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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냐크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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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냐크 동맹 전쟁은 1526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세력 확장에 대항하여 프랑스,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 등과 맺은 동맹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전쟁의 서막이 올랐고, 교황의 오락가락하는 정책과 헨리 8세의 이혼 문제, 나폴리 공성전, 란드리아노 전투 등을 거치며 혼전을 겪었다. 1527년 로마 약탈로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고, 1529년 캉브레 조약과 볼로냐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교황이 카를 5세와 화해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피렌체는 공성전 끝에 메디치 가문의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공화정이 붕괴되었고, 이후 로마 재건 사업과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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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냐크 동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피렌체 포위전, 1530년, 코냑 동맹 전쟁 중 벌어짐
피렌체 포위전, 1530년, 코냑 동맹 전쟁 중 벌어짐
분쟁프랑스-합스부르크 경쟁과 이탈리아 전쟁의 일부
기간1526년 – 1530년
장소이탈리아
결과합스부르크 승리
캉브레 조약 (1529년)
피렌체 공화국의 종말 (1530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한 피렌체의 세습 군주국으로의 전환 (1532년)
교전 세력 (1526–1529)
친 합스부르크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제국
페라라 공국
제노바 공화국 (1528–1530)
만토바 공국 (1528–1530)
교황령 (1530)
코냑 동맹프랑스 왕국
스위스 용병
스위스 근위대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잉글랜드 왕국
제노바 공화국 (1526–1528)
나바라 왕국
밀라노 공국
지휘관
친 합스부르크카를 5세
샤를 3세 드 부르봉
안토니오 데 레이바
필리베르 드 샬롱
하인리히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페란테 곤차가
코냑 동맹프랑수아 1세
생폴 백작
로트레크 자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프란체스코 페루초
말라테스타 발리오니

2. 국제 정세의 흐름

2. 1. 서유럽

백년전쟁(1337~1453)에서 패배 후 섬나라로 전락한 잉글랜드는 장미전쟁(1455~85)으로 불리는 내전을 치렀고 이후 출범한 튜더 왕조에 의해 절대왕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23] 스페인은 1492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어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백년전쟁 후 유럽 최초로 상비군을 창설한 프랑스는 관료제를 정비하여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을 실현하였고[24] 이로 인해 강대국 반열에 들어섰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명목상 황제가 다스리는 지역이었으나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하여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상속을 통하여 스페인 국왕에 오른뒤 1519년에 황제로 선출되면서 스페인과 독일-오스트리아를 아우르는 초강대국이 탄생하였고 유럽을 긴장시켰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와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싸움은 정해진 수순과도 같았다.

2. 2. 이탈리아 반도

1494년 이탈리아 지도


유럽의 대체적인 흐름은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을 통한 통일국가 형성이었으나,[25][26] 이탈리아는 힘의 질서를 좌우하는 주도 세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나폴리 왕국,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를 중심으로 약 20여 개의 약소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26][27] 이들은 자국의 이익만 추구했으며 상호 간에 연합과 동맹은 전략적이자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26] 또한 15세기경부터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열풍으로 점차 중세와 이별하고 근대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폴리 왕국은 1442년에 아라곤 왕국이 차지한 이래 방계 가문이 통치하였으나[28] 1503년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점령하였고,[29] 1516년 외손자 카를 5세가 물려받았다. 실크로드를 막아선 중동과의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1479년 오스만 제국과의 16년간 다툼을 끝내고[30][31]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적극 개입하며 지속적인 영토 확장을 꾀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는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실권 통치하고 있었다. 파치 음모사건(1478년)과 피렌체 전쟁(1478년~1480년)이라는 위기를 잘 극복하여 가문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1494년 메디치 가문이 추방당했다가[32] 18년 만인 1512년에 통치권을 회복하였다.[33] 2명의 교황을 배출하며 가문의 위상이 상승하는 듯했으나 실정을 거듭하며 피렌체인들의 민심을 잃고 있었다.[34]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인 밀라노 공국은 비스콘티 가문이 절손되자 스포르차 가문이 공국을 계승하였다.[35] 그러나 3대째 이르러 숙부가 조카의 권력을 찬탈하였고,[36] 이후 프랑스의 원정(1499년)과 캉브레 동맹 전쟁(1508년~1516년)으로 자고 일어나면 충성 서약을 해야 할 군주가 바뀌어 있다고 할 정도로 통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였다. 최종적으로 1521년 황제 카를 5세의 도움으로 스포르차 가문이 통치권을 회복하였다.[37]

2. 3. 교황과 종교개혁

보름스 협약(1122)으로 성직자 서임권을 교황이 움켜쥐며 권위가 상승하다가 십자군 전쟁(11~13세기)의 실패 이후 아나니 사건, 아비뇽 유수, 서방 교회 대분열(1378~1417)으로 인해 추락하고 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서방교회의 분열(1378~1417)이 해결되자 공의회 수위설이 탄력을 받으며 교황의 권위를 눌렀고 이에 반발한 로마 가톨릭은 교황청의 권위를 만회하려 하였다.[38] 교황들은 친족중용 족벌주의를 추구하여 출신가문의 위상을 높이려 하였다. 명목상의 지배령이었던 중북부 지역(로마냐)에 대한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출신 가문이 통치하는 영지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잦은 분쟁이 발생하였다.[39]

라이프치히 논쟁 (by 막스 셀리거)


메디치 출신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 판매를 남발[40]함으로 인해 촉발된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은[41] 유럽의 기독교를 분열하게 만들었고 더불어 중앙집권을 꿈꾸던 카를 5세를 힘들게 했다. 루터는 모든 혁명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인쇄술을 적극 활용했으며 반교황주의를 표방하는 종교개혁의 물결은 전유럽으로 점차 퍼져나갔다. 종교개혁에 동조하는 세력을 진압하고자 했던 교황은 황제의 힘이 필요했고,[42] 황제는 분열된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교황의 힘이 필요했다.

