 촘베의 지휘 하에 카탕가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2월에 이들이 제거되었지만, 그 대신 약 500명에 달하는 영국, 프랑스, 남아프리카, 로디지아 출신의 비정규 부대가 배치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헌병대 내에서 임무를 수행했고, 남아프리카 백인 전사로 구성된 "인터내셔널 컴퍼니"라는 친촘베 부대도 편성되었다.[47] 특히 프랑스 용병 중에는 알제리 전쟁에 참전한 직업 군인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카탕가에서 특공대 훈련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5,000명 이상의 ONUC 소속 제99 인도 보병 사단이 수도에 파견되었지만, 백인 용병이 ONUC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심각한 전투가 발생했다. 1961년 4월 5일, 다그 함마르셸드 사무총장은 카탕가에서 벨기에인 용병의 행위를 비판하고, ONUC를 도발한 촘베를 비난했다. 4월 8일에는 벨기에인과 남아프리카 헌병이 평화 유지를 위해 파견된 에티오피아 부대가 주둔하는 카탕가 북부의 도시, 카발로를 습격했다. 4월 30일, 카탕가는 ONUC와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47]
6월, 촘베는 콩고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한 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체포되어 자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그는 콩고 정부에 대한 반란 선동, 무기 및 항공기 불법 압수, Katangese franc/카탕가 프랑프랑스어 발행을 통한 화폐 위조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카탕가와 콩고의 다른 지역을 재통일하기 위한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석방되었다.[57]
8월부터 9월에 걸쳐 ONUC는 정권을 지지하는 주력이라고 여겨지는 용병 병사와 벨기에인 정치 고문을 체포하고 카탕가에서 강제 추방하기 위한 두 차례의 작전을 실행했다. 첫 번째 작전을 담당한 ONUC의 인도 부대는 유혈 사태 없이 다수의 인원을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몇몇 용병은 나중에 돌아왔지만, 총 300명 정도가 콩고에서 추방되었다.
9월 중순, 자도빌에서 ONUC의 아일랜드 부대가 병력에서 우세한 카탕가 헌병대와 6일간 자도빌 포위전(Siege of Jadotville)을 벌인 끝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카탕가는 아일랜드 병사들을 전쟁 포로로서 계속 구금했다[58]. 카탕가의 공군은 ONUC 부대가 주둔하는 자도빌, 엘리자베스빌, 카미나를 대상으로 기총 소사를 가해 성과를 거두었다[59]。
소규모의 평화 협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을 협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하마르셸드가 9월 18일 북로디지아의 은돌라 공항에 착륙하려던 중 의문의 추락 사고를 겪어 하마르셸드를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1961년 유엔 전세기 추락 사고)이 발생했다[60]. 이 사고는 단순 사고가 아닌 암살이라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설 등 여러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콩고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유엔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의문을 남겼다.
우 탄트가 하마르셸드의 후임으로 취임한 후에도 평화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촘베가 시간을 끄는 전술을 쓰고 있다는 판단하에 탄트는 카탕가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이에 분노한 촘베는 12월 19일, 협상에서 철수했다.
5. 1. 용병의 역할
1961년 2월, 모이즈 촘베는 카탕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주변 국가로부터 더 많은 외국인 용병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국제 사회는 이를 "용병 문제"라고 칭하며 ONUC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벨기에에서 파견된 117명의 백인 지원병이 촘베의 지휘하에 카탕가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월에 이들 "불법 전투원"이 제거되었지만, 그 자리는 약 500명에 달하는 영국, 프랑스, 남아프리카, 로디지아 출신의 비정규 부대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헌병대 내에서 지휘 임무를 맡았고, 주로 남아프리카 백인 전투원으로 구성된 "인터내셔널 컴퍼니"라는 친(親) 촘베 부대가 편성되기도 했다.[4]
특히 프랑스 용병 중에는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던 직업 군인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카탕가에서 특공대 훈련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1961년 3월 30일, 카탕가의 용병이 "벨기에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100명의 남아프리카인"을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최초의 공개 보고서가 나왔다.[4] ONUC가 약 5,000명 규모의 인도 제99 보병 사단 병력을 수도에 파견하자, 촘베는 카탕가 민간인과 백인 용병 모두에게 UN군을 공격하도록 선동하면서 심각한 전투가 벌어졌다. 1961년 4월 5일, UN 사무총장은 카탕가에서 복무하는 벨기에 용병을 비판하고, 촘베가 카탕가 대중을 유엔군에 반대하도록 선동한 것을 비난했다. 3일 후, 벨기에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병이 카탕가 북부의 발루바 마을인 카발로를 공격하여 그곳에 주둔한 에티오피아 평화 유지군과 교전하면서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이어진 전투에서 최소 30명의 용병이 무장 해제되고 체포되었다. 4월 30일에야 카탕가는 ONUC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4]
1961년 6월, 콩고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했던 촘베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체포되었다. 그는 자택 연금 상태에 놓였으며, 콩고 정부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무기 및 항공기를 불법으로 압수하고, 카탕가 프랑을 발행하여 화폐를 위조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촘베는 카탕가와 콩고의 다른 지역을 재통일하기 위한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석방되었다.[57]
8월부터 9월에 걸쳐, ONUC는 정권을 지지하는 주력이라고 여겨지는 용병 병사와 벨기에인 정치 고문을 체포하고, 강제로 카탕가에서 추방하기 위한 두 가지 작전을 실행했다. 첫 번째 작전을 담당한 ONUC의 인도 부대는 유혈 사태 없이 다수의 인원을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몇몇 용병은 나중에 돌아왔지만, 총 300명 정도가 콩고에서 추방되었다.
9월 중순, 자도빌에서 ONUC의 아일랜드 부대가 병력에서 우세한 카탕가 헌병대와 6일간 자도빌 포위전을 벌인 끝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카탕가는 아일랜드 병사들을 전쟁 포로로서 계속 구금했다.[58] 카탕가의 공군은 ONUC 부대가 주둔하는 자도빌, 엘리자베스빌, 카미나를 대상으로 기총 소사를 가해 성과를 거두었다.[59]
소규모의 평화 협상이 계속 진행되었지만, 협상 과정에서 휴전을 협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탄 UN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의 탑승기가 1961년 9월 18일 북로디지아의 은돌라 공항에 착륙하려던 중 의문의 추락 사고를 겪어, 함마르셸드를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1961년 유엔 전세기 추락 사고)이 발생했다.[60]
함마르셸드의 후임으로 우 탄트가 취임한 후에도 평화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시간을 끄는 전술을 쓰고 있다고 판단한 탄트는 카탕가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이에 분노한 촘베는 12월 19일, 이에 항의하며 협상에서 철수했다.
5. 2. 자도빌 포위전
1961년 2월, 모이즈 촘베는 카탕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주변 국가로부터 외국인 용병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용병 문제"로 불렸으며, ONUC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주요 관심사였다. 이전에는 벨기에에서 파견된 117명의 백인 지원병이 촘베의 지휘 하에 있는 카탕가 육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월에 이들이 제거되었지만, 그 대신 약 500명에 달하는 영국, 프랑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디지아 출신의 비정규 부대가 배치되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헌병대 내에서 임무를 할당받았고, 남아프리카 백인으로 구성된 "인터내셔널 컴퍼니"라는 친촘베 부대가 편성되었다.[47]5,000명 이상의 ONUC 소속 제99 인도 보병 사단이 수도에 파견되었지만, 백인 용병이 ONUC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심각한 전투가 발생했다. 다그 함마르셸드는 1961년 4월 5일에 카탕가에서 벨기에인 용병의 행위를 비판하고, ONUC에 도발적인 촘베를 비난했다. 4월 8일 벨기에인과 남아프리카 헌병이 평화 유지를 위해 파견된 에티오피아 부대가 주둔하는 카탕가 북부의 도시, 카발로를 습격했다. 4월 30일 카탕가는 ONUC와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47]
6월, 카탕가국 대통령 촘베는 콩고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한 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체포되었다. 촘베는 자택 연금 상태에 놓였으며, 콩고 정부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무기 및 항공기를 불법으로 압수하고, 카탕가 프랑을 발행하여 화폐를 위조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촘베는 카탕가와 콩고의 다른 지역을 재통일하기 위한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석방되었다.[57]
8월부터 9월에 걸쳐, ONUC는 정권을 지지하는 주력이라고 여겨지는 용병 병사와 벨기에인 정치 고문을 체포하고, 강제로 카탕가에서 추방하기 위한 두 가지 작전을 실행했다. 첫 번째 작전을 담당한 ONUC의 인도 부대는 유혈 사태 없이 다수의 인원을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몇몇 용병은 나중에 돌아왔지만, 총 300명 정도가 콩고에서 추방되었다.
