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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브리안 코스트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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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연결하려던 조지 스티븐슨의 계획에서 시작되어, 여러 회사가 분할 건설한 철도 노선이다. 칼라일과 메리포트를 연결하는 메리포트 앤 칼라일 철도, 화이트헤븐 타운과 항구를 연결하는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 화이트헤븐과 퍼니스를 연결하려던 화이트헤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 그리고 퍼니스 철도가 통합되어 현재의 노선이 되었다. 현재는 노던에서 운행하며, 주요 역으로는 칼라일, 메리포트, 화이트헤이븐 등이 있다. 156형, 158형, 195형 등의 디젤 동차가 주로 운행되며, 증기 기관차 운행 시에는 안전을 위해 좌석 착석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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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브리안 코스트 선 - [철도 노선]에 관한 문서
노선 정보
노선 이름컴브리안 코스트 선
종류지방 철도
국가영국
체계국가 철도 네트워크
상태운영 중
기점배로-인-퍼니스
종점칼라일
역 수26
개통일1844년
소유자네트워크 레일
운영자노던 레일
실거리137.6 km
궤도거의 복선이나, 3구간은 단선
Class 37 and 68 st bees
다이렉트 레일 서비스의 68형 기관차와 37형 기관차가 세인트 비즈 역에 있는 모습 (2018년 5월)
컴브리안 코스트 선 노선도
컴브리안 코스트 선 노선도
운영 정보
노선 길이85.5 마일 (137.6 km)
운영 회사노던 트레인스
차량156형
위치 정보
지역컴브리아
시작점칼라일
종착점배로-인-퍼니스

2. 역사

조지 스티븐슨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잇는 철도로 랭커스터와 칼라일을 해안선으로 연결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예비 조사까지 진행했다. 그러나 '그랜드 칼레도니안 정션 철도'라 불린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내륙의 셰이프(Shap)를 지나는 노선이 최종 선택되었다. 이로 인해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단일 계획이 아닌, 여러 철도 회사가 각자의 지역적 필요에 따라 구간별로 나누어 건설하게 되었다.

이 노선은 크게 네 개의 주요 구간으로 나뉘어 건설되었는데, 북쪽부터 칼라일과 메리포트를 잇는 메리포트 앤 칼라일 철도,[1] 메리포트와 화이트헤븐을 연결한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2] 화이트헤븐에서 폭스필드까지 이어진 화이트헤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32] 그리고 폭스필드에서 배로우 인 퍼니스까지 연결된 퍼니스 철도 구간이다.[60] 각 철도는 해당 지역의 산업 발전과 교통 수요에 부응하며 건설되었고, 이후 점차 연결되어 하나의 해안 노선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각기 다른 회사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되던 컴브리안 코스트 선의 구성 요소들은 1923년 런던, 미들랜드 앤 스코티시 철도(LMS)로 모두 흡수 통합되었다.

2. 1. 메리포트 앤 칼라일 철도

칼라일에서 메리포트까지 이어지는 노선이다.[1] 이 철도는 뉴캐슬 앤 카라일 철도와 연결하여 "독일해에서 아일랜드해까지 하나의 완전하고 연속적인 교통 노선"을 제공하고, 웨스트 컴브리아 탄전의 북부(내륙) 지역 개발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건설을 위한 의회법은 메리포트 앤 카라일 철도법 1837년 (7 윌. 4 & 1 빅트. c. ci)이었다.

첫 번째 구간인 메리포트-아클레비 (애스패트리아 바로 전)는 1840년에 개통되었으며, 메리포트-칼라일 전체 노선은 1845년에 완전히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단선으로 건설되었으나, 무겁고 수익성 높은 광물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해 1861년까지 전 구간이 복선으로 확장되었다. 이 노선은 철도 회사들이 그룹화될 때까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으며 매우 높은 수익성을 유지했다.

2. 2.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

조지 스티븐슨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잇는 철도를 랭커스터와 칼라일을 잇는 해안선을 따라 건설하는 방안을 선호하여 예비 조사를 실시했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내륙 노선이 선택되었다. 결과적으로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여러 회사가 지역의 필요에 따라 분할하여 철도를 건설한 결과물이다.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WJR)는 메리포트에서 화이트헤븐 (브랜스티)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담당했으며[2], 1865년 런던 노스웨스턴 철도(LNWR)에 임대되었고 1866년 LNWR에 합병되었다.

당시 화이트헤븐 지역은 로우더 가문, 즉 론스데일 백작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윌리엄 로우더 제1대 론스데일 백작의 지원을 받은 '화이트헤븐, 메리포트 앤 칼라일 철도' 설립 시도(1835년)는[3] 메리포트 앤 칼라일 철도에 밀려 실패했다. 그러나 1844년, 론스데일 경과 웨스트 컴벌랜드의 두 국회의원의 지원을 받아 화이트헤븐과 메리포트 사이를 잇는 보다 제한적인 철도 프로젝트가 의회의 승인을 얻었다. 이는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 법 1844'''(7 & 8 빅트. c. lxiv)이다.[4] 제1대 백작이 1844년 초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제2대 백작이 회사 회장이 되어 그 직을 유지했다.

노선 건설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845년 11월 말 메리포트에서 워킹턴까지 개통되었고,[5] 1846년 5월 중순에는 해링턴까지 연장되었다.[6] 특히 화이트헤븐과 해링턴 사이 구간은 절벽과 바다 사이의 좁은 공간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산사태, 낙석, 높은 파도 등으로 건설에 어려움이 많았다. 1847년 2월 19일, 메리포트에서 화이트헤븐까지 화물 열차가 처음 운행했지만, 승객들은 해링턴에서 내려야 했다.[7] 정식 여객 운송은 1847년 3월 18일에 시작되었다.[8]