2. 4. 동유럽과 지중해

1453년,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비잔틴 황제를 자처하였다.[43] 오스만 제국은 옛 비잔틴 제국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아나톨리아발칸반도를 점차 정복해 나가며 베네치아와 충돌하였고 이탈리아반도(1480년)를[44] 침공하기도 했다. 급격히 세력을 팽창하며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1517년)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은 베오그라드(1521년)와 로도스섬(1522년)을 정복하며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유럽을 압박하였다. 지중해에서는 북아프리카의 해적들과 연계하여 부족한 해군력을 보강하며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쟁취해 나갔다. 특히 프랑스와 전략적 연계 차원에서 1526년에 헝가리를 점령하더니 1529년에 오스트리아의 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43]

2. 5. 대항해 시대

15세기 초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에 의해 시작된 해양 개척 사업은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과 1498년 바스쿠 다가마의 신항로 개척으로 이어지며 아시아 무역로를 이원화하였다.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되었던 포르투갈이 이룬 쾌거는 자국에 큰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포르투갈에 밀릴 수 없었던 스페인은 이사벨 1세 여왕의 후원하에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에 탐험과 정복을 통하여 새로운 부를 창출하려 노력하였다. 1522년에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였고 1533년에는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정복하였다.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은 베네치아의 해상무역에 영향을 주었고 베네치아로 하여금 지중해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2. 6. 이탈리아 전쟁의 시작

피렌체에 입성하는 프랑스 군인들 (by Francesco Granacci)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는 밀라노 공작의 협조하에 나폴리 점령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한다.[45][46] 개량된 소형 야포[47]와 잘 훈련된 상비군을 앞세운 프랑스는 비교적 손쉽게 나폴리 정복에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상업활동으로 부유하지만 용병에 의존한 방위능력이 허약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48] 이후 이탈리아는 1559년까지 65년간 강대국들 간에 주도권 다툼의 격전장으로 변모하고 말았다.[49]

1499년 프랑스 루이 12세는 원정을 통하여 밀라노를 차지한 후 스페인과 함께 나폴리를 정복하였다.[50] 그러나 영토분할에 대한 이견 차로 벌어진 다툼에 패하여 밀라노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50] 1508년에 교황 율리오 2세의 주도하에 벌어진 캉브레 동맹 전쟁은[51] 8년간 이어지며 각국은 이해관계의 변화에 따라 동맹과 역동맹을 맺으며 혼전을 거듭하지만 프랑스가 밀라노를 차지하며 1516년에 종전되었다. 황제 선거에 불만을 품은 프랑수아 1세에 의해 1521년에 시작된 4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는 밀라노를 카를 5세에게 빼앗긴다.

3. 코냑 동맹 전쟁의 서막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대패하였고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생포되었다.[52] 프랑스는 국왕의 석방을 위해 이교도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까지 도움을 요청하였다.[53][54][55][56] 스페인 마드리드에 감금되어있던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1월 14일에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한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57] 프랑스에 돌아온 프랑수아 1세는 3월에 의회를 통해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며 조약을 준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클레멘스 7세도 프랑수아 1세의 손을 들어주었다.

1519년 황제 선거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당시 줄리오 추기경)는 카를 5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523년 콘클라베에서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에 줄리오 추기경을 지지하여 큰 힘을 실어주었다.[58] 새로운 교황 즉위 후 카를 5세는 전임 교황 하드리아노 6세 때 체결한 반-프랑스 방위 동맹의 갱신을 요구하였다.[59]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황제 카를 5세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524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를 침공해 점령하자 클레멘스 7세는 즉시 카를 5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1525년 1월 프랑스, 베네치아, 밀라노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1525년 2월,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여 스페인에 포로로 사로잡히자 교황은 다시 카를 5세와 이전 관계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526년 2월 9일 프랑수아 1세가 석방되자 다시 변심하여 카를 5세를 멀리하며 프랑스, 밀라노 등과 반-합스부르크 방위 동맹인 코냐크 동맹을 추진하였다.

1526년 9월 콜론나 추기경이 로마를 무력으로 장악한 후[60] 가진 협상에서 코냐크 동맹에서 탈퇴를 약속했다. 그러나 추기경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서 물러나자 약속을 저버렸다. 1527년 3월 중순에 밀라노의 제국군이 로마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교황은 동맹국과 상의도 없이 나폴리 총독과 평화협정을 맺었다.[61] 이를 통해 제국군의 남진을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음을 알고는 이내 4월 25일에 다시 코냐크 동맹에 재가입했다.[62] 갈팡질팡하는 교황의 정책은 교황청 안에 친독일파 등 파벌이 탄생하도록 만들었고 로마 귀족들과 추기경들의 심한 반발과 혼란을 부추겼다.

교황 클레멘스 7세 (1523~34)


1526년 5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주도로 코냐크 동맹이 결성되었다.[63] 동맹에는 프랑스 왕국,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 등이 참여했다.[63] 이 동맹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64]

제4차 이탈리아 전쟁 (1521~1526)에서 카를 5세밀라노를 차지하면서 황제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진 것이 동맹 결성의 주요 원인이었다.[64]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 체결 후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온 직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동맹 제안에 찬성했다.[1] 잉글랜드헨리 8세는 조약 체결 장소 문제로 동맹 참여를 거부했다.[63][1][11]

3. 1. 파비아 전투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대패하였고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생포되었다.[52] 프랑스는 국왕의 석방을 위해 이교도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까지 도움을 요청하였다.[53][54][55][56] 스페인 마드리드에 감금되어있던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1월 14일에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한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57] 프랑스에 돌아온 프랑수아 1세는 3월에 의회를 통해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며 조약을 준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클레멘스 7세도 프랑수아 1세의 손을 들어주었다.

