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캄데시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캄데시 전투는 2009년 10월 3일 아프가니스탄 캄데시 인근에서 미군과 탈레반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2008년 와낫 전투 이후 미군이 겪은 가장 치열한 전투로, 미군 8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했으며 탈레반 측은 1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 결과로 키팅 전초기지는 폐쇄되었고, 지휘 계통의 장교들이 징계를 받았다. 클린턴 로메샤 병장과 타이 카터 병장은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전투는 영화 '아웃포스트'와 책 '레드 플래툰'으로 제작되었으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명예 훈장'에도 다루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009년 전투 - 대청해전
    2009년 11월 10일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과 조선인민군 해군 간에 발생한 대청해전은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과 조준 사격으로 시작되어 대한민국 해군의 대응 사격으로 마무리되었으며, 남북 관계 경색과 교전 수칙 논란, 북한 피해 규모 은폐 의혹을 낳았다.
  • 탈레반의 테러 - 2018년 카불 구급차 폭탄 테러
    2018년 1월 27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발생한 구급차 폭탄 테러는 내무부 건물 근처에서 폭발하여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를 야기했으며, 탈레반이 배후를 자처하여 국제 사회의 비난과 각국 정부의 규탄을 받았다.
  • 탈레반의 테러 - 마이단샤르 테러
    2019년 아프가니스탄 마이단샤르의 국가안보국 훈련소를 목표로 발생한 마이단샤르 테러는 차량 폭탄과 무장 세력의 공격으로 최소 36명의 사망자와 58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며 탈레반 연루 부인과 정부의 은폐 의혹 등 논란을 야기했다.
  • 2009년 대량 살인 - 2009년 자카르타 폭탄 테러
    2009년 자카르타 폭탄 테러는 2009년 7월 17일 자카르타의 JW 메리어트 호텔과 리츠칼튼 호텔에서 발생한 연쇄 폭탄 테러로, 외국인 5명을 포함해 9명이 사망했으며 제마 이슬라미야가 배후로 지목되었다.
  • 2009년 대량 살인 - 청두 시내버스 방화 사건
    청두 시내버스 방화 사건은 2009년 청두 시내 버스에서 발생한 화재로 27명이 사망했으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남성이 휘발유를 이용해 방화한 사건이다.
캄데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탈레반의 공세 중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의 일부
2007년 3월 아프가니스탄 누리스탄 주 전투 전초기지 키팅에 착륙하는 보잉 CH-47 치누크
2007년 3월 아프가니스탄 누리스탄 주의 전투 전초기지 키팅에 착륙하는 보잉 CH-47 치누크
날짜2009년 10월 3일
장소캄데시, 아프가니스탄
좌표N
결과전술적 연합군 승리
전략적 탈레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미국
아프가니스탄
라트비아
교전 2탈레반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 1 지휘관커티스 스카파로티 장군
랜디 조지 대령 (4-4ID TF Mountain Warrior)
로버트 브라운 중령 (3-61 CAV TF Destroyer)
스토니 포티스 대위 (B Trp, 3-61 CAV)
앤드루 번더만 소위 (B Trp, 3-61 CAV)
아그리스 리에핀슈 대위
교전 2 지휘관도스트 무함마드
시라주딘 하카니
굴람 파로크
압둘-라흐만 무스타그니
전력 규모
교전 1 전력53명
42명
2명
교전 2 전력300명
사상자 및 피해
교전 1 사상자8명 사망, 27명 부상
10명 부상
교전 2 사상자150명 사망 (미국 측 자료)

2. 역사

캄데시 전투는 2008년 7월, 캄데시에서 약 약 32.19km (32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와낫 전투 이후 미군이 치른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였다. 이 공격으로 미군 8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탈레반 측은 약 15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 과정에서 키팅 전투 전초기지(COP Keating)는 부분적으로 점령당하고 거의 파괴될 위기에 처했다. 동시에 인근의 프릿체 관측소(Observation Post "OP" Fritsche) 역시 공격을 받아 키팅 기지에 대한 지원이 제한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전투 직후 기지에서 철수했다. 이 철수는 전투 발발 이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당시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스탠리 맥크리스털 장군의 광범위한 전략 변화의 일환이었다. 그의 전략은 외딴 전초기지들을 포기하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으로 병력을 모아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을 더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공식적으로 전초기지를 폐쇄하고 철수했다고 발표했지만, 철수가 급하게 이루어지면서 저장된 탄약을 모두 처리하지 못했다. 남겨진 탄약이 있던 전초기지 창고는 반군에게 즉시 약탈당했고, 이후 미군 항공기가 이를 파괴하기 위해 폭격했다.

전투 이후 조사 결과, 지휘 계통에 있던 4명의 미군 장교가 기지를 적절하게 지원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징계를 받았다. 반면, 기지 방어에 기여한 8명의 공군 조종사들은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훈장을 수여받았다. 특히 전투 중 용맹을 보여준 클린턴 로메샤 병장과 타이 카터 병장은 미군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을 받았다.

