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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투조프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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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투조프 작전은 1943년 7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오렐 돌출부를 공격하기 위해 수행한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은 쿠르스크 전투의 일부로, 독일군의 치타델 작전 이후 독일 제9군을 포위, 섬멸하여 붕괴를 유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소련군은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투입하여 공격을 감행했으며,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쿠투조프 작전의 결과로 소련군은 오렐 지역을 탈환하고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스몰렌스크 전투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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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투조프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1943년 소련 T-34 전차가 오룔에 진입하는 모습
1943년 소련 T-34 전차가 오룔에 진입하는 모습
명칭쿠투조프 작전
일부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
기간1943년 7월 12일 ~ 1943년 8월 18일
장소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오룔
결과소련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독일발터 모델
로타르 렌두리크
귄터 폰 클루게
로베르트 폰 그라임
소련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이반 바그라먄
바실리 소콜롭스키
마르키안 포포프
병력 규모
독일군인: 300,700명
전차 및 돌격포: 625대
항공기: 610대
야포: 5,500문
소련군인: 800,000명
전차 및 돌격포: 2,409대
항공기: 2,220~3,023대
야포: 26,379문
피해 규모
독일사상자: 86,454명
전사: 14,215명
실종: 11,300명
부상: 60,939명
전차 및 돌격포: 미상
야포: 미상
항공기: 218대
소련사상자: 429,890명
사망 또는 실종: 112,529명
부상 또는 질병: 317,361명
전차 파괴: 2,586대
야포 손실: 892문
항공기 파괴: 1,014대

2. 배경

소련군은 라스푸티차가 끝나갈 무렵, 다음 단계를 계획했다. 스탈린은 주도권을 잡아 독일군을 공격하길 원했지만, 소련군 수석 지휘관들은 독일군이 먼저 공격하게 하여 전력을 약화시킨 후 반격하는 방어 전략을 제안했다. 쿠투조프 작전은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소련군의 공격 계획으로, 서부 전선, 브랸스크 전선, 중앙 전선이 참여했다. 이 작전은 쿠르스크 북쪽에서 독일 제2 기갑군을 상대로 제9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쿠르스크 돌출부 공격을 저지하려는 의도였다.[2]

독일군은 치타델 작전을 위해 병력을 집중시켰고, 방어선은 얇게 분산되었다. 제2 기갑군과 제9군 일부가 방어했으며, 5-7km 깊이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지만 병력은 부족했다.[2]

소련 최고 사령부는 동부 전선 전반에 걸친 대규모 공세의 일환으로 두 개의 공세를 계획했는데,[3] 쿠투조프 작전은 그 중 북쪽 공세였다. 이 작전의 목표는 오렐 돌출부를 붕괴시키고 쿠르스크 공격에 참여한 제9군을 포위, 섬멸하여 독일군의 전반적인 붕괴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공격은 치타델 작전에 참여한 독일 기갑 부대가 약화된 후 시작될 예정이었다.

독일 정보부는 제2 기갑군 맞은편에 소련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클루게모델은 이에 우려를 표했다. 소련군은 1,286,000명의 병력, 2,400대의 전차, 26,400문의 대포, 3,000대의 항공기를 집결시켰다.[4]

쿠투조프 작전 지도


파르티잔의 공격은 독일군 후방에서 소련군 공세를 지원했다. 약 100,000명의 파르티잔이 독일군의 보급 및 증원을 방해했으며, 이들의 활동은 작전 전반에 걸쳐 독일군에게 큰 차질을 빚게 했다.

2. 1. 독일군의 방어 준비

2. 2. 소련군의 공격 계획

소련군은 라스푸티차가 끝나갈 무렵, 독일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계획했다. 소련 최고 사령부는 동부 전선 전체에 걸쳐 두 차례의 공세를 계획했는데, 그 중 쿠투조프 작전은 북쪽 공세였다.[3] 이 작전의 목표는 오렐 돌출부를 붕괴시키고, 쿠르스크에서 공격 작전에 참여한 독일 제9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하고 섬멸하는 것이었다.[3] 이를 통해 소련군은 독일군의 전반적인 붕괴를 유발하고자 했다.

초기 공격은 오렐 돌출부의 북쪽과 동쪽 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며, 독일군의 공세가 중단되면 돌출부의 남쪽 면을 따라 중앙 전선도 합류할 예정이었다.[3] 이 작전에는 서부 전선, 브랸스크 전선이 참여했다.