3. 2. 오락가락하는 교황의 정책

1519년 황제 선거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당시 줄리오 추기경)는 카를 5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523년 콘클라베에서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에 줄리오 추기경을 지지하여 큰 힘을 실어주었다.[58] 새로운 교황 즉위 후 카를 5세는 전임 교황 하드리아노 6세 때 체결한 반-프랑스 방위 동맹의 갱신을 요구하였다.[59]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황제 카를 5세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524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를 침공해 점령하자 클레멘스 7세는 즉시 카를 5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1525년 1월 프랑스, 베네치아, 밀라노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1525년 2월,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여 스페인에 포로로 사로잡히자 교황은 다시 카를 5세와 이전 관계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526년 2월 9일 프랑수아 1세가 석방되자 다시 변심하여 카를 5세를 멀리하며 프랑스, 밀라노 등과 반-합스부르크 방위 동맹인 코냐크 동맹을 추진하였다.

1526년 9월 콜론나 추기경이 로마를 무력으로 장악한 후[60] 가진 협상에서 코냐크 동맹에서 탈퇴를 약속했다. 그러나 추기경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서 물러나자 약속을 저버렸다. 1527년 3월 중순에 밀라노의 제국군이 로마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교황은 동맹국과 상의도 없이 나폴리 총독과 평화협정을 맺었다.[61] 이를 통해 제국군의 남진을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음을 알고는 이내 4월 25일에 다시 코냐크 동맹에 재가입했다.[62] 갈팡질팡하는 교황의 정책은 교황청 안에 친독일파 등 파벌이 탄생하도록 만들었고 로마 귀족들과 추기경들의 심한 반발과 혼란을 부추겼다.

3. 3. 코냑 동맹 결성

1526년 5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주도로 코냐크 동맹이 결성되었다.[63] 동맹에는 프랑스 왕국,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 등이 참여했다.[63] 이 동맹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64]

제4차 이탈리아 전쟁 (1521~1526)에서 카를 5세밀라노를 차지하면서 황제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진 것이 동맹 결성의 주요 원인이었다.[64]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 체결 후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온 직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동맹 제안에 찬성했다.[1] 잉글랜드헨리 8세는 조약 체결 장소 문제로 동맹 참여를 거부했다.[63][1][11]

4. 초기 움직임

동맹은 재빨리 로디를 점령했지만, 황제군은 롬바르디아로 진격하여 스포르차 가를 밀라노에서 물러나게 했다.[2] 한편, 강력한 콜론나 가문은 교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로마를 공격하기로 하고, 교황군을 격파하여 1526년 9월 잠시 도시를 장악했다. 그들은 곧 돈을 받고 도시를 떠났다.[3] 개전 직후, 코냐크 동맹은 로디를 점령했다. 그러나 황제군은 롬바르디아에 침입하여 스포르차 가를 밀라노에서 몰아냈다.[12] 이를 호기로 본 콜론나 가는 로마를 공격하여 1526년 3월에 동시를 점거했지만, 배상금이 지불되자 철수했다.[13]

4. 1. 전쟁의 시작

1526년 6월, 베네치아가 롬바르디아에서 동맹군과 합류하기 위해 서진하며 신속하게 로디를 점령하였다. 로디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불만이 많던 로디의 육군 지휘관이 베네치아군에 성문을 열어주었기에 비교적 손쉽게 로디를 차지할 수 있었다.[65] 제국군은 밀라노로 진군하여 스포르체스코 성을 포위한 후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밀라노 공작에게 통치권을 포기하도록 압박하였다. 1526년 7월 15일,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는 항복하고 말았다.[65]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프란체스코 2세가 4살 되던 해인 1499년 10월, 프랑스 루이 12세에 의해 밀라노가 함락되자 그는 망명을 하였는데,[66] 망명생활 20년 만인 1521년에 그를 밀라노 공작으로 복위시켜준 사람이 바로 카를 5세였다. 그런데 이번에 배신[67]을 하며 참전하자 카를 5세는 격노하였고[68] 제국군에 통치권 회수를 명했다.[69]

한편, 강력한 콜론나 가문은 교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로마를 공격하기로 하고, 교황군을 격파하여 1526년 9월 잠시 도시를 장악했다. 그들은 곧 돈을 받고 도시를 떠났다.[3]

4. 2. 분열하는 코냑 동맹

카를 5세 (1500~1558)


1526년 8월, 황제 카를 5세로마의 교황에게 외교 사절을 파견하였다. 교황에게 전달된 서신에는 공의회를 개최하여 루터의 종교분열 문제와 성직매매 등 교황의 각종 비리에 대해 처리하며 개혁을 감행하겠다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지난 서방교회 대분열 사건(1378~1418) 이후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권보다 우선한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었고,[70] 공의회가 교황을 폐위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공의회 개최를 매우 싫어했다.

황제의 위협을 받은 교황은 프랑스군이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에 막 도착할 때에 교황령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로 인해 동맹군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지난 이탈리아 전쟁[71] 기간 중 많은 국토가 유린당하여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는 핑계를 내세워 추가 파병을 거부하였다. 프랑스는 다른 동맹국들의 거부로 밀라노를 재정복하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자 군대를 돌려 롬바르디아를 떠났다.