2. 1. 캄데시 기지의 기원

2006년, 연합군 사령관들은 캄데시 지역이 반연합 민병대가 인근 파키스탄과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을 넘나드는 보급로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의 전략은 지방 재건팀(PRT) 기지를 건설하고 유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통제를 해당 지역까지 확대하는 것이었다.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의 가장 외지고 고립된 동부 지역 중 하나인 누리스탄까지 이러한 기지를 확장함으로써 정부의 신뢰성과 힘을 전체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기지는 미국의 반군 진압 전략의 핵심 요소였다.

당시 제10 산악사단 제3 보병 여단 전투단 사령관이었던 존 W. 니콜슨 주니어 대령은 캄데시가 파키스탄 국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세 개의 계곡 시스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니콜슨 대령과 그의 지휘관들은 파키스탄에서 유입되는 무기와 병력 상당 부분을 캄데시에서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캄데시 구의 정부 행정관인 굴 모하메드 칸이 란다이 신 강과 다르에 예 쿠슈토즈 강이 만나는 지점에 거주하고 있었던 점도 누리스탄 PRT 배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8]

누리스탄 지방 재건팀 기지 건설은 누리스탄 주지사 타밈 누리스타니의 강력한 추천을 받았다. 2006년 7월 20일 오전 2시, 제3-71 기병 비행대대 에이블 소대 1개 분대와 체로키 중대 전체 병력이 하워드 중령의 지휘 아래 두 대의 CH-47 치누크 헬리콥터를 이용해 캄데시 인근 능선의 옥수수밭(랜딩 존 바르하이트)에 도착하여 주둔을 시작했다. 이 캠프는 2006년 여름 제10 산악사단 제3-71 기병대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2007년 6월까지 에이블 소대 병력이 운영했다.[8]

이 지역은 제3-71 기병대가 인수하기 전까지 기존 미군의 주둔이나 작전이 거의 없었으며, 특수 작전 부대만이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 활동했을 뿐이었다. 캠프는 원래 PRT 캄데시라는 이름의 지방 재건팀 전초 기지로 계획되었으나, 이 지역의 전투가 극심하여 PRT 임무 대신 화력 기지로 운영되었다. 2006년 12월, 캠프 이름은 캠프 키팅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2006년 11월 26일 캠프 남쪽에서 작전 중 차량 사고로 사망한 제10 산악사단 제3-71 기병대 에이블 소대 소속 벤자민 키팅 중위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제3-71 기병대는 캠프 키팅을 거점으로 주변 지역에서 다수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으며 기지에 대한 여러 차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8]

2. 2. 지형

캄데시 마을과 누리스탄의 대부분은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다. 이곳은 깊고 좁은 계곡에 있는 급류로 분리된 거대한 화강암 바위의 가파른 경사가 특징인 웅장한 산맥이다. 이 지역의 기후는 몬순을 포함한 더운 여름과 계곡까지 확장되는 얼음과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을 보인다. 변동이 심한 날씨와 험준한 산악 지형의 조합은 어떤 종류의 이동과 삶을 어렵고 도전적으로 만든다. 캄데시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 작전은 부대가 이 지역에 배치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지형적, 기후적 요인에 영향을 받았다.

2006년 5월 5일 시작된 딥 스트라이크 작전은 코카이와 코랑갈 계곡에서 캄데시로 재배치하는 과정이었다. 에이블 부대 제2 소대의 픽업 구역(PZ 레즈)은 해발 약 2438.40m 산 측면에 위치했는데, 가파른 경사와 저고도 항공기에 위험한 장애물 때문에 "심장마비 능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8] 픽업 시도 중, 치누크 수송 헬리콥터 한 대가 후방 로터가 나무에 부딪혀 추락하여 승무원과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8]

캄데시 지방 전초기지(PRT) 예정지로 진입한 후에도 지형적 문제는 계속되었다. 기지 한가운데 있는 큰 바위 때문에 헬리콥터 착륙이 불가능했고, 착륙 구역은 란다이 신 강 건너편 우르물 마을 근처에 분리되어 배치되었다. 더욱이 기지가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효과적인 방어가 어려웠다.[8] 이러한 다층적이고 복잡한 지형은 간접 사격 지원을 어렵게 만들었고, 가파른 산은 2차원 지도와 랜드마크를 거의 쓸모없게 만들었다.[8]