9월 중순 리카시에서 ONUC의 아일랜드 부대가 병력에서 우세한 카탕가 헌병대와 6일간 자도빌 포위전을 벌인 끝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카탕가는 아일랜드 병사들을 전쟁 포로로서 계속 구금했다.[58] 카탕가의 공군은 ONUC 부대가 주둔하는 자도빌, 엘리자베스빌, 카미나를 대상으로 기총 소사를 가해 성과를 거두었다.[59]
소규모의 평화 협상이 계속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휴전을 협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의 탑승기가 9월 18일 북로디지아의 은돌라 공항에 착륙하려던 중 의문의 추락 사고를 겪어, 함마르셸드를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1961년 유엔 전세기 추락 사고)도 있었다.[60]
함마르셸드의 후임으로 우 탄트가 취임한 후에도 평화 협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시간을 끄는 전술을 쓰고 있다고 보고 격분한 탄트는 카탕가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분노한 촘베는 12월 19일, 이에 항의하며 협상에서 철수했다.
5. 3. 함마르셸드 사무총장 사망
1961년 2월, 모이즈 촘베는 카탕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주변 국가로부터 더 많은 외국인 용병을 수입했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용병 문제"로 불렸으며, 유엔 콩고 작전(ONUC)의 대응이 주목받았다. 이전에는 벨기에에서 파견된 117명의 백인 지원병이 촘베의 지휘 하에 있는 카탕가 육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는데, 2월에 이들이 제거되었지만, 그 대신 약 500명에 달하는 영국, 프랑스, 남아프리카, 로디지아 출신의 비정규 부대가 배치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헌병대 내에서 임무를 수행했고, 남아프리카 백인 전사로 구성된 "인터내셔널 컴퍼니"라는 친촘베 부대도 편성되었다[47]。5,000명 이상의 ONUC 소속 제99 인도 보병 사단이 수도에 파견되었지만, 백인 용병이 ONUC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심각한 전투가 발생했다. 다그 하마르셸드 사무총장은 1961년 4월 5일, 카탕가에서 벨기에인 용병의 행위를 비판하며 ONUC에 도발적인 촘베를 비난했다. 4월 8일에는 벨기에인과 남아프리카 헌병이 평화 유지를 위해 파견된 에티오피아 부대가 주둔하는 카탕가 북부의 도시, 카발로를 습격했다. 4월 30일, 카탕가는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로 ONUC와 합의했다[47]。
6월, 촘베는 콩고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한 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체포되어 자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그는 콩고 정부에 대한 반란 선동, 무기 및 항공기 불법 압수, Katangese franc/카탕가 프랑프랑스어 발행을 통한 화폐 위조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카탕가와 콩고의 다른 지역을 재통일하기 위한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석방되었다[57]。
8월부터 9월에 걸쳐 ONUC는 정권을 지지하는 주력이라고 여겨지는 용병 병사와 벨기에인 정치 고문을 체포하고 카탕가에서 강제 추방하기 위한 두 차례의 작전을 실행했다. 첫 번째 작전을 담당한 ONUC의 인도 부대는 유혈 사태 없이 다수의 인원을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몇몇 용병은 나중에 돌아왔지만, 총 300명 정도가 콩고에서 추방되었다.
9월 중순, 자도빌에서 ONUC의 아일랜드 부대가 병력에서 우세한 카탕가 헌병대와 6일간 자도빌 포위전(Siege of Jadotville)을 벌인 끝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카탕가는 아일랜드 병사들을 전쟁 포로로서 계속 구금했다[58]. 카탕가의 공군은 ONUC 부대가 주둔하는 자도빌, 엘리자베스빌, 카미나를 대상으로 기총 소사를 가해 성과를 거두었다[59]。
소규모의 평화 협상이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휴전을 협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하마르셸드가 9월 18일 북로디지아의 은돌라 공항에 착륙하려던 중 의문의 추락 사고를 겪어 하마르셸드를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1961년 유엔 전세기 추락 사고)이 발생했다[60]. 이 사고는 단순 사고가 아닌 암살이라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설 등 여러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콩고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유엔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의문을 남겼다.
우 탄트가 하마르셸드의 후임으로 취임한 후에도 평화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촘베가 시간을 끄는 전술을 쓰고 있다는 판단하에 탄트는 카탕가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이에 분노한 촘베는 12월 19일, 협상에서 철수했다.
6. 미국의 개입
1960년 10월 3일, 카탕가는 미국의 승인과 유엔 가입을 위한 로비를 위해 뉴욕에 미승인 외교 사절단을 개설했다.[9] 사절단의 수장은 벨기에령 콩고의 관광 진흥을 담당했던 벨기에인 미셸 스트루엘렌스(Michel Struelens)였다.[10] 미국이 카탕가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스트루엘렌스는 벨기에 여권을 가지고 브뤼셀에서 뉴욕으로 이동했다.[10] 카탕가가 벨기에 출신의 백인에 의해 대표된다는 점은 카탕가를 사기극으로 공격하는 데 자주 이용되었다.[11] 스트루엘렌스는 자신의 임무가 "카탕가가 콩고에서 공산주의 영향력에 대한 유일한 장벽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서반구에 카탕가의 이야기를 알리는 것"이라고 밝혔다.[12]
미국은 카탕가를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스트루엘렌스는 미국의 우익 상당수를 설득하여 카탕가를 지지하게 만들었다.[13] 스트루엘렌스의 동맹 중 하나는 극우 단체인 리버티 로비(Liberty Lobby)였다.[13] 유럽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을 경험한 제3세계의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반서방적인 경향을 보였고, 벨기에인들이 지배하는 카탕가는 미국의 우익에게 긍정적으로 여겨졌다.[14] 미국의 보수 지식인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은 카탕가를 옹호하며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이 백인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으려 한다고 주장했다.[13]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카탕가를 일본의 식민지였던 만주국에 비유하며, 촘베가 지도자이지만 실제 권력은 벨기에 관리들이 행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9], [12]
1960년 12월 도미니크 디유르(Dominique Diur)는 파리에 또 다른 사절단을 개설했는데, 이는 주로 외국 용병 모집 사무소로 기능했지만 프랑스에서 불법이었다. 로제 폴크(Roger Faulques), 로제 트린키에(Roger Trinquier), 에드가르 투페-톰(Edgard Tupët-Thomé)을 포함한 프랑스 용병들이 카탕가에서 싸우기 위해 모집되었다. 브뤼셀에서는 자크 마상구(Jacques Masangu)가 사절단을 이끌며 카탕가 대의를 위해 싸울 용병을 모집했다.