동맹은 재빨리 로디를 점령했지만, 황제군은 롬바르디아로 진격하여 스포르차 가를 밀라노에서 물러나게 했다.[2] 한편, 강력한 콜론나 가문은 교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로마를 공격하기로 하고, 교황군을 격파하여 1526년 9월 잠시 도시를 장악했다. 그들은 곧 돈을 받고 도시를 떠났다.[3] 개전 직후, 코냐크 동맹은 로디를 점령했다. 그러나 황제군은 롬바르디아에 침입하여 스포르차 가를 밀라노에서 몰아냈다[12]. 이를 호기로 본 콜론나 가는 로마를 공격하여 1526년 3월에 동시를 점거했지만, 배상금이 지불되자 철수했다[13] .

4. 3. 카를 5세의 고충

황제 카를 5세는 이탈리아 상황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지난 4차 이탈리아 전쟁 말기인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 승리하며 사실상 종전 되자 병력을 급히 독일로 투입했다. 1524년 8월에 시작된 독일농민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72] 다행히 반란은 1525년 5월경 진압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1517년에 시작된 루터의 종교분열로 인해 여전히 시끄러웠고 권력누수 현상이 심했다. 프랑스와 종전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중에 프랑수아 1세의 모후 루이즈는 왕의 석방을 위해 이교도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53][54]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을 충격에 빠트리는일이 발생하였다.

오스만의 쉴레이만 대제는 이를 구실삼아 유럽원정을 선언하였고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카를 5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73] 오스만은 급팽창하며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동남부 유럽을 점령한후 지속적으로 유럽대륙을 향해 서진을 하고 있었다. 쇠약해진 헝가리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혼인동맹[74]을 통하여 공동방위망을 구축하여 오스만을 견제하였다. 이에 대해 오스만은 발칸에서 이 동맹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며 분쇄시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4. 4. 오스만의 유럽 원정

모하치 전투 (1526년)


1526년 4월 16일, 술레이만 대제는 약 7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럽 침공을 위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출발하였다. 같은 해 6월, 북이탈리아 로디를 코냐크 동맹군이 점령하면서 전선이 두 곳으로 형성되어 카를 5세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8월 29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맹국인 헝가리 왕국에 도착한 오스만군은 모하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헝가리가 대패하며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였다. 다행히 7월 중순에 제국군이 밀라노 탈환에 성공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그해 9월에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이스탄불로 퇴각했다.

4. 5. 폼페오 콜론나의 로마 장악

폼페오 콜론나 (1479~1532)


1526년 9월 20일 새벽, 평소 메디치 가문을 혐오하였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교황청을 급습한 후 로마를 장악하였다. 황제의 사절인 돈 우고 디 몬카다의 사주를 받았던 것이다.[75][76] 산탄젤로성으로 도피했던 교황은 협상을 통해 코냑동맹에서 탈퇴를 약속했다.[77] 그러나 쿌론나 추기경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서 물러나자 약속을 파기한후 콜론나 추기경을 파문하고 교황군을 동원하여 그의 재산과 요새를 공격하여 파괴하고 황폐화시켰다. 또한 황제령인 나폴리의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78] 이 소식을 접한 황제 카를 5세는 이에 대한 응징을 계획하였다. 독일농민반란도 수습되었고 오스만군도 9월에 퇴각하였기 때문에 카를 5세에게도 반격을 가할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5. 로마 약탈

카를 5세는 14,0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과 6,000명의 스페인 테르시오 병력을 모았으며, 이들은 게오르크 프룬즈베르크와 부르봉 샤를이 이끌었다. 이 병력들은 피아첸차에서 합류하여 로마로 진격했다. 당시 교황군 사령관이었던 프란체스코 과르디니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4] 부르봉 공작이 사망하자 제대로 보수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도시를 약탈했고,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의 탈출은 스위스 근위대의 최후의 저항 덕분에 가능했다.[14]

롬바르디아 침공에 이어 카를 5세는 게오르크 폰 플룬츠베르크가 이끄는 란츠크네흐트 군대와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를 피아첸차에서 합류시켜 로마로 진격했다. 교황군 지휘관 프란체스코 과이차르디니는 황제군을 막지 못했고[14], 부르봉 공작이 전사하자 급료 지급이 제대로 되지 않던 부하 병사들은 로마를 약탈했다. 교황은 속수무책으로 도망쳤다.

5. 1. 남진하는 제국의 용병들

카를 5세는 그의 충복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에게 용병 소집을 명했다. 프룬츠베르크는 독일 농민전쟁(1524~25)과 모하치 전투(1526년 8월) 이후 할 일이 없었던 독일 남부 바이에른과 프랑켄 지방의 루터파 출신 용병들을 선동하여 부유한 도시 로마를 약탈하자고 하였다.[79] 이들은 알프스의 브레너 고개[80]를 넘어 롬바르디아로 집결했다. 14,0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과 6,000명의 스페인 테르시오 병력은 피아첸차에서 합류하여 샤를 드 부르봉[81]의 지휘 아래 로마로 진격했다. 프룬츠베르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독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4][14]

1527년 3월, 카를 5세는 스페인-제국 용병들에게 로마 침공을 명령하였다. 제국군은 피렌체와 충돌을 피하고자 볼로냐 쪽으로 우회하여 교황령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궂은 날씨로 인해 무거운 대포들을 도중에 버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용병료 체불로 인해 용병들의 불만이 커져 항명과 폭동의 조짐이 보였다. 샤를은 용병들을 달래기 위해 로마 약탈 요구를 수용했고, 이 소문으로 도적떼들까지 합류하여 2만 명이 넘는 인원이 로마로 향하게 되었다.