1848년, 두 개의 의회 법이 통과되었다; 하나는 기존 노선의 건설 초과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추가 자본 조달을 승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항구로 이어지는 고가 철도를 건설한 다음 항구 앞을 따라 화이트헤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 (W&FJR)와 연결하는 것이다.[9] 항구 연결은 실제로 건설되지 않았지만 (W&FJR은 터널을 건설하기로 결정), 북쪽 부두를 위한 선로가 깔렸다.[10] 화이트헤븐-해링턴 구간의 방파제에 지속적인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는 당시 설계가 나쁘고 비효율적이며 더욱 나쁘고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실행되었다고 설명되었다.[11] 1851년, 해링턴과 로우카의 방파제가 6000GBP의 비용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1852년 1월 폭풍으로 화이트헤븐역 바로 북쪽의 방파제가 심하게 손상되었을 때 (벽, 그 뒤의 제방, 철도 궤도가 약 약 45.72m 길이로 완전히 파괴됨,[12]) 손상된 부분은 철도 건설 이전의 것이었다.[13] 1852년 12월의 또 다른 폭풍으로 더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수리된 구간은 그 바로 북쪽에 있는 오래된 벽의 붕괴로 인해 다시 손실되었지만 (로우카와 라이즈호에도 추가적인 유실이 발생함), 서비스는 2주 이내에 재개되었다.[14] W&FJR에서 WJR로의 연결은 (원래 의도대로) 1852년 9월 말에 완공된 터널로 이루어졌으며, W&FJR과의 공동 운영 계약은 1854년 초에 발효되었다.[15] 1855년 12월, 브랜스티 역은 화물 사업을 중단했고, W&FJR의 프레스턴 스트리트 역이 WJR의 화이트헤븐 화물역이 되었다.[16]

1856년, 약 3000GBP가 사라졌다는 감사가 나온 후 회사의 비서가 교체되었다 (손실은 '이사들', 즉 실제로는 론스데일 경 단독으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보충함), 그리고 회사의 엔지니어는 엔진의 결함 상태와 이전 수리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사임했다.[17] 그러나 WJR은 혈암 채굴 붐으로 인해 번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1864년에는 15%의 배당금을 선언했다).[18] 1856년에는 화이트헤븐 인근에서 채굴된 철광석의 양이 259167ton으로 보고되었다. 이 중 152875ton이 화이트헤븐에서 선적되었고, 65675ton이 철도로 운송되었으며, 39617ton이 지역의 철강 공장에서 사용되었다. 광석의 목적지는 다음과 같다: 웨일스 124630ton, 스태퍼드셔 26768ton, 스코틀랜드 15865ton, 뉴캐슬, 미들즈브로 등 51470ton, 프랑스 817ton.[19]

1859년 9월에 메리포트의 습식 부두로 지선이 개통되었고[20] 플림비의 탄광에서 상당한 교통량을 처리했다. 이 노선은 원래 단선이었으나, 메리포트에서 플림비까지 복선화되었고 1861년까지 전 구간이 복선으로 확장되었다.[22] 브랜스티의 원래 레일웨이 호텔은 두 화이트헤븐 회사를 위한 역 건물 및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구매되었고, 커크머스 앤 워킹턴 철도의 워킹턴 역의 지분 절반을 매입했으며, 워킹턴과 해링턴의 목재 육교가 교체되었다. 교통부는 해링턴 교체에 목재 사용에 반대했는데, 특히 WJR의 번영을 고려할 때: "주당 53GBP의 수입을 올리는 회사의 이사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이 재료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23] WJR은 커크머스 앤 워킹턴과 합의(1864)하여 C&WR을 임대하고 C&WR 주주에게 10%의 배당금을 보장했지만, 필요한 법안에 대한 의회 승인을 얻지 못했다. 이는 화이트헤븐, 클레이터 앤 에그레몬트 철도가 임대가 WJR을 통해서만 북쪽으로 광석을 운송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라고 반대했기 때문이다.[24] WJR은 이후 (1865년 6월) 런던 노스웨스턴 철도와 영구적으로 WJR을 임대하고 연간 10%를 지불하는 데 합의했다.[25] (LNWR은 커크머스 앤 워킹턴과 유사한 합의를 맺었고, 퍼니스 철도는 W&FJR과 유사한 합의를 맺었다). 이 합병을 영구적으로 만드는 법안은 1886년 7월 국왕 재가를 받았다.[26] LNWR의 운영 첫 6개월 동안, 이 노선의 이익은 연간 27%로 알려졌다.[27]

화이트헤븐-해링턴 구간이 처음 개통되었을 때, 로우더의 이익에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칼라일 저널''은 이를 비판했다: "지그재그, 지그재그, 지그재그, 영원히. 어떤 뱀도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보다 더 많은 굴곡을 가지고 꼬이지 않는다"라고 비판했고, 그러한 코르니쉬에서의 사고의 공포를 지적했다. "열차를 채우는 불쌍한 불행한 사람들은 한쪽의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다른 쪽의 바다로 거꾸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28] 열차 승무원은 멀리 앞을 볼 수 없었고, 낙석의 가능성이 항상 있었다. 노선이 복선으로 확장된 후에도, 교통부는 해당 구간에 시속 15mph의 속도 제한을 요구했다. 1860년, 해당 구간이 여전히 단선이었을 때, 무거운 철광석 열차가 이 구간에서 고장이 났고, 화이트헤븐 역장이 실수로 고장난 열차의 일부를 화이트헤븐으로 되돌리는 것과 해링턴으로 고장난 열차를 밀어주기 위해 전진하는 여객 열차 사이에 저속 충돌이 발생했다. 16명의 승객이 부상을 입었고, 2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23] 이 사고 (1862년의 또 다른 저속 충돌과 함께)[29]로 인해 WJR은 보상금만으로 약 2만파운드의 비용을 지불했다고 하며,[30] WJR 배당금이 추가 사고에 취약하다는 점은 LNWR에 대한 임대를 지지하는 데 사용된 주장 중 하나였다.[25]

2. 3. 화이트헤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

조지 스티븐슨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잇는 철도를 랭커스터와 칼라일을 잇는 해안선을 따라 건설하는 방안을 선호하여 예비 조사를 실시했지만, 이 '그랜드 칼레도니안 정션 철도'는 건설되지 못했고, 셰이프를 지나는 직행 노선이 선호되었다. 결과적으로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여러 회사가 지역의 필요에 따라 분할하여 철도를 건설한 결과이다. 화이트헤이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W&FJR)는 화이트헤이븐에서 폭스필드까지의 구간을 담당했다.[32] (1865년 퍼니스 철도(Furness Railway)에 의해 임대되었고, 1866년 합병되었다).

