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두스 (로렌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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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라두스 (로렌 공작)는 941년 보름스 가우 백작이 되었고, 라인 프랑켄 지역을 다스렸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944년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947년 오토 1세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하여 관계를 강화했다.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베렌가리오 2세와 협상했지만, 오토 1세의 배신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화해하고 레흐펠트 전투에서 헝가리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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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라두스 (로렌 공작) | |
|---|---|
| 기본 정보 | |
![]() | |
| 칭호 | 로트링겐 대공 |
| 재위 기간 | 944년–953년 |
| 가문 | 잘리어 왕조 |
| 출생일 | 922년경 |
| 사망일 | 955년 8월 10일 |
| 사망 장소 | 레히펠트 평원, 아우크스부르크 근처, 바이에른 |
| 매장지 | 보름스 대성당 |
| 가계 | |
| 아버지 | 보름스가우 백작 베르너 5세 |
| 어머니 | 콘라트 1세의 딸 히카 |
| 배우자 | 리우트가르트 폰 작센 |
| 자녀 | 오토 1세 |
| 이름 | |
| 독일어 | Konrad der Rote (콘라트 데어 로테) |
| 라틴어 | Conradus (콘라두스) |
2. 가계
콘라두스는 9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했다. 장인은 오토 1세]로 작센 공작, 독일왕, 이탈리아왕, 신성로마황제였다. 장모는 유디트(잉글랜드의 이디스)이다.
콘라두스는 베르너 5세의 아들로, 941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름스 가우 백작이 되었으며, 나헤가우, 슈파이어가우, 보름스가우 영토, 즉 라인강 상류 지역을 다스렸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오토 1세에게 충실히 봉사했으며, 944년에는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1] 947년 오토 1세는 콘라두스를 자신의 딸 리우트가르트 폰 작센과 결혼시켜 유대를 강화했다.[1]
아들 오토 1세는 케른텐 공작(재위: 978년 - 985년, 995년 - 1004년)을 역임했다.
동복처남은 리우돌프, 처남댁은 이타이며, 이들의 아들 즉, 처조카는 콘라트이다. 이복처남은 오토 2세이며, 처남댁은 테오파노로 비잔틴의 황녀이다. 오토 2세와 테오파노의 아들 즉, 처조카는 오토 3세이다. 처삼촌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이고, 그의 아들 즉 처사촌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이다.
처고모는 마틸다이고 처고모부는 로렌 공작 기셀베르트이다. 다른 처고모 게르베르가(Gerberga of Saxony)는 서프랑크의 왕 루이 4세와 결혼했다.
3. 생애
951년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베렌가리오 2세와의 협상을 주관했지만, 오토 1세의 동생인 하인리히 1세의 방해로 인해 좌절되었다. 콘라두스는 953년 그의 매형 리우돌프와 함께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954년 6월 제국 회의에서 오토 1세와 화해했다.[2]
955년, 헝가리인의 바이에른 침공에 맞서 프랑켄 군대를 지휘하여 레흐펠트 전투에 참전했다.[2] 코르베이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콘라두스는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더위로 인해 갑옷을 벗고 숨을 쉬려는 순간 화살에 목을 맞아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보름스로 옮겨져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졌다.[2]
3. 1. 초기 생애 및 라인 프랑켄 백작
콘라두스는 베르너 5세 (약 935년 사망)의 아들이었다. 그는 프랑켄의 백작이었으며, 나헤가우, 슈파이어가우, 보름스가우 영토, 즉 라인강 상류 지역에 속했다. 그의 어머니는 훈프리딩 가문의 슈바벤 공작 부르카르트 2세와 그의 아내 취리히의 레겔린데의 딸인 히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상 최초의 잘리어 가문인 베르너 5세 백작의 계보는 불확실하다. 그는 프랑크의 비도니드 왕조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의 아버지 베르너 4세(왈라호)는 알려지지 않은 독일의 콘라트 1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941년, 콘라두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인 지역의 백작이 되었으며, 라인강 우안의 베터라우 지역도 추가로 얻었다. 콘라두스는 보름스에 거주하며 라인 프랑켄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와 경쟁했다. 잘리어 가문은 프랑켄 영토에서 그들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지만, 콘라디너 친척들은 918년 콘라트 왕의 죽음과 오토 왕조의 등장 이후 왕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고 콘라트 왕의 동생 에버하르트는 프랑켄 공작으로 즉위할 수 있었고, 잠시 로트링겐 공작령을 봉토로 받았지만, 그는 로렌 공작 기로베르트의 반란에 가담하여 오토 1세의 통치에 반대했고, 939년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사망했다.