파트리스 루뭄바가 소련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미국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카탕가를 콩고의 마지막 "반공의 요새"로 여겼다. 엘리자베스빌 주재 미국 영사는 정부 승인을 "적대 행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모이즈 촘베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2]
아이젠하워의 후임인 케네디는 콩고 중앙 정부의 시릴 아둘라 정권을 지지하며 카탕가의 분리 활동을 종결시키려 했다.[63][64] 1963년 1월 21일, 케네디는 카탕가 분리 종식에 대해 긍정적인 성명을 발표했다.[65] 케네디 행정부는 콩고의 통일을 지지하며 카탕가의 분리주의를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6. 1. 아이젠하워 행정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콩고 정책에 접근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파트리스 루뭄바를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콩고의 마지막 "반공의 요새"로 카탕가를 여겼다. 엘리자베스빌 주재 미국 영사는 모이즈 촘베에게 그의 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것을 "적대 행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전달받았다.[62]아이젠하워의 후임인 존 F. 케네디는 미국의 보호 아래 수립된 콩고 중앙 정부의 시릴 아둘라 정권을 지지하며 카탕가의 분리 활동을 종결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했다.[63][64] 카탕가의 분리 활동이 종료된 1963년 1월 21일에 케네디는 "분리의 종식이... 미국이나 콩고 및 아프리카 전체의 미래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환영받고 있다. 이 분리는 2년 반 동안 콩고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었다."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65]
6. 2. 케네디 행정부
소련에 지원을 요청한 파트리스 루뭄바는 미국에게 최악의 사태를 초래할 수 있는 인물로 간주되어 위험시되었다. 아이젠하워와 그의 행정부 각료들은 독립 선언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소련과 싸울 의지를 공언한 카탕가를 콩고의 마지막 "반공의 요새"로 여겼다. 엘리자베스빌 주재 미국 영사는 그의 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것을 "적대 행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모이즈 촘베에게 전달하도록 지시받았다.[62]케네디는 미국의 보호 아래 수립된 콩고 중앙 정부의 시릴 아둘라 정권을 지지했으며, 전임자와는 대조적으로, 카탕가의 분리 활동을 종결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했다.[63][64] 카탕가의 분리 활동이 종료된 1963년 1월 21일에 케네디는 "분리의 종식이... 미국이나 콩고 및 아프리카 전체의 미래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환영받고 있다. 이 분리는 2년 반 동안 콩고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었다."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65]
6. 3. 스트루엘렌스 로비
케네디는 미국의 보호 아래 수립된 콩고 중앙 정부의 시릴 아둘라 정권을 지지하며, 카탕가의 분리 활동을 종결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했다.[63][64] 카탕가의 분리 활동이 종료된 1963년 1월 21일에 케네디는 "분리의 종식이... 미국이나 콩고 및 아프리카 전체의 미래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환영받고 있다. 이 분리는 2년 반 동안 콩고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었다."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65]7. 카탕가국의 종말
1963년, 카탕가국은 콩고 민주 공화국에 재통합되는 과정을 겪는다.
6월, 모이즈 촘베 대통령과 외무부 장관 에바리스트 킴바는 콩고 지도자들의 코킬하빌 회의에 참석 후 귀국하려다 체포되었다. 촘베는 가택 연금되었고, 콩고 정부에 대한 반란 선동, 불법 무기 및 항공기 압수, 카탕가 프랑 발행을 통한 위조 지폐 발행 혐의를 받았다. 이후 촘베는 카탕가를 콩고와 재통일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석방되었으나, 8월에는 이 합의를 이행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17] 촘베는 카탕가의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옹호하며 현상 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촘베가 부재중인 동안, 그의 사진이 엘리자베스빌 거리에 붙여졌고, 무농고, 장-밥티스트 키브웨, 조셉 키웰레 3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삼두정치가 대통령직을 임시로 인계받았다.
8월과 9월, 유엔은 용병과 벨기에 정치 고문들을 카탕가에서 군사력으로 체포 및 송환하는 두 차례의 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은 정권의 핵심 세력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작전은 인도 유엔군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약 400명의 남자를 무혈 체포했다.[4] 카탕가 주재 벨기에 영사에게 정치 고문을 포함한 벨기에 국민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는 자국 정부 또는 군과 관련된 공식 직원들에게만 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총 300명 정도가 콩고에서 추방되었지만, 일부 용병들은 나중에 돌아왔다. 특히 백인 카탕가인들은 유엔의 조치에 분개했으며, 촘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9월 11일, 유엔군은 카탕가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모든 외국인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했지만, 촘베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일부 유엔 인사가 촘베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엘리자베스빌의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며 그의 헌병들을 체포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협상 기회는 무산되었다. 카탕가인들은 이 음모를 재빨리 파헤쳤고, 촘베가 유엔에 이 혐의를 제기했을 때, 유엔은 당황스럽게도 이 주장이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음 날, 자도빌에서 민간인을 보호하던 155명의 아일랜드 군인들이 우세한 헌병대에 포위되면서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카탕가 공군의 용병 조종사가 지원하는 헌병 부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군인들은 항복을 거부하며 맞섰지만 결국 포로로 억류되었다.[4][18]
ONUC 사령관들은 카탕가 정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새로운 계획에 동의, 유엔군이 용병을 체포하고 엘리자베스빌의 우체국과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며, 콩고 중앙 정부의 대표를 파견하여 지휘권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헌병과 용병 동맹에 의해 저항받았다. 우체국을 접수하려는 초기 유엔의 계획은 격퇴되었고, 카탕가 군인들은 ONUC 군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8일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11명의 유엔 인원이 사망했으며, 자도빌의 아일랜드 부대가 체포되었다. 촘베의 군대는 압도적인 공군력을 자랑했고, 카탕가 공군은 자도빌, 엘리자베스빌, 카미나에 주둔한 유엔 진지에 성공적인 공격을 가했다.[19] 유엔군의 암울한 실패는 열등한 장비에도 기인했다. 헌병들은 자동 소총, 중기관총, 박격포,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로 무장했지만, 유엔 군의 대다수는 구식 소총과 임시 보호 장치만 갖춘 민간 차량을 사용했다.
영국, 벨기에, 프랑스 정부는 콩고의 국내 문제에 대한 간섭을 포함하는 콩고의 '평화 유지 작전'에 비판적이었으며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다.[4] 반면 소련은 카탕가를 진압하고 모부투 정부와의 즉각적인 재통일을 시작하기 위해 더 많은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 협상 과정에서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와 15명이 은돌라 근처 북로데시아(현재 잠비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20][21][22] 함마르셸드의 죽음은 유엔에서 후계자 위기를 촉발시켰고,[23] 안전 보장 이사회는 후임자를 투표해야 했다.[24]
유엔의 압력 하에 촘베는 새로운 임시 사무총장 우 탄트의 3단계 계획에 동의했지만, 이는 서류상의 합의에 불과했다. 카탕가 정부는 촘베가 새로운 콩고 헌법 초안 작성에 도움을 받고 의회에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측은 곧 조건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했고, 이러한 오해는 시릴 아둘라 총리의 콩고 정부와의 관계를 붕괴시켰다. 유엔은 30일 이내에 콩고에서 연방 헌법을 채택하고, 불법적인 카탕가 반란을 종식시키며, 통화를 통합하고, 카탕가와 중앙 정부 간에 광산 수입을 50대 50으로 분배하는 새로운 계획을 채택했다.[4] 우 탄트는 촘베에게 모든 정치범들을 무조건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시릴 아둘라는 즉시 이 타협안을 수용했지만, 모이즈 촘베는 조건을 명시했다. 유엔이 주최한 일련의 토론이 이어졌지만,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카탕가 정부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 여겨 탄트는 경제 제재를 가했지만, 이는 평화로운 통합에 대한 희망을 파괴했을 뿐이다. 12월 19일, 촘베는 항의의 표시로 협상에서 탈퇴했다.