이러한 지형적 어려움은 보급에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2006년 8월 8일부터 11월 25일까지 나라이 FOB에서 란다이-신 계곡 도로를 이용한 육로 보급이 시도되었으나, 아프가니스탄 계약업체가 좁은 산길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고 보급 차량은 끊임없는 매복 공격에 시달렸다.[8] 결국 벤 케이팅 중위가 보급 트럭을 직접 운전하다 도로 붕괴로 사망하는 사건 이후, 연합군은 이 도로 사용을 중단했다.[8] 공중 보급 역시 어려운 조건과 현지 주민의 지원 부족으로 원활하지 못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2006년 11월 26일 케이팅 캠프로 이름이 바뀐 이 전초기지는 너무 고립되고 방어와 보급이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8]

2. 3. 반군 세력

누리스탄의 주민들은 민족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다른 지역 주민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크게 콤(Kom), 카타(Kata), 쿠스토즈(Kushtoz), 칼라샤(Kalasha)의 네 그룹으로 나뉜다. 이들은 다시 혈통이나 종교 지도자의 해석에 따라 여러 씨족과 종파로 세분화된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5개의 주요 언어와 다양한 방언이 사용되어 아프가니스탄 다른 지역 출신의 통역가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역사적으로 누리스탄인들은 1895년까지 이슬람교 수용을 거부했으며, 이전에는 힌두교를 믿는 지역으로 간주되어 이슬람 침략자들에게 '카피르(Kafir, 이교도)'라 불렸다. 이들은 외부 세력에 폭력적으로 저항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려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8]

누리스탄 지역의 저항 활동은 주로 헤즈비 이슬라미 굴부딘(Hezb-e-Islami Gulbuddin, HIG)이라는 이슬람 무장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소련 점령기 동안 HIG는 다른 어떤 무자헤딘 저항 단체보다도 미국 CIA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특히 파키스탄으로부터의 침투나 매복 공격 설정에 있어 가장 숙련된 집단으로 평가받았다. 2006년 당시 HIG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일례로, 미군 체로키 중대 소속 에런 스웨인 대위가 아프가니스탄 국경 경찰 사령관 아흐메드 샤에게 캄데시 인근 주둔 가능성을 문의했을 때, 샤는 이전 방문 당시 HIG 반군이 자신의 지프 차량을 폭파하려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 지역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8]

2. 4. 전술

누리스탄 지역의 미국 군인들은 헤즈비 이슬라미 굴부딘(HIG) 부대와 직접 대치하게 되었다. 제3여단 전투단(3rd BCT)의 전 사령관 패트 도나휴 대령은 누리스탄 주민들이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며 외부 세력에 적대적이고 고립되어 있어, 이 지역에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는 버지니아주 크기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 미군 병력이 5,000명에 불과하고 기반 시설이 거의 없다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대반란(COIN) 전략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이 개선한 육군 및 해병대 대반란 야전교범 FM 3-24, 즉 COIN 전략의 목표는 누리스탄 주민들을 미국의 목표에 동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도나휴 대령과 달리, 니콜슨 대령은 캄데시를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하며 COIN 전략을 지지했다.

지역 재건팀(PRT)의 기본 접근 방식은 다음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

  • 적과 주민을 구분하지 않는다.
  • 주민들을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연결한다.
  • 경제 개발과 국가 기반 시설 구축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을 변화시킨다.


니콜슨 대령은 외부에서 강요하는 방식이 아닌, 누리스탄 주민들 스스로 개발 과정을 시작하기를 희망했다. 캄데시 PRT의 초대 사령관 케이팅 중위는 이 지역에서 COIN 전략을 성공시키고자 했다.[8]

마이크 하워드 중령(대대장)은 COIN 전략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으로 구상했다.

  • 중력식 파이프라인 설치를 통한 깨끗한 물 공급
  • 우르물과 캄데시의 수력 발전소 수리
  • 미르데시와 가와르데시에 새로운 발전소 설치
  • 지역 계약자가 건설하고 유지 관리하는 새로운 도로 건설 (최종 단계)


이러한 사업들은 지역 경제를 개선하고 중앙 정부 및 다른 지역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총 133만달러의 예산이 책정되었으며, 이는 그동안 공공 개선 사업이 거의 없었던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케이팅 중위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사업에서 소외된 마을 주민과 부족들은 불만을 품고 미국에 등을 돌렸다. 가와르데시의 마을 원로이자 발전소 계약자였던 하지 유누스는 납치되어 살해당했으며, 그의 시신에는 "연합군과 협력하지 말라. 당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쪽지에는 탈레반 최고 지도자 물라 오마르의 서명이 있었지만, 미국 정보부는 HIG가 살해를 저질렀으며, 더 큰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 오마르의 이름을 이용했다고 분석했다. 도로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매복과 교전은 케이팅 중위의 회의감을 더했다. 그는 "이 자들이 매일 우리에게 총을 쏜다"고 평가했다.[8]

케이팅 중위 사망 이후, 2007년 4월 29일 캄데시 상부 모스크 문에 파슈토어로 작성된 "야간 편지"가 붙었다. 편지에는 "학교, 도로, 발전소 건설 계약을 맺어 미국 쓰레기들에게 복종하고 일하는 자들, 경찰, 지역 행정관, 사령관, 그리고 알라의 명령과 성전을 거부하고 코란을 부정하는 매국노 물라들에게 알린다. 우리는 알라의 뜻에 따라 성전을 계속하고 있으며… 곧 작전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고, "무자헤딘"의 서명이 있었다.