로트링겐이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에게 넘어간 반면, 콘라두스 더 레드는 오토 왕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로 남았고, 에버하르트 공작의 죽음 이후 프랑켄 섭정으로 활동했으며, 공작 칭호를 얻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또한 서 프랑크 왕 루이 4세의 로트링겐 포기를 보장하고, 왕의 동생 하인리히가 오토의 생명을 위협하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94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름스 가우 백작이 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오토 1세에게 충실히 봉사했다.[2] 944년에 오토 1세는 콘라두스를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하고, 947년에는 콘라두스를 자신의 딸 리우트가르트 폰 작센과 결혼시켜 유대를 강화했다.[1]
그와 리우트가르데는 948년에 태어난 아들 보름스의 오토를 두었고, 그는 나중에 카린티아 공작이 되었다.
콘라두스는 951년 그의 재능을 입증했고, 이탈리아에 대한 오토 왕의 첫 번째 원정에 동행했으며, 베렌가리오 2세와 협상했다. 베렌가리오는 그의 대리인으로 952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나타나 독일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951년에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떠난 후, 콘라두스는 이탈리아 왕국의 왕 베렌가리오 2세를 오토 1세에게 옹호한 결과, 베렌가리오 부자는 이탈리아 왕위를 인정받았고, 콘라두스는 베렌가리오와의 협상을 주관했지만, 오토 1세의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하인리히 1세의 방해로 인해 콘라두스는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2] 오토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베로나 변경백령을 그의 동생 하인리히에게 양도하도록 강요했다.
콘라두스의 아내의 이복 오빠인 슈바벤 공작리우돌프는 아버지 오토 1세의 재혼이나 베렌가리오 2세에 대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콘라두스는 의붓 오빠에게 동조하여 953년에 리우돌프와 함께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들었다.[2] 그 다음 해, 콘라두스는 그의 매형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와 함께 오토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연대기 작가 코르베이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콘라두스의 배은망덕함에 대해 격렬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반란은 광범위하게 퍼졌지만, 반란자들이 적대적인 헝가리 세력과 거래를 시작한 후 진압되었다. 리우돌프와 콘라두스는 프리츠라르 의회에서 공작령을 박탈당했고, 로트링겐은 대신 왕의 동생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에게 주어졌으며, 콘라두스는 즉시 지역 귀족들에게 쫓겨났다. 그 결과, 콘라두스는 로트링겐 공작위를 박탈당하고, 공작위는 오토 1세와 하인리히 1세의 동생이자 쾰른 대주교인 쾰른의 브루노에게 주어졌다.[2] 이후, 954년 6월의 제국 회의에서 콘라두스는 오토 1세와 화해했다.[2] 결국 잘리어 가문은 랑겐젠에서 오토에게 항복했고, 두 사람은 화해했다. 콘라두스는 그의 영지를 유지했지만, 공작 칭호는 다시 얻지 못했다. 954년 그는 변경백 게로가 슬라브족 우크라니 부족에 대항하여 우케를란트에서 벌인 성공적인 원정에 참여했다.
3. 2. 오토 1세와의 관계 및 로트링겐 공작 임명
콘라두스는 베르너 5세의 아들로, 94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인 지역의 백작이 되었고, 베터라우 지역도 추가로 얻었다. 보름스에 거주하며 프리드리히 대주교와 라인 프랑켄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콘라두스는 오토 1세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로, 에버하르트 공작 사후 프랑켄 섭정으로 활동했다. 서 프랑크 왕 루이 4세의 로트링겐 포기를 보장하고, 왕의 동생 하인리히의 음모를 밝히는 데 기여한 대가로 944년 로트링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역 귀족들에게 거부당했고, 왕의 지원에 의존했다.
