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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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가성은 일본 나라 시대에 무쓰국의 임시 현도로 건설된 성으로, 현재의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위치해 있다. 724년에 건설되어 혼슈 북부로 야마토 세력이 확장하는 주요 기지 역할을 했으며, 지휘관은 친지후쇼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타가성은 여러 차례의 개축과 재건을 거쳤으며, 869년 조간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다. 11세기에는 군사적 중요성이 감소했지만, 행정 중심지로 유지되다가 12세기에 멸망했다. 현재는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다카조 비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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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가성 | |
|---|---|
| 지도 정보 | |
![]() | |
| 개요 | |
| 이름 | 다가 성 |
| 원어 이름 | 多賀城 |
| 별칭 | 다가 책 (多賀柵, 타카노키) |
| 종류 | 일본식 성책 (城柵, 조사쿠) |
| 위치 | 미야기 현다가조 시 |
| 좌표 | 38°18′24″N 140°59′18″E |
| 문화재 지정 | 특별 사적 국가 중요문화재 |
| 건설 정보 | |
| 건설 시작 | 724년 |
| 건설 주체 | 오노노 아즈마토 |
| 역사 | |
| 건설 | 724년 |
| 용도 | 군사적, 정치적 중심지 |
| 파괴 | 미상 |
| 현재 상태 | 유적지 |
| 구조 | |
| 재료 | 미상 |
| 관리 | |
| 소유 | 미상 |
| 공개 여부 | 공개 |
| 추가 정보 | |
| 관련 사건 | 미상 |
2. 역사
나라 시대에 율령제에 따른 중앙 집권 정부가 수립된 후, 황실은 현 도호쿠 지방에 있는 지역 에미시 부족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보냈다.[2] 709년에는 에미시의 대규모 반란으로 많은 구조물이 파괴되었고, 715년 대지진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남부 간토 지방에서 이주하여 내륙에 요새 정착지를 형성했다.
타가 성은 신귀 원년(724년)에 오노노 아즈히토가 무쓰국의 임시 현도로 건설한 성이다. (다카조 비). 아키타 성 및 데와국의 오카치 요새와 함께 혼슈 북부로 야마토 세력이 재확장하는 주요 기지 중 하나였으며, 그 지휘관은 鎮守府/친지후쇼군일본어이라는 칭호를 받았다.[3] 덴표 9년(737년) 『속일본기』에 북방을 굳건히 하는 "덴표 오책"과 함께 "다카 책"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덴표 오책은, 이시노마키 평야에서 오사키 평야에 걸쳐 조성된 오지카 책·니이타 책·타마즈쿠리 책·시마 책의 네 책과 불명의 한 책이다. 덴표호지 6년(762년)에는 후지와라노 아사카리에 의해 대규모로 수리되었다(다카조 비[21]).
호키 11년(780년)에 이하이 아라마로의 난으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다. 엔랴쿠 21년(802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성공적인 작전으로 야마토와 에미시 영토 사이의 경계가 북쪽으로 이동했고, 이사와 성(이와테현오슈시)의 건설로 병참적 기능으로 바뀌면서 타가 성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행정 기능을 위한 중심지로 유지되었지만, 대부분의 군사 활동은 다양한 북부 요새로 이전되었다. 조간 11년(869년)의 조간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다.[4][5] 『일본삼대실록』에 따르면, 무쓰국에서 거대한 지진(조간 지진)이 일어나, 지진 피해와 함께 성 아래는 쓰나미로 인해 피해를 입어 익사자가 천 명 정도 발생했다. 이 후, "다카 국부"로 부흥하였다.
11세기 전반 무렵 간신히 유지된 국부 정청은, 11세기 후반에는 정청 인접지에 평지(히라바)를 설치하여 정청을 대신하는 연회 의례의 장을 정비하고, 국부 중추로서의 기능은 크게 변질된다. 11세기 후반 - 전9년의 역과 후3년의 역에서도 군사적 거점으로 기능하며, 쇼토쿠 원년(1097년)에도 무쓰 국부가 소실되었다.