5. 2. 로마 침공

로마 약탈 (by 헴스케르크)


1527년 5월 4일, 제국군 2만여 명이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밑에 도착하자 크게 당황한 교황은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시의회를 열어 시민들에게 동맹군이 올 때까지 3일 정도만 싸워줄 것을 간청했다. 교황의 호소로 인해 급조된 시민군 5,000명이 농성전을 대비하게 되었다. 5월 6일 새벽이 되어 테베레강에서 안개가 피어오르자, 제국군은 교황령 성도 로마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공성전중에 지휘관인 샤를(구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이 총에 맞아 전사하자[82] 제국군 용병들은 흥분하였고 지휘체계가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용병료 체불로 인해 불만이 가득했는데 존경하던 지휘관마저 사망하자 용병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샤를은 비록 조국 프랑스를 버리고 망명한 자였으나 훌륭한 군인이었고 용맹하고 유능한 지휘관으로서 용병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카를 5세는 14,0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과 6,000명의 스페인 테르시오 병력을 모았으며, 이들은 게오르크 프룬즈베르크와 부르봉 샤를이 이끌었다. 이 병력들은 피아첸차에서 합류하여 로마로 진격했다. 당시 교황군 사령관이었던 프란체스코 과르디니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4] 부르봉 공작이 사망하자 제대로 보수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도시를 약탈했고,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의 탈출은 스위스 근위대의 최후의 저항 덕분에 가능했다.[14]

5. 3. 로마 약탈 (1527년 5월 6일)

제국군, 특히 독일 루터파 출신 용병들은 로마를 점령한 후 무자비하게 약탈을 일삼았다.[22] 살인, 강간, 파괴, 방화가 자행되면서 로마는 도시 기능이 마비되며 무정부 상태에 이르렀다. 포로 1,000명에 대한 공개 처형과 수천 명의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대학살이 일주일 동안 벌어졌다. 용병들은 지휘관에게 항명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독일 루터파 신자들은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로 여겨 양심의 가책 없이 약탈을 자행했다.[83]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통해 산탄젤로 성[77]으로 피신하여[21]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후 항복했다. 교황이 피신하는 과정에서 스위스 근위대 500명은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포기하고 충성 서약을 지키며 교황을 위해 싸우다 베드로 대성당 근처에서 전원 전사했다.

5월 10일, 클레멘스 7세와 적대 관계였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8,000명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왔다.[84] 이들은 1526년 교황군에게 약탈당했던 것에 대해 보복하기 위해서였으나,[85] 로마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자신의 저택에서 수많은 로마 시민을 보살폈다.

교황은 산탄젤로 성에 은신하며 동맹군이 도와주기를 기다렸다. 6월 1일, 동맹군 총사령관 우르비노 공작이 로마 북부 몬테로시에 도착했으나, 신중한 성격 탓에 신성 로마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 우르비노 공작은 우르비노 전쟁에서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에게 공작위를 박탈당한 악연이 있어,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이 주도한 이번 전쟁에 소극적이었다.[86] 또한 전쟁 초반 밀라노와 롬바르디아가 제국군에 함락되고 베네치아와 프랑스가 소극적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산탄젤로 성


12월 7일, 교황은 제국군 지휘관들을 매수하여 산탄젤로 성을 탈출, 오르비에토[87]로 도피했다. 페라라 공작의 배신, 베네치아의 라벤나와 체르비아 점령,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 축출 소식 등 불리한 상황 속에서 교황은 무기력하게 은신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군은 1528년 2월까지 9개월 가량[88][89] 로마를 점령했다. 1527년 로마 인구 약 5만 4천 명 중[90] 4만 5천 명 정도가 사망, 부상, 국외 탈출하는 등, 이번 로마 점령은 코냑 동맹 전쟁에서 제국군에게 결정적인 승기를 안겨주었다.

카를 5세는 14,0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과 6,000명의 스페인 테르시오 병력을 게오르크 프룬즈베르크와 부르봉 샤를 지휘 하에 피아첸차에서 합류시켜 로마로 진격시켰다. 당시 교황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과르디니는 이들을 막을 수 없었고,[4] 부르봉 공작 사망 후 보수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로마를 약탈했다.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스위스 근위대의 최후의 저항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14]

5. 4. 동맹군 총사령관 우르비노 공작의 소극적인 태도

카를 5세는 14,0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과 6,000명의 스페인 테르시오 병력을 모았으며, 이들은 게오르크 프룬즈베르크와 부르봉 샤를이 이끌었다.[4] 이 병력들은 피아첸차에서 합류하여 로마로 진격했다. 당시 교황군 사령관이었던 프란체스코 과르디니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4][14] 부르봉 공작이 사망하자 제대로 보수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도시를 약탈했고,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의 탈출은 스위스 근위대의 최후의 저항 덕분에 가능했다.

5. 5. 탈출하는 교황 (1527년 12월 7일)

산탄젤로 성에 갇혀 있던 교황은 페라라 공작, 베네치아, 피렌체 등 동맹국들의 배신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졌다.[4][14] 결국 교황은 제국군 지휘관들을 매수하여 몰래 탈출하였다. 제국군은 9개월 후 로마에서 퇴각했다.

6. 전쟁의 전환점

로마 약탈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발언력을 크게 잃었다. 교황군의 탈락으로 프랑스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프랑수아 1세는 어쩔 수 없이 헨리 8세와의 동맹 협상을 다시 시작했다. 1527년 4월 30일,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서명되었다. 마침내 잉글랜드를 동맹에 끌어들인 프랑스는 로트레크 백작(Odet of Foix, Viscount of Lautrec)과 페드로 나바로 (Pedro Navarro, Count of Oliveto)를 나폴리로 파견했다. 두 사람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도중에 제노바를 거치면서 안드레아 도리아도 동료로 끌어들였다. 프랑스군은 나폴리에 도착하자 도시를 포위했다.[5]

