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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피에뉴 휴전 협정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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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콩피에뉴 휴전 협정은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며 체결된 협정이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포위로 인해 주요 장비와 기갑 부대를 잃었고, 정부는 파리를 개방 도시로 선언하고 보르도로 이전했다. 필리프 페탱이 총리가 되고 휴전을 요청한 끝에,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휴전을 맺었던 콩피에뉴 숲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협정은 프랑스에 가혹한 조건을 부과하여, 국토의 5분의 3을 독일이 점령하고, 프랑스군은 최소 규모로 유지되며, 정치적 망명자는 독일로 인도되었다. 이 협정으로 프랑스는 분할되었고, 비시 프랑스가 수립되었으며,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저항을 시작했다. 협정 체결 후, 히틀러는 기념지를 파괴했으나, 전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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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피에뉴 휴전 협정 (1940년)
개요
제목독불 휴전 협정
다른 이름1940년 6월 22일의 휴전 협정
휴전 협정 조인 장면. 프랑스의 샤를 앙치제르 장군에게 문서를 건네는 빌헬름 카이텔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총장
휴전 협정 조인 장면. 프랑스의 샤를 앙치제르 장군에게 문서를 건네는 빌헬름 카이텔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
설명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의 휴전 협정
상세 정보
서명일1940년 6월 22일
서명 장소콩피에뉴 숲
체결국나치 독일과 프랑스
웹사이트"Convention d'armistice" – 1940년 6월 22일 르통드에서 서명된 휴전 협정 텍스트

2. 프랑스 공방전 (1940년 5월 ~ 6월)

프랑스 공방전에서 가장 현대화된 프랑스군이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포위되어 패배하면서, 프랑스는 주요 중화기와 기갑부대를 잃었다.[1] 1940년 5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군은 계속 후퇴했고 독일은 파리를 점령하려 했다.[1] 프랑스 정부는 독일군에 포획되는 것을 피하고자 6월 10일 보르도로 이동했고, 같은 날 파리는 개방 도시로 선포되었다.[1]

폴 레노 내각은 프랑코-영국 연합 제안을 통해 지지를 확보하려 했으나, 부총리 필리프 페탱을 비롯한 많은 각료들이 휴전을 지지하여 내분이 일어났다. 결국 레노는 6월 16일 사임하고 페탱이 총리가 되었다.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의 저항이 이어졌지만, 프랑스 본토의 항복으로 영국과의 연합 시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2]

6월 22일까지 독일 국방군은 전사자 , 부상자 이상, 실종자 을 기록했다. 프랑스군은 전사자 , 부상자 이상이었고, 영국 원정군은 약 이 사망하고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2]

2. 1. 독일군의 전격전

프랑스군에서 가장 현대화되고 강력한 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독일 국방군의 포위망에 갇혔고, 그 결과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중장비와 기갑부대를 잃게 되었다.[1] 5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군은 전면적인 패퇴 상태에 있었고, 독일군은 파리를 위협하고 있었다.[1]

프랑스 정부는 독일군에게 포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6월 10일 보르도로 이동해야 했고, 파리는 무방비 도시로 선언되었다.[1] 같은 날, 이탈리아가 참전했다.[1] 정부 내에서는 평화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6월 16일 필리프 페탱이 총리가 되자, 다음 날인 17일에 독일에게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했다.[1]

6월 22일까지 독일 국방군은 전사자 , 부상자 이상, 실종자 의 피해를 보았지만, 프랑스 측의 손실은 전사자 , 부상자 이상이었다.[1] 영국 해외 원정군 (BEF) 또한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1]

2. 2. 프랑스군의 패배

프랑스군의 가장 현대화되고 강력한 부대가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독일 국방군의 포위망에 갇히면서,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중장비와 기갑부대를 잃게 되었다.[1] 5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군은 전면적으로 패퇴했고, 독일군은 파리를 위협했다.[1]