요와 원년(1181년) - 무쓰 국부 및 "다카요메이"를 거점으로 하는 세력은 헤이안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를 무쓰노카미로 맞이하고, 야하타관(스에노마쓰야마) 및 개발 저습지를 거점으로 하는 무쓰노스케 등의 세력과 결별(게츠베츠)한다. 전자의 다카 국부의 세력은 분지 5년(1189년) 오슈 합전 및 오카와 가네토의 난으로 몰락했지만, 후자 즉 야하타관을 거점으로 하는 무쓰노스케는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지토 직을 얻어, 가마쿠라에 가옥을 얻게 되었다. 야하타 소는 가마쿠라 쇼군가를 혼쇼로 하는 간토 고료로 존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에이닌 7년(1299년) - 2월 초하루, 대단나개(오단나노스케) 다이라노 가게쓰나가 오슈 스에노마쓰야마 야하타 궁에 종을 봉납하고 있다.
남북조 시대에는, 고다이고 천황이 이끄는 건무 정부에서 무쓰노카미에 임명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아버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등이 요시요시 친왕(고무라카미 천황)을 받들고 다카조로 향하여, 이곳에 도호쿠 지방 및 기타 간토를 지배하는 도호쿠 지방의 신정부, 무쓰 쇼군부가 탄생하였다.
쇼와 36년(1961년) - 다카조 유적과 그 주변의 조사가 시작됨[25]
쇼와 41년(1966년) - 4월 11일, 유적은 국가의 특별 사적으로 지정됨[19]
헤이세이 28년(2016년) - 특별 사적 지정 50주년을 맞이함[25]
레이와 4년(2022년) - 10월 9일, 다카조 유적 성전 관아 등 10동 복원 정비 완료[26]
레이와 5년(2023년) - 남문의 본체 목조 복원이 완료. 남문 축제 담장 2동의 목조 복원은 2024년에 완성될 예정이다[27]
2. 1. 초기 역사 (724년 ~ 780년)
나라 시대에 율령제에 따른 중앙 집권 정부가 수립된 후, 황실은 현 도호쿠 지방에 있는 지역 에미시 부족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보냈다.[2] 6세기 말에 현도와 지역 행정 중심지 형태로 민정이 수립되었지만, 709년에는 대규모 에미시 반란이 발생하여 많은 구조물이 파괴되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15년에 대지진이 발생한 후, 많은 사람들이 남부 간토 지방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내륙에 수많은 요새 정착지를 형성했다.타가 성 유적에서 발견된 기념비의 비문에는 신귀 원년(724년)에 오노노 아즈히토가 무츠국의 임시 현도로 건설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다카조 비). 아키타 성 및 데와국의 오카치 요새와 함께 혼슈 북부로 야마토 세력이 재확장하는 주요 기지 중 하나였다. 그 지휘관은 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이는 규슈의 지휘관의 북부와 동일했다.[3] 덴표 9년(737년) 『속일본기』에 북방을 굳건히 하는 "덴표 오책"과 함께 "다카 책"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덴표 오책은, 이시노마키 평야에서 오사키 평야에 걸쳐 조성된 오지카 책·니이타 책·타마즈쿠리 책·시마 책의 네 책과 불명의 한 책(이토 노부오는 다섯 번째 책에 오다군 나카야마 책을 채웠다). 덴표호지 6년(762년)에는 후지와라노 아사카리가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다카조 비[21]).
호키 11년(780년) 이하이 아라마로의 난으로 소실된 후, 재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 2. 중기 역사 (780년 ~ 869년)
나라 시대에 율령제에 따른 중앙 집권 정부가 수립된 후, 황실은 현 도호쿠 지방에 있는 지역 에미시 부족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보냈다.[2] 6세기 말에 현도와 지역 행정 중심지 형태로 민정이 수립되었지만, 709년에는 대규모 에미시 반란이 발생하여 많은 구조물이 파괴되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15년에 대지진이 발생한 후, 많은 사람들이 남부 간토 지방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내륙에 수많은 요새 정착지를 형성했다.타가 성 유적에서 발견된 기념비의 비문에는 신귀 원년(724년)에 오노노 아즈히토가 무츠국의 임시 현도로 건설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다카조 비. 아키타 성 및 데와국의 오카치 요새와 함께 혼슈 북부로 야마토 세력이 재확장하는 주요 기지 중 하나였다. 그 지휘관은 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이는 규슈의 지휘관의 북부와 동일했다.[3] 덴표 9년(737년)에는 『속일본기』에 북방을 굳건히 하는 "덴표 오책"과 함께 "다카 책"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덴표호지 6년(762년)에는 후지와라노 아사카리에 의해 대규모로 수리되었다(다카조 비[21]).