존 F. 케네디 행정부는 아둘라 정부가 콩고의 안정에 대한 최고의 희망을 대표한다고 판단, 콩고의 통합을 지지하게 되었다.[25] 케네디는 국무부 차관 조지 볼에게 카탕가가 미국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언론에 하도록 했다.[27] 볼은 카탕가 인구의 대다수가 촘베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벨기에 관리들이 카탕가에서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는 방식을 지적하며, 카탕가를 만주국과 같이 다른 사람들의 제국주의를 위한 외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국가라고 주장했다.[28]
1962년 12월 24일, 엘리자베트빌 근교에서 카탕가국 헌병대와 ONUC의 충돌이 발생했다. 12월 27일까지 양측의 교전은 멈추지 않았고, 유엔 장교들은 국회에 즉시 휴전을 준수하지 않으면 자위 수단을 포함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통보했다.[4] 다음 날 그랜드슬램 작전이 시작되었고, 평화유지군은 헌병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엘리자베스빌로 진격했다.
사흘 만에 엘리자베스빌은 유엔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촘베는 수도에서 탈출했다. 1월 1일까지 휴전이 지켜졌지만, 유엔 인력은 뉴욕의 명령을 명백히 무시하고 자도트빌을 공격했다. 카탕가군은 진격을 막기 위해 루피라 강의 다리를 파괴했지만, 유엔군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4] 자도트빌 함락 이후, 유엔군과 카탕가의 외국 민간인과 관련된 여러 논란이 발생했다. 차량에 탑승한 벨기에 여성 2명이 인도 유엔군 경비병의 발포로 도로 검문소에서 사망했고, 유엔군의 행동으로 사망한 다른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했다.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은 추가 군사 작전을 중단했으며, 벨기에와 영국 관료들은 촘베와 대화를 시작하여 그를 항복시키려 했다. 1월 11일, 평화유지군은 로디지아 국경 근처의 사카니아에 진입했고, 카탕가 헌병대는 이미 패주하여 심각한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1월 15일, 모이즈 촘베는 패배를 인정했고, 1월 21일 유엔 관리들을 콜웨지로 들여보냈다. 촘베는 지지자들에게 "지난 2년 반 동안 당신들은 두 번이나 영웅적으로 적과 싸웠습니다. 이제 그들의 우세함은 압도적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61]
콩고 정부는 카탕가를 콩고 민주 공화국에 재통합하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카탕가 헌병대는 국군에 흡수되었고, 조제프 일레오가 신설된 주의 상주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국제 연합은 분열된 경제 및 행정 구역의 재결합을 지원했다. 1963년 1월 29일, 사무총장실은 카탕가 주의 대부분의 국제 연합 활동이 경제에 국한될 것이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축소된 병력이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4] 우 탄트 사무총장은 광신자들이나 완고한 사람들이 두 번째 분리를 시도할 경우를 대비하여 군사적 주둔을 점진적으로 축소할 것을 촉구했다.
1964년 7월, 모이즈 촘베는 망명에서 돌아와 시릴 아둘라의 뒤를 이어 콩고의 총리가 되었지만, 권력을 잡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렸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1965년 10월에 해임되었다.
7. 1. 그랜드슬램 작전
6월, 모이즈 촘베 대통령과 외무부 장관 에바리스트 킴바는 콩고 지도자들의 코킬하빌 회의에 참석한 후, 자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려던 날 체포되었다. 촘베는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고, 콩고 정부에 대한 반란 선동, 불법 무기 및 항공기 압수, 그리고 카탕가 프랑을 발행하여 위조 지폐를 발행한 혐의를 받았다. 촘베는 이후 카탕가를 나머지 국가와 재통일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이에 따라 석방되었다.[17] 그러나 8월이 되자 그는 이 합의를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촘베는 그 달 연설에서 카탕가의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옹호하고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 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촘베가 부재중인 동안, 그의 사진이 엘리자베스빌 거리에 붙여졌고, 3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대학이 촘베의 대통령직을 임시로 인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삼두정치는 카탕가의 실력자 2명, 무농고와 재무부 장관 장-밥티스트 키브웨, 그리고 두 지도자 간의 균형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 교육부 장관 조셉 키웰레로 구성되었다.8월과 9월, 유엔은 용병과 벨기에 정치 고문들을 카탕가에서 군사력으로 체포하고 송환하는 두 차례의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러한 외국인들이 정권의 핵심 세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작전은 인도 유엔군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오전 5시에 용병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여 약 400명의 남자를 무혈 캡처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4] 비록 카탕가 주재 벨기에 영사에게 정치 고문을 포함한 나머지 벨기에 국민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는 자국 정부 또는 군과 관련된 공식 직원들에게만 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총 300명 정도가 콩고에서 추방되었지만, 몇몇 용병들은 나중에 돌아왔다. 특히 백인 카탕가인들은 유엔의 이러한 조치에 분개했다. 촘베는 깜짝 놀랐고 긴장은 급속도로 고조되었다. 9월 11일, 유엔군은 카탕가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모든 외국인들을 추방할 것을 더욱 요구했지만, 대통령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남아 있는 외국 세력의 평화로운 제거를 위한 협상의 기회는, 일부 유엔 인사가 촘베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엘리자베스빌의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며 그의 헌병들을 체포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재빨리 무산되었다. 카탕가인들은 이 음모를 재빨리 파헤쳤고, 촘베가 유엔에 이 혐의를 제기했을 때, 유엔은 당황스럽게도 이 주장이 상당히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만약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도록 허용되었다면, 이는 주요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 외에 내부 문제에 대해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ONUC의 약속을 명백히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4] 다음 날, 자도빌에서 민간인을 보호하던 155명의 아일랜드 군인들이 많은 유럽인을 포함한 우세한 헌병대에 포위되면서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카탕가 공군의 용병 조종사가 지원하는 헌병 부대의 여러 공격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항복을 거부했고, 이어진 전투에서 공격 부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4][18] 수적으로 열세인 아일랜드 부대는 결국 항복해야 했다. 그들은 약 한 달 동안 전쟁 포로로 억류되었다.
더 이상 카탕가에서 증가하는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ONUC 사령관들은 마침내 카탕가 정부를 권좌에서 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계획에 동의했다. 이 계획은 유엔군이 용병을 체포하고 엘리자베스빌의 우체국과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며, 콩고 중앙 정부의 대표를 파견하여 지휘권을 갖는 것을 요구했다. 이 시도는 전혀 무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헌병과 그들의 용병 동맹에 의해 저항받았다. 우체국을 접수하려는 초기 유엔의 계획은 효율적으로 격퇴되었다. 그날 늦게 카탕가 군인들은 ONUC 군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8일간의 전투가 도시에서 벌어졌고, 11명의 유엔 인원이 사망했다. 자도빌의 한 아일랜드 부대가 체포되었다. 촘베의 군대는 압도적인 공군력을 자랑했고, 작은 카탕가 공군은 자도빌, 엘리자베스빌, 카미나에 주둔한 유엔 진지에 성공적인 사격과 폭격을 가했다.[19]
UNF의 암울한 실패는 열등한 장비에도 기인할 수 있다. 헌병들은 자동 소총, 중기관총, 박격포, 그리고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로 무장했지만, 유엔 군의 대다수는 구식 소총과 임시 보호 장치만 갖춘 민간 차량을 사용했다. 전투 중에 카탕가 당국은 조건부 휴전을 제안했지만, ONUC는 즉시 거부했다. 결국 모이즈 촘베를 축출하려는 어떤 목표도 실패했음이 분명해졌다. 영국, 벨기에, 프랑스 정부는 콩고의 국내 문제에 대한 이러한 간섭을 포함하는 콩고의 '평화 유지 작전'에 특히 비판적이었다.[4] 그들은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다. 반면에 소련은 카탕가를 진압하고 모부투 정부와의 즉각적인 재통일을 시작하기 위해 더 많은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항의했다.