프랑스 정부는 독일군에게 포획되는 것을 피하고자 6월 10일 보르도로 이동해야 했고, 같은 날 파리는 무방비 도시로 선포되었다.[1] 같은 날, 이탈리아가 참전했다.[4] 정부 내에서는 평화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6월 16일 필리프 페탱이 총리가 되자, 그 다음 날인 17일에 독일에게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했다.[4]

6월 22일까지 독일 국방군은 전사 2만 7천 명, 부상자 11만 1천 명 이상, 실종자 1만 8천 명의 피해를 입었다.[2] 반면 프랑스 측의 손실은 전사 9만 2천 명, 부상자 20만 명 이상이었다.[2] 영국 해외 원정군 (BEF) 또한 6만 8천 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5]

2. 3. 프랑스 정부의 항복

프랑스군에서 가장 현대화되고 강력한 부대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독일 국방군의 포위망에 갇히면서,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중장비와 기갑부대를 잃게 되었다. 1940년 5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군은 전면적인 패퇴 상태에 있었고, 독일군은 파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군에게 포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6월 10일 보르도로 이동해야 했고, 파리는 무방비 도시로 선포되었다. 같은 날, 이탈리아가 참전한다. 정부 내에서는 평화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6월 16일 필리프 페탱이 총리가 되자, 그 다음 날인 17일에 독일에게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했다.[1]

폴 레노 정부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프랑코-영국 연합 제안은 지지를 분열시켰다. 부총리 필리프 페탱과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 웨이강 장군과 같이 휴전을 지지하는 많은 장관들이 내각에 있었기 때문에 레노는 6월 16일 사임했다. 페탱이 총리가 되었다.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의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프랑스 본토의 항복으로 영국이 두 나라를 통합하려는 더 이상의 시도는 끝났다.[2]

6월 22일까지 독일 국방군 (''베어마흐트'')은 전사 2만 7천 명, 부상자 11만 1천 명 이상, 실종자 1만 8천 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 측의 손실은 전사 9만 2천 명, 부상자 20만 명 이상에 달했다. 영국 해외 원정군 (BEF) 또한 6만 8천 명 이상의 손실을 기록했다.[5]

3. 콩피에뉴 휴전 협정

아돌프 히틀러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휴전 협상을 원한다는 통보를 받자, 협상 장소로 콩피에뉴 숲을 선택했다. 콩피에뉴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1918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곳이었다. 히틀러는 복수의 행위로 독일이 1918년 휴전 협정에 서명했던 콩피에뉴 열차에서 서명식을 거행했다.[2]

윌리엄 샤이러는 "나는 그에게서 불과 50야드 떨어져 있습니다. [...] 나는 그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여러 번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것은 경멸, 분노, 증오, 복수, 승리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록했다.[2] 1940년 6월 21일, 히틀러는 1918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던 같은 철도 차량에서 페르디낭 포슈 원수가 앉았던 같은 의자에 앉았다. 서문 낭독을 들은 후 히틀러는 프랑스 대표단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차량에서 나와 국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 장군에게 협상을 맡겼다.

협상은 1940년 6월 22일 저녁까지 하루 동안 진행되었다. 샤를 앙투안 엉튀지제르 장군은 보르도로 피신한 프랑스 정부 대표들과 전화로 조건을 논의해야 했다.

히틀러가 휴전에 동의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프랑스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서 계속 싸우는 것을 막고 프랑스 해군을 전쟁에서 제외시키려 했다. 또한 프랑스 정부를 유지함으로써 독일은 프랑스 영토를 관리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독일은 프랑스의 해외 영토를 점령할 만한 충분한 해군이 부족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영국이 이 영토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식적으로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프랑스 잔여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윌리엄 샤이러의 책 ''제3제국의 흥망''에 따르면, 샤를 앙투안 엉튀지제르는 프랑스에 부과된 휴전 조건이 1918년 독일에 부과된 조건보다 더 가혹하다고 불평했다.

최종 평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고, 자유 지역 (zone libre프랑스어)은 1942년 11월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침공한 후 안톤 작전에 따라 독일과 그 동맹국 이탈리아에 의해 침략당했다.