독일 정보부는 제2 기갑군 맞은편에 소련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이는 클루게모델에게 큰 우려를 안겨주었다. 이 작전에 배정된 소련군은 1,286,000명의 병력과 2,400대의 전차를 집결시켰으며, 26,400문의 대포와 3,000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았다.[4]

소련 공세는 독일군 후방에서 파르티잔의 공격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 약 100,000명의 소련 파르티잔이 독일군의 병력 보급 및 증원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활동했다.[4]

2. 3. 양측 전력

3. 전개 과정

1943년 7월 12일, 브랸스크 전선과 서부 전선의 군대는 대규모 포격과 함께 공세를 시작했다.[5] 호브하네스 바그라뱐이 지휘하는 제11 근위군은 제1 전차 군단과 제5 전차 군단의 지원을 받아 독일 제2 기갑군의 북쪽 및 북동쪽 측면을 공격했다. 울리아노보 인근에서 6개의 소련 소총 사단이 2개의 독일 보병 연대를 공격한 지점에서 독일 방어선은 소련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깊었고, 소련 선두 부대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일부 지역에서 상당한 돌파를 달성했다.[5] 첫날 오후, 제11 근위군은 약 23km 전진했으며, 독일 제5 기갑 사단은 돌파구를 메우려 했지만 소련 지원 장갑군과 맞닥뜨려 후퇴해야 했다.[5]

오렐 근처 제2 기갑 사단의 3호 전차


동쪽에서 브랸스크 전선이 가한 초기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제61군, 제3군, 제63군은 각각 8, 14, 15km 전진했다. 다음 날 독일 제LIII군단이 반격하여 브랸스크 전선을 멈춰 세웠고, 탁 트인 지형은 독일군의 더 긴 사정거리의 대포에 유리했다. 클루게와 모델은 소련의 공격을 예측하고 쿠르스크 지역에서 부대를 서둘러 옮겨 방어군을 강화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북쪽에서 제11 근위군은 독일 방어선을 뚫고 진격했고, 독일군은 이러한 돌파구를 막을 예비군이 부족했다. 이틀째가 끝날 무렵, 중앙 집단군은 제2 기갑군의 지휘권을 모델에게 이전했고, 모델은 이미 독일 제9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지휘권 이전은 그가 오렐 지역의 모든 독일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소련 병사들이 브랸스크 근처에서 T-34를 따라 진격한다


7월 18일, 제9군은 7월 5일 출발점으로 돌아갔다.[5] 오렐 돌출부에서 도착하는 독일 예비군과 소련 전차 부대 사이에서 일련의 교전이 벌어졌고, 히틀러는 후퇴를 금지했지만, 소련군은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보했다. 7월 26일까지 독일군은 오렐 작전 기지를 포기하고 브랸스크 동쪽의 하겐 진지로 철수를 시작해야 했다. 제11 근위군은 카라체프 교외에 도달하여 오렐과 브랸스크 사이 중간 지점에 도달하여 주요 보급로인 주요 철도를 차단할 위협을 가했다. 7월 29일 볼호프가 해방되었고, 8월 4일 오렐을 위한 전투가 시작되어 하루의 격렬한 전투 후 오렐이 함락되었다. 독일군은 하겐 선의 준비된 진지로 후퇴했고, 8월 18일까지 소련군은 오렐 돌출부 기저부에 있는 브랸스크 동쪽의 하겐 선에 도달했다.

3. 1. 독일군의 반격과 소련군의 공세 강화

독일군은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예비대를 투입하여 반격을 시도했다. 초기 공격은 브랸스크 전선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더 북쪽에서 제11 근위군은 독일 방어선을 뚫고 진격했다.[5] 독일군은 이러한 돌파구를 막을 예비군이 부족했고, 제2 기갑군의 상황은 심각해졌다.[5] 이틀째가 끝날 무렵 중앙 집단군은 제2 기갑군의 지휘권을 모델에게 이전했다.[5]

쿠투조프 작전의 2단계가 시작되면서, 소련군은 공세를 확대하여 제50군의 지원 공격을 제11 근위군 북쪽에 추가했다.[6] 공격의 기세를 높이기 위해 소련군은 예비군에서 제3 근위 전차군과 제4 전차군을 투입했다. 제3 근위군은 오렐을 향해 진격했고, 제4 전차군은 북쪽에서 진격하여 오렐 돌출부의 독일군을 포위하려 했다.[6]