947년 오토 1세의 딸 리우트가르데와 결혼했고,[1] 948년 아들 보름스의 오토를 두었다. 951년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 베렌가리오 2세와의 협상을 통해 952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베렌가리오 2세가 독일 왕에게 경의를 표하게 했다. 그러나 오토 1세는 베로나 변경백령을 동생 하인리히에게 양도하도록 강요하여 콘라두스를 속였다.[1]
953년 콘라두스는 매형 리우돌프와 함께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은 진압되었다. 콘라두스는 프리츠라르 의회에서 공작령을 박탈당했고, 로트링겐은 브루노에게 주어졌다. 랑겐젠에서 오토에게 항복한 후 화해했고, 954년 변경백 게로의 우크라니 부족 원정에 참여했다.
3. 3. 이탈리아 원정과 베렌가리오 2세와의 협상
콘라두스는 951년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베렌가리오 2세와의 협상을 주도했다.[1] 베렌가리오는 콘라두스의 중재를 통해 952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출석, 독일 왕 오토 1세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이탈리아 왕위를 인정받았다.[2]
그러나 오토 1세는 콘라두스와의 약속을 어기고 베로나 변경백령을 자신의 동생 하인리히 1세에게 넘겨주었다.[1] 이로 인해 콘라두스는 체면을 구기게 되었고, 이는 953년 콘라두스가 매형인 리우돌프와 함께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
3. 4. 오토 1세에 대한 반란과 화해
941년 콘라두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인 지역의 백작이 되었으며, 베터라우 지역도 추가로 얻었다. 그는 오토 왕조의 오토 1세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로,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의 사후 프랑켄 섭정으로 활동했다. 944년 로트링겐을 받았으나 지역 귀족들에게 거부당했고, 3년 후 오토 1세의 딸 리우트가르데와 결혼했다.
951년 이탈리아에 대한 오토 왕의 첫 번째 원정에 동행, 베렌가리오 2세와 협상하여 제국 의회에서 독일 왕에게 경의를 표하게 했다. 그러나 오토 1세는 베로나 변경백령을 그의 동생 하인리히에게 양도하여 콘라두스를 속였다.
953년, 콘라두스는 매형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와 함께 오토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광범위하게 퍼졌지만, 반란자들이 헝가리 세력과 거래를 시작한 후 진압되었다. 프리츠라르 의회에서 공작령을 박탈당했고, 로트링겐은 왕의 동생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에게 주어졌다. 콘라두스는 랑겐젠에서 오토에게 항복하여 화해했고, 그의 영지는 유지했지만 공작 칭호는 얻지 못했다. 954년 변경백 게로가 슬라브족 우크라니 부족에 대항하여 우케를란트에서 벌인 성공적인 원정에 참여했다.
3. 5. 레히펠트 전투와 죽음
콘라두스는 베르너 5세의 아들로, 94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름스 가우 백작이 되었으며, 나헤가우, 슈파이어가우, 보름스가우 영토, 즉 라인강 상류 지역을 다스렸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오토 1세에게 충실히 봉사했으며, 944년에는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1] 947년 오토 1세는 콘라두스를 자신의 딸 리우트가르트 폰 작센과 결혼시켜 유대를 강화했다.[1]
951년 오토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베렌가리오 2세와의 협상을 주관했지만, 오토 1세의 동생인 하인리히 1세의 방해로 인해 좌절되었다. 콘라두스는 953년 그의 매형 리우돌프와 함께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954년 6월 제국 회의에서 오토 1세와 화해했다.[2]
955년, 헝가리인의 바이에른 침공에 맞서 프랑켄 군대를 지휘하여 레흐펠트 전투에 참전했다.[2] 코르베이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콘라두스는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더위로 인해 갑옷을 벗고 숨을 쉬려는 순간 화살에 목을 맞아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보름스로 옮겨져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졌다.[2]
4. 평가
참조
[1]
서적
コルヴァイのヴィドゥキント
[2]
서적
瀬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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