프랑스-독일 휴전 협정 제19조는 프랑스가 프랑스 영토에 있는 모든 독일 국민을 독일 당국에 넘겨주도록 요구했는데, 그들은 흔히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4] 카이텔은 이것이 주로 "전쟁을 선동한" 난민, 즉 유대인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구두 보증을 했다.[4]

샤를 앙투안 엉튀지제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대표단은 휴전 조건을 완화하려고 했지만, 카이텔은 그대로 휴전을 수락하거나 거부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프랑스가 처한 군사 상황을 고려할 때, 엉튀지제르는 휴전 조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은 1940년 6월 25일 00시 35분에 발효되었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였다.

이 휴전은 프랑스에게 어느 정도의 이점이 있었는데, 식민 제국과 함대를 유지하고 완전한 점령과 무장 해제를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점령되지 않은 지역에 남은 프랑스 잔여 국가는 추축국에 대해 특정한 ''사실상''의 독립과 중립을 시행할 수 있었다.

3. 1. 협정 장소 선정

히틀러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휴전 협상을 원한다는 통보를 받자, 협상 장소로 콩피에뉴 숲을 선택했다. 콩피에뉴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1918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곳이었다. 히틀러는 복수의 행위로 독일이 1918년 휴전 협정에 서명했던 콩피에뉴 열차에서 서명식을 거행했다.[2]

윌리엄 샤이러는 당시 현장에서 "나는 그에게서 불과 50야드 떨어져 있습니다. [...] 나는 그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여러 번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것은 경멸, 분노, 증오, 복수, 승리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록했다.[2] 1940년 6월 21일, 히틀러는 1918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던 같은 철도 차량(박물관 건물에서 옮겨와 1918년과 같은 위치에 놓였다)에서 페르디낭 포슈 원수가 앉았던 같은 의자에 앉았다. 서문 낭독을 들은 후 히틀러는 프랑스 대표단에 대한 경멸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으로 차량에서 나와 국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 장군에게 협상을 맡겼다.

3. 2. 협정 내용

1940년 당시 프랑스의 분할: 나치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합병하고, 스페인 국경까지 이르는 북부 프랑스 본토와 대서양 연안 전역을 점령. 나머지 프랑스(프랑스 본토 남동부의 나머지 5분의 2, 해외 프랑스 및 북아프리카 포함)는 비시에 본부를 둔 협력 정부(필리프 페탱 원수가 이끌었음)의 통제하에 점령되지 않은 상태로 남음.


6월의 ''폴 롯''은 5월의 ''폴 겔브'' 독일 전격전을 이용하고 확정.


1940년 6월 22일,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22년 만에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콩피에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프랑스에 매우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내용
영토 분할* 프랑스 국토의 5분의 3 (제네바, 투르, 스페인 국경을 잇는 선의 북서쪽)이 독일군 점령 하에 놓임.[3]
군비 제한* 프랑스 육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됨.[3]
배상금프랑스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점령 비용을 부담해야 했으며, 그 액수는 하루 에 달했음.[3]
기타* 프랑스 내 정치적 망명자들은 모두 독일로 인도됨.[3]



특히, 제19조는 프랑스 내 유대인 및 반나치 인사들을 독일 당국에 인도하도록 규정하여, 이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4] 카이텔은 이것이 주로 "전쟁을 선동한" 난민, 즉 유대인, 특히 그때까지 프랑스에서 망명을 누렸던 독일 유대인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구두 보증을 했다.[4]

이 휴전 협정은 프랑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프랑스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3. 3. 프랑스 대표단의 협상 노력

샤를 앙투안 엉튀지제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대표단은 휴전 협정 조건을 완화하고자 노력했다. 협정 서문에 "독일은 용감한 상대에 대한 모욕의 형태로 휴전 조건과 휴전 협상을 이용할 의도가 없다"라는 문구가 삽입된 것은 프랑스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2] 또한 3조 2항에는 적대 행위 종료 후 영국과의 휴전 이후 프랑스 북서부를 대규모로 점령할 의도가 없다는 내용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빌헬름 카이텔 장군이 주도했으며, 프랑스 대표단은 보르도로 피신한 프랑스 정부 대표들과 전화로 조건을 논의해야 하는 등 협상에 어려움을 겪었다.