==== 헨리 8세의 이혼 문제 ====

로마 약탈 사건의 여파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재위 1509-47)의 이혼(혼인무효선언)[91] 문제가 불거졌다.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생몰 1485-1536)과의 이혼 허락을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92][93] 보통의 경우 교황들은 왕의 편을 들어주며 자신에 대한 지지와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높이는 방편으로 삼았으나, 캐서린이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에 이혼을 허락할 수 없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가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협박했고, 만약 허락할 경우 카를 5세가 자신을 폐위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헨리 8세 (생몰 1491~1547)


헨리 8세의 특사 윌리엄 나이트는 1527년 12월 초 교황을 처음 알현했으나, 교황은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3)가 관면혼을 허락했으므로 혼인에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94][95] 1528년 2월, 헨리 8세는 두 번째 특사를 파견했으나 같은 답변을 받았다. 다만 교황 특사를 공동 재판장으로 하는 이혼 소송 진행은 허락했다.[96][97]

섬네일


1528년 9월 29일, 교황 특사 로렌초 캄페지오 추기경이 런던에 도착해[98] 혼인 무효 문제를 다루는 특별 법원의 판사가 되었다. 1529년 5월 31일, 런던 블랙브라이어스에서 교황청 법정이 열렸고,[99] 율리오 2세 교황이 내렸던 관면의 유효성이 주요 쟁점이 되었다. 캐서린은 관면장을 제시하며 결혼의 합법성을 주장했다. 1529년 7월 23일 캄페지오는 소송을 무기한 연기하고[99] 로마로 돌아갔다.

이에 헨리 8세는 1533년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단행, 자신이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교회와 분리시킨 후 이혼을 합법화하고 앤 볼린과 재혼했다. 1533년 7월 11일,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했다.[100]

==== 나폴리 공성전 (1528년) ====

나폴리 지도 (1572년)


로마 약탈 이후 교황이 동맹군 리더로서의 역할을 상실하자,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프랑수아 1세는 오데 드 푸아와 페드로 나바로가 이끄는 군대를 제노바에 보냈고,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 함대의 지원을 받아 나폴리 해상을 봉쇄했다.[101] 1528년 4월에 시작된 공성전은 그러나 8월 말 프랑스군의 포기 선언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 진영에 치명적인 전염병(흑사병)이 발생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101] 1528년 여름, 프랑스군은 나폴리 수비대의 식수 공급을 막기 위해 볼라 수로교를 파괴했으나, 이는 오히려 주변 지역을 습지로 만들어 전염병을 확산시켰다. 뜨거운 여름 날씨와 겹쳐 전염병은 프랑스군 지휘관들을 포함한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102] 설상가상으로 안드레아 도리아는 용병료 문제로 프랑스와 결별하고 카를 5세와 계약하여 7월 초 나폴리 해상 봉쇄를 풀어버렸다.[102] 이후 그는 제노바 항구 봉쇄를 뚫고 사보나에서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나폴리 공성전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철수 중 오랑주 공이 이끄는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프랑스군 전체가 항복했다.

==== 란드리아노 전투 (1529년) ====

1529년 6월, 파비아 인근 롬바르디아 지역인 란드리아노에 주둔하던 생폴 백작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테라노바 공작 (안토니오 데 레이바)[103]가 이끄는 스페인군과 교전하였다.[104]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전멸당하고 지휘관 생폴 백작은 포로로 잡혔으며, 카를 5세가 밀라노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105] 란드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이탈리아 지배력을 회복하려던 프랑수아 1세의 희망은 좌절되었다.[105]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의 강화 조약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105]

6. 1. 헨리 8세의 이혼 문제

로마 약탈 사건의 여파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재위 1509-47)의 이혼(혼인무효선언)[91] 문제가 불거졌다.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생몰 1485-1536)과의 이혼 허락을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92][93] 보통의 경우 교황들은 왕의 편을 들어주며 자신에 대한 지지와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높이는 방편으로 삼았으나, 캐서린이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에 이혼을 허락할 수 없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가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협박했고, 만약 허락할 경우 카를 5세가 자신을 폐위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헨리 8세의 특사 윌리엄 나이트는 1527년 12월 초 교황을 처음 알현했으나, 교황은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3)가 관면혼을 허락했으므로 혼인에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94][95] 1528년 2월, 헨리 8세는 두 번째 특사를 파견했으나 같은 답변을 받았다. 다만 교황 특사를 공동 재판장으로 하는 이혼 소송 진행은 허락했다.[96][97]

1528년 9월 29일, 교황 특사 로렌초 캄페지오 추기경이 런던에 도착해[98] 혼인 무효 문제를 다루는 특별 법원의 판사가 되었다. 1529년 5월 31일, 런던 블랙브라이어스에서 교황청 법정이 열렸고,[99] 율리오 2세 교황이 내렸던 관면의 유효성이 주요 쟁점이 되었다. 캐서린은 관면장을 제시하며 결혼의 합법성을 주장했다. 1529년 7월 23일 캄페지오는 소송을 무기한 연기하고[99] 로마로 돌아갔다.

이에 헨리 8세는 1533년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단행, 자신이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교회와 분리시킨 후 이혼을 합법화하고 앤 볼린과 재혼했다. 1533년 7월 11일,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했다.[100]

6. 2. 나폴리 공성전 (1528년)



로마 약탈 이후 교황이 동맹군 리더로서의 역할을 상실하자,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프랑수아 1세는 오데 드 푸아와 페드로 나바로가 이끄는 군대를 제노바에 보냈고,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 함대의 지원을 받아 나폴리 해상을 봉쇄했다.[101] 1528년 4월에 시작된 공성전은 그러나 8월 말 프랑스군의 포기 선언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 진영에 치명적인 전염병(흑사병)이 발생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101] 1528년 여름, 프랑스군은 나폴리 수비대의 식수 공급을 막기 위해 볼라 수로교를 파괴했으나, 이는 오히려 주변 지역을 습지로 만들어 전염병을 확산시켰다. 뜨거운 여름 날씨와 겹쳐 전염병은 프랑스군 지휘관들을 포함한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102] 설상가상으로 안드레아 도리아는 용병료 문제로 프랑스와 결별하고 카를 5세와 계약하여 7월 초 나폴리 해상 봉쇄를 풀어버렸다.[102] 이후 그는 제노바 항구 봉쇄를 뚫고 사보나에서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나폴리 공성전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철수 중 오랑주 공이 이끄는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프랑스군 전체가 항복했다.

