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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아스 평화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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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리아스 평화조약은 기원전 450/449년경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에 체결되었다고 전해지는 조약이다. 이 조약은 델로스 동맹에서 반란을 일으킨 도시 국가들에 대한 아테네의 대처를 도왔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약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조약의 진위와 관련된 증거들을 근거로 그 존재를 부정한다. 조약의 의의와 영향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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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아스 평화조약
개요
명칭칼리아스 평화조약
그리스어 명칭Ειρήνη του Καλλία
로마자 표기Eirḗnē tou Kallía
배경
관련 전쟁페르시아 전쟁
시기기원전 449년경
장소
위치수사 (추정)
교전 세력
협상 당사자델로스 동맹 및 아케메네스 제국
주요 인물
델로스 동맹 대표칼리아스
아케메네스 제국 대표불명
조약 내용 (전쟁 종결 조건)
페르시아 측 조건아케메네스 제국은 에게해 연안에서 물러난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함대를 파견하지 않는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아티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테네 측 조건아테네는 아케메네스 제국 영토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테네는 아케메네스 제국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반란을 지원하지 않는다.
논쟁
역사적 진실성칼리아스 평화조약의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다.

2. 주요 내용 (디오도로스의 기록)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의 그리스 침공 실패 후, 아테나이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은 기원전 450년 키프로스 원정을 감행했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델로스 동맹과의 강화를 결정했고, 이에 따라 평화 조약이 맺어지면서 델로스 동맹의 원정군은 키프로스에서 철수했다. 이 조약은 아테나이의 전권 대사 칼리아스의 이름을 따서 《칼리아스 평화조약》으로 불렸다고 디오도로스는 기록했다.[10]

디오도로스가 전하는 평화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10]

이 협약으로 아테나이는 에게해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소아시아 그리스 폴리스들의 자치를 확보하는 대신 키프로스이집트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2. 1. 델로스 동맹 측의 이점

이 조약으로 아테나이에게해에서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소아시아의 그리스인 폴리스의 자치를 쟁취하는 대신, 키프로스이집트(당시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킨 상태)에 대한 불간섭을 인정했다.[10] 또한 기원전 450년/기원전 449년 이후 페르시아와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는 데 합의함으로써, 아테네코린토스, 테베, 에우보이아 등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로부터의 새로운 위협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2. 2. 페르시아 측의 이점

이 조약으로 아테나이에게해에서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소아시아의 그리스인 폴리스의 자치를 쟁취했다.[10][7]

3. 조약의 진위 논란

칼리아스 평화조약에 대한 기록은 디오도로스, 기원전 4세기의 변론 작가인 데모스테네스[11], 플루타르코스[12] 등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테오폼포스는 조약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투키디데스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기록에서 조약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 이후 페르시아 제국아테네, 페르시아 제국스파르타 사이에 맺어진 조약들에서 '칼리아스 평화조약'에 기반한 조건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조약의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고대 역사가 테오폼포스는 조약문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며 조약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는데, 그 이유는 조약이 합의되었다고 주장하는 시점보다 반 세기나 이후에 사용된 서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3. 1. 조약의 존재를 긍정하는 주장

칼리아스 평화 조약에 대한 내용은 디오도로스, 기원전 4세기의 변론 작가인 데모스테네스[11]플루타르코스[12], 이소크라테스[3]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헤로도토스[4]는 조약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합리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을 언급했으며, 플루타르코스는 이 조약이 에우리메돈 전투 (기원전 466년) 이후에 서명되었거나, 아니면 아예 서명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5]

3. 2. 조약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 테오폼포스는 조약문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며 조약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는데, 그 이유는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시점보다 반 세기나 이후에 사용된 서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3]

이 조약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체결되었다 하더라도 그 중요성은 논쟁의 대상이다. 투키디데스는 이 조약을 언급하지 않지만, 헤로도토스[4]는 조약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을 언급하며, 플루타르코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는 이 조약이 에우리메돈 전투(기원전 466년) 이후에 서명되었거나, 아니면 아예 서명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5]

디오도로스, 기원전 4세기의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8], 플루타르코스[9] 등은 칼리아스 평화 조약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의 기록에서 조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및 그 이후 페르시아 제국과 아테네, 페르시아 제국과 스파르타 사이에 맺어진 조약에는 "칼리아스의 평화 조약"을 바탕으로 한 조건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 실존 여부를 의심하는 연구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6]

4. 조약의 의의와 영향

기원전 450/449년 이후 페르시아와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기로 합의하면서, 아테네델로스 동맹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란을 일으킨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칼리아스는 기원전 446~445년 스파르타와의 30년 평화 조약에도 관여했지만, 커져가는 아테네의 위협은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1] 이후 페르시아는 그리스 문제에 계속 개입하며 스파르타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이 조약의 존재는 역사가들과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4. 1. 아테네의 입장

기원전 450/449년 이후 페르시아와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기로 합의하면서, 아테네델로스 동맹에서 반란을 일으킨 코린토스, 테베, 에우보이아 등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새로운 위협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아테네의 '동맹국'들이 더 이상 델로스 동맹의 정당성이 없다고 느꼈을 때 발생했을 수 있다. 델로스 동맹은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침공을 격퇴한 스파르타가 이끄는 헬라스 동맹에서 발전했는데, 페르시아가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점점 더 많은 공물을 요구하고 동맹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강화하면서 동맹은 진정한 제국으로 변모했고, 아테네의 많은 동맹국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칼리아스는 기원전 446~445년 스파르타와의 30년 평화 조약에도 책임이 있었지만, 커져가는 아테네의 위협은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1]

4. 2. 페르시아의 입장

기원전 450년 이후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투는 잦아들었지만, 페르시아는 그리스 문제에 계속 개입했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승리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참조

[1] 서적 Diodorus Siculus 12.4
[2]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3] 간행물 ancient Greece (historical region, Eurasia): Peace with Persia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4] 서적 Histories
[5] 서적 Cimon
[6] 웹사이트 カリアスの和約 https://kotobank.jp/[...]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コトバンク]]) 2019-05-26
[7] 서적 XII. 4
[8] 서적 使節職務不履行について
[9] 서적 キモン伝
[10] 서적 XII 4
[11] 서적 사절 직무 불이행에 대해
[12] 서적 키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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