다음 날, 반군은 캄데시에서 코므/카타 부족 간의 불화를 해결하려던 바드무크의 원로 파잘 아하드를 납치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아프간 정부는 더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들은 나라-캄데시 도로에서 심한 매복 공격을 받아 캄데시에 도착하지 못했다.[8]

교전의 근접성과 계곡 양쪽에서의 조직적인 사격은 이 매복 공격자들이 이전의 산발적이고 장거리 사격을 가하던 집단과는 다르다는 것을 시사했다. 미군은 이들을 AAF(Anti-Afghan Fighters, 반아프간 전투원)라는 약칭으로 불렀다. 이들은 더 전문적이었으며, 누리스탄 외부 세력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AAF는 아프간 국민군(ANA) 제복으로 위장하고 가짜 검문소를 설치해 현지 계약자로부터 세금과 통행료를 징수했으며, 불법 목재와 보석을 파키스탄으로 밀수하는 업자들과 결탁했다. 우르두어와 파슈툰어를 사용하는 HIG 전사들은 파키스탄에서 무기와 탄약을 들여왔고, 이들의 검문소[12]와 "세금"은 AAF 작전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전반적으로 AAF는 2007년 미군 진주 이전보다 더 광범위하고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8]

2007년 5월 말, 173 공수여단 전투단 제1-91 기병대대 불독 부대가 톰 보스틱 대위의 지휘 아래 COP 케이팅에 도착했다. 이 부대의 첫 임무는 작전 마운틴 II로, COP 케이팅과 아프간 마을 사레트 코헤 사이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서쪽으로 일련의 관측소를 확장하는 노력이었다. 강을 따라 통제를 더 확장하는 것은 2007년 여름 AAF의 확장과 활동에 대응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AAF는 2007년 7월 26일 사레트 코헤의 강 계곡에서 잘 조직된 매복으로 이러한 진전에 대응했다. 관련된 AAF 부대는 개선된 부대의 패턴에 부합하여 아프간 육군 및 경찰 병력으로 제복을 입고 장비를 갖추었으며, 정부 아프간군에 지급된 최신 무기와 무전기, 그리고 스키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여 미국의 지원 부대와 광범위한 공군력을 전투에 끌어들였다. 공중 및 포병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보스틱 대위는 로켓 추진 수류탄에 의해 사망했다. 윌리엄 "라이언" 프리츠셰 하사는 소총 사격에 의해 사망했다. 다른 미국인 7명과 ANA 병사 1명이 부상을 입었다.[8][13]

사레트 코헤 전투는 "야간 편지"의 위협을 현실화했으며, 나라 지역 미군 사령관 크리스 콜렌다 중령에게 위기 상황임을 각인시켰다. AAF 작전이 확대되었고, 파키스탄의 탈레반 조직의 지원을 받았다. 미군은 나라에서 캄데시까지 강을 따라 얇게 유지되고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초소를 형성했다. 미군은 지속적인 전투에서 살아남기에 너무 적은 수였다. 누리스탄을 미국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첫 번째 노력은 데이브 롤러 중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미국 군인들의 "전투 장비"가 무자비한 살상 기계라는 인상을 준다고 결정했다. 갑옷, 헬멧, 무기로 덮인 미국인들은 싸움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롤러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마을 지도자들과의 다음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가족과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공통 가치에 대해 논의했다. 마울라위 압둘 라흐만은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에 감명받은 지역 원로였다. 그는 아프간 정부를 지지하는 마을 원로들의 합의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8년 여름과 가을을 통해 COP 케이팅의 새로운 사령관인 조이 후토 대위는 이 이니셔티브를 확장했다. 후토는 중앙 아메리카에서 COIN 캠페인에 수년 동안 참여했다.[8]

2007년 10월까지 캄데시 지역의 원로와 물라들은 라흐만의 영감을 받아 캄데시에 모여 누리스탄의 미래를 계획하기 위한 대규모 회의, 즉 슈라를 열었다. 이틀 동안 열린 이 일련의 회의에는 800명 이상의 누리스탄 주민 대표가 참여했으며, 이 지역에 질서와 경제 발전을 가져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을 지도자들은 지역 안보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 군대 및 아프가니스탄 카르자이 정부와 협약을 체결할 100명의 대표로 구성된 슈라를 선출했다. 이 협약은 백인 슈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경제 발전을 위한 자금을 제공할 것이었다. "상호 지원 협약"으로 공식화된 이 협약은 슈라가 현지 보안을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 군대의 현지 마을과 모스크에 대한 무단 수색을 중단하도록 규정했다. 2007년 11월부터 2008년 1월까지 슈라 위원들은 캄데시 지역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지원 협약을 알리고 성전 시대는 끝났으며, 현지 정부가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협약은 캄데시 지역의 전투 수준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이 협약이 체결된 이듬해 아프가니스탄 국민군(ANA)과 미군 사망자는 30명에서 3명으로 감소했다.[8]