호키 11년(780년)에 이하이 아라마로의 난으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다. 엔랴쿠 21년(802년)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의 성공적인 작전으로 인해 야마토와 에미시 영토 사이의 경계가 더 북쪽으로 이동했고, 이사와 성(이와테현오슈시)의 건설로 병참적 기능으로 바뀌면서 타가 성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행정 기능을 위한 중심지로 유지되었지만, 대부분의 군사 활동은 다양한 북부 요새로 이전되었다. 조간 11년(869년)의 조간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다.[4][5] 『일본삼대실록』에 따르면, 무쓰국에서 거대한 지진(조간 지진)이 일어나, 지진 피해와 함께 성 아래는 쓰나미로 인해 피해를 입어 익사자가 천 명 정도 발생했다.
2. 3. 후기 역사 (869년 ~ 11세기)
나라 시대에 율령제에 따른 중앙 집권 정부가 수립된 후, 황실은 현 도호쿠 지방에 있는 지역 에미시 부족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보냈다.[2] 709년에는 에미시의 대규모 반란으로 많은 구조물이 파괴되었고, 715년 대지진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남부 간토 지방에서 이주하여 내륙에 요새 정착지를 형성했다.타가 성은 724년 아즈마비토 오노가 무쓰국의 임시 현도로 건설한 성이다.[3] 아키타 성 및 데와국의 오카치 요새와 함께 혼슈 북부로 야마토 세력이 재확장하는 주요 기지 중 하나였으며, 그 지휘관은 鎮守府/친지후쇼군일본어이라는 칭호를 받았다.[3] 762년에는 후지와라 아사카리가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21]
780년에는 에미시족에 의해 약탈되고 불타기도 했지만, 이후 재건되었다. 802년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의 성공적인 작전으로 야마토와 에미시 영토 사이의 경계가 북쪽으로 이동했고, 이사와 성의 건설로 타가 성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대부분의 군사 활동은 다양한 북부 요새로 이전되었지만, 행정 기능을 위한 중심지로는 계속 기능했다. 869년 조간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다.[4][5]
10세기에는 고대 행정 체제의 붕괴와 지역 사무라이 무리의 부상으로 중앙 정부는 직접 통치를 포기했다. 타가 성은 점차 폐허가 되었고, 12세기에 북부 후지와라에 의한 히라이즈미의 부상으로 최종 멸망을 맞이했다.[6] 남북조 시대 동안 키타바타케 치카후사와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부자가 잠시 남조를 위해 그 자리를 점령했지만, 나중에 북쪽의 더 안전한 산악 요새인 료젠 산으로 이동했다. 1955년까지 유적은 빈터로 남아있었고, 1976년에 더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7]
11세기 후반, 전9년의 역과 후3년의 역에서도 군사적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쇼토쿠 원년(1097년)에도 무쓰 국부가 소실되었다.
3. 구조
다가성은 군사 요새라기보다는 요새화된 도시에 가깝다. 이곳은 태평양 연안 근처, 센다이시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고원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센다이 평원을 반으로 나누는 구릉 지대로, 당시에도 사용되었던 자연 항구인 시오가마와 가깝다. 성터는 늪과 강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적합한 장소였다.