독일군의 방어 노력은 통신 및 철도 보급선에 대한 게릴라 공격으로 인해 방해받았다. 소련군의 돌파가 이루어지면서 독일 제9군 전체가 포위될 위험에 처했다. 모델은 거의 모든 기갑 부대를 제2 기갑군을 돕기 위해 보냈고, 독일군은 전선의 임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5] 7월 18일, 제9군은 7월 5일 출발점으로 돌아갔다.[5]

3. 2. 오렐 해방과 독일군의 후퇴

1943년 7월 12일, 브랸스크 전선과 서부 전선의 군대는 대규모 포격과 함께 공세를 시작했다.[5] 호브하네스 바그라뱐이 지휘하는 제11 근위군은 제1 전차 군단과 제5 전차 군단의 지원을 받아 독일 제2 기갑군의 북쪽 및 북동쪽 측면을 공격했다. 울리아노보 인근에서 6개의 소련 소총 사단이 2개의 독일 보병 연대를 공격한 지점에서 독일 방어선은 소련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깊었고, 소련 선두 부대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일부 지역에서 상당한 돌파를 달성했다.[5] 첫날 오후, 제11 근위군은 약 23km 전진했으며, 독일 제5 기갑 사단은 돌파구를 메우려 했지만 소련 지원 장갑군과 맞닥뜨려 후퇴해야 했다.[5]

동쪽에서 브랸스크 전선이 가한 초기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제61군, 제3군, 제63군은 각각 8, 14, 15km 전진했다. 다음 날 독일 제LIII군단이 반격하여 브랸스크 전선을 멈춰 세웠고, 탁 트인 지형은 독일군의 더 긴 사정거리의 대포에 유리했다. 클루게와 모델은 소련의 공격을 예측하고 쿠르스크 지역에서 부대를 서둘러 옮겨 방어군을 강화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북쪽에서 제11 근위군은 독일 방어선을 뚫고 진격했고, 독일군은 이러한 돌파구를 막을 예비군이 부족했다. 이틀째가 끝날 무렵, 중앙 집단군은 제2 기갑군의 지휘권을 모델에게 이전했고, 모델은 이미 독일 제9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지휘권 이전은 그가 오렐 지역의 모든 독일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7월 18일, 제9군은 7월 5일 출발점으로 돌아갔다.[5] 오렐 돌출부에서 도착하는 독일 예비군과 소련 전차 부대 사이에서 일련의 교전이 벌어졌고, 히틀러는 후퇴를 금지했지만, 소련군은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보했다. 7월 26일까지 독일군은 오렐 작전 기지를 포기하고 브랸스크 동쪽의 하겐 진지로 철수를 시작해야 했다. 제11 근위군은 카라체프 교외에 도달하여 오렐과 브랸스크 사이 중간 지점에 도달하여 주요 보급로인 주요 철도를 차단할 위협을 가했다. 7월 29일 볼호프가 해방되었고, 8월 4일 오렐을 위한 전투가 시작되어 하루의 격렬한 전투 후 오렐이 함락되었다. 독일군은 하겐 선의 준비된 진지로 후퇴했고, 8월 18일까지 소련군은 오렐 돌출부 기저부에 있는 브랸스크 동쪽의 하겐 선에 도달했다.

3. 3. 공중전

지상전과 함께 치열한 공중전도 벌어졌다. 소련 공군은 예비 포병 폭격과 함께 독일 지상 진지에 대한 공격을 지원했다. 제1 항공군과 제15 항공군은 독일 후방 지역을 상대로 360 소티를 수행하여 약 21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불거진 지역 남부에서는 독일군이 첫날에 1,000회 이상의 출격을 기록했고, 이에 맞서 제15 항공군이 737회 출격했다. 루프트바페는 브랸스크 전선의 전차 35대, 대포 14문, 차량 50대를 파괴하여 그들의 진격을 늦추었다. 첫날이 끝날 무렵 소련군은 첫 번째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제2 기갑군은 점차 밀려나고 있었지만, 루프트바페는 VVS와 교전하여 7월 13일에 50대의 슈투르모비크를 포함한 94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했다.