슈라는 2008년 10월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1-91 기병대의 ISAF 부대가 본국으로 복귀하고, 제6 기병대대, 제4 기병연대, 제3 여단 전투단, 제1 보병 사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10월 28일, COP 키팅의 지휘관 로버트 J. 옐레스카스 대위는 전초기지에서 400m 이내에서 원격으로 폭파된 IED를 이용한 표적 암살 시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그는 12월 1일 부상으로 사망했다. 암살범은 나중에 우르물에서 발견되었으며, 캠프 키팅의 아프가니스탄 일용직 노동자 중 한 명의 도움을 받았고 우르물 원로들의 묵인 하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옐레스카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슈라와의 관계는 1-91 기병대에서 제6 기병대대로의 전환을 지원했으며, 이 시점부터 슈라의 영향력과 ISAF 부대와의 협력은 감소했다.[8][14]

2. 5. 최종 작전

2009년 여름, COP 키팅은 점점 더 고립되었다. 이 지역의 도로는 제한적이었고 반군의 공격 위협 때문에 지상 보급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캠프 키팅은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위치 탓에 헬리콥터전초기지의 수비대가 반군의 사격에 쉽게 노출되었다. 결국 보급 비행은 달이 없는 밤으로 제한되었는데, 거의 완전한 어둠 속에서 헬리콥터 승무원과 항공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8] 가장 가까운 공격 헬리콥터는 비행 시간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잘랄라바드에 있었다.[11]

OP 프리츠체는 COP 키팅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미국 및 아프가니스탄 국가군이 주둔했다.[9] 두 전초 기지에 주둔한 미 육군 병사들은 전초 기지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지역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에게 이러한 계획을 알렸다.[10] 당시 COP 키팅에는 제61 기병연대 제3대대 브라보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9] 또한, 아프가니스탄 국가군은 이 지역 주변의 다양한 검문소와 장애물에 병력을 배치했다.[15] 이 아프가니스탄 국가군은 라트비아군 작전 멘토 연락팀(OMLT)의 감독과 훈련을 받고 있었다.[16]

연합군은 본래 2009년 8월까지 COP 키팅을 폐쇄할 계획이었지만, 인근 지역에서 진행 중이던 다른 군사 작전 때문에 이 계획은 연기되었다.[31] 키팅 기지가 곧 폐쇄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지도부는 기지의 요새화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했다.[17]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군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반군이 전초 기지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인적 정보 보고를 세 차례 받았다. 하지만 이 보고들은 전자 정보와 같은 다른 정보 수단으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18]

3. 전투

아프가니스탄 누리스탄주의 캄데시 구역


2009년 10월 3일 오전 6시경, 300~400명 규모의 탈레반 무장세력이 캄데시 지역의 전초기지 키팅(COP Keating)과 인근 관측소 프리츠셰(OP Fritsche)를 동시에 공격했다.[19][11] 이는 2008년 7월 와낫 전투 이후 미군이 겪은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탈레반은 공격 전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19] 공격은 박격포로켓추진유탄으로 시작되었으며, 미군의 박격포 진지를 즉시 무력화시켰다.[4] 공격 시작 2분 만에 미군 첫 사상자가 발생했다.[20]

OP 프리츠셰 역시 동시에 공격받아 키팅 기지에 대한 지원 능력이 제한되었다.[9] 공격이 시작되자 아프가니스탄 국가군 병력 대부분은 라트비아군 고문관 두 명(제1상사 야니스 라키스, 상사 마르틴스 다볼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22][23] 방어선을 포기하고 도주했으며, 일부는 전투 중 기지 내 미군 물품을 훔치기도 했다.[24] 미군은 소화기 사격과 박격포로 대응했으며, 오후에는 헬리콥터, 중포, 공습 지원을 받았다.[21]

공격 시작 약 48분 만에 탈레반은 키팅 기지의 방어선을 세 군데(화장실 구역, 정문, 동쪽 아프간군 배치 구역)에서 돌파했다. 기지 내로 진입한 탈레반은 막사 등 건물 대부분에 불을 질렀다. 미군과 라트비아군은 기지 내 불타지 않은 두 건물을 중심으로 한 좁은 방어선으로 후퇴하여 재집결했고, 반격을 통해 출입 통제 지점과 기지 서쪽 건물까지 방어선을 다시 확보하여 최종 방어 거점으로 삼았다.[4][11]