초대 론즈데일 백작은 화이트헤이븐과 메리포트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지지했지만, 화이트헤이븐 남쪽이나 웨스트 코스트 메인 라인과의 연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44년에 사망하고 아들인 윌리엄 로우더, 제2대 론즈데일 백작이 계획을 지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의 의장직 아래에서 화이트헤이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는 의회에서 화이트헤이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법 1845[33]를 통과시켰다. 1846년에는 화이트헤이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 (화이트헤이븐 연장 및 커크산톤 우회) 법 1846[34]이 추가로 통과되어, W&FJR을 화이트헤이븐 정션 철도(Whitehaven Junction Railway, WJR)의 화이트헤이븐 역 근처에서 연결하는 노선 연장이 승인되었다. 당시 지역 교통량은 미미했기에, W&FJR이 카르포스 남쪽의 랭커스터 앤 칼라일 철도와 연결될 경우 발생할 통과 교통량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이러한 연장을 위한 법안은 제출된 문서의 불일치로 인해 거부되었다.[35][36][47][37][38] 결국 다른 회사들이 랭커스터와 퍼니스를 연결하는 노선을 건설하게 되었고, 론즈데일 경은 회사를 유지하며 더 나은 시기를 기다려야 했다.[39]

1847년까지 회사는 남은 자금으로 WJR 화이트헤이븐 역 연결 터널과 더든 강어귀를 건너 커비 인 퍼니스 근처에서 퍼니스 철도와 연결하기 위한 2km 길이의 고가교 건설 등 비용이 많이 드는 공사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에 직면했다.[40][41][42] 1848년, 회사는 계획을 변경하여 항구까지 고가 철도를 건설하고 항구 전면을 따라 노선을 운영하며, 커비 아이렐레스로 가는 더든 강 횡단을 포기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대신 노선을 되돌려 더든 강어귀 서쪽 둑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 폭스필드 기차역에서 퍼니스 철도의 브라우튼 인 퍼니스 지선과 더 짧은 구간에서 연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43]

미어하우스(화이트헤이븐 남쪽 2km)에서 칼더 강까지의 16km 구간은 이미 건설 교통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1849년 2월에는 석탄을 브레이스톤과 셀라필드의 창고로 운송하는 데 사용되며 화물 운송을 시작했다.[44] 1849년 7월 21일 공식 개통 이후, 임시 역인 프레스턴 스트리트(화이트헤이븐 남쪽 가장자리)와 래번글래스 사이에서 첫 여객 서비스가 시작되었다.[45][46][47] 1850년 7월에는 부틀이 여객 서비스의 남쪽 종착역이 되었고,[48] 부틀 기차역과 폭스필드 사이의 마지막 구간은 1850년 11월 1일에 여객 서비스로 개통되었다.[49] 화이트헤이븐 북쪽의 WJR 역과의 연결은 터널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터널은 1852년 9월 말에 완공되었다. 1853년 의회 법에 의해 승인된, 프레스턴 스트리트에서 항구 남쪽 끝까지 화물 마차를 말로 운반할 수 있는 시장 통과 트램웨이는 1854년에 완공되었다.[51] WJR과의 공동 운영 협약은 1854년 초에 발효되었다.[15] 1855년 12월부터 W&FJR 여객 열차는 브란스티의 WJR 역까지 운행하기 시작했다.[52] 프레스턴 스트리트는 두 노선의 화물역이 되었고, 터널 바로 남쪽 코키클에 새로운 여객역이 개통되었다.[53] 북쪽으로 가는 혼합 열차의 화물 부분은 코키클에서 분리되어 중력에 의해 프레스턴 스트리트로 보내졌다.[54]

화이트헤이븐, 클레이터 앤 에그레몬트 철도(WC&ER)의 개통은 W&FJR 북쪽 구간에 상당한 광물 수송량을 추가했다.[55] 남쪽에서는 1857년 울버스톤 앤 랭커스터 철도(U&LR)가 완공되면서 화이트헤이븐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완전한 철도 노선이 마침내 마련되었다.[56] 이에 따라 퍼니스 철도와의 연결 지점에 추가 곡선이 설치되었고, W&FJR 열차는 브라우튼 대신 폭스필드나 울버스톤으로 운행하게 되었다. 적철광의 남쪽 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864년 W&FJR은 퍼니스 철도의 유사한 제안과 경쟁하며 폭스필드, 컴브리아를 통한 우회 경로를 없애기 위해 더든 강어귀를 직접 횡단하는 노선을 계획했다. 에그레몬트에서 WC&ER과 셀라필드의 W&FJR을 연결하는 노선 건설 주체에 대한 WC&ER과의 의견 불일치는 W&FJR의 요금 인하로 잠시 보류되었고, 두 회사는 노선 건설 계획을 일시적으로 포기했다가[57] 이후 공동 노선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58] W&FJR은 더든 횡단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이후 연간 8%의 수익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퍼니스 철도에 임대하기로 합의했다.[59] W&FJR은 1865년에 퍼니스 철도에 임대되었고, 1866년에 최종 합병되었다.

2. 4. 퍼니스 철도

조지 스티븐슨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잇는 철도를 랭커스터칼라일을 잇는 해안선을 따라 건설하는 방안을 선호하여 예비 조사를 실시했지만, 이 '그랜드 칼레도니안 정션 철도'는 건설되지 못했고, 셰이프(Shap)를 지나는 직행 노선이 선호되었다. 결과적으로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여러 회사가 지역의 필요에 따라 분할하여 철도를 건설한 결과이다.

화이트헤이븐에서 폭스필드까지의 구간은 화이트헤이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W&FJR)에 의해 건설되었다.[32] 이 회사는 1865년 퍼니스 철도(Furness Railway)에 임대되었고, 1866년에 합병되었다.