4. 협정의 결과

콩피에뉴 휴전 협정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 국제 정세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프랑스는 국토의 5분의 3이 독일군에 점령당하고, 나머지 지역은 비시 정부의 통제 하에 놓이는 분단 상황을 맞이했다. 샤를 앙투안 엉튀지제르 장군은 휴전 조건이 1918년 독일에 부과된 조건보다 가혹하다고 불평했지만, 프랑스는 군사적 열세로 인해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3] 이로 인해 약 100만 명의 프랑스 군인이 독일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는 등[3] 프랑스는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는 항복을 거부하고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계속 참전했다.[1]

독일은 프랑스 점령을 통해 영국 해협대서양의 주요 항구를 확보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 집중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얻었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 제국은 여전히 비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고, 이는 훗날 안톤 작전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휴전 협정은 또한 프랑스 내 독일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결과를 낳았다.[4]

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은 프랑스 항복 이후 크게 변화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프랑스군은 주력 부대와 장비를 상실했고, 독일군은 파리를 점령했다. 이탈리아도 추축국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4. 1. 프랑스의 분할과 비시 프랑스

아돌프 히틀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휴전에 동의했다. 프랑스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서 계속 싸우는 것을 막고, 프랑스 해군을 전쟁에서 제외시키려 했다. 또한 프랑스 정부를 유지하여 프랑스 영토 관리 부담을 덜고, 영국에 집중하고자 했다. 독일은 프랑스 해외 영토를 점령할 해군력이 부족했기에,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프랑스 잔여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영국을 견제하는 실용적인 방법이었다.[3]

윌리엄 샤이러의 책 ''제3제국의 흥망''에 따르면, 프랑스 장군 샤를 앙투안 엉튀지제르는 프랑스에 부과된 휴전 조건이 1918년 독일에 부과된 조건보다 더 가혹하다고 불평했다. 휴전 조건은 프랑스 본토의 5분의 3을 독일이 점령하고, 나치 독일의 해군이 모든 프랑스 해협대서양 항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정치적 망명자들은 넘겨져야 했고, 독일은 프랑스에 하루 약 4억 프랑화의 점령 비용을 요구했다. 최소한의 프랑스 육군만 허용되었고, 프랑스 해군은 무장 해제되지만 항복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프랑스를 너무 압박하면 프랑스 식민 제국에서 저항이 계속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부의 점령되지 않은 지역인 ''자유 지역''은 잔여 프랑스 행정부비시에 본부를 두고 통치하도록 했다. 비시 정권은 알자스-로렌을 제외한 점령 지역도 관리했지만,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3]

이는 최종 평화 조약이 협상될 때까지의 임시 조약으로 여겨졌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점령이 임시적이며 영국이 타협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3] 프랑스 대표단은 프랑스 군인들이 전쟁 포로로 남는다는 규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거의 100만 명의 프랑스인이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5년을 보내야 했고, 이들 중 약 3분의 1은 전쟁 말 강제 노동 프로그램으로 석방되거나 교환되었다.[3]

최종 평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고, 자유 지역 (zone libre|존 리브르프랑스어)은 1942년 11월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침공한 후 안톤 작전에 따라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점령되었다.

프랑스-독일 휴전 협정 제19조는 프랑스가 프랑스 영토 내 독일인을 독일 당국에 넘겨주도록 요구했다. 이들은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요청 시 항복" 조항).[4] 카이텔은 이것이 주로 "전쟁을 선동한" 유대인, 특히 독일 유대인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구두 보증을 했다. 프랑스 항공기는 독일에게 넘겨줄 필요가 없었다.[5]

샤를 앙투안 엉튀지제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대표단은 휴전 조건 완화를 시도했지만, 카이텔은 그대로 수락하거나 거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프랑스는 군사 상황 때문에 휴전 조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은 1940년 6월 25일 00시 35분에 발효되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 휴전 협정도 체결되었다.