이어지는 제한적인 평화 협상 과정에서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와 15명은 의문의 여지 속에 은돌라 근처 북로데시아 (현재 잠비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는 증거도 있다.[20][21][22] 함마르셸드의 죽음은 유엔에서 후계자 위기를 촉발시켰고,[23] 후계자 계승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안전 보장 이사회는 후임자를 투표해야 했다.[24]
유엔의 압력(군사 공격) 하에 촘베는 나중에 새로운 임시 사무총장 우 탄트의 3단계 계획에 동의했는데, 이는 카탕가를 콩고와 재통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류상의 합의에 불과했다. 카탕가 정부는 이 계획이 레오폴드빌에 의해 완전히 존중되어야 하며, 촘베가 새로운 콩고 헌법 초안 작성에 도움을 받고 의회에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측은 일주일도 안 되어 조건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합의가 구속력을 갖기 전에 국회에서 비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오해는 재빨리 시릴 아둘라 총리의 콩고 정부와의 관계를 붕괴시켰다. 좌절한 유엔은 새로운 계획을 채택했는데, 이는 30일 이내에 콩고에서 연방 헌법을 채택하고, 불법적인 카탕가 반란을 종식시키며, 통화를 통합하고, 카탕가와 중앙 정부 간에 광산 수입을 50대 50으로 분배하는 것을 요구했다.[4] 이 제안의 주요 설계자인 우 탄트는 또한 촘베가 모든 정치범들을 무조건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벨기에와 미국은 후자가 통합된 콩고를 개혁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 계획을 지지했다. 시릴 아둘라는 즉시 이 타협안을 수용했지만, 모이즈 촘베는 조건을 명시했다. 유엔이 주최한 일련의 토론이 이어졌지만,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카탕가 정부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 여겨 점점 격분한 탄트는 경제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무총장이 평화로운 통합을 위해 가지고 있던 마지막 희망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12월 19일, 분노한 촘베는 항의의 표시로 진행 중인 협상에서 탈퇴했다.
존 F. 케네디의 새로운 행정부는 아둘라 정부가 콩고의 안정에 대한 최고의 희망을 대표한다고 결정했는데, 특히 아둘라가 확고한 반공주의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다.[25] 카탕가가 콩고의 대부분의 광물 자원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탕가가 분리될 경우 아둘라 정부가 경제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케네디는 콩고의 통합을 지지하게 되었다.[25] 뉴욕에서 스트루렌스는 기자 회견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엔이 카탕가에서 어떤 만행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때, 저는 만행 사진을 배포하여 유엔의 카탕가에서의 유혈 사태를 증명합니다."[25] 이에 대응하여 케네디 행정부는 스트루렌스의 비자를 취소하여 그를 추방하려 했지만, 의회의 카탕가 친구들이 언론의 소란을 일으킨 후 물러섰다.[26] 선전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케네디는 국무부 차관 조지 볼에게 카탕가가 미국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언론에 하도록 위임했다.[27] 볼은 나중에 국무부에서 팜플렛으로 출판된 연설에서, 카탕가 인구의 대다수가 촘베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벨기에 관리들이 카탕가에서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는 방식을 지적하며, 카탕가를 만주국과 같이 다른 사람들의 제국주의를 위한 외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국가라고 주장했다.[28]
1962년이 저물어 가면서, 유엔은 카탕가에서 작전 능력을 점차 강화했고, 우 탄트는 촘베의 분리주의를 강제로 종식시키는 방안을 점점 더 심각하게 고려했다. 유엔군이 헌병대에 계속 괴롭힘을 당하면서, 정치적 교착 상태는 즉각적인 군사적 긴장으로 빠르게 고조되었다. 예를 들어, 카탕가 주민들이 독립 기념일을 축하했을 때, 유엔 관계자들은 다가오는 퍼레이드에 행진할 예정이었던 2,000명 규모의 "명예 근위대"를 두려워하여 엘리자베스빌로 가는 길을 봉쇄했다. 몇 천 명의 민간인 거주자들이 즉시 이 일방적인 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4] 두 달 후, 지방 당국은 ONUC 작전에 사용할 장비와 물품을 실은 여러 대의 철도 차량을 압수했고, 여러 명의 구르카 평화유지군이 카탕가 국경에서 표시 없는 지뢰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브루킹스 연구소가 작성한 후속 보고서에 따르면 카탕가 정권은 새로운 군용 항공기를 구매하고 군대 규모를 늘리고 있으며, 현재 "4만 명의 병력과 헌병대, 최소 400명의 용병, 최소 20대의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수치는 과장된 것이었다.[4] 사무총장실은 무역 제재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특히 영국을 포함한 여러 회원국은 정치적 해결을 강요하기 위한 금수 조치 사용에 계속 반대했다.
12월 20일, 미국 국무부는 카탕가에 미국 군사 임무를 파견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 조치는 백인과 흑인 카탕가인 모두에게 심한 비판을 받았다. 최소 100명의 현지 학생, 그 중 많은 수가 유럽인이었고, 이후 미국 영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콩고 정부와 동구권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4] 그러나 카탕가의 국제적 승인 시도는 곧 실패할 운명임이 분명해졌다. 직접적인 조치에 대한 압력 급증, 증가하는 미국의 이해관계, 유엔군 사령관들의 호전적인 분위기, 그리고 반군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벨기에의 약속은 곧 유엔이 가까운 미래에 모이즈 촘베에 대해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1962년 12월 24일, 엘리자베트빌 근교에서 카탕가국 헌병대와 ONUC의 충돌이 발생했다. 해가 바뀌기 전에 ONUC는 엘리자베트빌을 제압했고, 그 직후에 정전 합의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ONUC의 인도군 부대는 본부의 명령을 어기고 자도빌을 급습했다. 자도빌 제압 후 ONUC 병사에 의한 잔학 행위가 발생했다. 이 때 도로 검문소에서 벨기에 여성 2명이 인도 경비원의 발포를 받아 차 안에서 살해되는 등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했다.
카탕가 헌병대와 주로 프랑스인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으로 구성된 나머지 용병 부대는 "초토화 작전"을 따르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앙골라로 도주했다.[47] 1963년 1월 21일, 모이즈 촘베는 패배를 인정하고 마지막 거점이었던 콜웨지에 유엔 직원이 들어가는 것에 동의했다. 지뢰를 제거하고 모든 무장 지지자에게 무기를 포기하도록 지시했다. 촘베는 카탕가국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성명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여러분은 적과 두 번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현재, 그들은 압도적인 우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61]
7. 2. 촘베의 항복
6월, 모이즈 촘베 대통령과 외무부 장관 에바리스트 킴바는 콩고 지도자들의 코킬하빌 회의에 참석한 후, 자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려던 날 체포되었다. 촘베는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고, 콩고 정부에 대한 반란 선동, 불법 무기 및 항공기 압수, 그리고 카탕가 프랑을 발행하여 위조 지폐를 발행한 혐의를 받았다. 촘베는 이후 카탕가를 나머지 국가와 재통일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이에 따라 석방되었다.[17] 그러나 8월이 되자 그는 이 합의를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촘베는 그 달 연설에서 카탕가의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옹호하고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 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촘베가 부재중인 동안, 그의 사진이 엘리자베스빌 거리에 붙여졌고, 3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대학이 촘베의 대통령직을 임시로 인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삼두정치는 카탕가의 실력자 2명, 무농고와 재무부 장관 장-밥티스트 키브웨, 그리고 두 지도자 간의 균형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 교육부 장관 조셉 키웰레로 구성되었다.8월과 9월, 유엔은 용병과 벨기에 정치 고문들을 카탕가에서 군사력으로 체포하고 송환하는 두 차례의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러한 외국인들이 정권의 핵심 세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작전은 인도 유엔군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오전 5시에 용병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여 약 400명의 남자를 무혈 캡처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4] 비록 카탕가 주재 벨기에 영사에게 정치 고문을 포함한 나머지 벨기에 국민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는 자국 정부 또는 군과 관련된 공식 직원들에게만 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총 300명 정도가 콩고에서 추방되었지만, 몇몇 용병들은 나중에 돌아왔다. 특히 백인 카탕가인들은 유엔의 이러한 조치에 분개했다. 촘베는 깜짝 놀랐고 긴장은 급속도로 고조되었다. 9월 11일, 유엔군은 카탕가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모든 외국인들을 추방할 것을 더욱 요구했지만, 대통령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남아 있는 외국 세력의 평화로운 제거를 위한 협상의 기회는, 일부 유엔 인사가 촘베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엘리자베스빌의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며 그의 헌병들을 체포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재빨리 무산되었다. 카탕가인들은 이 음모를 재빨리 파헤쳤고, 촘베가 유엔에 이 혐의를 제기했을 때, 유엔은 당황스럽게도 이 주장이 상당히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만약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도록 허용되었다면, 이는 주요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 외에 내부 문제에 대해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ONUC의 약속을 명백히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4] 다음 날, 자도빌에서 민간인을 보호하던 155명의 아일랜드 군인들이 많은 유럽인을 포함한 우세한 헌병대에 포위되면서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카탕가 공군의 용병 조종사가 지원하는 헌병 부대의 여러 공격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항복을 거부했고, 이어진 전투에서 공격 부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4][18] 수적으로 열세인 아일랜드 부대는 결국 항복해야 했다. 그들은 약 한 달 동안 전쟁 포로로 억류되었다.