초대 론즈데일 백작은 화이트헤이븐과 메리포트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지지했지만, 화이트헤이븐 남쪽으로 철도를 건설하거나 웨스트 코스트 메인 라인과 연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844년 그가 사망하고 아들인 윌리엄 로우더, 제2대 론즈데일 백작이 뒤를 이으면서 계획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의 의장직 아래에서 W&FJR은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이 '''화이트헤이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법 1845'''[33]이다. 1846년에는 '''화이트헤이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 (화이트헤이븐 연장 및 커크산톤 우회) 법 1846'''[34]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W&FJR을 화이트헤이븐 정션 철도(Whitehaven Junction Railway, WJR)의 화이트헤이븐 역 근처에서 WJR과 연결하는 노선을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지역 교통량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W&FJR이 카르포스 남쪽의 랭커스터 앤 칼라일 철도와 연결될 경우 발생할 통과 교통량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이러한 연장을 위한 법안은 문서상의 불일치로 인해 거부되었다.[35] 결국 다른 회사들이 랭커스터와 퍼니스를 연결하는 노선을 제공하게 되었고, 론즈데일 경은 더 나은 시기를 기다리며 회사를 유지해야 했다.[39]

1847년까지 회사는 남은 자금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공사, 즉 화이트헤이븐 정션 철도(WJR)의 화이트헤이븐 역 연결 터널 건설과 더든 강어귀를 가로질러 커비 인 퍼니스 근처의 퍼니스 철도와 연결하기 위한 2km 길이의 고가교 건설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에 직면했다.[40] 1848년에는 항구까지 고가 철도를 건설하고 항구 전면을 따라 달리며, 커비 아이렐레스(Kirby Ireleth)로 가는 더든 횡단을 포기하는 대신 노선을 자체적으로 되돌려 더든 강어귀 서쪽 둑을 따라 상류로 가서 폭스필드 기차역에서 퍼니스 철도의 브라우튼 인 퍼니스 지선과 더 짧게 연결하는 법안이 제출되었다.[43]

미어하우스(Mirehouse, 화이트헤이븐에서 남쪽으로 2km)에서 칼더 강까지의 16km 구간은 이미 건설 교통에 사용되었으며, 1849년 2월에는 석탄을 브레이스톤(Braystones)과 셀라필드의 창고로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다.[44] 이는 화물 운송을 위한 개통을 의미했다. 1849년 7월 21일 공식 개통 이후, 임시 역인 프레스턴 스트리트(Preston Street, 화이트헤이븐 남쪽 가장자리)와 래번글래스 사이에서 첫 여객 서비스가 시작되었다.[45] 1850년 7월에는 부틀이 여객 서비스의 남쪽 종착역이 되었다.[48] 부틀 기차역과 폭스필드 사이의 마지막 구간은 1850년 11월 1일에 여객 서비스로 개통되었다.[49] 화이트헤이븐 북쪽의 화이트헤이븐 정션 철도(WJR) 역으로의 연결은 터널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터널은 1852년 9월 말에 완공되었다. 1853년 의회 법에 의해 승인되어 프레스턴 스트리트에서 항구 남쪽 끝까지 화물 마차를 말로 운반할 수 있는 시장을 통과하는 트램웨이는 1854년에 완공되었다.[51] WJR과의 공동 운영 협약은 1854년 초에 발효되었다.[15] 1855년 12월부터 W&FJR 여객 열차는 브란스티(Bransty)의 WJR 역까지 운행했다. 프레스턴 스트리트는 두 노선의 화물역이 되었고, 터널 바로 남쪽에 코키클(Corkickle)에 여객역이 개통되었다.[53] 북행 혼합 열차의 화물 부분은 코키클에서 분리되어 중력에 의해 프레스턴 스트리트로 운행되었다.[54]

화이트헤이븐, 클레이터 앤 에그레몬트 철도(WC&ER)의 개통은 W&FJR 북쪽 끝에 상당한 추가 광물 수송량을 가져왔다.[55] 남쪽 끝에서는, 화이트헤이븐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노선이 1857년 울버스톤 앤 랭커스터 철도의 완공으로 마침내 완성되었다.[56] 이를 반영하여 퍼니스 철도와의 연결 지점에 추가 곡선이 설치되었고, W&FJR 열차는 브라우튼 대신 폭스필드 또는 울버스톤으로 운행되었다. 적철광의 남쪽 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864년 W&FJR은 퍼니스 철도의 유사한 제안과 경쟁하며 폭스필드, 컴브리아를 통한 우회 노선을 제거하고자 더든 강어귀를 직접 횡단하는 노선을 계획했다. 에그레몬트에서 화이트헤이븐, 클레이터 앤 에그레몬트 철도(WC&ER)에서 셀라필드의 W&FJR까지 노선을 누가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한 WC&ER과의 불일치는 W&FJR의 요금이 감소하면서 보류되었고, 두 회사는 이후 공동 노선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58] W&FJR은 더든 횡단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후 연간 8%의 수익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퍼니스 철도에 임대되기로 합의했다.[59]

폭스필드에서 배로우 인 퍼니스까지의 구간은 퍼니스 철도에 의해 건설되었다.[60] 퍼니스 철도는 1844년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뷰클뢰 공작과 벌링턴 백작이 철광석 광산(달턴 인 퍼니스)과 슬레이트 광산(커크비 인 퍼니스)을 배로우 항구와 연결하기 위해 추진한 결과이다. 1846년 배로우와 커크비 사이에 개통되었고, 1848년에는 브로턴 인 퍼니스까지 연장되었다.

언급된 모든 철도 회사들은 1923년 런던, 미들랜드 앤 스코티시 철도에 흡수되었다.

2. 5. 통합

앞서 언급된 모든 철도 회사들은 1923년 런던, 미들랜드 앤 스코티시 철도에 흡수되었다.

3. 노선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네트워크 레일(Network Rail)의 노선 번호 '''NW 4033'''으로도 불리며, 칸포스 인근의 칸포스 노스 분기점(Carnforth North Junction)에서 시작하여 셀라필드 역을 거쳐 칼라일 인근의 칼라일 사우스 분기점(Carlisle South Junction)까지 이어지는 노선이다. 총 길이는 약 183.8km이다.

3. 1. 주요 역

컴브리안 코스트 선(NW 4033)의 주요 역과 Carnforth North 분기점에서의 거리는 다음과 같다.