6. 3. 란드리아노 전투 (1529년)

1529년 6월, 파비아 인근 롬바르디아 지역인 란드리아노에 주둔하던 생폴 백작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테라노바 공작 (안토니오 데 레이바)[103]가 이끄는 스페인군과 교전하였다.[104]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전멸당하고 지휘관 생폴 백작은 포로로 잡혔으며, 카를 5세가 밀라노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105] 란드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이탈리아 지배력을 회복하려던 프랑수아 1세의 희망은 좌절되었다.[105]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의 강화 조약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105]

7. 강화 조약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의 군대가 패배한 후, 카를 5세와 평화를 모색했다. 1529년 7월, 변경 도시인 캉브레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프랑수아 1세의 모친인 루이즈 드 사부아가, 신성 로마 제국 측에서는 조카인 황제를 대신하여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이 주로 협상을 진행했다.(이 때문에 '여인들의 평화', 즉 ''파 드 담''(Paix des Dames)으로 알려지게 되었다.)[7] 카를 5세는 협상 직전에 바르셀로나에서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최종 조건은 3년 전의 마드리드 조약과 대체로 유사했다. 프랑수아 1세는 아르투아, 플랑드르, 투르네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고, 아들들이 석방되기 전에 2백만 금화 에퀴를 지불해야 했다.[17] 그러나 굴욕적인 부르고뉴 공국 자체의 할양과 2년 전에 사망하여 독립적인 프로방스 왕국을 이끌 후보가 아니었던 부르봉 공작 샤를에 관한 여러 조항은 삭제되었다.[8] 8월 3일에 서명된 캉브레 조약으로 프랑스는 전쟁에서 물러났고, 베네치아, 피렌체, 교황은 카를 5세에 맞서 고립되었다.

부인들의 평화(Paix des Dames)


교황 클레멘스 7세.


제노아에 도착한 카를 5세는 교황과의 회담을 위해 볼로냐로 향했다. 클레멘스 7세는 로마 약탈에 가담한 사람들을 사면하고 카를 5세에게 대관식을 약속했다. 그 대가로 그는 라벤나와 체르비아를 받았다. 이 도시들은 베네치아 공화국마리냐노 전투에서 얻은 영토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대가로, 풀리아에 남아있던 영토와 함께 카를 5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9] 마지막으로, 프란체스코 2세는 90만 스쿠도를 지불하고 밀라노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베네치아의 반대로 인해,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왕위에 앉히려던 계획을 포기했다.[10]

7. 1. 캉브레 조약 (1529년 8월 5일)

1529년 7월, 나폴리와 란드리아노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 평화를 모색하며 국경 도시 캉브레에서 협상을 시작했다.[106][107][108] 프랑스 측 대표는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루이사 디 사보이아였고, 카를 5세 측 대표는 그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였다. 이 때문에 캉브레 조약은 '부인들의 평화'(Paix des Dames)라고도 불린다.[7]

최종적인 조약 조건은 3년 전 마드리드 조약의 내용을 대체로 반영했다. 프랑수아 1세는 아르투아, 플랑드르, 투르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고, 두 아들의 몸값으로 금화 200만 에퀴를 지불해야 했다.[17] 그러나 부르고뉴 공국 할양과 관련된 굴욕적인 조항은 삭제되었고, 2년 전(1527년 5월 6일 로마탈환 공성전) 전사한 샤를 드 부르봉에 관한 조항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8][109] 8월 5일에 체결된 캉브레 조약으로 프랑스는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18]

카를 5세는 볼로냐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회담을 가졌다. 교황은 로마 약탈 가담자들을 사면하고 카를 5세의 대관식을 약속했다. 그 대가로 교황은 라벤나와 체르비아를 얻었다. 이 도시들은 베네치아 공화국마리냐노 전투에서 얻은 영토를 유지하는 대가로 카를 5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9][19]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는 90만 스쿠도를 지불하고 밀라노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10][20]

7. 2. 볼로냐 조약 (1529년 8월 12일)

1529년 8월 12일, 카를 5세제노바를 통해 볼로냐로 이동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만났다. 교황은 황제 대관식을 거행해주었고, 라벤나와 체르비아를 돌려받았다.[110] 베네치아 공화국은 마리냐노에서 얻은 영토를 유지하는 대가로 풀리아에 남아있던 영토를 카를 5세에게 넘겨주었다.[9]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밀라노 공작 자리에 앉히려 했으나 베네치아의 반대로 포기하고, 대신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에게 900,000 스쿠디를 받고 밀라노 복귀를 허용했다.[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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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3. 마지막 황제 대관식 (1530년 2월 24일)

카를 5세는 1530년 2월 24일 자신의 3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볼로냐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황제 대관식을 수여받았다.[112][113][114] 1356년 금인칙서 발표 이후 황제 대관식은 필수적인 의식이 아니었고 교황은 더 이상 황제 승인권자가 아니었으나, 카를 5세는 교황이 직접 황제관을 씌워줌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정당성을 부여받고 가톨릭 세계를 지키는 수호자로서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다.[115]

전통적으로 대관식은 로마에서 거행되었으나, 1527년 로마 약탈로 도시 복원이 미진했고 로마 시민들의 민심을 고려하여 볼로냐의 페트로니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는 역사상 교황이 황제에게 왕관을 수여하는 마지막 행사로 기록되었다.[115]

8. 피렌체 공성전

피렌체 공화국은 오렌지 공작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제국군에 맞서 저항을 계속했다. 1530년 가비나나 전투에서 프란체스코 페루치오가 지휘하는 피렌체군과 황제군이 결전을 벌여, 필리베르 드 샬롱이 전사했지만, 전투 자체는 황제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쥐었고, 그로부터 10일 후에 공화국이 항복했다. 피렌체가 진압됨으로써,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피렌체 공작이 되었다.