더 이상 카탕가에서 증가하는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ONUC 사령관들은 마침내 카탕가 정부를 권좌에서 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계획에 동의했다. 이 계획은 유엔군이 용병을 체포하고 엘리자베스빌의 우체국과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며, 콩고 중앙 정부의 대표를 파견하여 지휘권을 갖는 것을 요구했다. 이 시도는 전혀 무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헌병과 그들의 용병 동맹에 의해 저항받았다. 우체국을 접수하려는 초기 유엔의 계획은 효율적으로 격퇴되었다. 그날 늦게 카탕가 군인들은 ONUC 군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8일간의 전투가 도시에서 벌어졌고, 11명의 유엔 인원이 사망했다. 자도빌의 한 아일랜드 부대가 체포되었다. 촘베의 군대는 압도적인 공군력을 자랑했고, 작은 카탕가 공군은 자도빌, 엘리자베스빌, 카미나에 주둔한 유엔 진지에 성공적인 사격과 폭격을 가했다.[19]
UNF의 암울한 실패는 열등한 장비에도 기인할 수 있다. 헌병들은 자동 소총, 중기관총, 박격포, 그리고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로 무장했지만, 유엔 군의 대다수는 구식 소총과 임시 보호 장치만 갖춘 민간 차량을 사용했다. 전투 중에 카탕가 당국은 조건부 휴전을 제안했지만, ONUC는 즉시 거부했다. 결국 모이즈 촘베를 축출하려는 어떤 목표도 실패했음이 분명해졌다. 영국, 벨기에, 프랑스 정부는 콩고의 국내 문제에 대한 이러한 간섭을 포함하는 콩고의 '평화 유지 작전'에 특히 비판적이었다.[4] 그들은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다. 반면에 소련은 카탕가를 진압하고 모부투 정부와의 즉각적인 재통일을 시작하기 위해 더 많은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항의했다.
이어지는 제한적인 평화 협상 과정에서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와 15명은 의문의 여지 속에 은돌라 근처 북로데시아(현재 잠비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는 증거도 있다.[20][21][22] 함마르셸드의 죽음은 유엔에서 후계자 위기를 촉발시켰고,[23] 후계자 계승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안전 보장 이사회는 후임자를 투표해야 했다.[24]
유엔의 압력(군사 공격) 하에 촘베는 나중에 새로운 임시 사무총장 우 탄트의 3단계 계획에 동의했는데, 이는 카탕가를 콩고와 재통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류상의 합의에 불과했다. 카탕가 정부는 이 계획이 레오폴드빌에 의해 완전히 존중되어야 하며, 촘베가 새로운 콩고 헌법 초안 작성에 도움을 받고 의회에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측은 일주일도 안 되어 조건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합의가 구속력을 갖기 전에 국회에서 비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오해는 재빨리 시릴 아둘라 총리의 콩고 정부와의 관계를 붕괴시켰다. 좌절한 유엔은 새로운 계획을 채택했는데, 이는 30일 이내에 콩고에서 연방 헌법을 채택하고, 불법적인 카탕가 반란을 종식시키며, 통화를 통합하고, 카탕가와 중앙 정부 간에 광산 수입을 50대 50으로 분배하는 것을 요구했다.[4] 이 제안의 주요 설계자인 우 탄트는 또한 촘베가 모든 정치범들을 무조건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벨기에와 미국은 후자가 통합된 콩고를 개혁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 계획을 지지했다. 시릴 아둘라는 즉시 이 타협안을 수용했지만, 모이즈 촘베는 조건을 명시했다. 유엔이 주최한 일련의 토론이 이어졌지만,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카탕가 정부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 여겨 점점 격분한 탄트는 경제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무총장이 평화로운 통합을 위해 가지고 있던 마지막 희망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12월 19일, 분노한 촘베는 항의의 표시로 진행 중인 협상에서 탈퇴했다.
존 F. 케네디의 새로운 행정부는 아둘라 정부가 콩고의 안정에 대한 최고의 희망을 대표한다고 결정했는데, 특히 아둘라가 확고한 반공주의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다.[25] 카탕가가 콩고의 대부분의 광물 자원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탕가가 분리될 경우 아둘라 정부가 경제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케네디는 콩고의 통합을 지지하게 되었다.[25] 뉴욕에서 스트루렌스는 기자 회견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엔이 카탕가에서 어떤 만행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때, 저는 만행 사진을 배포하여 유엔의 카탕가에서의 유혈 사태를 증명합니다."[25] 이에 대응하여 케네디 행정부는 스트루렌스의 비자를 취소하여 그를 추방하려 했지만, 의회의 카탕가 친구들이 언론의 소란을 일으킨 후 물러섰다.[26] 선전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케네디는 국무부 차관 조지 볼에게 카탕가가 미국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언론에 하도록 위임했다.[27] 볼은 나중에 국무부에서 팜플렛으로 출판된 연설에서, 카탕가 인구의 대다수가 촘베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벨기에 관리들이 카탕가에서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는 방식을 지적하며, 카탕가를 만주국과 같이 다른 사람들의 제국주의를 위한 외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국가라고 주장했다.[28]
1962년 12월 24일, 유엔군과 카탕가 헌병대는 엘리자베스빌 인근 유엔 관측소 근처에서 충돌했다. 헬리콥터가 격추되었고, 촘베 대통령은 처음에는 오해로 보였던 상황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며 자신의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2월 27일까지 양측의 교전은 멈추지 않았고, 유엔 장교들은 국회에 즉시 휴전을 준수하지 않으면 자위 수단을 포함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통보했다.[4] 다음 날 그랜드슬램 작전이 시작되었고, 평화유지군은 헌병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엘리자베스빌로 진격했다.
사흘 만에 엘리자베스빌은 유엔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다수의 헌병대가 체포되거나 서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외국 용병들은 흩어졌다. 전투기는 카탕가 공군을 상대로 70회 이상 출격했고, 두 대를 제외한 모든 제트기는 지상에서 파괴되었다.[4] 촘베는 수도에서 탈출했지만, 유엔군이 자제하고 공격을 중단하지 않으면 반격을 시작하겠다고 위협했다. 1월 1일까지 휴전이 지켜졌지만, 논란이 많은 반항 행위로 유엔 인력은 뉴욕의 명령을 명백히 무시하고 자도트빌을 공격했다. 카탕가군은 진격을 막기 위해 루피라 강의 다리를 파괴했지만, 유엔군은 가벼운 저항과 산발적인 저격에도 불구하고 잔해를 이용하여 강을 건널 수 있었다.[4] 이는 당시 카탕가와 콩고 전역에서 ONUC를 괴롭히던 느린 통신 상태 때문이라는 의견이 나중에 제기되었다.[4] 이후 자도트빌 점령으로 인해 촘베의 지지자들이 그곳에서 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는데, 이는 우려했던 바였다.