이 요새는 둘레가 약 3.4km인 사각형 울타리였으며, 5m 높이의 흙으로 된 토루(방어벽)에 나무 울타리가 얹혀 있었고, 3~4m 폭의 마른 해자로 보호받았다. 성벽이 연결된 언덕을 마주한 성의 동쪽은 특히 잘 보호되었으며, 동쪽 문은 모퉁이 망루가 지키는 벽 안쪽 구멍 안에 지어졌다. 남쪽의 요새화된 정문 안쪽에는 폭이 20m가 넘는 주요 도로가 있었고, 이 도로는 또한 흙벽으로 둘러싸인 100m x 100m의 두 번째 사각형 울타리로 이어졌다. 외부 지역에는 행정 사무소, 병영, 장교 숙소가 있었고, 내부 지역에는 고위 정부 행정 건물, 작업장 및 창고가 있었다.[2]
다가성 유적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는 대규모 불교 사찰 단지의 유적이 있으며, 성의 남쪽 벽 바깥쪽에는 계획된 정착지의 유적이 있다.
이곳은 오늘날 고고학 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다가성은 2006년 일본성재단에 의해 일본의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3. 1. 성곽 구조
다가성은 군사 요새라기보다는 요새화된 도시에 가깝다. 이곳은 센다이시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태평양 연안 근처 고원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센다이 평원을 반으로 나누는 구릉 지대로, 당시에도 사용되었던 자연 항구인 시오가마와 가깝다. 성터는 늪과 강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적합한 장소였다.[2]이 요새는 둘레가 약 3.4km인 사각형 울타리였으며, 5m 높이의 흙으로 된 토루(방어벽)에 나무 울타리가 얹혀 있었고, 3~4m 폭의 마른 해자로 보호받았다. 성벽이 연결된 언덕을 마주한 성의 동쪽은 특히 잘 보호되었으며, 동쪽 문은 모퉁이 망루가 지키는 벽 안쪽 구멍 안에 지어졌다. 남쪽의 요새화된 정문 안쪽에는 폭이 20m가 넘는 주요 도로가 있었고, 이 도로는 또한 흙벽으로 둘러싸인 100m x 100m의 두 번째 사각형 울타리로 이어졌다. 외부 지역에는 행정 사무소, 병영, 장교 숙소가 있었고, 내부 지역에는 고위 정부 행정 건물, 작업장 및 창고가 있었다.[2]
다가성 유적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는 대규모 불교 사찰 단지의 유적이 있으며, 성의 남쪽 벽 바깥쪽에는 계획된 정착지의 유적이 있다.[2]
이곳은 오늘날 고고학 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다가성은 2006년 일본성재단에 의해 일본의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2]
3. 2. 주변 시설
다가성은 군사 요새라기보다는 요새화된 도시에 가깝다. 이곳은 센다이시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태평양 연안 근처 고원에 위치해 있다.[2] 이 지역은 센다이 평원을 반으로 나누는 구릉 지대로, 당시에도 사용되었던 자연 항구인 시오가마와 가깝다. 성터는 늪과 강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적합한 장소였다.[2]요새는 둘레가 약 3.4km인 사각형 울타리였으며, 5m 높이의 흙으로 된 토루(방어벽)에 나무 울타리가 얹혀 있었고, 3~4m 폭의 마른 해자로 보호받았다.[2] 성벽이 연결된 언덕을 마주한 성의 동쪽은 특히 잘 보호되었으며, 동쪽 문은 모퉁이 망루가 지키는 벽 안쪽 구멍 안에 지어졌다.[2] 남쪽의 요새화된 정문 안쪽에는 폭이 20m가 넘는 주요 도로가 있었고, 이 도로는 또한 흙벽으로 둘러싸인 100m x 100m의 두 번째 사각형 울타리로 이어졌다.[2] 외부 지역에는 행정 사무소, 병영, 장교 숙소가 있었고, 내부 지역에는 고위 정부 행정 건물, 작업장 및 창고가 있었다.[2]
다가성 유적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는 대규모 불교 사찰 단지의 유적이 있으며, 성의 남쪽 벽 바깥쪽에는 계획된 정착지의 유적이 있다. 성 동남쪽 발굴 조사에서 절터가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다가조 절터로 알려져 있다.[11] 이러한 절들은 지방 행정 중심지와 함께 건설되었다.[11] 흙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직사각형 구역 안에서 5개의 건물이 확인되었다.[11]
이곳은 오늘날 고고학 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다가성은 2006년 일본성재단에 의해 일본의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주변에는 도호쿠 역사 박물관, 다가조비, 스에노 마쓰야마, 다가 신사, 우키시마 신사, 다가조 신사, 무쓰 소샤구, 시오가마 신사 (시오가마시) 등이 있다.