컴브리안 코스트 선 (NW 4033) 주요 역 및 거리
역 이름M-체인거리 (km)
Carnforth North Junction0-000.00
Carnforth0-120.25
Carnforth Station Junction0-190.40
Silverdale3-365.55
Arnside6-109.85
Grange-over-Sands9-1211.85
Kents Bank11-0814.75
Cark and Cartmel13-2921.50
Ulverston19-0930.75
Dalton23-4637.95
Dalton Junction24-1939.00
Roose26-7443.35
Salthouse Junction27-3844.20
배로우 인 퍼니스28-6646.40
Park South Junction32-5752.65
Askam34-6456.00
Kirkby-in-Furness38-0061.15
Foxfield40-2164.80
Green Road42-1567.90
Millom44-6872.20
Silecroft47-7377.10
Bootle53-1885.65
Ravenglass57-6092.95
Drigg59-5996.15
Seascale61-7399.65
셀라필드 역63-57102.55
Braystones65-57105.75
Nethertown67-13108.10
St Bees70-03112.70
Corkickle73-59118.65
Whitehaven74-47120.05
Bransty Junction74-54120.15
Parton75-79122.30
Harrington79-08127.30
Workington81-27130.90
Workington Northalign=right |align=right |
Flimby85-00136.80
Maryport86-64139.70
Aspatria94-36152.00
Wigton102-63165.40
Dalston110-06177.15
Currock Junction113-37182.60
Carlisle South Junction114-19183.85



래번글래스 역에서는 래번글래스 앤 에스크데일 철도와 연결된다.

3. 2. 운행 정보

열차 운행은 노던에서 담당한다. 모든 역에 정차하지만, 요청 시 정차하는 역이 많다. 네더타운과 브레이스톤은 양방향 하루 4회 운행하며, 드리그, 부틀, 실레크로프트는 양방향 하루 1회 운행하지 않는다.

2022년 12월부터 2023년 5월까지의 시간표[61]에 따르면, 평일에는 다음과 같은 열차가 운행되었다.

평일 운행 정보 (2022년 12월 - 2023년 5월 기준)
방향총 횟수세부 운행 구간 및 횟수
남행하루 24회
북행하루 26회



밀롬과 화이트헤븐 사이 구간은 많은 신호 박스와 유인 건널목 운영 비용 문제로 하루 12시간만 운영되어, 오후 9시 30분 이후에는 열차가 운행되지 않는다. 토요일에는 운행 시간이 약간 변경되며, 일요일에는 운행 횟수가 더 적다.

2016년 4월 새로운 노던 레일 프랜차이즈 계약이 발효된 후, 2018년 5월 시간표 변경[62]에 따라 화이트헤븐 남쪽 구간에 새로운 일요일 운행이 도입되었다. 이전 운영자인 아리바 레일 노스는 교통부와의 10년 계약의 일환으로 평일 양방향으로 6개의 추가 열차를 운행했다.[63]

2022년 12월부터 2023년 5월까지의 시간표[64]에 따르면, 일요일에는 다음과 같은 열차가 운행되었다.

일요일 운행 정보 (2022년 12월 - 2023년 5월 기준)
방향총 횟수세부 운행 구간 및 횟수
남행하루 14회
북행하루 13회



칼라일에서는 웨스트 코스트 메인 라인, 세틀-칼라일 선, 타인 밸리 선, 글래스고 사우스 웨스턴 선, 칼레도니안 슬리퍼 서비스와 연결된다. 배로우-인-퍼니스에서는 퍼니스 선과 연결된다.

3. 3. 2009년 홍수

2009년 홍수 이후, 메리포트와 워킹턴 사이에는 임시 워킹턴 노스를 포함한 중간의 모든 역에 정차하는 추가적인 시간별 운행이 이루어졌다. 이 운행은 2010년 12월에 중단되었다.

3. 4. 연결 노선

이 노선은 현재 Northern이 운행한다. 2009년 12월부터 2010년 5월까지의 시간표에 따르면, 주중에는 8개의 열차가 남쪽으로 운행하고, 10개의 열차가 배로우인퍼니스에서 칼라일로 북쪽으로 운행하며, 메리포트와 화이트헤븐에서 배로우로 가는 열차가 2편 더 있다. 추가로 북쪽으로는 칼라일에서 화이트헤븐으로 가는 열차와, 밀럼에서 배로우인퍼니스로 가는 남행 열차도 있다. 또한, 영국 핵연료 공사(BNFL) 근무자를 위한 배로우인퍼니스행과 셀라필드행 열차도 운행된다. 이 노선은 비교적 서비스에 비해 운행하는 열차 수가 적은 편이다. 일부 Northern 열차는 랭커스터나 퍼니스 선을 넘어가거나, 일부 열차는 타인 밸리 선을 경유하여 화이트헤븐에서 뉴캐슬어폰타인까지 운행하기도 한다.

주요 연결 노선은 다음과 같다:

  • 칼라일에서는 웨스트 코스트 메인 라인, 세틀-칼라일 선, 타인 밸리 선, 글래스고 사우스 웨스턴 선, 칼레도니안 슬리퍼 서비스와 연결된다.
  • 배로우인퍼니스에서는 퍼니스 선과 연결된다.


'''과거 연결 노선'''

=== 메리포트 앤 카라일 철도 ===

칼라일에서 메리포트까지 연결되었던 노선이다.[1] 이 노선은 뉴캐슬 앤 카라일 철도와 연결하여 "독일해에서 아일랜드해까지 하나의 완전하고 연속적인 교통 노선"을 제공하고 웨스트 컴브리아 탄전의 북부 지역 개발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메리포트 앤 카라일 철도법 1837년(7 윌. 4 & 1 빅트. c. ci)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첫 구간인 메리포트-아클레비 구간은 1840년에 개통되었고, 전 구간은 1845년에 완전히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단선으로 부설되었으나, 광물 수송량 증가에 따라 1861년까지 전 구간이 복선으로 확장되었다. 이 노선은 그룹화될 때까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높은 수익성을 유지했다.