8. 1. 바르셀로나 밀약 (1529년 6월 29일)

1529년 6월 29일,[116]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바르셀로나에서 황제 카를 5세와 비밀 계약을 체결하였다.[117] 주된 내용은 강화 조약 체결 시 피렌체를 제외하고, 교황이 군비를 조달하는 조건하에 제국군이 피렌체를 탈환하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교황은 피렌체에게 황제와 종전 협의를 진행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여 침공 명분을 유지하고 피렌체 정부를 고립시켜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하고자 했다.

1527년 5월 19일,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였다.[118] 로마가 제국군에 의해 점령당하여 메디치 가문의 구심점이었던 교황이 힘을 잃어버렸을 때를 기회로 반(反) 메디치 세력이 벌인 일이었다. 황제와의 종전 조약 체결로 동맹국들이 전쟁에서 이탈하자 피렌체는 고립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은 오렌지 공작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제국군에 맞서 저항을 계속했다. 1530년 가비나나 전투에서 프란체스코 페루치오가 지휘하는 피렌체군과 황제군이 결전을 벌여, 필리베르 드 샬롱이 전사했지만, 전투 자체는 황제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쥐었고, 그로부터 10일 후에 공화국이 항복했다. 피렌체가 진압됨으로써,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피렌체 공작이 되었다.

8. 2. 피렌체의 전쟁 준비

피렌체에 대한 공격이 임박하자 황제에게 항복하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끝까지 투쟁하자는 세력이 우세하였다. 혼란을 뒤로 하고 피렌체는 전쟁 준비작업을 했다. 군지휘권은 페루자의 장군 말라테스타 발리오니에게 위임하였고 10,000명 가까운 민병대를 모았다. 도시 방어를 위해 다수의 외진 곳에 있는 수녀원과 수도원, 별장들 그리고 성벽 외각에 있는 도시의 일부를 파괴하였다.[119] 새로운 요새와 성채 강화 작업은 미켈란젤로(1475~1564)가 맡았다.

조르조 바사리가 묘사한 피렌체 공성전

8. 3. 피렌체 공화국의 종말 (1530년 8월 10일)

1529년 10월 24일 오랑주 공(필리베르 드 샬롱)과 피에르 마리아 3세 데 로시가 이끄는 제국군은 피렌체를 포위한 후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국군이 고립작전을 펴며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상황은 점차 피렌체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제국군에 의해 볼테라가 점령당하고 1530년 8월 3일 가비아나 전투에서 피렌체의 유능한 장수 프란체스코 페루초가 전사하자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열 달이 넘게 걸린 전쟁은 마침내 1530년 8월 10일 제국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은 오렌지 공작이 이끄는 제국군에 맞서 저항을 계속했으나, 가비나나 전투에서 황제의 군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10일 후에 항복했다. 그 후 교황 클레멘스 7세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했고, 그 이후 피렌체는 강력한 메디치 가문의 세습 영토가 되었으며 수 세기 동안의 공화정 통치가 종식되었다.

9. 종전과 사후 수습

9. 1. 피렌체 세습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1510~1537)


피렌체 공성전을 끝으로 1526년에 시작된 코냑동맹전쟁은 4년 만에 완전히 종료되었다. 황제 카를 5세의 도움으로 메디치 가문은 통치권을 회복했으며,[120] 전후 수습은 황제의 지원을 받는 교황이 주도하였다. 제국군과 피렌체 공화정 지도자들 사이의 항복 조건은 도시가 교황의 손에 넘어가자 무시되었으며, 천여 명에 달하는 피렌체 지도급 인사들이 처형, 추방, 투옥되었다.[121] 교황의 측근인 바초 발로리가 수상으로 임명되어 권력을 집중시켰고 시뇨리아는 형식적으로 존속되었다.

1531년 7월 5일,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재종손자[122] 알레산드로를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1532년 5월 1일, 교황의 요청을 받은 황제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를 피렌체 초대 세습공작으로 임명하였다.[123] 이로써 피렌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황제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를 귀족정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후 카를 5세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쳤다. 1536년에 알레산드로는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 마르게리타(1522~86)와 결혼하였으며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의 통치에 든든한 지지자가 되었다.

9. 2.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3년에 자신의 손녀 카트린과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의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교황은 직접 프랑스를 방문하였고 프랑수아 1세와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교황은 이 결혼을 통하여 코냐크 동맹 전쟁 이후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536년에 프랑수아 1세의 장남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의 손녀 카트린은 왕세자비가 되었으며, 훗날 1547년에 앙리 2세가 국왕에 오르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카트린은 교황의 재종손녀이다.

9. 3. 로마 재건 사업

로마 약탈로 폐허가 된 로마의 재건 사업은 클레멘스 7세 재임 시대에 완료되지 못하고 후임 바오로 3세 시대까지 이어졌다.[124] 153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로마를 방문하여 재건 중인 도시를 둘러보았다.[124] 이 때 카를 5세는 교황과 추기경들 앞에서 프랑수아 1세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연설을 했다.[124] 이는 같은 해 3월,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토리노를 점령했기 때문이었다.[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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