4. 다카조 비(多賀城碑)
'''쓰보노이시부미'''(壺の碑) 또는 '''다카조비'''(多賀城碑)는 나라 시대의 금석문 비석으로, 나라의 수도, 에미시의 지역 및 기타 지역까지의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8]
마쓰오 바쇼/松尾 芭蕉일본어는 자신의 저서 ''오쿠노 호소미치/奥の細道일본어''에서 이 비석을 본 경험을 창의적으로 묘사하며, '과거의 확실한 흔적은 드물지만, 이곳에는 천 년 전의 사건에 대한 믿을 수 있는 기념물이 있다'며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그의 기록에서 이 비석은 명승 또는 ''우타마쿠라''와 같은 역할을 한다.[9]
1998년에는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10]
5. 문화재
5. 1. 국보
다카조 비(고문서)는 1998년 6월 30일에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4년 8월 27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28]5. 2. 특별 사적
1922년 10월 12일, 다가성터 부 사찰 터가 국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6년 4월 11일에는 국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5년 4월 17일을 시작으로, 1974년 2월 18일, 1978년 11월 21일, 1980년 3월 24일, 1984년 3월 27일, 1990년 6월 28일, 1993년 9월 22일에 걸쳐 사적 범위 추가 지정이 이루어졌다.5. 3. 중요 문화재
- 다가성터 출토 칠지 문서 151점 (고문서) - 2022년 3월 22일 지정.[29]
- 다가성터 출토 목간 450점 (고문서) - 2023년 6월 27일 지정.[29]
- 다가성 관련 유적군 출토 목간 105점 (고문서) - 다가시 매장 문화재 조사 센터 보관. 2024년 8월 27일 지정.[29]
- 다가성 관련 유적군 출토 칠지 문서 29점 (고문서) - 다가시 매장 문화재 조사 센터 보관. 2024년 8월 27일 지정.[29]
- 미야기현 다가성터 출토품 (고고 자료) - 미야기현 다가성터 조사 연구소·도호쿠 역사 박물관 보관. 2024년 8월 27일 지정.[29] 다가성 정청·관아터, 다가성 폐사터, 산노·이치카와바시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 도자기, 토기, 묵서 토기, 토제품, 석제품, 목제품, 금속 제품, 칠지포, 복골 등이 포함된다.
6. 현대적 의의
도호쿠 역사 박물관은 다가 성 부지에 있으며, 발굴 결과물과 도호쿠 지역의 다른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12]
7. 접근성
JR 도호쿠 본선(센세키 도호쿠 라인) 고쿠후타가조역에서 정청 터까지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무료 주차장은 여러 곳에 마련되어 있다. 동문 터 북쪽에 약 15대, 정청 터 북동쪽에 포장된 약 20대, 정청 터 남쪽의 남북 도로 계단 아래에 약 20대, 다가조 남문 터 및 다가조 비석 근처에 6대 주차가 가능하다.
가장 가까운 IC는 산리쿠 자동차도의 다가조 IC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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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多賀城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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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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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869 Jōgan tsunami deposit and recurrence interval of large-scale tsunami on the Pacific coast of northeast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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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賀城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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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鎮守府」示す木簡出土、宮城 -存在裏付け、多賀城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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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賀城跡 附 寺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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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別史跡多賀城跡附寺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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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幡荘と治承・寿永の内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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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奥国の荘園と公領―鳥瞰的考察―
東北学院大学東北文化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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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永風土記」について知り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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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の風 特別史跡指定50周年特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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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賀城創建1300年記念復元整備 城前官衙エリアのプレオープンについて(お知ら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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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城県多賀城跡調査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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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뉴스
多賀城跡、まず南門を復元 創建1300年の24年度に一般公開へ
https://www.asahi.co[...]
2023-02-16
[28]
문서
令和6年8月27日文部科学省告示第120号。
[29]
문서
令和6年8月27日文部科学省告示第121号。
[30]
서적
特別史跡多賀城附寺跡(パンフレット)
多賀城市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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