미 공군의 F-15E 전투기 2대(마이크 폴리도어 대위, 아론 도브 대위 및 윙맨 저스틴 파보니 중위, 라이언 본 대위)는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이륙하여 거의 8시간 동안 상공을 선회하며 A-10, B-1 랜서, 기타 F-15 등 다른 19대의 항공기 공습을 유도하고 조정했다.[25] 공습에는 탈레반의 주요 화력 거점이었던 지역 모스크 파괴도 포함되었다. OP 프리츠셰의 병력이 박격포 진지를 다시 확보하자, 아르만도 아발로스 상사는 COP 키팅 방어를 위한 간접 화력 지원을 지시했다.[4][11]

탈레반은 그날 늦게 철수하기 시작했다. 제10 산악 사단 제1대대 32보병연대의 신속 대응 부대(QRF)는 가용 항공기 부족과 험준한 지형 때문에 지연되어 오후 7시가 되어서야 COP 키팅에 도착했다. QRF는 OP 프리츠셰를 먼저 확보한 후 도보로 이동 중 매복 공격을 격퇴하고 키팅 기지에 진입하여 남아있던 지역을 소탕했으며, 이 과정에서 실종 상태였던 조슈아 하트 상사의 시신을 발견했다.[4]

이 전투로 미군 8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했으며, 아프가니스탄 군인 8명과 민간 경비원 2명도 부상을 입었다. 미군은 탈레반 측 사망자를 150명으로 추산했다. 전투 결과 키팅 기지는 거의 파괴되었다.

미군은 전투 발발 이전부터 스탠리 맥크리스털 장군의 새로운 전략에 따라 외딴 전초기지들을 폐쇄하고 인구 밀집 지역으로 병력을 재배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탈레반의 공격은 이 철수 계획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미군은 전투 후 너무 서둘러 철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탄약을 미처 파괴하지 못하고 남겨두었다. 탈레반은 즉시 기지의 창고를 약탈했고, 미군은 남겨진 탄약을 파괴하기 위해 10월 6일 B-1 랜서 폭격기로 창고를 폭격했다. 10월 5일과 6일, 연합군은 기지를 공격했던 탈레반 부대를 추적하여 추가적인 공습을 가했다.

전투 후 조사 결과, 지휘 계선상의 장교 4명이 기지를 적절히 지원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징계를 받았다. 기지 방어에 기여한 공군 조종사 8명은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클린턴 로메샤 병장과 타이 카터 병장은 전투에서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3. 1. 전사자 명단

이름생년월일출생지경력사망 원인[26]
상사 저스틴 티모시 갈레고스1982년 1월 24일애리조나주 투손2003년부터 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이라크 전쟁에 참전머리에 단일 총상
상사 크리스토퍼 토드 그리핀1985년 4월 10일미시간주 킨체로2004년부터 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이라크 전쟁에 참전머리와 몸에 여러 발의 총상
상사 조슈아 미첼 하트1985년 9월 6일캘리포니아주 맨테카2006년부터 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이라크 전쟁에 참전머리와 상체에 여러 발의 총상 및 RPG 파편상
상사 조슈아 존 커크1979년 7월 19일메인주 토머스턴2005년부터 미 육군에서 복무RPG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탈레반 저격수의 총에 머리를 맞음.
병장 스테판 리 메이스1988년 4월 11일버지니아주 러베츠빌2008년부터 미 육군에서 복무RPG 파편에 다리를 맞아 부상 후 사망.
상사 버논 윌리엄 마틴1984년 3월 20일브루클린, 뉴욕시2004년부터 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이라크 전쟁에 참전다리에 단일 총상을 입고 부상 후 사망.
상사 마이클 패트릭 스쿠사1986년 10월 5일빌라스, 뉴저지2005년부터 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이라크 전쟁에 참전탈레반 저격수의 총에 목을 맞음.
일병 케빈 크리스토퍼 톰슨1987년 2월 11일캘리포니아주 샌 마테오 카운티2008년부터 미 육군에서 복무기지 박격포 참호에서 얼굴에 단일 총상으로 사망.


4. 결과

전투 결과 미군 8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했으며, 아프가니스탄 군인 8명과 아프가니스탄 민간 경비원 2명도 부상을 입었다.[4] 미군은 교전 과정에서 탈레반 무장세력 약 1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2008년 와낫 전투 이후 미군이 겪은 가장 큰 인명 피해 중 하나였다.

키팅 전초기지(COP Keating)는 탈레반의 공격으로 부분적으로 점령당하고 거의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동시에 인근의 OP Fritsche 관측소도 공격을 받아 기지 방어를 위한 지원이 제한되었다.