자도트빌 함락 이후, 유엔군과 카탕가의 외국 민간인과 관련된 여러 논란이 발생했다. 차량에 탑승한 벨기에 여성 2명이 인도 유엔군 경비병의 발포로 도로 검문소에서 사망했다. 또한, 유엔군의 행동으로 인해 사망한 2명의 신원 미상의 유럽인을 포함한 다른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 이후,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은 추가 군사 작전을 중단했으며, 벨기에와 영국 관료들은 촘베와 대화를 시작하여 그를 항복시키려 했다. 그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월 11일, 평화유지군은 로디지아 국경 근처의 사카니아에 진입했다. 카탕가 헌병대는 이미 패주하여 심각한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주로 프랑스인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인 나머지 용병들은 어떠한 효과적인 지도력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초토화 작전"을 따르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앙골라를 통해 국외로 도망쳤다.[4]
1월 15일, 모이즈 촘베는 패배를 인정했고, 1월 21일 유엔 관리들을 자신의 마지막 거점인 콜웨지로 들여보냈다. 지뢰와 폭파물은 제거될 예정이었고, 무장한 모든 충성파들은 무기를 항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촘베는 지지자들에게 한 마지막 연설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당신들은 두 번이나 영웅적으로 적과 싸웠습니다. 이제 그들의 우세함은 압도적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62년 12월 24일, 엘리자베트빌 근교에서 카탕가국 헌병대와 ONUC의 충돌이 발생했다. 해가 바뀌기 전에 ONUC는 엘리자베트빌을 제압했고, 그 직후에 정전 합의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ONUC의 인도군 부대는 본부의 명령을 어기고 자도빌을 급습했다. 자도빌 제압 후 ONUC 병사에 의한 잔학 행위가 발생했다. 이 때 도로 검문소에서 벨기에 여성 2명이 인도 경비원의 발포를 받아 차 안에서 살해되는 등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했다.
카탕가 헌병대와 주로 프랑스인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으로 구성된 나머지 용병 부대는 "초토화 작전"을 따르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앙골라로 도주했다.[4] 1963년 1월 21일, 모이즈 촘베는 패배를 인정하고 마지막 거점이었던 콜웨지에 유엔 직원이 들어가는 것에 동의했다. 지뢰를 제거하고 모든 무장 지지자에게 무기를 포기하도록 지시했다. 촘베는 카탕가국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성명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여러분은 적과 두 번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현재, 그들은 압도적인 우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7. 3. 재통합 이후
콩고 정부는 카탕가를 콩고 민주 공화국에 재통합하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카탕가 헌병대는 국군에 흡수되었고, 전 총리 조제프 일레오가 신설된 주의 상주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국제 연합은 분열된 경제 및 행정 구역의 재결합을 지원했다. 1963년 1월 29일, 사무총장실은 카탕가 주의 대부분의 국제 연합 활동이 경제에 국한될 것이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축소된 병력이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4] 우 탄트 사무총장은 광신자들이나 완고한 사람들이 두 번째 분리를 시도할 경우를 대비하여 군사적 주둔을 점진적으로 축소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ONUC가 모이즈 촘베를 몰아내기 위해 사용한 무력 사용을 옹호했지만, 마지막 작전에 대해 "평화 유지군에게는 약간의 전투조차도 너무 많고, 소수의 사상자도 너무 많다"고 언급했다.[4]1964년 7월, 모이즈 촘베는 망명에서 돌아와 시릴 아둘라의 뒤를 이어 연립 정부를 이끌며 콩고의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렸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1965년 10월에 해임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야망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962년 12월 24일, 엘리자베트빌 근교에서 카탕가국 헌병대와 ONUC의 충돌이 발생했다. ONUC는 엘리자베트빌을 제압했고, 그 직후에 정전 합의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ONUC의 인도군 부대는 본부의 명령을 어기고 자도빌을 급습하여 무고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자도빌 제압 후 ONUC 병사에 의한 잔학 행위가 발생했으며, 도로 검문소에서 벨기에 여성 2명이 인도 경비원의 발포를 받아 차 안에서 살해되는 등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했다.
카탕가 헌병대와 주로 프랑스인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으로 구성된 나머지 용병 부대는 "초토화 작전"을 따르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앙골라로 도주했다.[47] 1963년 1월 21일, 모이즈 촘베는 패배를 인정하고 마지막 거점이었던 콜웨지에 유엔 직원이 들어가는 것에 동의했다. 그는 지뢰를 제거하고 모든 무장 지지자에게 무기를 포기하도록 지시했다. 촘베는 카탕가국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성명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여러분은 적과 두 번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현재, 그들은 압도적인 우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61]
8. 정치
카탕가국의 정치 체제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이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으로서, 각료 회의를 이끌고 군대의 최고 사령관을 겸임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연임이 가능했지만, 국민 투표가 아닌 카탕가 의회의 대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되었다.[29]
입법권은 대통령과 의회에 분할되어 있었으며, 양 기관 모두 입법 권한을 행사했다. 의회는 64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58명이 콩고 연합(CONAKAT) 소속이었다.[29] 의석의 85%는 직접 선출되었고, 나머지 15%는 전통적인 부족 당국 대표에게 할당되었다.[29] 대(大) 평의회는 상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입법 권한은 없었다. 이 기구는 20명의 주요 부족 추장으로 구성되어 헌법 문제, 법률 실무, 과세, 그리고 광업 산업의 기능 및 운영을 포함한 핵심 문제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거부권은 국민 의회에서 3분의 2의 찬성으로 무효화될 수 있었다.[29]
카탕가국은 명목상 다당제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실제로는 콩고 연합(CONAKAT)에 의해 지배되었다.