===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 ===

메리포트에서 화이트헤븐 (브랜스티)까지 연결되었던 노선이다.[2] 1865년 런던 노스웨스턴 철도(LNWR)에 임대되었고, 1866년 LNWR에 합병되었다.

당시 화이트헤븐 지역은 로우더 가문, 즉 론스데일 백작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윌리엄 로우더 제1대 론스데일 백작의 지원을 받은 1835년 '화이트헤븐, 메리포트 앤 칼라일 철도' 계획은 메리포트 앤 카라일 철도에 밀려 무산되었다.[3] 1844년, 론스데일 경과 웨스트 컴벌랜드의 두 국회의원의 지원을 받아 화이트헤븐과 메리포트 사이의 철도 건설 계획이 의회 승인을 얻었다. 이것이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 법 1844'''(7 & 8 빅트. c. lxiv)이다.[4] 제1대 백작 사망 후 그의 아들인 제2대 백작이 회장이 되었다. 노선은 1845년 11월 말 메리포트에서 워킹턴까지 개통되었고,[5] 1846년 5월 중순 해링턴까지 연장되었다.[6] 화이트헤븐과 해링턴 사이 구간은 절벽과 바다 사이를 지나가 산사태, 낙석, 높은 조수 등으로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다. 1847년 2월 19일 메리포트에서 화이트헤븐까지 열차가 운행했지만, 승객들은 해링턴에서 하차해야 했다.[7] 정식 여객 운송은 1847년 3월 18일에 시작되었다.[8]

1848년, 두 개의 의회 법이 통과되어 추가 자본 조달과 항구 연결 계획이 승인되었다. 항구 연결 고가 철도는 실제로 건설되지 않았지만, 북쪽 부두를 위한 선로는 깔렸다.[10] 화이트헤븐-해링턴 구간의 방파제는 설계 및 시공 불량으로 지속적인 문제를 일으켰다.[11] 1851년 방파제 재건(비용 6000GBP) 후에도 1852년 1월 폭풍으로 화이트헤븐역 북쪽 방파제가 약 약 45.72m 길이로 크게 손상되었고,[12] 12월 폭풍으로 더 큰 피해가 발생했지만 서비스는 2주 안에 재개되었다.[14] 화이트헤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W&FJR)와의 연결은 1852년 9월 말 터널 완공으로 이루어졌고, 공동 운영 계약은 1854년 초에 발효되었다.[15] 1855년 12월, 브랜스티 역은 화물 사업을 중단하고 W&FJR의 프레스턴 스트리트 역이 화이트헤븐 화물역이 되었다.[16]

1856년 회계 감사에서 약 3000GBP가 사라진 사실이 드러나 비서가 교체되었고(손실은 론스데일 경이 개인적으로 보충함), 엔진 결함과 수리 비효율성 문제로 엔지니어가 사임했다.[17] 그러나 혈암 채굴 붐 덕분에 WJR은 번영하여 1864년에는 15%의 배당금을 지급했다.[18] 1856년 화이트헤븐 인근 철광석 채굴량은 259,167톤이었으며, 이 중 상당량이 철도로 운송되었다.[19]

1859년 9월 메리포트 습식 부두 지선이 개통되었고,[20] 플림비 탄광 교통량을 처리했다. 노선은 메리포트에서 플림비까지 복선화되었고, 1861년까지 전 구간이 복선으로 확장되었다.[22] 브랜스티의 레일웨이 호텔은 역 건물 및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코커머스 앤 워킹턴 철도의 워킹턴 역 지분 절반을 매입했으며, 목재 육교들이 교체되었다. 교통부는 특히 WJR의 재정 상태(주당 수입 53GBP)를 고려할 때 해링턴 교량 교체에 목재 사용을 반대했다.[23] WJR은 코커머스 앤 워킹턴 철도(C&WR) 임대를 시도했으나, 화이트헤븐, 클레이터 앤 에그레몬트 철도(WC&ER)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4] 이후 WJR은 1865년 6월 런던 노스웨스턴 철도(LNWR)와 연간 10% 배당금 지급 조건으로 영구 임대 계약을 체결했고,[25] 1886년 7월 합병이 승인되었다.[26] LNWR 운영 첫 6개월 동안 노선 이익은 연간 27%에 달했다고 한다.[27]

화이트헤븐-해링턴 구간은 개통 당시부터 안전 문제 지적을 받았다. ''칼라일 저널''은 "지그재그, 지그재그, 영원히. 어떤 뱀도 화이트헤븐 정션 철도보다 더 많이 꼬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사고 위험성을 경고했다.[28] 열차 승무원의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낙석 위험이 상존했다. 복선화 이후에도 교통부는 해당 구간에 시속 15mph 속도 제한을 요구했다. 1860년, 단선 시절 철광석 열차 고장 처리 과정에서 역장의 실수로 여객 열차와 저속 충돌 사고가 발생하여 16명이 부상(2명 중상)했다.[23] 이 사고와 1862년의 또 다른 충돌 사고[29]로 WJR은 약 2만파운드의 보상금을 지불했으며,[30] 이러한 사고 위험성은 LNWR 임대를 정당화하는 논거 중 하나가 되었다.[25]

=== 화이트헤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 ===

화이트헤븐에서 폭스필드까지 연결되었던 노선이다.[32] 1865년 퍼니스 철도에 임대되었고, 1866년 합병되었다.