미군은 전투 발발 이전부터 아프가니스탄 내 외딴 전초기지들을 폐쇄하고 인구 밀집 지역 보호를 위해 병력을 재배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이었던 스탠리 맥크리스털 장군의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키팅 기지의 폐쇄 역시 예정되어 있었다.[27] 그러나 탈레반의 대규모 공격으로 인해 기존의 철수 계획은 급격히 앞당겨졌다.[27]

미군은 전투 직후 기지에서 철수했으나, 철수 과정이 매우 급박하게 진행되어 일부 탄약을 미처 파괴하거나 회수하지 못하고 남겨두게 되었다.[11][28][29] 버려진 탄약고는 즉시 탈레반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미군은 남아있는 위험 물자를 제거하기 위해 10월 6일 B-1 폭격기를 동원하여 기지 전체를 폭격하여 파괴했다.[11][28][29]

10월 5일과 6일 양일간, 연합군은 전초기지를 공격했던 탈레반 세력을 추적하고 소탕하기 위한 후속 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 군인 10명이 추가로 사망하고 다수의 탈레반 사상자가 발생했다.[30]

전투 후 진행된 조사 결과, 지휘 계선상의 미군 장교 4명이 기지를 적절히 지원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징계를 받았다. 반면, 위험을 무릅쓰고 항공 지원을 통해 기지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군 조종사 8명은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투 중 용맹을 보여준 클린턴 로메샤 병장과 타이 카터 병장은 미군 최고의 영예인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5. 징계

전투 이후, 미국 중앙사령부는 가이 스완 미 육군 장군이 이끄는 조사단을 통해 사건 경위를 조사했다. 2011년 6월 공개된 조사 보고서는 "지휘 계통에서 부적절한 조치가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고 결론 내렸다.[31] 캄데시 전투 조사단은 기지의 방어력 개선 실패가 육군 지휘부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며, 방어가 어려운 전초기지들의 폐쇄를 권고했다.

보고서는 기지에서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병사들에 대해서는 "현저한 용맹함, 용기, 그리고 용감함"을 보여주었다고 칭찬했지만,[31] COP 키팅을 감독했던 4명의 미 육군 장교에 대해서는 지휘 실패의 책임을 물었다. 이들 장교는 멜빈 포터 대위, 스토니 포티스 대위, 로버트 브라운 중령, 랜디 조지 대령으로, 각각 훈계 또는 견책 처분을 받았다.[32] 그러나 미 육군은 대중에게 공개된 보고서에서는 징계를 받은 네 장교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17]

6. 명예 훈장

캄데시 전투의 생존 병사 두 명이 명예훈장을 받은 것은 베트남 전쟁 이후 약 50년 만의 일이었다.[39]

2013년 2월 1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전투 생존자인 클린턴 로메샤 당시 병장(이후 하사 진급)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로메샤는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았으며, 이는 이라크 전쟁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용사 중 생존자로는 네 번째 명예 훈장 수훈이었다.[39] 로메샤는 입대 초기에 독일에서 근무한 후, 한국 동두천시에 위치한 캠프 케이시의 미국 제2보병사단 제72기갑연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대한민국 국방 근무 기장을 받기도 했다.

2009년 7월 27일 아프가니스탄 누리스탄주 캄데시의 전투 초소 키팅 근처에서 순찰 중인 미 육군 상사 클린턴 L. 로메샤


같은 해 8월 26일에는 또 다른 생존자인 타이 카터 병장(당시 특등병) 역시 전투 중 보여준 용맹함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40]

7. 대중 문화

2020년에는 캄데시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아웃포스트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제이크 테퍼가 쓴 책 ''아웃포스트: 미국 용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The Outpost: An Untold Story of American Valoreng)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41]

캄데시 전투는 2017년에 출판된 클린턴 로메샤의 저서 ''레드 플래툰: 미국 용기의 실화''(Red Platoon: A True Story of American Valoreng)에도 기록되어 있다. 로메샤는 아프가니스탄 누리스탄의 키팅 전초기지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함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명예 훈장''(Medal of Honoreng)에는 클린턴 로메샤와 타이 카터의 활약을 자세히 다룬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42]

8. 한국의 관점

캄데시 전투에서 명예훈장을 받은 클린턴 로메샤 병장은 입대 초기에 독일 근무를 마친 후, 한국 동두천에 위치한 캠프 케이시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그는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제72기갑연대 소속이었으며, 이 공로로 대한민국 국방 근무 기장(:en:Korea Defense Service Medal)을 받았다. 로메샤 병장과 타이 카터 병장은 베트남 전쟁 이후 약 50년 만에 같은 전투에서 생존하여 명예훈장을 받은 사례로 기록되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로메샤 병장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했으며, 그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생존자 중 네 번째 명예훈장 수훈자가 되었다.