1960년 8월 4일 카탕가국 헌법 적용을 통해 11명의 장관이 임명되었다.[30][31]
이름 | 기능 | 정당 | 내각 구성원 |
---|---|---|---|
모이즈 촘베 | 카탕가국 대통령 | CONAKAT | 자크 바르텔루스(비서실장);[32] 자비에르 그랑장(부비서실장); 폴 응고이에(부관); 므왐바 대위(의전 장교); 이반 그리냐르(정부 비서); 에바리스트 음부이(이반 그리냐르의 부관) |
고드프로아 뮈농고 | 내무부 장관 | CONAKAT | 빅토르 티니에(비서실장); 찰스 "카를로" 휘게(부비서실장, 1960년 7월 12일부터 1960년 10월까지[33]); 폴 분스(법률 고문) |
장-밥티스트 키브웨 | 재무부 장관, 각료 회의 부회장(1960년 8월 30일부터) | CONAKAT | 르네 바스틴(비서실장); 장-고드프로아 뭄반다(부비서실장); 폴 깁슨(부관 및 비서) |
알퐁스 키엘라 | 통신부 장관 | CONAKAT | U. 반 그라베엑스(비서실장); 가스통 일룽가(부비서실장) |
조제프 키웨레 | 국립 교육부 장관 | CONAKAT | 마르셀 프티(비서실장); 브누아 뉵지(부비서실장) |
에바리스트 킴바 | 외무부 장관 | CONAKAT | 앙리 드메르(부비서실장) |
발랑탱 일룽가 | 법무부 장관 | CONAKAT | 도미니크 디우르(비서실장, 1960년 12월 파리 임명 전까지); 피에르 은다이에(부비서실장) |
클레오파스 무케바 | 공중 보건부 장관 | MNC—칼론지 | 앙드레 문투(비서실장); 그레구아르 카샬라(부비서실장); 드 쉐이츠 박사(고문) |
폴 무호나 | 노동 사회부 장관 | 무소속 | 레몽 데길라주(비서실장); 크리스토프 콜롱고(부비서실장) |
실베스트르 킬론다 | 농업부 장관 | CONAKAT | 장 미셸(비서실장); 장 칼룸(부비서실장) |
살로몽 치잔 | 경제부 장관 | 무소속 | 장 나웨즈(비서실장); 페르손 응구자(부비서실장) |
8. 1. 헌법
카탕가 헌법은 1960년 8월 5일에 공포되었으며, 66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카탕가의 정치 구조와 시민의 권리를 규정했다.[29]8. 2. 행정부
카탕가의 정치 체제는 국가 원수로서 대통령과 정부 수반으로서 총리 사이에 행정 권한이 분담된 콩고 공화국에서 확립된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대신 카탕가는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인 대통령을 가진 순수 대통령제 공화국이었다. 대통령은 각료 회의를 이끌었고, 또한 카탕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대통령은 4년 임기로 연임이 가능했지만, 국민 투표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인 카탕가 의회의 대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되었다.[29]8. 3. 입법부
카탕가국의 입법권은 대통령과 의회에 분할되어 있었으며, 두 기관 모두 입법 권한을 행사했다. 국민 의회는 64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58명이 콩고 연합(CONAKAT) 소속이었다.[29] 의석의 85%는 직접 선출되었고, 나머지 15%는 전통적인 부족 당국 대표에게 할당되었다.[29]대(大) 평의회는 때때로 상원 역할을 수행했지만, 입법 권한은 없었다. 이 기구는 20명의 주요 부족 추장으로 구성되었다. 대 평의회는 헌법 문제, 법률 실무, 과세, 그리고 중요한 광업 산업의 기능 및 운영을 포함한 핵심 문제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거부권은 국민 의회에서 3분의 2의 찬성으로 무효화될 수 있었다.[29]
카탕가국은 명목상 다당제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실제로는 콩고 연합(CONAKAT)에 의해 지배되었다.
8. 4. 각료 명단
1960년 8월 4일 카탕가국 헌법의 적용을 통해 11명의 장관이 임명되었다. 이름과 직책은 룸바 암살에 대한 벨기에 의회 조사 보고서에서 가져왔으며,[30] 내각 구성원의 이름은 기 웨버의 "모이즈 촘베의 카탕가"에서 가져왔다.[31] 살로몽 치잔은 1961년 5월 23일에 사망했으며, 조제프 키웨레는 1961년 11월 14일에 사망했고, 루카스 사말렌게는 1961년 11월 19일에 사망했다. 그들은 교체되지 않았다. 클레오파스 무케바는 1961년 4월 22일에 사임했으며, 공중 보건부 장관이 된 크리소스톰 므웨와가 그를 대신했다.이름 | 기능 | 정당 | 내각 구성원 |
---|---|---|---|
모이즈 촘베 | 카탕가국 대통령 | CONAKAT | 자크 바르텔루스(비서실장);[32] 자비에르 그랑장(부비서실장); 폴 응고이에(부관); 므왐바 대위(의전 장교); 이반 그리냐르(정부 비서); 에바리스트 음부이(이반 그리냐르의 부관) |
고드프로아 뮈농고 | 내무부 장관 | CONAKAT | 빅토르 티니에(비서실장); 찰스 "카를로" 휘게(부비서실장, 1960년 7월 12일부터 1960년 10월까지[33]); 폴 분스(법률 고문) |
장-밥티스트 키브웨 | 재무부 장관, 각료 회의 부회장(1960년 8월 30일부터) | CONAKAT | 르네 바스틴(비서실장); 장-고드프로아 뭄반다(부비서실장); 폴 깁슨(부관 및 비서) |
알퐁스 키엘라 | 통신부 장관 | CONAKAT | U. 반 그라베엑스(비서실장); 가스통 일룽가(부비서실장) |
조제프 키웨레 | 국립 교육부 장관 | CONAKAT | 마르셀 프티(비서실장); 브누아 뉵지(부비서실장) |
에바리스트 킴바 | 외무부 장관 | CONAKAT | 앙리 드메르(부비서실장) |
발랑탱 일룽가 | 법무부 장관 | CONAKAT | 도미니크 디우르(비서실장, 1960년 12월 파리 임명 전까지); 피에르 은다이에(부비서실장) |
클레오파스 무케바 | 공중 보건부 장관 | MNC—칼론지 | 앙드레 문투(비서실장); 그레구아르 카샬라(부비서실장); 드 쉐이츠 박사(고문) |
폴 무호나 | 노동 사회부 장관 | 무소속 | 레몽 데길라주(비서실장); 크리스토프 콜롱고(부비서실장) |
실베스트르 킬론다 | 농업부 장관 | CONAKAT | 장 미셸(비서실장); 장 칼룸(부비서실장) |
살로몽 치잔 | 경제부 장관 | 무소속 | 장 나웨즈(비서실장); 페르손 응구자(부비서실장) |
9. 군사
카탕가국의 군대는 주로 카탕가 헌병대였다.
9. 1. 카탕가 헌병대
카탕가 헌병대는 카탕가국의 치안 유지 및 국경 경비를 담당하는 준군사 조직이었다. 1960년 카탕가국이 독립을 선언한 직후, 모이즈 촘베의 주도 하에 창설되었다. 헌병대는 주로 카탕가인으로 구성되었지만, 벨기에와 프랑스 용병들이 간부로 복무하며 훈련과 지휘를 담당했다.헌병대의 조직은 크게 본부, 지역대, 기동대로 나뉘었다. 본부는 뤼벰시에 위치하며 행정, 인사, 군수, 정보 등을 담당했다. 지역대는 카탕가 전역에 배치되어 치안 유지 및 국경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기동대는 수도 뤼벰시를 중심으로 주요 지역에 배치되어 긴급 상황 발생 시 투입되는 역할을 했다.
헌병대원의 훈련은 벨기에와 프랑스 용병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훈련은 주로 보병 전술, 사격, 폭동 진압, 대테러 등에 집중되었다. 훈련 강도는 매우 높았으며, 실전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의 지도 하에 헌병대원들은 빠르게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헌병대는 다양한 종류의 장비를 사용했다. 소화기로는 FN FAL 소총, FN MAG 기관총, 브라우닝 하이파워 권총 등이 사용되었으며, 중화기로는 81mm 박격포, 106mm 무반동총 등이 사용되었다. 또한, 파나르 AML 장갑차, M3 스카우트 카 등 다양한 장갑차량도 보유하고 있었다.
헌병대는 용병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용병들은 헌병대의 간부로서 훈련과 지휘를 담당했으며, 실전에서도 헌병대와 함께 싸웠다. 용병들은 헌병대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동시에 헌병대가 외국 용병에 의존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1963년 카탕가국이 콩고 중앙 정부에 의해 진압된 이후, 헌병대는 해체되었고, 잔존 세력은 앙골라 등 주변국으로 망명했다.
10. 결론
카탕가국의 사례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카탕가 분리주의 운동은 자원 부국이 겪는 고질적인 문제, 즉 자원 저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풍부한 자원이 오히려 갈등의 씨앗이 되어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콩고 민주 공화국뿐만 아니라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제 사회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당시 서방 강대국들은 카탕가 지역의 풍부한 광물 자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분리주의 운동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하고 진정한 독립을 지원하기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제국주의적 행태의 잔재로 해석될 수 있다. UN의 소극적인 대처 또한 비판의 대상이다. UN은 카탕가 사태 초기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고, 이는 분쟁을 장기화시키고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카탕가국의 실패는 콩고 민주 공화국이 국가 통합을 이루고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국제 사회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문제에 대해 더욱 책임감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과거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반성하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발전을 진정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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