초대 론즈데일 백작은 화이트헤븐 남쪽 철도 건설에 소극적이었으나, 1844년 사망 후 아들인 윌리엄 로우더, 제2대 론즈데일 백작이 계획을 지지했다. 그의 주도 하에 '''화이트헤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법 1845'''[33]와 '''화이트헤븐 앤 퍼니스 정션 철도 (화이트헤븐 연장 및 커크산톤 우회) 법 1846'''[34]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들은 W&FJR을 WJR의 화이트헤븐 역 근처에서 연결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초기에는 지역 교통량이 적었으나, 카른포스 남쪽에서 랭커스터 앤 칼라일 철도와 연결될 경우 발생할 통과 교통량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연결 연장 법안은 문서 불일치로 거부되었다.[35] 결국 다른 회사들이 랭커스터와 퍼니스 연결 노선을 건설하게 되었다.[39]

1847년, 자금 부족으로 WJR 화이트헤븐 역 연결 터널과 더든 강 하구를 가로지르는 2km 길이의 고가교 건설 등 비용이 많이 드는 공사를 완료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40] 1848년, 계획을 변경하여 더든 강 하구 횡단을 포기하고, 대신 강 서쪽 둑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 폭스필드에서 퍼니스 철도의 브라우튼 인 퍼니스 지선과 연결하는 더 짧은 횡단 계획이 제출되었다.[43]

미어하우스에서 칼더 강까지의 16km 구간은 1849년 2월까지 건설 교통 및 석탄 운송에 사용되었다.[44] 1849년 7월 21일 공식 개통 후, 임시 역인 프레스턴 스트리트(화이트헤븐 남쪽)와 래번글래스 사이에서 첫 여객 서비스가 시작되었다.[45] 부틀은 1850년 7월에 남쪽 종착역이 되었고,[48] 부틀과 폭스필드 사이의 마지막 구간은 1850년 11월 1일에 여객 서비스가 개시되었다.[49] 화이트헤븐 북쪽의 WJR 역과의 연결은 1852년 9월 말 터널 완공으로 이루어졌다. 1853년 법에 따라 승인된 프레스턴 스트리트에서 항구 남쪽 끝까지 마차로 화물 마차를 운반하는 트램웨이는 1854년에 완공되었으며;[51] WJR과의 공동 운영 협약은 1854년 초에 발효되었다.[15] 1855년 12월부터 W&FJR 여객 열차는 브란스티의 WJR 역까지 운행했으며, 프레스턴 스트리트는 두 노선의 화물역이 되었고, 터널 남쪽에 코키클 여객역이 개통되었다.[53]

화이트헤븐, 클레이터 앤 에그레몬트 철도 개통은 W&FJR 북쪽 끝에 상당한 광물 수송량을 추가했다.[55] 남쪽 끝에서는 1857년 울버스톤 앤 랭커스터 철도 완공으로 화이트헤븐에서 남쪽으로 가는 노선이 마침내 완성되었다.[56] 이에 따라 퍼니스 철도와의 연결 지점에 추가 곡선이 설치되었고, W&FJR 열차는 브라우튼 대신 폭스필드나 울버스톤으로 운행되었다. 적철광 남쪽 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864년 W&FJR은 더든 강 하구 직결 노선을 계획했으나, WC&ER과의 노선 건설 주체 및 요금 문제 등으로 계획이 보류되었다가[57] 공동 노선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58] W&FJR은 더든 횡단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후 연간 8% 배당금 보장 조건으로 퍼니스 철도에 임대되기로 합의했다.[59]

=== 기타 폐쇄된 지선 ===

노선 명칭연결 지점비고
실로스 지선아스파트리아에서 분기폐쇄
브리검 지선메리포트 인근폐쇄
클리에이터 앤 워킹턴 정션 철도워킹턴 인근폐쇄
코커머스 앤 워킹턴 철도워킹턴 인근폐쇄
화이트헤븐, 클리에이터 앤 에그레몬트 철도코키클 인근[67]폐쇄 (주요 연결선, 길가란 지선도 파턴에서 연결)
클리에이터 앤 퍼네스 철도셀라필드 인근폐쇄
라벤글라스 앤 에스케일 철도라벤글라스에서 연결관광용 협궤 철도 운행 중 (과거 표준궤 화물 노선 존재)
코니스톤 지선폭스필드 인근폐쇄
샌드스케일 지선배로우인퍼니스폐쇄


4. 차량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메리포트와 칼라일 사이 구간의 일부 고가교가 좁게 건설되어 구조적인 간격 제한이 있다. 이 때문에 150형, 158형, 195형 등 일부 디젤 동차(DMU)는 폭 문제로 운행이 불가능하다. 현재 노선 운행은 주로 156형 '스프린터' 차량이 담당하고 있다. 과거에는 142형 '페이서'나 153형 등 다른 종류의 DMU도 운행된 바 있다.

2006년 이후 간격 제한 완화 조치로 마크 1형, 마크 2형, 마크 3형 객차를 이용한 열차 운행이 가능해졌으며, 특정 조건 하에서는 증기 기관차가 끄는 특별 열차도 운행된다.[65][66] 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 추가 좌석 확보를 위해 다이렉트 레일 서비스(DRS)에서 임대한 마크 2형 객차와 37형 디젤 기관차로 구성된 열차가 일부 정규 운행에 투입되기도 했다.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2008년 지역 철도(Community Rail)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노선 발전을 위한 지역 철도 파트너십이 활동하고 있다.

4. 1. 여객 차량

45690 르앤더(Leander)가 칼라일에서 출발하는 특별열차와 함께 컴브리안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모습.


메리포트와 칼라일 사이의 철도 구간은 M&CR(Maryport and Carlisle Railway)이 건설한 일부 고가교의 폭이 통상적인 치수보다 좁게 건설되어 간격 제한이 있다. 이 때문에 150형, 158형, 195형 등 다수의 디젤 동차(DMU)는 폭 문제로 해당 노선 운행이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는 주로 156형 '스프린터' 차량으로 운행된다. 과거에는 142형 '페이서' 차량도 운행되었으나, 이후 애벨리오 스코트레일에서 이전된 156형으로 대체되었다. 153형 차량 역시 이 노선을 운행한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노던 트레인스와의 임대 계약이 종료되어 156형으로 대체되었다.