전투 남부 지역에서 루프트바페의 ''제1 항공사단''은 독일 제9군 방어를 위해 제공권을 유지하며,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소련군에게 상당한 항공기 피해를 입혔다. 6일간의 격렬한 전투 이후 루프트바페의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제1 항공사단''은 제16 항공군이 수행한 868 소티에 대해 74회의 요격 임무를 수행했다. 소련군은 전술 공중전에서 계속 손실을 입었지만, 공중에서의 전반적인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VVS는 제11 근위군이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VVS는 쿠투조프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60,995 소티를 수행하고 1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독일의 ''제1 항공사단''은 37,421 소티를 수행하고 소련 목표에 20,000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4. 결과 및 영향

이 전투는 쿠르스크 전투 동안 벌어진 세 차례의 주요 작전 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전투였다. 전투 중 독일군의 총 손실은 전사, 실종, 부상자를 합하여 86,454명이었다.[7] 붉은 군대의 사상자는 전사 112,529명, 부상 317,361명이었다.[7] 붉은 군대의 전차 및 돌격포 손실은 특히 심각하여 쿠투조프 작전 동안 2,586대의 차량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7] 이 전투에서 독일 전차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앙 집단군은 시타델 작전과 쿠투조프 작전 모두에서 343대의 장갑 전투 차량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7]

제17 대공포 사단의 붉은 군대 병사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시로보코프가 카라체프 해방 당시 그의 자매들을 껴안고 있다. 그들의 부모는 독일 점령 기간 동안 독일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일부 소련 지휘관들은 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하며 그 결과에 불만을 품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는 "적을 포위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돌출부에서 밀어냈을 뿐이다. 브랸스크에서 만나는 두 번의 강력한 펀치를 위해 병력을 사용했다면 작전은 달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7] 쿠투조프 작전은 시타델 작전을 위해 배정된 독일 예비군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소련군은 오렐 돌출부를 축소하고 독일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소련의 승리는 몇 주 후 스몰렌스크 전투의 발판을 마련했다. 쿠투조프 작전으로 소련군은 전략적 주도권을 잡았고,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이를 유지했다.

4. 1. 인명 피해

쿠투조프 작전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주요 작전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독일군은 전사, 실종, 부상자를 합쳐 86,454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붉은 군대는 전사자 112,529명, 부상자 317,361명으로 총 429,89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붉은 군대는 쿠투조프 작전 동안 2,586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잃는 등 심각한 장비 손실도 입었다. 독일군 전차 손실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앙 집단군은 시타델 작전과 쿠투조프 작전에서 총 343대의 장갑 전투 차량을 손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소련군 지휘관들은 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며 결과에 불만을 표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는 "적을 포위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돌출부에서 밀어냈을 뿐이다. 브랸스크에서 만나는 두 번의 강력한 펀치를 위해 병력을 사용했다면 작전은 달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비슷한 의견을 보였다.[7] 쿠투조프 작전은 시타델 작전을 위해 배정된 독일 예비군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소련군은 오렐 돌출부를 축소하고 독일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쿠투조프 작전의 성공으로 소련군은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고, 이는 스몰렌스크 전투의 발판을 마련했다.

4. 2. 전차 손실

붉은 군대는 쿠투조프 작전 동안 2,586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잃었다. 이는 쿠르스크 전투 동안 벌어진 세 차례의 주요 작전 중 가장 큰 피해였다. 독일군 전차 손실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앙 집단군은 시타델 작전과 쿠투조프 작전을 통틀어 343대의 장갑 전투 차량을 손실했다.

5. 평가 및 비판

이 전투는 쿠르스크 전투 동안 벌어진 세 차례의 주요 작전 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전투였다. 전투 중 독일군의 총 손실은 전사, 실종, 부상자를 합하여 86,454명이었다. 붉은 군대의 사상자는 전사 112,529명, 부상 317,361명이었다. 붉은 군대의 전차 및 돌격포 손실은 특히 심각하여 쿠투조프 작전 동안 2,586대의 차량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중앙 집단군은 시타델 작전과 쿠투조프 작전 모두에서 343대의 장갑 전투 차량을 잃었다.

일부 소련 지휘관들은 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하며 그 결과에 불만을 품었다. 로코소프스키 원수는 "적을 포위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돌출부에서 밀어냈을 뿐이다. 브랸스크에서 만나는 두 번의 강력한 펀치를 위해 병력을 사용했다면 작전은 달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코프도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7]

하지만 쿠투조프 작전은 시타델 작전을 위해 배정된 독일 예비군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소련군은 오렐 돌출부를 축소하고 독일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소련의 승리는 몇 주 후 스몰렌스크 전투의 발판을 마련했다. 쿠투조프 작전으로 소련군은 전략적 주도권을 잡았고,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이를 유지했다.

6. 대한민국과의 관계

참조

[1] 서적 Koltunov
[2] 간행물 Encyclopedia of World War II
[3] 서적 Willmott
[4] 웹사이트 Орловская операция http://www.hrono.inf[...]
[5] 서적 Die Schlacht von Orel
[6] 서적 Koltunov
[7] 서적 Zhukov
[8] 서적 Koltu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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