참조

[1] 뉴스 Latvian, U.S. soldiers reunite after deadly battle https://gazette.com/[...] 2020-01-04
[2] 뉴스 Attack on Afghan outposts kills 8 soldiers Associated Press 2009-10-05
[3] 뉴스 U.S. ignored warnings before deadly Afghan attack http://www.washingto[...] 2010-02-06
[4] 뉴스 U.S. Military Faults Leaders in Attack on Base https://www.nytimes.[...] 2010-02-06
[5] 뉴스 Courage at Keating: 2 Medals of Honor, 1 DSC, 8 Silver Stars for standout B Troop https://www.military[...] 2020-01-04
[6] 웹사이트 COP Keating https://mohmuseum.or[...] 2023-08-17
[7] 웹사이트 COP Keating https://taskandpurpo[...] 2023-08-17
[8] 서적 The Outpost, An Untold Story of American Valor Little, Brown and Company, Hachette Book Group
[9] 뉴스 Army releases report on battle at Combat Outpost Keating battle http://www.longwarjo[...] 2010-02-06
[10] 뉴스 Afghan insurgents pushed into U.S. base, official says http://www.cnn.com/2[...] CNN 2010-02-06
[11] 뉴스 Strategic Plans Spawned Bitter End for a Lonely Outpost https://www.nytimes.[...] WikiLeaks 2010-07-25
[12] 문서 Tapper pg 250
[13] 웹사이트 Defense.gov News Release: DoD Identifies Army Casualties http://www.defense.g[...] 2015-05-23
[14] 웹사이트 Defense.gov News Release: DoD Identifies Army Casualty http://www.defense.g[...] 2015-05-23
[15] 뉴스 Insurgents breached U.S. outpost in battle http://www.philly.co[...] Associated Press 2010-02-06
[16] 웹사이트 The Gazette: Mom works to help Carson soldiers honor battle bonds http://www.gazette.c[...]
[17] 뉴스 Command Failures Associated Press 2011-06-11
[18] 뉴스 Inside the Ring: DIA on Afghan intel http://www.washingto[...] 2010-02-06
[19] 웹사이트 The Battle for COP Keating https://www.military[...] 2021-03-16
[20] 웹사이트 They 'weren't going to get beat that day' — the Medal of Honor recipients who held COP Keating against all odds https://www.military[...] 2021-03-16
[21] 뉴스 Eight U.S. Soldiers Dead in Bold Attack in Afghanistan https://www.nytimes.[...] 2009-10-04
[22] 웹사이트 US premiere of film about Battle of COP Keating and Latvian soldiers http://www.mod.gov.l[...] 2022-09-13
[23] 웹사이트 Latvijas Televīzija: Videofilma "Afganistāna. Skola karalaukā" http://ltv.lsm.lv/lv[...]
[24] 뉴스 Investigation: Afghan Troops Ran, Hid During Deadly Battle Associated Press 2011-06-11
[25] 뉴스 Pilot honored for organizing airstrikes 2011-02-19
[26] 웹사이트 The Battle of COP Keating (Kamdesh) https://mohmuseum.or[...] 2021-03-16
[27] 웹사이트 COP Keating Investigation Findings Released http://www.isaf.nato[...] 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Afghanistan 2012-06-04
[28] Youtube Taliban fighters display 'US weapons' https://www.youtube.[...] Al Jazeera 2010-07-28
[29] 웹사이트 The Battle for COP Keating http://burnpit.legio[...] American Legion's Burn Pit 2010-07-28
[30] 뉴스 Afghan, US troops kill 40 militants in east http://www.cbs8.com/[...] Associated Press 2010-02-06
[31] 뉴스 Fault Found in Outpost's Fall https://www.wsj.com/[...] 2010-02-06
[32] 뉴스 Camp Keating Officers Disciplined for Attack That Killed 8 U.S. Troops https://abcnews.go.c[...] 2010-02-06
[33] 웹사이트 Outnumbered and With Taliban Overrunning the Base, Clinton Romesha Was Awarded MoH at the Battle of Kamdesh https://www.warhisto[...] 2018-03-30
[34] 뉴스 The Battle for COP Keating http://www.military.[...] 2016-05-06
[35] 뉴스 4th ID Soldier awarded Distinguished Service Cross http://www.army.mil/[...] 2018-12-17
[36] 뉴스 Army vet honored with Distinguished Service Cross for combat heroics in Afghanistan https://www.stripes.[...]
[37] 웹사이트 Pilots receive Distinguished Flying Cross for valor https://web.archive.[...] 2015-05-23
[38] 웹사이트 Airmen honored by college for heroism in Afghanistan http://www.af.mil/Ne[...] 2012-10-22
[39] 웹사이트 Army veteran Clinton Romesha receives Medal of Honor for Afghan fight http://www.stripes.c[...] 2015-05-23
[40] 뉴스 Obama awards Ty Carter Medal of Honor for Afghan battle https://www.bbc.co.u[...] 2013-08-26
[41] 뉴스 I Watched My War Story Become a Movie https://www.nytimes.[...] 2020-07-03
[42] 웹사이트 US soldiers hold back Taliban attack on COP Keating https://taskandpurpo[...] 2019-10-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