과거 이 노선에 사용되었던 108형 1세대 DMU는 이러한 간격 제한 때문에 드롭라이트 도어(내림창문식 출입문)에 막대가 맞춤 설치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 네트워크 레일은 간격 제한을 완화하여 마크 1형, 마크 2형, 마크 3형 객차 차량이 전체 노선을 운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다만, 메리포트와 칼라일 사이 구간에서는 승객이 창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드롭라이트 창문을 승무원이 관리하거나 잠가야 한다는 엄격한 지침이 적용되었다. 이 조치로 인해 많은 전세 열차가 컴브리안 해안 전체 구간을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2015년 5월 시간표 변경에서는 칼라일과 배로 사이의 일부 정기 열차가 추가 좌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다이렉트 레일 서비스(DRS)에서 임대한 마크 2형 객차, DBSO(운전객차), 37형 디젤 기관차를 사용하여 운행되었다. 이 열차들은 드롭라이트 창문에 막대를 설치하는 등 그에 맞게 수정되었다.[65] 이러한 기관차 견인 열차 운행은 2018년 12월 말에 다시 DMU 운행으로 복귀했다.[66]

증기 기관차 견인 열차가 메리포트와 칼라일 사이를 북쪽 또는 남쪽 방향으로 운행할 때는 승객은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이는 전세 회사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웨스트 코스트 철도 마크 1형 객차에 드롭라이트 창문용 막대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해당 노선을 이용한 증기 열차 운행이 제한된 간격과 일반인 부상의 우려로 인해 금지되기도 했다. 일부 증기 기관차는 폭 때문에 이 노선을 운행할 수 없으며, 최근 몇 년 동안 이 노선을 운행한 증기 기관차에는 LMS 블랙 5, LMS 8F, LMS 주빌리 및 LMS 로얄 스코트 등이 있다.

컴브리안 코스트 선은 2008년에 지역 철도(Community Rail) 지위를 받았으며, 이 노선 개발을 위해 활동하는 지역 철도 파트너십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Maryport and Carlisle Railway http://www.railbrit.[...] 2012-03-24
[2] 웹사이트 Whitehaven Junction Railway http://www.railbrit.[...] 2012-04-02
[3] 뉴스 Whitehaven, Maryport and Carlisle Railway (advertisement) 1835-12-12
[4] 뉴스 Local Intelligence 1844-07-09
[5] 뉴스 Railway Intelligence – Local – Partial Opening of the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45-11-14
[6] 뉴스 Railway News https://www.newspape[...] 1846-09-02
[7] 뉴스 Opening of the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47-02-24
[8] 뉴스 Opening of the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47-03-19
[9] 뉴스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48-08-29
[10] 뉴스 Whitehaven 1851-02-21
[11] 뉴스 Whitehaven Junction Railway – Half-Yearly Meeting 1851-08-26
[12] 뉴스 Extraordinary Railway Disaster 1852-01-31
[13] 뉴스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52-02-21
[14] 뉴스 The Whitehaven Junction Railway Company 1853-02-19
[15] 뉴스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Meeting 1854-02-28
[16] 뉴스 Whitehaven Junction Railway – Notice (advertisement) 1855-12-25
[17] 뉴스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56-08-26
[18] 뉴스 Local Railway Meetings 1864-09-01
[19] 뉴스 Iron Ore Produced in West Cumberland and Furness https://www.newspape[...] 185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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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Accident Returns: Extract for the Accident at Flimby Colliery on 1st February 1858 http://www.railwaysa[...] Board of Trade 1858-03-17
[22] 뉴스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61-10-11
[23] 웹사이트 Accident at Harrington on 14th August 1860 http://www.railwaysa[...] Board of Trade 1860-12-15
[24] 뉴스 Whitehaven Junction and Cockermouth and Workington Railway 1865-03-11
[25] 뉴스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65-06-29
[26] 뉴스 Local Railways 1866-07-27
[27] 뉴스 A Paying Railway 1866-08-31
[28] 뉴스 Whitehaven Junction https://www.newspape[...] 1847-03-23
[29] 웹사이트 Accident at Whitehaven on 6th March 1862 http://www.railwaysa[...] Board of Trade
[30] 뉴스 Compensation Claims Against the Whitehaven Junction Railway 1865-12-05
[31] 뉴스 London and North Western 1867-02-28
[32] 웹사이트 Whitehaven and Furness Railway http://www.railbrit.[...] 2012-04-02
[33] 뉴스 Imperial Parliament 1845-07-25
[34] 뉴스 Local Intelligence 1846-08-11
[35] 뉴스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 Lancashire Extension (advertisement ) 1846-06-13
[36] 뉴스 Railway Memoranda 1846-04-04
[37] 뉴스 Notice is Hereby Given 1845-11-29
[38] 뉴스 North Western Railway – Notice is Hereby Given 1845-11-29
[39] 뉴스 Whitehaven News – Thursday September 1 1859 1859-09-01
[40] 뉴스 Railway Intelligence 1847-08-27
[41] 뉴스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1848-09-01
[42] 뉴스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1848-12-02
[43] 뉴스 Admiralty Inquiry 1848-02-22
[44] 뉴스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1849-02-27
[45] 뉴스 Opening of the Whiteha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1849-07-24
[46] 뉴스 Shocking and Fatal Accident https://www.newspape[...] 184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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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뉴스 Opening of the Railway to Bootle 1850-07-09
[49] 뉴스 Local Intelligence 1850-11-02
[50] 뉴스 Reports of Select Committees on Railways 185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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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웹사이트 England and Wales Six-Inch Series: Cumberland LXVII http://maps.nls.uk/v[...] Ordnance Survey 1867
[53] 뉴스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 Notice (advertisement) 1855-12-25
[54] 뉴스 Fatal Accident on the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1857-01-06
[55] 뉴스 Our Local Railways 1857-09-08
[56] 뉴스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1857-09-01
[57] 뉴스 Railway Intelligence –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1865-03-02
[58] 뉴스 The Whitehaven Railways 1866-03-17
[59] 뉴스 Whitehaven and Furness Junction Railway 1865-08-31
[60] 웹사이트 Furness Railway http://www.railbrit.[...] 2012-03-11
[61] 웹사이트 Carlisle to Barrow-in-Furness https://www.northern[...] 2022-12-11
[62] 웹사이트 August News http://www.crug.org.[...] null
[63] 웹사이트 Northern Franchise Improvements – DfT http://maps.dft.gov.[...]
[64] 웹사이트 Carlisle to Barrow-in-Furness https://www.northern[...] 2022-12-11
[65] 웹사이트 New Loco-hauled Services for the Cumbrian Coast http://www.railtechn[...] 2015-05-19
[66] 간행물 Special Cumbrian service to commemorate Class 37s https://www.northern[...]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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