이 휴전은 프랑스에게 식민 제국과 함대를 유지하고, 완전한 점령과 무장 해제를 피하는 이점을 주었다. 점령되지 않은 지역에 남은 프랑스 잔여 국가는 추축국에 대해 특정한 ''사실상''의 독립과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2.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

프랑스 본토 항복 이후, 폴 레노 총리가 사임하고 필리프 페탱이 새 총리가 되었다.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은 저항을 계속했다.[1]

4. 3. 유럽 전선의 변화

프랑스군은 가장 현대화되고 강력한 부대가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독일 국방군(베어마흐트)의 포위망에 갇혀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중장비와 기갑부대를 잃었고, 5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군은 전면적인 패퇴 상태에 있었다. 독일군은 파리를 위협했다.

프랑스 정부는 6월 10일 독일군에게 포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보르도로 이동해야 했고, 파리는 무방비 도시로 선언되었다. 같은 날, 이탈리아가 참전한다. 프랑스 정부 내에서는 평화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6월 16일 필리프 페탱이 총리가 되자, 그 다음 날인 17일에 독일에게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했다.

6월 22일까지 독일 국방군은 전사 2만 7천 명, 부상자 11만 1천 명 이상, 실종자 1만 8천 명의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 측의 손실은 전사 9만 2천 명, 부상자 20만 명 이상이었다. 영국 해외 원정군 (BEF) 또한 6만 8천 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

5. 콩피에뉴 휴전 기념지의 파괴와 복원

1940년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콩피에뉴 휴전 기념지가 파괴되었으나,[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포로 노동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5. 1. 히틀러의 파괴 명령

휴전 기념지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3일 후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6] 마차 자체는 전리품으로 베를린으로 옮겨졌고, 큰 돌 비석 조각들도 함께 가져갔다. 칼에 찔린 독일 제국의 독수리를 묘사한 알자스-로렌 기념비도 파괴되었고, 그 장소의 모든 흔적은 사라졌다. 다만, 페르디낭 포슈 동상만은 예외적으로 남았는데, 히틀러는 황무지를 기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대로 두라고 명령했다. 철도 마차는 나중에 베를린에 전시되었고, 1945년에는 튀링겐주 크라빈켈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SS 부대에 의해 파괴되어 잔해는 매장되었다.

5. 2. 전후 복원 과정

전쟁 후, 독일 포로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휴전 기념지 복구 작업이 진행되었다.[6] 파편을 모아 조립한 돌판과 같은 형식의 객차를 복제하여 원래 위치에 두었고, 알자스-로렌 기념비는 새로 재건되었다.

1989년 독일 재통일 이후, 객차의 파괴와 매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유물 발굴을 실시하여 이전의 유물과 함께 발굴하였다. 이는 1991년 5월 11일 「쥐트튀링거 차이퉁 (Südthüringer Zeitung)」지에 "히틀러의 객차, 크라빈켈 마을에서 발견되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발굴된 각 부분은 1992년 콩피에뉴로 반환되었다.

1994년 5월 5일, "평화에 대한 희망"을 기념하는 작은 너도밤나무가 크라빈켈의 객차 파괴 현장에서 콩피에뉴로 이식되었다. 2005년 5월 7일, 크라빈켈의 그 장소는 사적이 되었다.[7]

6. 한국과의 관계

콩피에뉴 휴전 협정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협정은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으며, 이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국제 정세 변화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웹사이트 "Convention d'armistice" – Text of the armistice signed in Rethondes on 22 June 1940 http://mjp.univ-perp[...] University of Perpignan 2015-06-11
[2]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A History of Nazi Germany Simon & Schuster 2011
[3] 서적 LaCaptivité
[4] 웹사이트 The Varian Fry Foundation Project/IRC http://www.almondsee[...] 2013-12-07
[5] 서적 1991
[6] 웹사이트 Compiègne http://stevenlehrer.[...] 2013-12-07
[7] 서적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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